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강 /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 (28:16-19)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

본문: 창세기 28:16-19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늘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그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이름을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고, 공생애를 마치시며 남기신 마지막 말씀에서도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선지자들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와 어떤 방식으로 함께 하시는지, 그 구체적인 방식에 대해서는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하시는가를 발견하고 찾는 것은 우리의 몫으로 남겨 두셨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찾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서 찾아낸 이도 있고, 아직까지 찾지 못한 이도 있습니다. 철학자도, 예술가도, 기도하는 자도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하실까' 궁리하다가, 불현듯 기대하지 않은 장소에서, 기대하지 않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분들이 있습니다.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거장 들라크루아가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작품을 그린 적이 있습니다. 종교화를 거의 그리지 않았던 그가 1849년에 이 그림을 발표했습니다. 붉은색을 좋아했던 들라크루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강렬한 붉은색으로 표현했고, 울퉁불퉁한 근육도 잘 드러냈습니다. 평소 들라크루아를 존경했던 빈센트 반 고흐는 1890년에 이 그림과 똑같은 모작을 그립니다. 제목도 동일하게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노란색을 좋아했던 고흐는 선한 사마리아인에게 노란색을 많이 입혀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고흐가 이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의외였습니다. 왜냐하면 고흐는 평소에 '나는 종교화를 그리지 않겠다'고 늘 말하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 그림에서 자신을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투영하지 않고 강도 만난 자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에게 안겨 있는 연약한 강도 만난 자가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죽기 몇 달 전에 이 그림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나는 연약한 자인데, 이 불쌍한 나 같은 자를 돌봐주는 사람'을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보고 그렸습니다.

그렇다면 고흐가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본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조셉 룰랭과 그의 부인입니다. 이들은 고흐가 파리에 살 때 세들어 살았던 집주인이었습니다. 가난한 예술가에게 집세를 깎아주기도 했고, 돈이 없어서 모델을 구할 수 없는 고흐에게 기꺼이 무료로 모델이 되어 주기도 했습니다. 우체국에 다녔던 조셉 룰랭 아저씨는 항상 오후에 말동무가 되어 주기도 했습니다. 고흐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서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뒷바라지해 주었습니다.

평생 동안 진리를 찾으며 '하나님이 어디 계실까' 궁금해했던 고흐가 그제서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조셉 룰랭과 그의 부인이 자신의 말년 마지막을 지켜준 그 모습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모습으로 강렬하게, 따뜻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노란색 옷을 입혀 이 두 분을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토록 찾고 싶어도, 그토록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했던 하나님이 불현듯 내 이웃의 얼굴을 통해서 나타나기도 하고, 기적 같은 놀라운 역사를 통해서 스치듯 내 인생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

야곱도 그랬습니다. 야곱이 경험한 하나님은 '정말 하나님이 여기까지 나와 함께 하시는 줄을 전혀 몰랐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꿈에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늘 문이 활짝 열리고 천사가 사닥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 하나님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자녀의 축복과 땅의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이 훈련을 잘 견디라고 격려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 다음 자리에 네 이름이 새겨지기를 원한다면 이 훈련을 잘 견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땅의 복과 자손의 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잠이 깹니다. 꿈에서 깨어난 야곱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16)

이 고백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에서 첫 번째 의미는 장소적, 공간적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는데 자기는 몰랐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기 집을 떠나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집에만 계시는 줄로 알았습니다. 훌륭한 아버지 이삭, 믿음 좋은 어머니 리브가, 그들에게는 당연히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집에만 계신 줄 알았습니다. 떠나보지 않았으니까, 하나님은 그곳에만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집을 떠나보니 여기도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꿈에 하나님을 직접 만났기에 잠에서 깨어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이 땅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는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발 닿는 곳에, 우리 숨결이 닿는 곳에, 내 손 가는 곳에 하나님은 어디나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집에도 계시고, 예배당에도 계시고, 내 일터에도 계시며, 어디서나 함께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야곱이 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집 밖을 나가 보지 않았으니까, 그제야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고백은 야곱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도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쫓겨 다니다가 가드 왕 아기스에게 도망간 적이 있었습니다. 가드 왕 아기스는 블레셋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너무 무서워서 살기 위해 아기스에게 도망갔는데, 아기스가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미친 척하고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생명을 부지하고 빠져나온 후에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시 34:6-7)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음에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이 곤고한 자는 다윗입니다. 부르짖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블레셋 사람의 땅, 이방 지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블레셋 땅, 이방 지역에서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지금까지 다윗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만 계시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땅, 선민들의 택하신 땅에만 거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방 땅 블레셋 땅에 가서도 거기에서 위기를 겪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온 땅의 주인이시구나!

에스겔 선지자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나라를 잃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바벨론 땅에서 희망 없이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말씀하시며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마른 뼈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내려 강물을 이루고 그 강이 이르는 각처의 모든 것이 살아나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땅은 이방 땅인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땅인데, 그런데 그 땅에서도 하나님은 주인이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도 주인이셨고, 바벨론에서도,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도 주인이셨습니다. 야곱의 집에도 하나님이 주인이셨고, 빈들에서 노숙하고 있는 그곳에도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매 순간 경험하고 있어야 합니다. 온 세상 방방곡곡에 아직까지 복음이 전파되지 못한 곳에서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그 땅의 주인이 여전히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보고 경험해야 합니다. 야곱이 만약 그냥 자기 집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 경험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우여곡절 끝에 등 떠밀어 집 밖을 나가게 하시고 노숙하게 하시면서, 하나님은 네 집에만 있는 게 아니라 빈들에도 계시고 네 고통 중에도 계시며 어디서나 계시다는 것을 야곱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죄인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두 번째로 야곱의 이 고백,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는 개인적인 고백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연약함과 죄인 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지금 야곱의 심리 상태가 어떻습니까? 밑바닥을 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후회가 막심했을 것입니다. 목표는 옳았지만, 축복을 받고 싶다는 목적은 좋았지만 방법이 틀렸습니다. 거짓말했습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어머니와 공모해서 거짓말하고 지금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가정은 깨어졌습니다. 형의 마음에는 살인의 욕구가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나는 실패자구나, 나는 패배자구나.'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정을 깨뜨리고 도망가고 있는 도망자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죄인인데, 정말 죽어 없어져야 마땅한 죄인인데,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죄인인 나에게도 찾아오시는구나!' 이 고백을 야곱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 몰랐던 것이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죄인을 찾아오시는 분! 예수님도 원래 죄인을 찾아가시는 것이 그분의 특기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루는 세리 마태를 찾아가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를 찾아가서 함께 일하자고 부르십니다. 세관에서 돈 걷고 있는 마태를 찾아가셨는데, 마태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이제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니까 자기 친구들을 불러놓고 파티를 엽니다. 식사를 대접합니다. 세리의 친구라고 해봐야 똑같은 세리들, 세리와 같이 놀아주는 창기들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자리에서 함께 식탁을 나눕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 2:16)

세리는 정말 죄인 중에 악한 죄인입니다. 세리의 친구인 죄인들, 창기들도 사람들이 상대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과 예수님이 함께 잡수시고 식사하시며 교제하니까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은 그 당시 문화에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시고 예수께서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그래서 예수님이 죄인 중의 죄인이었던, 가장 마음이 힘들어서 밑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던 야곱을 찾아가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태초에 죄 짓고 떠나간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셨습니다. 선악과 먹고 숨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불러내십니다. 동생을 죽이고 살해하고 숨어 있는 가인을 찾아오십니다. "가인아,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은 죄 짓는 현장까지 직접 찾아가 주셨습니다.

문제는 죄인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 맞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인은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환대하지 못했습니다. 등을 돌려서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사울은 예수님을 영접했고, 그들의 인생이 변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찾아오시면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죄인이었던 나를 찾아오시는 예수님, 죄인 중에도 큰 죄인인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

야곱도 이런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 하나님을 붙잡고 야곱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창 28:17)

야곱의 응답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야곱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왜 야곱이 이곳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고백한 것일까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자기 집만 하나님의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도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도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에 내가 가는 모든 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부르겠다는, 내가 가는 모든 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삼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늘의 문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은 하늘을 복수의 개념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하늘'이라고 나와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하늘들(샤마임)'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 속에, 그들의 관념 속에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하늘들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헬라어로 '우라노이스'라고 복수 형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왜 하늘을 복수로 생각했을까요? 자기 집 위에도 하늘이 있습니다. 내 일터 위에도 하늘이 있습니다. 교회 위에도 하늘이 있습니다. 멀고 먼 바다 나라 위에도 하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을 여러 개로 생각한 것입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표현할 때 '하늘들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왜 하늘의 문이라고 표현하는 것일까요? 문은 열고 닫는 것입니다. 하늘의 문, 하늘에 달려 있는 문은 누가 열고 닫습니까? 하나님만이 열고 하나님만이 닫을 수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계 3:7)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이 하늘의 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셔서 하늘의 문을 여시면 그 열린 문으로 무엇이 쏟아져 내려오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하나님의 집을 짓는 자에게 하늘에 열린 문으로 하늘의 온갖 복과 하늘의 온갖 은총이 쏟아져 내려오지 않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닫으시면, 땅 아래에서 누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짓을 해도 하늘의 문을 열 길이 없습니다. 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라는 것을, 어디서나 하나님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래서 제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집을 삼겠으니, 하나님은 그 머리 꼭대기 위에 하늘의 문을 열어 주옵소서. 하나님의 문을 열어 주셔서 그 열린 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총과 온갖 복을 다 내려 주옵소서!'

죄인을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 도망자 야곱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 야곱이 이 은혜를 붙잡고 하나님께 고백 드리며 하나님께 약속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야곱이 자기 결단을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창 28:18-19)

원래 그 동네 이름이 루스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곳을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 제가 이제부터 내가 가는 곳, 모든 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삼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열어 주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은 복 주셨습니다. 은혜를 함께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보면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배당에 나와서 은혜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곳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도 계시고, 우리 일터에도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집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집입니까?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루 종일 찬송가 틀어놓고, 하루 종일 설교 틀어놓고, 하루 종일 기도한다고 그 가정이 하나님의 집이 됩니까? 결단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누구누구의 집'이라는 것은 그 누구누구가 주인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집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 하나님이 주인 되십니까? 돈 벌어오는 사람이 주인입니까? 그 가정에 수험생이 있으면 그 수험생이 그 가정의 주인입니까? 목소리 가장 큰 사람이 그 가정의 주인입니까? 그러면 그 가정은 하나님의 집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모름지기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곳입니다. 어떤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 여쭈고 기도하며 '하나님, 우리 가정의 주인 되어 주십시오' 모든 결정을 하나님께 위임하고, 온 식구가 함께 기도하고, 최종 결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가정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 일터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나에게 봉급 주는 사장님이 내 일터의 주인입니까? 내 부서의 보스가 내 일터의 주인입니까? 그렇게 살면 내 일터는 하나님의 집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 일터의 주인이 하나님이 된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내가 주인으로 모시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 일터가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내 발이 닿는 모든 곳에, 내 숨결이 닿는 모든 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면, 그 위에 하늘의 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내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기대하지도 않았던 하나님의 복과 은총이 열린 문을 통해서 마음껏 쏟아져 들어올 것입니다. 그 귀한 은총이 우리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영적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며 달려가고, 하나님의 집을 삼고 하늘의 문을 소망하는 믿음의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불현듯 이렇게 야곱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집을 떠나서 도망자가 되고 실패자가 되어서 먼 길을 걸어가는데, 그곳에도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죄인에게도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그에게 꿈을 보여 주시고 비전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그 자리에 돌베개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의 집을 세웠습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집을 삼겠다고,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주인 되는 인생을 삼겠다고, 그렇게 살겠다고 결단하고 하늘의 문을 열어 달라고 하나님께 소원했습니다.

주여, 우리도 이렇게 살기 원합니다. 우리가 가는 모든 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게 하옵소서. 내가 가는 모든 곳이 하나님의 집이 되어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게 하시고,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곳에 하늘의 문이 활짝 열려서 우리 가정과 일터와 내 삶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가득 채워 주시옵소서. 은총을 내려 주시고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 가득가득 마음껏 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