91강 / 명분 (25:27-34)

명분

본문: 창세기 25:27-34

어른이라고 하면 어떤 존재를 떠올리십니까? 눈에 보이는 어른은 적당히 나이가 들고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주저 없이 어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어른다움'이라는 말을 할 때는 내용이 달라집니다. 액면가로는 어른인데, 과연 그 사람이 어른다우냐는 질문은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어른이지만 정말 어른다우냐는 물음은 훨씬 깊이 있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이는 어른이고 돈은 벌고 있지만, 어른답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에 참으로 많습니다.

지난 4월 중순, 언론 보도를 통해 한 부부의 사연이 알려졌습니다. 전주시 인후동에 사는 부부가 건물을 지으면서 건물 중간을 뚫어 통행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통행로 앞에 '인후초등학교 가는 길'이라는 팻말을 붙였습니다. 근처 초등학교 학생들이 안전하게 등하교할 수 있도록 자기 건물 가운데에 길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기자들이 그 면적을 재어 보았더니 99제곱미터, 정확히 30평이었습니다. 이 30평을 임대하면 월 100만 원, 연 1,200만 원 정도의 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연 1,200만 원의 수입을 포기하고 통행로를 만든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건물을 지으려고 쇠파이프로 둘레를 쳐두었는데, 학생들이 위로 타 넘어가고 아래로 기어가는 것입니다. 부부가 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은 왜 공사판을 지나다니니? 저리로 돌아가면 안전할 텐데." 아이들이 대답했습니다. "돌아가면 이면도로라서 자동차가 더 많이 다녀서 훨씬 위험해요. 차라리 공사장으로 지나가는 것이 안전해요." 그 말을 듣고 부부가 고민 끝에 설계를 바꿔 버렸습니다. 주변 초등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보기에는 예쁘지 않지만 건물 가운데를 뚫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야말로 진짜 어른 아니겠습니까? 나이만 먹어서 어른이 아니요, 돈벌이한다고 어른이 아닙니다. 그분들은 어른다운 어른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가방 들고 교회에 오고 예배 시간에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이것은 액면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말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가, 예수 믿는 사람다운가 하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상당한 무게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그 명분에 걸맞게 행동하며 살고 있는가.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바로 그 질문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편애가 낳은 그늘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 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창 25:27)

이삭과 리브가가 자녀를 낳았습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쌍둥이 형제를 낳았습니다. 이제 아이들이 성장했습니다. 장성했습니다. 에서는 이렇게 성장하고, 야곱은 저렇게 성장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익숙한'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동사 '야다'에서 왔습니다. '알다'라는 뜻입니다. 사냥을 알고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스포츠 경기를 알고 하는 것이 어떤 뜻이겠습니까? 아주 잘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냥을 알고 한다는 것은 사냥에 능통하다는 뜻입니다. 어디에 가면 사냥감이 있는지, 봄·여름·가을·겨울 사시사철에 따라 사냥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들은 어떤 먹이를 좋아하는지를 다 알고 사냥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천적이고 천부적인 재능이기도 하지만, 후천적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능력이기도 합니다. 에서는 타고난 사냥꾼이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조용한'은 히브리어 '탐'이라는 단어입니다. '온전한'이라는 뜻입니다. 그저 말수가 적고 주변 사람들과 잘 소통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조용함이 아니라, 두루두루 온전하고 모든 사람과 잘 지내는 인물이 야곱이었습니다. 쌍둥이 형제인데, 한 배에서 난 형제인데 이렇게 성격이 천양지차로 다릅니다. 한 사람은 활달하고, 한 사람은 안으로 온전한 인물이었습니다.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이삭과 리브가가 이런 쌍둥이 형제를 기르면서 아주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창 25:28)

'사랑했다'는 말이 이 한 절에 두 번이나 나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이유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삭이 에서를 사랑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이런 사랑은 삐뚤어진 사랑입니다. 조건적인 사랑 아닙니까? 만약 에서가 기능을 잃어 더 이상 사냥할 수 없다면, 에서가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는다면, 이삭의 사랑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버지의 사랑이 자녀를 향해 지속적으로 고기를 공급하니까 사랑하고, 고기를 갖다 주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랑을 정상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남편의 사랑이 장남을 향하기 때문에 부인의 사랑은 자연스럽게 반대급부로 차남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 안에 편애가 편 가르기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어떠합니까? 성경 곳곳에 다양한 형태의 하나님의 사랑이 등장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난 지점은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 탕자가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자기 몫의 재산을 가지고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다 써 버렸습니다. 먼 나라로 가서 기생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탕진했습니다. 거지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 둘째 아들이 견디지 못해 집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가 어떻게 맞이합니까?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2-23)

아버지가 옷을 입혔는데 어떤 옷을 입힙니까? 제일 좋은 옷을 입혔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송아지를 잡았는데,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사실 이 아들은 문제아 아닙니까? 타락한 아들 아닙니까? 사고뭉치요 생각만 하면 골치 아픈 인간입니다. 이런 아들이 큰 사고를 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뭐가 예뻐서, 잘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가지고 있는 재산을 가지고 나가서 다 써 버리고 돌아왔는데, 이 아버지가 왜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아들이니까. 자식이 건강하게 살아 돌아와 준 것만 해도 고마워서 아버지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행위대로 하나님 앞에서 책망받기 시작한다면, 내가 한 행위대로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고 벌을 주기 시작하셨더라면, 여기 이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잘한 것보다 잘못한 것이 훨씬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일이 따지기 시작하셨다면 우리가 그 벌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한 가지 잘한 것을 보시고 열 가지, 백 가지를 견디고 참아 주셨습니다. 무조건적으로 안아 주시고, 무조건적으로 기다려 주시고, 품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 그런 사랑의 수혜자인 우리가 부모가 되었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 아닙니까? 하나님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나 대신 이 아이를 너희 가정에 보내니 맡아 달라, 길러 달라, 키워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 이 아이들을 교회에 보내니 교회에서 잘 길러 달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대리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가정에서 성장하고 자라는 아이들, 우리 교회 교회학교 아이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돌보고 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왜 조건적으로 자녀를 키웁니까? 공부 잘하면 예뻐하고, 돈 잘 벌어 오면 좋아하고, 말썽 부리지 않고 잘 지내면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미워하고...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그 아이가 어떠하든지, 아무런 상관없이, 그냥 그 존재 자체가, 그냥 내 자식이니까, 우리 교회학교 아이니까 그냥 아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사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함으로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삐뚤어진 사랑입니다. 우리는 부디 이런 사랑으로 전도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경솔한 입술, 무거운 대가

이제 성경은 두 형제가 나눈 대화에 집중합니다.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창 25:29-30)

여느 때처럼 에서가 사냥터에서 돌아왔습니다. 배가 몹시 고팠습니다. 여느 때처럼 야곱은 집에서 일을 합니다. 죽을 쑤었습니다. 팥죽이었습니다. 배가 몹시 고팠습니다. 좋은 냄새가 납니다. 죽을 좀 달라고 합니다. 그냥 평소처럼 야곱이 죽을 주면 됩니다. 그런데 야곱이 평소에 하지 않았던 말을 던집니다.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창 25:31)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 당시는 장자 독식의 세계였습니다. 장자는 아버지의 재산 처분권을 가지고 있었고, 축복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은 쌍둥이 형제였습니다. 태어날 때 불과 몇 분 차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형은 형이라는 명분으로 재산 처분권과 축복권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몇 분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합니다. 이것이 억울했습니다. 마음에 품고 있었던 생각을 야곱이 그냥 툭 던졌습니다. 야곱으로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을 받는 에서의 태도입니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창 25:32-33)

이 형제들의 대화가 몇 분이나 되었을까요? 길어 봐야 1분 미만입니다. "야, 배가 너무 고프다. 팥죽 끓였구나, 주라." "그래 형, 내가 죽은 얼마든지 줄 테니 형의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아." "그래, 그까짓 거 주지 뭐, 준다." "그럼 맹세해." "그래, 맹세할게." 30초, 좀 길게 대화해도 1분 정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형제들의 짧은 대화를 매우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 이 두 형제가 이 집에서 태어나서부터 성인이 되어 자랄 때까지 많은 사건과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부모의 기쁨으로, 때로는 부모의 아픔으로, 그들 스스로 좋은 일도 힘든 일도 어려운 일도 겪어 가며 수십 년 동안 살아왔는데, 성경은 단 한 가지 형제간의 사건, 이 대화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1분도 채 되지 않은 이 짧은 대화를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한 것입니까? 중요하니까. 이 대화가 형제간의 앞날과 미래를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모티브가 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오고 오는 모든 인류에게 이 대화를 소개해야 될 만큼, 하나님은 이들의 대화가 중요하기에 성경에 기록해 두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보라고 기록한 것입니까? 에서의 문제점을 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에서의 세 가지 착각

첫째, 그가 가진 문제는 자기가 받은 장자권이 영원히 자기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장자권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도 자기 동생 야곱이 장자권에 관심이 있고, 자기 처지에 대한 불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니까, 내가 잡은 고기를 아버지께 드리면 아버지가 항상 기뻐하시고 나를 더 사랑하시니까.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동생이 아무리 설쳐 봐야, 팥죽 한 그릇 따위 가지고 나에게 장자권을 달라 말라 해 봐야, 그것은 영원히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영원히 내 것이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이 장자권은 내 것이었으니까, 동생이 아무리 까불어도 이것은 내 것이라고. 그래서 염려도 하지 않았습니다.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키지 않아도 내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성경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야곱은 열두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큰아들이 르우벤입니다. 에서의 생각대로라면 장자권은 르우벤에게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까? 눈에 보이는 장자권,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로 갑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장자의 명분은 유다에게로 갔습니다. 르우벤은 장자권을 박탈당했습니다.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9장을 보면 야곱이 열두 아들을 불러놓고 그들을 축복하는데, 사실 르우벤에게는 저주에 가까운 말을 쏟아냅니다.

원래부터 내 것인 것은 없습니다. 내가 힘써 지키지 않으면, 힘써 노력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에서 물이 빠지듯, 내 손에 움켜쥔 모래가 빠지듯 그냥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2:4-5)

어느 교회를 책망하는 말씀입니까?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사도 바울이 가장 열심히 키워냈던 교회입니다. 2차 선교여행 때 가고 싶었는데 못 갔습니다. 3차 선교여행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먼저 개척했습니다. 거기에서 바울이 두란노 서원을 세우고 3년 동안 눈물로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교회였습니다. 그 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이 에베소 교회를 거쳐가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그 교회는 번성했습니다. 바울은 그 교회를 사랑했고, 옥중에서도 에베소서 옥중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믿음에서 낳은 아들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의 목회를 부탁할 정도로 그 교회를 아꼈습니다. 그 교회는 큰 교회였고 뜨거운 교회였고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원래부터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였던 줄 알고, 이 교회의 영광이 영원토록 그 자리에 함께 있을 줄 알고, 교인들은 첫사랑을 버렸습니다. 성령께서 경고하십니다. 촛대를 옮길 거라고. 힘써 지키지 않으면, 너의 그 첫 영광을, 첫사랑을 가지고 지켜내지 않으면 너의 영광의 촛대를 다른 데로 옮겨 버릴 거라고 성령께서 경고하셨습니다.

정말 옮겨갑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계 3:8, 12)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칭찬입니다. 이 교회는 작은 교회였습니다. 교회 규모도 작고, 성도 수도 작고, 재정도 형편없었습니다. 그런데 비록 작은 능력이었지만 내 이름을 지키며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신실한 교회였습니다. 촛대가 그 교회로 옮겨집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처럼 든든한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보통 우리가 성전의 기둥 정도 되려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돈도 있어야 되고, 권세도 있어야 되고, 가지고 누리고 있는 것이 많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성전의 기둥은 그런 자에게 배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실한 자, 믿음 있는 자, 자기 것을 지키고 붙잡고 하나님 앞에서 분투하고 투쟁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촛대를 거대한 대형 교회 에베소에서 작고 연약하지만 신실한 빌라델비아 교회로 옮겨 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할아버지 때부터, 아버지 때부터 믿음생활 잘해서 그분들의 영광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천부적으로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힘써 지키지 않으면, 그 영광을 붙잡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내지 않으면 그것은 내 것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겨 버리면, 하나님께서 다른 데로 가지고 가 버리면, 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내 것이 아닌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정신 차리고 살지 않으면, 믿음으로 그것을 지켜내지 않으면, 분투하지 않으면 그냥 빠져나가 버립니다. 에서는 그렇게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둘째, 에서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보다 아버지를 더 믿었습니다. 복은 누가 주는 것입니까? 복의 근원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닙니까? 그런데 에서는 자기 아버지 이삭이 복을 주는 존재라고 착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서 복을 주시는 것인데, 그는 아버지를 믿었습니다. 아버지가 내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니까. 아버지 이삭이 그렇게 이 자녀를 길렀습니다. 서로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복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터에서 일하고 급여를 받고 생업을 유지하고 살아가는데, 사장님이 나에게 월급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하나님이 돌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하나님이 나의 보스가 되시고,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신다는 이 고백이 있어야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에게 줄 서게 되고, 사람에게만 잘 보이게 되고,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미련한 자입니다. 어리석은 자입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창 25:34)

셋째 문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가볍게 여기다'라는 말을 히브리어 성경은 '바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경멸하다'라는 뜻입니다. 가볍게 여긴다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가볍다는 것은 무겁다는 말의 반대 아닙니까? 둘 사이를 들어서 비교해 보고,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별것 아닌 것으로 경멸해 버렸습니다. 그 당시 그가 더 무겁게 여긴 것은 팥죽 한 그릇이었습니다. 배가 고프니까. 그 당시 판단의 순간, 선택의 순간에 장자의 명분이 더 무거우냐 팥죽이 더 무거우냐 비교했을 때, 그는 배가 고프니까 팥죽 한 그릇을 더 무겁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망령된 자'라고 말씀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히 12:16)

이런 자가 망령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직분들, 지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른이라는 이름, 부모라는 이름, 목사, 교회 중직, 성도, 집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 비교할 때도 있습니다. 선택의 순간에 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이 직분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익을 바라보고, 이것이 더 중요하고 나에게 가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은 직분을 가볍게 여긴 적이 없었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에서처럼 망령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습니다. 나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목사라는 직책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거룩한 직분, 일할 수 있도록 자리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일을 더 성실하게 잘 감당할 것인가 기도해 보고 고민해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도록 이 일을 감당할까,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할까 고민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이 직분을 무겁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무겁게 여기고 가치 있게 여기면, 하나님도 우리 인생을 무겁게 여기고 가치 있게 여기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직분을 가볍게 여기면, 하나님도 우리 인생을 가볍게 여기고 가치 없게 여기고 경멸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에서는 그런 의미에서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미련한 자였습니다. 부디 우리 인생이 이런 길을 걸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명분에 합당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직분과 그 자리를 잘 지키고, 촛대가 옮겨지지 않도록 애써야 합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겁게 여기고 그 직분을 잘 수행하고 감당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우리를 기뻐하시고 무겁게 여기시고 가치 있게 대하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에서처럼 하나님께 받은 직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우리도 에서처럼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신 줄 모르고 사람으로부터 복이 오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주여, 우리도 에서처럼 한번 받은 것 영원히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 받은 거룩한 직분 믿음으로 잘 감당하며 간직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사명, 그 사명 무겁게 여기고 가치 있게 여기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나라와 주의 의를 위해서 애쓰며 힘쓰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이 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 되게 하시고, 복된 길 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를 함께 이루는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살게 하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