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본문: 창세기 27:42-28:5
동물의 생태를 연구하는 학자의 글에 따르면, 고양이과에 속한 동물들이 서로 다른 개체를 만나면 서열 다툼을 합니다. 그 방법이 흥미롭습니다. 입을 크게 벌리는 것입니다. 고양이를 관찰해 보면 서로 다른 고양이가 만났을 때 입을 크게 벌립니다. 이것은 고양이뿐만 아니라 덩치가 큰 호랑이나 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는 하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열을 정하는 중입니다. 입을 크게 벌리면 누구의 턱이 강한지가 드러나고, 누구의 이빨이 더 날카로운지가 보입니다. 서로 입을 크게 벌려 상대의 턱이 더 나가고 이가 더 날카로우면 바로 꼬리를 내리고 서열이 정리됩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때부터 피 터지는 싸움이 시작됩니다.
카멜레온도 흥미롭습니다. 높은 나무의 한 가지 위에 두 마리의 카멜레온이 마주쳤습니다. 누군가가 길을 비켜줘야 두 마리가 싸우다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때 두 마리가 약속이나 한 듯이 몸을 슬쩍 옆으로 틀어서 자신의 몸통을 상대에게 보여줍니다. 내 몸통을 보고 상대의 몸통을 보고 내 몸이 상대보다 왜소하면 옆으로 길을 비켜 줍니다. 내가 상대보다 몸이 크면 당당하게 어깨 펴고 길을 지나갑니다. 그렇게 서열 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이렇게 단순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속성 가운데 동물의 속성도 있고, 거듭나지 않은 교만한 인간은 사람을 보면 서열을 정하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동물처럼 입을 벌려서 턱의 강함으로, 이빨의 날카로움으로 서열을 정하지도 않고, 몸집의 크기로 정하지도 않습니다. 다면적이고 복합적입니다. 그래서 간을 봅니다. 질문을 던지면서 "어떤 일을 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질문은 그 사람의 직업이 궁금해서라기보다 그 말 속에 다양한 함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직업을 알면 사회경제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자기 마음속에 서열을 정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또 다르게 묻습니다. "어디에 사십니까?" 사는 곳을 알면 우리나라가 사는 지역에 따라 나름대로 서열화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는 곳을 물어서 서열을 정하기도 합니다. 속물적인 근성이 묻어나는 질문이지만, 그만큼 사람이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은 다면적입니다. 위대한 예술가들, 대가들의 작품도 입체적으로 다면적인 해석이 가능합니다. 인상파의 대가 빈센트 반 고흐가 자기 귀를 스스로 자르고 자기 발로 정신병원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정신병원 창살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을 그렸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 1889년 작품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고 고흐의 정신세계가 불안정하다고 말합니다.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밤하늘을 저렇게 정신없이 그렸다고, 이 사람의 말년이 불행했다고 사람들은 이 작품을 평가합니다.
그런데 천문학자들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천문학자들은 이 그림을 그린 시기가 1889년 6월이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6월 밤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은 금성, 샛별입니다. 나무 뒤에 보이는 가장 밝게 그린 별이 바로 샛별이고, 달이 환하게 비치고 있습니다. 천문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6월 밤하늘에 달의 위치와 샛별의 위치가 너무 정확하게 그려졌는데, 이것을 정신병자가 그렸다고 말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적어도 고흐는 정신병자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유가 어떻게 되었건, 진실이 무엇이건 고흐에게 물어봐야 하겠지만, 하나의 작품을 보는 다양한 관점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미술작품뿐만 아니라 음악도, 문학도 다양한 관점으로 다면적으로 분석하고 바라보고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의 삶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삶은 한 가지 눈으로, 한 가지 시각으로만 재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수많은 갖가지 사건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는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 관점으로만 해석합니다. "이건 나에게는 불행한 일이다", "이건 나에게는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타인의 관점도 한번 살펴봐야 합니다. 내 친구는 나에게 일어난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부모는, 자녀는, 형제는, 이웃은, 가족은, 나와 관계에 있는 사람은, 가까운 사이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보는지 다면적, 입체적으로 살펴봐야 자기만의 오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여기서 가장 중요한 관점이 필요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이 일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하나님의 관점이 빠진다면, 우리의 관점만 가지고 있다면 편파적이고 지엽적인 인생을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피신의 상황, 훈련의 시작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은 야곱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야곱 이야기의 변두리 사건을 다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야곱의 관점에서만 보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보면 야곱 이야기에 중대한 기로가 되고 분기점이 되는 사건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내 인생을 보는 하나님의 관점을 함께 찾고 배우기를 바랍니다.
리브가는 걱정이 됩니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습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에서의 이 말이 그저 화가 나서 욱해서 해보는 말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에서가 동생을 죽일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리브가가 아들 야곱을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창 27:43-44)
에서가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고 하니까 이 말이 리브가에게는 큰 위협으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신신당부합니다. 지금 이곳을 떠나서 밧단아람, 네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해서 며칠 동안만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진심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창 27:45)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이 말이 리브가의 마음속에 있는 깊은 진심이었습니다. 리브가는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인의 마음속에 동생을 죽이고 싶은 살해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모 아담과 하와는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개입도 가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벨이 죽었습니다. 아벨이 죽어서 부모 곁을 떠났습니다. 가인도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으로 가서 성을 쌓고 부모와 절연하고 말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자녀들을 한꺼번에 잃고 만 것입니다.
이것을 리브가가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여기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형은 동생을 죽일 것이고, 동생은 살해당할 것이고, 형은 그 죄책감에 가인처럼 길을 떠날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여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이것이 리브가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리브가가 잘못 생각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몇 날만 지나면,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며칠만 있으면 내가 너를 다시 불러오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몇 날'이라는 것이 20년이나 지나고 말았습니다. 밧단아람은 바로 옆 동네가 아닙니다. 멀고 먼 곳입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데려올 때도 이삭이 직접 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 다메섹 엘리에셀이 가서 리브가를 데려올 정도로 먼 곳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멀리 가줘야, 거기서 라반의 보호 아래 있어야 에서가 야곱을 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곳으로 아들을 멀리 피난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삭과 리브가와 야곱의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세 사람의 상황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들이 죽고, 가만히 있으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떠나야 합니다.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와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피신입니다. 살기 위해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관점의 전환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한번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상황은 어떤 상황입니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 하나님은 믿음의 계보를 세워 가고 계십니다. 아브라함, 그리고 이삭, 이삭의 대를 이어서 이 가정의 장자가 될 만한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타고난 장자는 에서입니다. 에서는 그것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혈통을 믿었습니다. 혈통주의로 밀어붙였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이니까", "나는 사냥을 잘하니까" 하면서 공로주의로 일관했습니다. 사냥한 고기를 가지고 오면 나는 장자권을 그대로 가져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장남답지 못했습니다. 장자권을 가볍게 여기고 팔아버렸습니다. 가정도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에서를 달아보니 그는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장자권을 넘겨주지 않으십니다.
이제는 야곱의 차례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피신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야곱을 저울에 올려놓고 달아보는 과정입니다. 야곱을 저울에 올려놓고 달고 훈련시키는 과정입니다. 야곱이 이 가정의 장자권을 계승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이 사람 야곱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믿음의 계보를 이어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그릇이 될 만한 사람인지 하나님은 그것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코너에 몰려서 도망가는 과정이지만, 하나님은 그를 부르시고 훈련하는 과정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히브리 민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애굽 왕궁에서 왕자로 40년을 자랍니다. 공주의 양자였지만 모세는 왕위 계승 서열 가운데 있었습니다. 암투가 시작됩니다. 나이 40 언저리까지 치열한 암투가 시작됩니다. 여기에서 성공하면 그는 파라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히브리 민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고 있었던 모세가 어느 날 애굽 관리가 히브리 민족을 괴롭히는 것을 봅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애굽 관리를 쳐 죽였습니다. 시신을 모래 속에 묻어버렸습니다. 그 일이 탄로가 났습니다.
바로가 그를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바로 입장에서는 히브리 민족은 큰 위협입니다. 아무리 압제해도 자꾸만 늘어납니다. 그런데 왕자 모세가 히브리 민족의 피끓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니, 이 노예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면 제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모세는 그 길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미디안 광야로 도주합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모세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한때 애굽의 왕자였는데, 한때는 왕위 계승 서열 가운데 있었는데, 탁월한 용맹과 지도력과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광야에 내몰려서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40년 동안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고 있습니다. 온몸에 양 냄새와 염소 냄새로 80세까지 지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뭐라고 말했겠습니까? "저 사람은 실패했다. 한순간 혈기를 이기지 못해서 사람을 죽임으로 피난 가서 버림받았고, 사람들에게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편에서 볼 때는 도주요, 망한 인생이요, 실패한 인생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불러서 훈련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광야에서 불러서 훈련시키고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 3:4)
8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이 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내 백성을 건져 내라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그를 다시 바로에게 보내십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모세는 실패한 40년이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모세를 빚고 훈련시키고 그를 세워 가시는 연단과 훈련의 과정이었습니다.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 인생 가운데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내 인생의 관점으로 보면 어쩌면 우리는 성공하지 못한 인생이고, 불쌍한 인생이고, 실패한 인생이라고 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시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을 어떻게 보실까? 입체적으로 우리 인생을 다면적으로 보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8-9)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았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방에 모든 적들인데, 바울은 고백하기를 믿음의 눈을 열어보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둘러싸고 계시니 나는 싸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면 망한 인생입니다. 넘어지면 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기 때문에, 믿음의 눈으로 보니 하나님의 손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망한 인생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훈련을 위한 떠남
야곱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집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야곱은 선천적으로 집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어머니 치마폭에 싸여서 요리를 하고 주방에서 떠나지 않은 인물입니다. 한 번도 집을 떠나보지 않았습니다. 리브가의 품 안에 있었습니다. 모든 일을 리브가가 다 꾸며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훈련받습니까? 이 사람이 믿음의 장자가 될 만한 사람인지 어떻게 하나님이 달아볼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오랫동안 훈련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를 어머니 손에서 건져내어서 그를 광야로 이끌어 내시고 훈련시키시고 연단시키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도 훈련시켰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아브라함의 훈련 과정이 창세기 12장부터 25장까지 세밀하게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삭도 훈련시켰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훈련시키시고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그랄 땅에서 우물 파기 훈련도 시켰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으로 그를 빚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서를 훈련시키려고 하는데 에서가 훈련을 거부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야곱을 훈련시키실 차례입니다. 야곱을 훈련시키시고 그를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보신 후에 하나님은 결정하실 것입니다. 훈련을 잘 받는지, 그가 진실로 믿음의 후손이,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자격이 있는 건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요 1:42)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이름은 베드로가 아니라 시몬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장차 게바가 될 것이다." 게바, 반석, 페트라, 베드로라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강한 함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략된 말이 있습니다. "네가 나를 따라서 훈련 잘 받으면, 3년 동안 연단 잘 받으면, 나만 믿고 잘 따라오면, 너는 반석 위에 선 베드로가 될 것이다."
베드로를 잘 아는 갈릴리 사람들의 눈에서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자기 배가 있는 사람입니다. 선주였습니다. 적어도 배 한 척을 가지고 있으면 밥 굶을 일은 없습니다. 배 가지고 오랫동안 자기 조상 때부터 내려오던 삶의 터전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 잡고, 가정을 이루고, 처자식 먹여 살리고, 그렇게 살면 됩니다. 소박하게 그렇게 살아가던 인생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거렁뱅이 같은 사람이 찾아왔는데, 베드로가 그 사람을 따라간다고 합니다. 처자식 다 팽개치고 그 사람 따라간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베드로 뒤에서 얼마나 많이 수근거렸겠습니까? "망했다. 이상한 사람 따라간다. 자기 배도 버리고 처자식도 버리고 따라간다."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베드로는 미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철저하게 이 3년을 훈련받았습니다. 시몬으로 살아갈 뻔했는데, 잘 훈련받아서 반석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초대교회 최고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사람의 관점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 자녀들을 보면 부모의 눈으로 보면 서글프기도 하고, 억장이 무너지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 자녀를 보면 "이게 다 내 탓인가" 하기도 합니다. 리브가가 꼭 그랬을 것입니다. 내가 들어서, 내 욕심에 형제들 사이를 갈라놓고, 형이 동생을 죽이려고 하고, 동생은 떠나보내야 하나, 이게 내 문제인가, 내 탓인가 리브가가 이것을 얼마나 자책했겠습니까? 그저 며칠만 떠나고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이 시간이 20년이나 길어지는 동안 리브가의 마음이 한시라도 편할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눈을 들어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리브가가 야곱을 끼고 있어서는 훈련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떼어 보내시고 하나님이 직접 그를 훈련하고 연단하는 과정입니다. 우리 자녀들, 지금의 상태로 부모의 눈으로만 살피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먼 미래의 시각으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우리 자녀들을 보시고, 하나님의 훈련의 손길에 맡겨 두시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복 받을 그릇의 준비
이제 떠나는 야곱에게 이삭이 이렇게 축복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창 28:3-4)
멋진 복으로 축복했습니다. 이삭이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복으로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아무리 멋진 복이 위에서 내려오더라도 복 받을 사람의 그릇이 중요합니다. 그 그릇이 엎어져 있으면 하늘에서 복이 그릇에 담길 수가 없습니다. 그릇이 간장 종지 같으면 복이 담기다가 다 흘러넘치고 말 것입니다. 넓은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큰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넓고 깊고 큰 그릇이 되어야 아버지 이삭이 마음껏 축복한 이 복을 다 담아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의 상태를 보십시오. 어머니 치마폭에서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그는 소심한 인간입니다. 어머니가 앞장서서 들이밀어서 아버지께 가서 축복받았습니다. 결단력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욕심만 있습니다. 거짓말쟁이입니다. 소심하고 욕심 많고 그의 속은 좁기 그지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그를 이 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도록 멀리 떠나보냅니다.
하나님은 훌륭한 교관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매 그가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비더라" (창 28:5)
훌륭한 교관 라반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라반이 어떤 사람입니까? 노련한 사기꾼입니다. 훌륭한 거짓말쟁이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야곱은 햇병아리입니다. 야곱이 자기 아버지와 형을 속인 거짓말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라반은 7년 동안 나를 섬기면 라헬을 주겠다고 했는데, 7년이 지나고 첫날밤 지나고 눈 떠보니 레아가 누워 있었습니다. 화를 내니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거짓말합니다. "이 지방에는 형보다 아우를 먼저 시집보내는 일이 없다." 딱 잡아뗍니다. "잔치를 망치지 않고 잔칫날을 다 채우면 라헬을 주겠다." 다시 7년을 종처럼 일합니다. 14년을 일했습니다. 대단한 사기꾼이요 거짓말쟁이입니다. 20년 동안 이 집에 있으면서 10번이나 품삯을 바꿀 정도였습니다.
여기서 야곱이 엄청난 훈련을 받습니다. 거기에서 자기 속이 깊어지고, 인생의 깊이가 깊어지고, 폭이 넓어지고,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시야가 달라집니다. 좁고 좁은 소견이었던 야곱이 온 이스라엘을 품을 수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어서 돌아옵니다. 20년 뒤에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 인생은 지금의 이 상태에서, 내가 보는 내 시각으로만 결정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재조명하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슬픈 일, 고통스러운 일이 있으면 하나님의 시각으로, 넓고 넓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바라보시고, 기쁘고 좋은 일이 있으면 이것이 내가 기뻐해야 될 일인지 하나님의 시각으로 다시 조명해 보시는 그런 깊은 지혜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시각이 나의 시각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슬픔도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절망도 희망이 되며,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소망 없는 내 자녀가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에 연단되고 훈련받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아버지, 내 인생도, 우리 자녀들의 인생도,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로 판단하지 않게 하옵시고, 섭리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빚어 가시는데 잘 훈련받아 넓어지고 깊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