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강 / 야곱의 서원 (28:20-22)

야곱의 서원

본문: 창세기 28:20-22

통일신라 시대에 뛰어난 학자 한 분이 계셨습니다. 최치원이라는 분입니다. 857년 통일신라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출중하여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당나라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를 한 후 그곳에서 관리가 되어 충분히 인정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라의 진성 여왕이 그를 불러들입니다. 함께 신라를 개혁하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니 와서 도와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개혁이란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법입니다. 당시 성골과 진골 귀족들이 그의 개혁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습니다. 결국 중앙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좌천되어 천령군, 현재의 함양군 태수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중앙 관료가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좌천되면 낙망합니다. 이제 다시는 일하지 않겠다, 내가 여기에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최치원은 달랐습니다. 자기가 그곳에서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매년 홍수가 일어나 함양군 일대를 물에 잠기게 했습니다. 이 일을 내가 해야 되겠구나 결심한 그는 중앙에서 세금을 가져와 땅을 파서 물길을 바꾸고 제방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나무를 심었는데, 이것이 독보적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둑과 제방을 쌓는 일은 일상적이었으나 나무를 심는 일은 그가 최초였습니다. 나무를 심어서 뿌리가 깊게 내리면 뿌리끼리 얽히고설키며 제방을 단단하게 붙잡아 주어 홍수가 와도 잘 무너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최치원이 이룬 숲이 넓어져 상림, 중림, 하림이 되었습니다. 농지개발과 도시개발로 중림과 하림은 사라지고 지금은 함양의 상림숲만 남아 있습니다.

최치원의 예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습니다. 적어도 관리라면 세금을 이렇게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세금을 내야 합니다. 과거 백성들도 그렇고 지금 국민들도 납세는 당연히 마땅히 해야 할 의무입니다. 세금은 열심히 내는데 이 세금이 어디로 흘러 들어갔는지 모르면 화가 납니다. 도대체 이 세금은 누가 쓰는 것인지, 어떤 사람이 이 세금을 먹고 배부른 것인지 출처와 경로를 알 수 없으면 사람들은 세금을 내기 싫어합니다. 강력한 조세 저항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세금과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은 헌금을 합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또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헌금을 사용하는 이는 교회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의 직분자들, 교회 책임을 맡은 중직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결정합니다. 열심히 하나님께 헌금을 드렸는데, 예물을 드렸는데, 예물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으면 헌금할 맛이 나겠습니까? 헌금하기 싫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도 성경에 나와 있는 방식대로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야곱의 서원 기도가 나오고 야곱의 십일조 다짐이 나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둘 다 틀렸습니다. 야곱은 서원 기도도 잘못했고 십일조 다짐도 잘못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왜 잘못되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불안이 낳은 서원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길을 떠나 밧단아람까지 8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그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는 도망자였습니다. 그는 실패자였습니다. 가정을 풍비박산 내고 도망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찾아와 주시고 만나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결단합니다. 하나님, 제가 가는 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늘의 문을 여시고 저를 복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이어서 드린 기도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창 28:20-21)

야곱이 서원 기도를 했습니다. 서원 기도는 아주 간절할 때 드리는 기도입니다. 민수기 30장에 보면 서원 기도는 반드시 지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서원 기도의 핵심은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외도 있습니다. 민수기 30장에 예외 규정이 적혀 있는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미성년의 딸아이가 하나님 앞에 서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서원을 합니다. 아버지가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 딸이 서원 기도를 드렸는데 도저히 허락해 줄 수 없는 서원이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아버지의 직권으로 서원 기도를 무효화할 수 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꽉 막힌 분이 아닙니다. 네가 서원 기도를 했으니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어떤 기도를 했든지 반드시 해야 한다고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상황을 살피시고 미성년의 딸이, 아직 신앙적으로 온전히 다듬어지지 않은 아이가 순간의 감정으로 서원 기도한 것을 무효화시켜 주시기도 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미성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할 만한 신앙을 가진 성숙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서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사 입다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라 그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바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바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새" (삿 11:29)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사기에 나오는 전형적인 표현인데, 하나님은 사사들을 세우실 때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자기가 가장 먼저 알고, 주변 사람들도 다 압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그가 능력을 행하고 사람이 달라집니다. 이번에 하나님이 이분에게 하나님의 영을 보내셨구나, 하나님이 이 사람을 세워서 암몬 자손의 손에서 우리 민족을 구원하려 하시는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입다에게 하나님의 영을 보내 주셨다는 것은 너는 이제 하나님의 영을 받았으니 암몬 자손과 싸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았으니 이제 나가서 전투하고 싸워서 승리하면 됩니다. 그러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 입다가 불필요한 서원 기도를 드립니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삿 11:30-31)

이렇게 서원 기도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가장 먼저 누가 달려 나옵니까? 그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달려 나오지 않았습니까? 서원 기도를 했으니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영이 임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가 서원 기도를 드렸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영이 임했기 때문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이면 충분한데 그가 왜 불필요한 서원 기도까지 드린 것입니까?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는 뭔가가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는 내 정성이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암몬 자손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싶은데, 하나님의 영이 충만히 나에게 임하긴 했는데, 나도 그것을 느끼긴 하는데, 그래도 나도 뭔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부족하지 않은가, 내 정성이 부족하고 모자라지 않은가, 그러면 서원이라도 해야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도인 서원 기도라도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지. 불안해서, 그 불안감을 채우기 위해서 서원 기도를 한 것입니다.

야곱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 28:14-15)

하나님이 이미 야곱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네가 여기 돌아올 때까지 내가 너와 항상 함께하겠다.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무엇이 더 부족합니까? 무엇이 부족해서 야곱이 또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까?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했는데, 내가 그것을 분명히 벧엘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런데 진짜 괜찮을까? 내가 밧단아람까지 가는데 안전할 수 있을까? 아버지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을까? 뭔가를 내가 해야 될 것 같은데. 그래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도인 서원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런 불안감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뭔가를 해야 될 것 같은 불안감. 어느 날부터 가만히 집에 있다 보면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죽으면 천국 갈 수 있을까? 이렇게 죽으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 불안감을 가지고 길거리에 나갔는데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저기 가야 되겠구나 싶어집니다.

주변에서 이 불안감을 알고 이단들이 접근합니다. 144,000명 자리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금 당신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해서는 천국 못 갑니다. 재산 다 팔고 빨리 우리 모임에 들어오십시오. 성경공부 제대로 하십시오. 열심을 내십시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기 와서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해야 됩니다. 그렇게 느슨하게 신앙생활해서 어떻게 천국 가겠습니까? 이런 꾀임이 내 귀에 계속 맴돕니다. 그렇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구나.

그런데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때 이미 하나님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주셨는지를. 하나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가장 큰 은혜가 무엇입니까? 구원의 은혜 아닙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나를 위해서 이 땅에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서 피 흘려 주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건져주기 위해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는 이미 받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을 나에게 부어 주셔서 시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일하게 하시고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서원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에 선행할 수 없습니다. 내 열심이 하나님의 은혜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순서가 중요한데,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이고, 그 은혜에 감격하는 우리가 감사해서 내 손과 발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섬김이고 봉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내 서원 기도로 물타기해 버리는 것, 이것은 불신앙입니다. 이것은 타종교인들이 하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불안감이 들 때마다 사탄이 이 불안을 틈타서 우리를 혼란시키는구나 깨달아야 합니다. 그때마다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크고 놀라웠다는 사실을.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 은혜 아니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이미 나에게 주어진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고 은혜를 붙잡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미 그 은혜로만 구원받은 존재이고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거기서 감사가 넘치면 그다음에 일하시면 됩니다. 그다음에 섬기고 그다음에 일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먼저 기억하라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십일조의 참된 원리

두 번째로 십일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 28:20-22)

야곱의 십일조 다짐입니다. 야곱의 십일조 다짐은 성경의 십일조에 대한 내용으로 두 번째 나오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가장 최초로 십일조 이야기가 나오는 지점은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 왕들의 전쟁에 휩싸여서 포로로 잡혀가 버렸습니다. 조카 롯과 그의 아내와 그의 가족 식구들이 다 끌려갔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던 아브라함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서 기른 318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야간 기습작전을 감행해서 포로들을 다 구출해서 건져 나왔습니다. 잃어버린 것들도 다 찾아왔습니다. 소돔 왕들에게서 빼앗아 왔습니다. 전리품을 잔뜩 안고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멜기세덱은 제사장이었습니다. 멜기세덱 제사장이 아브라함을 축복해 줍니다. 그 축복을 받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십의 일조를 드린 것이 최초의 기록입니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 14:19-20)

이것이 최초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말씀 속에 십일조의 원리가 세 가지 나옵니다.

첫 번째 원리는 감사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소돔 왕들의 전쟁에 들어갔다는 것은 무모한 짓입니다.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왕들의 전쟁에 개인이 뛰어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더구나 배경이 없는 사람입니다. 집에서 기른 제대로 훈련하지 않은 318명의 가병을 거느리고 이 전쟁에 뛰어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전리품을 가득 안고 돌아옵니다. 포로들도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다 건져왔습니다. 누가 하신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아브라함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철저하게 개입하시고 하나님이 도우셔서 내가 이 전쟁에서 승리했구나.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십일조는 감사의 원리로 출발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살기 얼마나 어렵습니까? 전쟁 같은 세상 아닙니까? 돌아보면 경제활동을 하고 가정을 거느리고 자녀들을 키워가며 공부시키고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기적에 가깝습니다. 내 능력으로, 내 힘으로, 내가 가진 지식으로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먹고 살 수 있고 이렇게 활동하고 생활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번 달도 살게 하시고 올 한 해도 살게 하신 하나님, 아무것도 없이 빈털터리였는데 하나님이 살게 하시고 미래를 꿈꾸게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 그것이 십일조의 원리입니다.

두 번째 십일조의 원리는 자발성입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너 십일조 드려. 네가 이렇게 살아오는 건 하나님의 은혜니까 너 십일조 드려야 된다. 너의 생명값을 하나님께 드려라"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십일조를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발적으로 드렸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자발성의 원리가 중요합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떤 권위도 누구에게도 십일조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강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 나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고 깨달아질 때, 그때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강요하고 요구해서 십일조를 드려서는 곤란합니다.

세 번째 원리는 신앙고백의 원리입니다. 아브라함은 전리품을 가지고 부자 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하나님께 그냥 그대로 십의 일을 드림으로 "나는 맘몬의 종이 아닙니다. 나는 물질의 노예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라고 명확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 저는 물질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이것을 다 드려도 하나님이 저를 살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아브라함의 십일조 정신은 감사요, 자발성이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율법은 십일조를 마땅히 드리라고 기록합니다.

"너는 마땅히 매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신 14:22)

앞뒤를 다 생략하고 "마땅히 십일조를 드려라" 이것만 말하면 문제가 됩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와 이것을 연결시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너를 살게 하셨으니 감사하지 않느냐, 그러니 마땅히 드려야 되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 되시지 않느냐, 그러니 마땅히 드려야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율법은 "마땅히"라는 말씀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많이 들어왔습니다. 십일조 당연히 내야 되는 것이라고 목사님들을 통해서, 신앙훈련을 통해서, 헌금생활에 대해서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이 드린 십일조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대해서,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우리가 제대로 배운 적이 별로 없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드려진 십일조가 어떻게 쓰여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옛날 고대 사회는 농경사회였습니다.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3년 단위로 움직입니다. 첫째 해와 두 번째 해에 드린 십일조는 일상적으로 사용됩니다. 일상적이라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성전을 위해서 사용됩니다. 성전의 유지보수와 수리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성전이니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수리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니 식사 대접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공동체 교제도 해야 합니다. 성전 안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성장하고 자랍니다. 그 아이들 양육을 위해서도 십일조가 사용되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매번 떡상에 진설병이 올라갑니다. 진설병을 준비하는 데도 십일조가 사용됩니다. 등잔대의 불은 절대로 꺼져서는 곤란합니다. 그러면 등잔대 등불을 밝히는 기름에 십일조가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저런 식으로 성도들이 드린 십일조가 성전에 각양각색 다양한 모양으로 다 사용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레위인들의 생활을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레위인들은 기업이 없습니다. 땅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땅을 준 적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성전에서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의 생활을 위해서 십일조가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지 않습니까? 십일조는 성전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유지 보수, 성도들의 편안함과 안전을 위해서 십일조가 사용되어야 합니다. 교회 학교 아이들이 자라는데 그 아이들을 위해서 십일조가 충분하게 공급되고 사용되어야 합니다. 곳곳에 성도들이 드린 헌금이 교회 곳곳으로 잘 흘러가야 합니다. 신앙생활하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헌금이 잘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회자들, 전적으로 여기서 섬기고 일하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생활을 위해서도 십일조가 사용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독특한 표현이 나옵니다.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14:28-29)

매 3년 끝에 그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성읍에 저축하라고 했습니다. 3년째 되는 해의 십일조는 다 저축하는 것입니다. 저축해서 그것을 어디에 씁니까?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 요즘으로 말하면 교회가 없는 미자립 교회 목사님들, 미자립 교회 성도님들, 어려운 교회 목회자들, 은퇴하시고 생활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분들, 그분들을 위해서 충분히 사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십일조가 쓰임받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3년을 주기로 볼 때 첫째 해와 두 번째 해는 성전과 레위인들을 위해서, 세 번째 해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3년 주기가 돌아갑니다. 4년째와 5년째는 일상적인 십일조, 6년째는 또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7년째는 어떻게 됩니까? 7년째는 안식년입니다. 유대인들은 농사짓지 않습니다. 농토를 그냥 쉬게 합니다. 7년째를 면제년이라고 부릅니다. 농사짓지 않으면 수입이 없지 않습니까? 수입이 없는데 십일조는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그때는 십일조를 면제합니다. 얼마나 합리적이고 얼마나 조직적이고 얼마나 치밀합니까?

그러면 이런 십일조 사용 정신에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사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열심히 십일조를 드리는데 성전에 비가 새는데 수리하지 않습니다. 성전 곳곳에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누구도 돌보지 않고 누구도 손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십일조가 다 어디로 흘러 들어간 것입니까? 교회 학교 아이들이 충분히 교육받아야 되고 충분히 보살핌받아야 되고 그들이 훈련받아야 되고 신앙교육 잘 받아야 되는데 거기에 제대로 투여되지 않고 제대로 사용되지 않으면 그 십일조가 다 어디로 간 것입니까? 가난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나눔을 위해서 십일조가 사용되어야 되는데, 가난한 자들, 교회 안팎에 수없이 많은 분들, 힘들고 어려움을 호소하는 분들을 위해서 단 한 푼도 흘러가지 않는다면 그 십일조는 다 어떻게 사용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많이 보니 성도들이 십일조를 열심히 하는데 목사님만 부자가 되어 갑니다. 좋은 차도 타고 배부르고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습니다. 교회 중직들, 장로님들이 성도들이 드린 헌금을 가지고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배부르게 자기들이 원하는 것만 하고 다닙니다. 그러면 천벌 받아 마땅합니다. 성도들이 드린 헌금, 하나님께 드린 헌금, 하나님 말씀대로 제대로 사용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성경은 십일조를 드리라는 말도 원리적으로 하고 있으나 사용하는 원리도 충분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잘 익혀서 눈여겨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나눔창고 사역을 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부자라서, 교회가 돈이 많아서 나누는 게 아니고 성경의 원리대로 나누라고 하니까 나누는 것입니다. 나누고 베풀고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을 위해서 자꾸 흘려보내야 되고, 교회가 시설을 확충하고 주차장을 만들고 성도들의 편의를 위해서 주일에 제공하고 평일에는 이웃들을 위해서 조건 없이 개방하는 것도 바로 이런 것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경의 원리대로 제대로 살아보려는 것입니다.

결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야곱의 십일조 결단은 틀렸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안전을 보장하시면 저는 반드시 십분의 일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 아닙니까? 십일조 정신은 거래가 아닙니다. 감사입니다. 자발성입니다.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십일조가 틀렸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려도 잘 드려야 하고, 헌금을 드려도 원리대로 드려야 하고, 교회 책임 맡은 분들이 헌금을 사용할 때도 제대로 잘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그런 좋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우리가 그런 훌륭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것에 선행한다고 하셨습니다. 내 소원을 아뢰는 서원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에 앞설 수 없고, 내가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십일조의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앞설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영이면 충분합니다. 주여,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의 은혜, 놀라웠던 하나님의 은혜,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 붙잡고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저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신앙고백으로 하나님께 물질도 드리고 봉사도 하고 충성하는 믿음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리석게 하나님과 거래를 시도하는 믿음 없는 자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