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강 / 칠 년을 섬기리이다 (29:11-20)

칠 년을 섬기리이다

본문: 창세기 29:11-20

몇 년 전부터 우리는 방송과 연애 프로그램에서 '본캐'와 '부캐'라는 말을 자주 들어왔습니다. 원래 이 말은 게임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 캐릭터와 부캐릭터를 줄여 부른 표현입니다. 이 말이 일상 용어로 옮겨오면서 본업, 곧 원래 자신이 잘하고 생업으로 삼는 일을 본캐라 부르고, 취미로 하는 일이나 평소에 못했던 것을 부캐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본캐와 부캐가 있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부캐가 본캐를 삼킬 때, 역전 현상이 일어날 때 생깁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개그맨이 있었습니다. 본업은 개그맨인데 원래 노래를 좋아해서 대중 앞에 서서 노래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대중들이 이분의 노래를 좋아해주고 환호해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본캐보다 부캐, 곧 개그보다 노래에 더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중의 관심이란 변덕스러워서 그토록 좋아하다가 갑자기 차갑게 식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노래할 수 없게 되어 원래 본업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돌아오려 하니 자리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자리잡고 있던 그곳에 잠깐 떠나 있던 사이 후배들이 들어와 그 자리를 차지해버린 것입니다. 갈 곳이 없습니다. 부캐가 본캐를 삼켜버린 것입니다. 비본질이 본질을 삼켜버린 역전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와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제25회 국제스카우트 세계잼버리 대회를 새만금에서 열었습니다. 탈도 많고 문제도 많았던 대회였는데, 대회 초반의 혼란을 중앙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지자체가 이를 떠맡고 기업이 들어가고 각 개인 봉사자들이 들어가서 어쨌든 마무리했습니다. 마지막은 상암에서 케이팝 콘서트로 피날레를 장식했습니다. 그런데 끝나고 나서도 왠지 불편하고 찝찝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본질적인 의미의 대회는 이미 기능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의미의 국제스카우트 세계잼버리 대회라는 것이 기능적으로는 이미 실패한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것들, 우리나라를 관광시켜주고 케이팝 콘서트를 열어주고 이것으로 언론에 도배를 했지만, 사실은 내용적으로 본연의 의미가 퇴색했습니다. 그렇다면 실패한 대회가 아닙니까?

우리 인생에도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인생길 아주 중요한 메인스트림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그것이 본질인데, 사람들은 그 본질을 벗어나서 비본질에 집착하고 집중합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 비본질이 본질을 삼켜버리는 역전 현상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 야곱이 바로 그런 일을 겪고 있습니다.

사명자의 발목을 잡은 연애 감정

야곱은 아브라함, 이삭으로 이어지는 약속의 계보의 중심 인물입니다. 그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데 결혼이 무척 중요합니다. 하지만 결혼이 사명보다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결혼 문제에 휩싸여서 20년 동안이나 거기에 발목 잡혀 사명의 길을 중단하고야 말았습니다. 역전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혹시 이런 일을 겪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 가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목자들이었습니다. 자기들끼리 약속하고 자기들끼리 못된 카르텔을 조직하고 있는 목자들을 만났습니다. 목자들은 우물 뚜껑을 덮어두고 양 떼가 다 모이면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목자들을 나무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확신했기에 용기 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스스로의 힘으로 혼자 우물 뚜껑을 열어버렸습니다.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하나님이 그를 살피고 도우셔서 가능해졌습니다. 그 후에 그는 라헬을 만납니다. 자기 신분을 밝히고 라헬은 아버지 라반에게 야곱을 만났다고 전합니다.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창 29:13-14)

이제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한 달을 거주합니다. 이 한 달이 야곱에게는 어떤 의미였겠습니까? 쉼이 있었습니다. 800km를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저녁마다 노숙하면서 자기 목숨의 위협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안전합니다. 먹는 것도 걱정 없습니다. 외삼촌 집에서 한 달을 잘 쉬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 달이 라반에게는 또 다른 의미였습니다. 라반은 이 한 달 동안 야곱이라는 인간을 완벽하게 해부하고 완전하게 파악했습니다. 라반은 오늘 본문에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늙은 종 다메섹 엘리에셀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왔을 때 등장한 인물입니다. 그는 다메섹 엘리에셀이 가지고 온 은금 패물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자기 여동생 리브가의 몸값을 높일까 생각했습니다.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창 24:55)

며칠 혹은 열흘을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결심이 서고 결단이 되면 그냥 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랫동안 붙들어 놓으면 가지고 온 은금 패물을 더 내어 놓을 것만 같으니 계속해서 시간을 지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라반이었습니다. 라반은 자기 여동생이 시집가는 것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동생을 통해서 물질을 더 얻으려고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노련했고 오랫동안 사람을 많이 접해 보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리브가가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리브가가 결단하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라반의 계획이 실패한 것입니다. 세월이 한참 지났습니다. 이제 라반은 더 교활해지고 더 노련해졌습니다. 그런 노련한 라반에게 야곱은 한 어린아이 같았고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사실 라반이 야곱에 대해서 이미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동네 청년들에게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동네에서 골칫거리가 목자들의 카르텔인데, 멀리서 온 야곱이 그 자리에 오자마자 목자들에게 쓴소리를 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것으로 봐서 정의감이 넘치고 의욕이 있는 청년입니다. 그리고 성실합니다. 오다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도 만났습니다. 그는 건장합니다. 힘도 셉니다. 그래서 이 한 달 동안 라반은 야곱을 면밀하게 파악합니다. 어른의 눈에 볼 때 젊은 청년이 그 눈에서 라헬을 사랑하는 것을 느끼지 못했겠습니까? 한 달 동안 이 청년이 자기 딸을 좋아하는 눈빛을 가지고 있는 것, 그런 표시를 하는 것, 그것을 분명히 느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계산이 다 끝났습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창 29:15)

사실 이 말은 아주 평범하게 들리지만 평범하지 않습니다. 일상적이라면, 일반적이라면 외삼촌 입에서 조카에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는 것 아닙니까? 왜 그렇습니까? 사실 야곱이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외삼촌 라반이 다 들었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러면 자기 여동생 리브가가 아들을 멀리까지 보내 놓고 얼마나 걱정하는지 기별을 보내고 사람을 보내서 안전하다는 것을 알려줘야 할 것 아닙니까? 한 달 동안 잘 지냈다고 전갈을 넣어 줘야 합니다. 그리고 또 그에게 있어서 에서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에서의 화가 좀 누그러졌는지, 이제는 야곱을 집으로 돌려보내도 되는지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조카를 이렇게 데리고 있다면, 이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안전하게 집으로 돌려보내고 그 가정에 이제 평화가 찾아왔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순서인데, 라반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라반은 그저 야곱을 노동력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농사짓고 여기서 목축하고 여기서 자기 노동자로 세우고 그냥 데리고 있는 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또 반대로 라반은 두 딸의 아버지 아닙니까? 두 딸이 자기 집에 있습니다. 딸들을 결혼시켜야 합니다. 시집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하란, 밧단아람 지역에 있는 청년들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목자들의 영적 상태, 목자들의 상황을 우리가 다 보지 않았습니까? 용기가 없는 자들입니다. 자기들끼리 담합하고 게으른 자들입니다. 양을 치다가 그냥 양들을 버려두고 우물가에 모여서 먹고 마시고 게임하고 노는 아이들입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어떻게 두 딸을 맡깁니까?

그런데 굴러 들어온 복덩이가 찾아왔습니다. 야곱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나서서 자기 딸과 야곱의 결혼을 주선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멀리 있는 여동생 리브가에게 '우리가 서로 이 아이들을 짝지어주는 것이 어떠냐' 아버지가 먼저 기별을 보내는 것이 순서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두 딸들을 이용해 먹습니다. 이 딸을 지렛대 삼아서, 특히 둘째 딸 라헬을 지렛대 삼아서 뽑아 먹을 수 있는 대로 최대한 야곱의 노동력을 끌어내려고 합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악한 자들

한마디로 말하면 라반이라는 인간은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존재입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못됐고 얼마나 야비하고 비열한지 모릅니다.

1942년 태평양 전쟁이 거의 말미에 이르렀을 때, 일본 제국주의는 이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동원할 군사력도 없습니다. 무기도 없습니다. 그러면 항복하면 됩니다. 거기서 항복해야 무고한 인명이 더 이상 살상 당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죽은 사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특공대를 모집했습니다. 이른바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였습니다. 비행기에 250kg의 폭탄을 싣습니다. 비행기 조종사가 비행기를 몰고 미 군함으로 그냥 돌진해서 자살합니다. 서로 같이 죽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작전에 3천 명이 투입되었습니다. 젊은 아이들 3천 명이 전쟁을 위한 수단으로 삼화되어 갔고, 그들이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다 죽어갔습니다. 그래서 전쟁에는 이겼습니까? 전쟁에도 지고 젊은 아이들 3천 명의 목숨도 그렇게 잃어버린 일본 제국주의,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악한 자들 아닙니까?

공산주의는 또 다를 것이 있습니까? 그들은 혁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사람을 수단으로 삼습니다.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 지주들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부자들의 돈을 빼앗았습니다. 집을 빼앗았습니다. 사람들을 착취하고 인권을 유린합니다. 혁명이라는 명분으로 사람이 그 조직에서는 모두가 다 수단이 됩니다. 그 수단의 가치가 다하고 나면 그냥 냉정하게 버립니다.

사이비 이단 집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주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그 신도들은 거기에서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돈을 가져오라고, 노동력을 가져오라고, 등등의 모든 것을 다 뽑아 먹습니다. 사이비 이단 교주들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욕심을 다 채우면 그때는 가차 없이 끊어내지 않습니까?

예수님 제자 중에 가룟 유다가 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 공동체의 돈궤를 맡은, 재정을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도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공금을 횡령하는 일에 맛을 들인 악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도둑질이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자기 선생 예수를 은 30에 팔아 버렸습니다. 그의 목적은 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수단이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예수님을 수단으로 이용해 먹고 예수님을 팔아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가룟 유다의 본성입니다. 그것이 실체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이용하고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았던 유다, 그도 역시 이용당합니다. 자기 선생님을 팔아 치우고 나니 양심의 가책이 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돈을 주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찾아갔습니다.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 27:3-5)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손절당한 것입니다. 유다가, 가룟 유다는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았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을 체포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유다를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목적이 달성되었습니다.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유다가 버림받습니다. 냉정하게 내쳐집니다. 그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서 유다는 스스로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지 않습니까?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람을 이렇게 수단으로 사용하고 버립니다.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됩니다. 이런 일들을 우리가 사회에서 얼마나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결단코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선언하셨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은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지방에 가셨습니다. 거기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이었습니다. 군대 귀신에 들렸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군대 귀신 레기온입니다. 로마의 군대 조직 단위 중 군단입니다. 한 사람에게 귀신이 한 군단 규모로 들어간 자였습니다. 그 사람이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셨습니다. 그 군대 귀신이 쫓겨나와서 그 인근 마을의 돼지 떼에게 들어갔습니다. 돼지가 물로 치달아 다 빠져 죽었습니다.

한번 따져 보십시오. 돼지 한 마리 한 마리 그 돈이 얼마입니까? 그 어마어마한 돈의 가치, 그런데 예수님은 그 돈의 가치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한 영혼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엄청나게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그 영혼이 온전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예수님에게 있어서 목적은 돈이 아니라 우리 주님에게 있어서 목적은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목적은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목적은 사람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돼지가 몇 천 마리가 필요하든지 그 돈을 다 지불할 마음이 있으신 분이 우리 주님이었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비록 우리를 수단으로 생각할지 몰라도, 우리 믿음의 백성들은 누구를 보더라도 수단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저 사람을 내가 어떻게 이용할까? 저 사람을 통해서 내가 어떤 것을 이룰까? 내가 저 사람을 통해서 어떤 이득을 볼까?' 그런 마음이 들면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라반 같은 사람, 일본 제국주의, 공산주의자들, 유다 같은 사람, 예수님을 팔아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유대 종교 지도자들 같은 사람이나 하는 짓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구원을 위한 목적으로 생각하는 귀한 존재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없이 내뱉은 경솔한 약속

이제 이 악한 라반의 사탕발림에, 그의 말에 야곱이 어떻게 대응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창 29:18)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칠 년을 섬기겠습니다.' 아니, 결혼 안 한 젊은이가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그것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7년이건 70년이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명자이기 때문에, 야곱이 사명자이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여기서 두 가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첫째, 일생일대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데 한마디도 기도해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즉흥적으로 그냥 대답해 버렸습니다. 자기 연애 감정으로, 자기 순간적인 충동으로 대답해 버렸지 하나님 앞에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늙은 종 다메섹 엘리에셀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아브라함에게 보냄 받을 때부터 기도 받고 출발했습니다. 두려우니까, 잘 만날 수 있을까, 내 주인의 아들 이삭의 아내감을 데려오는 이 중요한 일에 내가 쓰임 받는데 잘할 수 있을까, 기도 받고 떠났습니다. 밧단아람 우물가에 도착해서 어디로 가야 될지 누구를 만나야 될지 어떻게 해야 될지 아무것도 알 길이 없을 때, 그때도 기도했습니다. 순조롭게 만나게 해달라고. 하나님은 그가 기도한 대로 다 응답하시고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어려운 일을 단 며칠 만에 다 해치워 버렸습니다. 한순간에 해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가장 좋은 여인 리브가를 집으로 데려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기도하지 않았던 야곱을 보십시오. 7년이라는 세월을 담보 잡혔습니다. 7년으로 끝납니까?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 7년이 14년이 됩니다. 14년으로 끝났습니까? 더하기 6년, 20년이 됩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미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하면 되지 왜 기도하느냐고, 그것을 왜 기도하고 거기서 앉아 있느냐고.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가장 빠릅니다. 기도하는 길이 가장 빨리 끝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답을 주시고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는데, 그 길이 신비롭고 놀랍게 빨리 끝납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고 자기 의지대로 자기 욕심대로 그냥 결정하면 이 세월이 20년이 걸려도 끝나지 않습니다. 둘러둘러 세월이 흘러가고 20년 이상이나 걸립니다.

이것은 야곱에게도 손해고 하나님도 안타까우십니다. 우리 인생이 천년만년 사는 인생입니까? 우리 인생은 한계가 있습니다. 시간의 한계 아래 살아갑니다. 사명자로서 일해야 되는 시기에, 하나님이 일해야 되는데, 하나님은 이 사람 빨리 훈련시켜서 일 시켜야 되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이 중요한 자리에 중심이 되는 인물로 하나님이 사용해야 되는데, 이 20년을 비본질에 발목 잡혀서 본질이 잠식당하는 이런 상황을 하나님도 가슴만 태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자들 아닙니까? 믿음의 백성들 아닙니까? 믿음의 백성들이라면 시간 관리 잘해야 합니다. 시간 아까운 줄 알아야 합니다. 비본질에 발목 잡혀서 본질적인 일을 놓치는 어리석은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서는 곤란합니다. 야곱은 그렇게 세월을 낭비해 버렸습니다.

두 번째, 그는 부모에게도 불효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창 28:1-2)

이삭이 야곱을 보낼 때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했다는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책임지겠다는 말입니까? 고대에서 결혼할 때를 보면 고대 결혼은 신랑이 신부를 데려올 때 결혼 지참금을 신부 집에 주고 데려와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가 이렇게 당부하는 것은 '좋은 사람이 생기면 나에게 기별해라, 내가 책임질 테니' 그 말씀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 생겼는데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습니다. 자기 노동력으로 결혼 지참금을 해결하려고 한 것입니다. 7년 동안 일하고, '저는 지금 돈이 없습니다. 은과 금과 패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7년 동안 몸으로 때울 테니 우선 이 아내를 주십시오.' 그런데 라반이 그냥 줄 인간입니까? 7년 동안 주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한 걸까요? 집에 부모가 멀쩡히 있는데, 그 부모가 믿음의 사람들인데, 왜 그렇게 안 한 걸까요? 마음이 급해서 그렇습니다. 왕복 1600km를 자기가 다녀오는 것도 부담스럽고, 누군가를 보내는 것도,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얼른 이 여인을 붙잡아 두고자 하는 욕망, 그 욕심에 말부터 뱉어 버린 것입니다.

결국은 이 결혼이라는 비본질이 야곱 인생의 사명이라는 본질의 길을 가로막아 버렸습니다. 이 슬픈 현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야곱에게 일어났던 일이 오늘 우리에게는 없다고 보장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인생길 사는 데 돈은 필요합니다.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물질도 믿음의 사람이 믿음 생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 달란트를 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땅에 가서 사명 잘 감당하고 돌아오라고,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자고, 그때 결산하자고.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다 받은 자들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잘 감당하고 살아내라고.

그런데 돈 버는 데 정신이 팔려서 사명은 온데간데없고, 나중에는 돈 버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명은 어디론가 가고 없습니다.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비본질이 본질을 삼켜버리고 잠식당한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사랑은 중요합니다. 결혼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사랑의 가치에 매몰된 나머지 자신의 인생에 하나님께 받은 사명과 사명자로서의 길이 중요한 시간들을 잃어버리고, 인간관계에 얽히고설킨 복잡한 관계 가운데서 인생이 얼마나 복잡해지는지 모릅니다. 결혼은 중요하지만, 사랑은 중요하지만, 우리 인생 하나님께 받은 사명의 가치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론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께서는 나를 어떤 자리에 부르셨는가, 이것을 따져보고 돌이켜보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제자리로 돌아오고, 다시 한번 원점으로 돌아와서 나는 어떤 사명자였는가, 하나님이 나에게 바라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돌이키고 살피고 잘못된 것은 다시 회복하시는 용기 있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야곱은 사명자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으로 이어지는 영적 계보의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결혼이 필요했고 그 일을 위해서 좋은 믿음의 돕는 배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기도하지 않았고 부모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고 자기 스스로 홀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결국 시간을 흘려보내고 낭비하고 말았습니다. 주여, 이런 미련한 인생 우리는 살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명의 길을 위해서, 이 본질적인 길을 위해서 비본질을 잘 다스리고 잘 컨트롤하는 하나님의 백성, 지혜로운 백성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미련하고 어리석게도 비본질에 본질을 잠식당하는 어리석은 자 되지 않도록 도우시고, 다시 우리를 깨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워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