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본문: 창세기 29:31-35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면서 우주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 열렸습니다. 그 이전까지 우주는 미지의 공간이었으나, 그날 이후로 개척의 영역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진입 장벽이 높아 우주 정복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지구상의 부호들은 땅보다 우주에 대한 열정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는 스페이스X를 설립하여 사람을 우주로 보내고 있으며, 2024년에는 화성 탐사 계획까지 추진하고 있습니다. 아마존의 설립자 제프 베이조스도 블루오리진을 설립하고 나사와 손을 잡아 우주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우주 개발은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지난 8월 23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인도의 무인 탐사선 찬드라얀 3호가 달 남극 표면에 착륙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것이 대단한 뉴스인 이유는, 불과 3일 전에 러시아가 그 자리에 착륙하려다 실패한 바로 그곳에 인도가 성공적으로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처럼 인도는 선진국도 아니고 부유한 나라도 아닙니다. 그런 인도가 우주 개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것이 세계인들에게는 놀라움이었습니다. 만약 달 남극에서 얼음이 발견되면, 새로운 영토 전쟁이 그곳에서 시작되는데 인도가 그 시작점을 선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도의 우주에 대한 관심은 지금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60여 년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먹고살기 어려웠던 1960년대부터 인도는 우주에 대한 꿈을 품었습니다. 그때는 GDP가 100불도 채 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소달구지 위에 통신위성 시험대를 놓고 우주와의 교신을 시도했을 정도입니다. 우주를 향한 열망이 그들에게는 끝이 없었고, 부품을 실어 올 차가 없어서 자전거로 부품을 실어 나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터무니없어 보이는 열망이 1980년에 드디어 결실을 맺습니다. 전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한 나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리고 2017년도에는 로켓 하나에 무려 104개의 인공위성을 실어서 발사해 세계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처음부터 된 일은 없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진심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기 때문에 오늘의 결실이 있게 된 것입니다. 결국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의 성공과 실패는 열정이 좌우합니다. 얼마나 그 일에 대해서 진정성이 있느냐, 얼마나 그 일을 진정성을 가지고 열심히 감당하느냐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가 갈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발전하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열정을 다해야 합니다.
영적 성장의 조건
영적인 부분도 역시 성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적 성장, 신앙 성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성장은 세상적인 성장이나 성공과는 궤를 달리합니다. 세상적인 성장은 열심히 하고 진정성을 가지면 되지만, 신앙 성장과 영적 성장에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봐야 하고, 회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고 회개하는 과정이 영적 성장에는 필수적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레아의 고통이 나옵니다. 레아는 고통스러운 여인이었고 한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이용당하고 남편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레아는 고통 중에 영적 성장을 이루어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우리는 지금 성장하고 있는지, 발전하고 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속아서 7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라헬을 얻기 위해서 7년 동안 종처럼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첫날밤 눈 떠보니 바로 곁에 누워 있는 사람이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배신감이 밀려왔습니다. 외삼촌에게 찾아가서 따지고 화를 냈습니다. 라반은 태연하게 받아들이며 말했습니다. 7일 동안 잔치를 망치지 않으면 라헬을 바로 주겠다고, 그리고 다시 7년 동안 자신을 섬기라고 제안했습니다. 만약 거기서 야곱이 멈추고 자기를 돌아봤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덥석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14년 동안이나 외삼촌 라반에게 묶여 있게 되었습니다. 14년 동안이나 꼼짝없이 거기서 종처럼 일하게 된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가정에 한 자매가 함께 부인이 된 것입니다. 야곱의 아내가 둘이 되었는데, 레아와 라헬은 자매지간입니다. 야곱, 레아, 라헬 이 세 사람 중에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가장 심각하게 불행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레아입니다.
레아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이용당했습니다. 아버지 라반은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기 때문에 외삼촌을 7년 동안 섬기겠다고까지 했던 것을 라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레아를 끼워 넣었습니다. 라반은 야곱의 노동력을 이용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정직함과 강직함을 이용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7년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레아를 끼워 넣은 것입니다. 딸을 이용했습니다. 첫날밤에 레아를 신방에 밀어 넣고, 그리고 다시 7일에 7년을 더하는 제안을 했습니다. 14년 동안 야곱을 묶어 놓기 위해서 레아를 이용했습니다. 딸의 행복이나 딸의 가정의 불행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아버지 라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딸을 이용해 먹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레아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자신의 행복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이용했고, 자신은 아버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나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화가 났겠습니까? 세상에 이런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딸의 행복을 이런 식으로 짓밟아 버리는 아버지가 진정한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라반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레아는 거기에 희생양이 되었고, 그것 때문에 인생이 불행해졌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상관없습니다. 기왕에 결혼했으니 남편이 사랑을 주면 견딜 만하고 살 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야곱의 눈빛을, 남편 야곱이 레아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땠겠습니까? 경멸의 눈, 차가운 눈빛이 아니었겠습니까? "너는 내 인생에 걸림돌이다. 너만 없었다면, 아버지가 널 밀어 넣는다고 해서 네가 들어오느냐. 네가 거기서 안 된다고 해야 되지. 너 때문에 내 인생은 망쳤다. 너 때문에 내 인생이 14년 동안 이렇게 꼬였다. 너만 없었다면 나와 라헬은 행복하고 즐거웠을 텐데, 네가 들어서 내 인생이 이 꼴이 되었다." 야곱은 레아를 그런 식으로 경멸했을 것입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이용당하고, 그리고 가슴 아파하고 눈물 흘리는 레아의 심정이 상상이 됩니까? 사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사랑받아야 마땅한 사람에게 사랑받아야 합니다. 부모에게 사랑받는 것이 정상인데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돌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편에게 사랑받고 존중받아야 정상인데 그런 인생을 살지 못하고 살아가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그런 분들이 왜 없겠습니까?
보고 계시는 하나님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하실까요? 아버지도 자신을 이용하고 남편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하나님은 어떠하십니까?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창 29:31)
하나님은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레아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다 보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의문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알기나 할까? 내가 지금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 나는 이런 고통 가운데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아시기나 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밧단아람 하란 저 시골 구석에서 한 여인 레아가 아버지에게 이용당하고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도 하나님이 다 보고 계셨고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피조물, 우리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이 왜 모르시겠습니까?
그것은 비단 레아뿐만이 아닙니다. 하갈에게도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셨습니다. 하갈은 애굽 여인입니다. 아브라함 집에 여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주인 사라가 임신하지 못하자 하루는 사라가 하갈을 자기 남편에게 줍니다. 아브라함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임신했습니다. 그때부터 여주인의 학대가 시작됩니다. 사라가 그녀를 괴롭게 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무작정 집을 나왔습니다. 정처 없이 사막을 헤매고 다닙니다. 사람들은 그가 없어져도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사막을 헤매다가 그 자리에서 죽어버려도 누구 하나 여종의 죽음에 대해서 눈 깜짝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내가 너의 기도와 너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너는 임신했고 너는 아들을 낳을 것인데,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라. 하나님이 들으셨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갈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하갈은 이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창 16:13)
하갈이 고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이 나를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눈은 나를 감찰하고 나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찮은 애굽 여인 하갈도 살피고 계셨고, 아버지에게 이용당하고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 천덕꾸러기 레아도 하나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과거도 미래도 동일하신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내 마음의 내면을 다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보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만 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과 생각을 다 보고 계시므로, 우리 마음 중심이 똑바로 서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7)
하나님이 다윗의 집에 사무엘을 보냈습니다. 기름 부을 자를 찾아서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큰아들, 둘째 아들을 보고 사무엘이 반해서 기름을 부으려고 하자,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나는 중심을 본다."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위로가 됩니까? 어떤 분들은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중심을 본다고 하시니.
그런데 이 말씀은 상당히 이중적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 때는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됩니다. 내 중심이 바로 서 있을 때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 중심이 조금이라도 흔들리기 시작하면, 그때는 이 말씀이 굉장히 두려운 말씀이 됩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있습니까? 사람에게는 그런 척, 그렇지 않은 척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가 없으므로 이 말씀은 두려운 말씀이 됩니다.
이것은 다윗에게도 역시 그랬습니다. 다윗은 이 말씀 때문에 성공했고, 이 말씀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다윗이 아버지 이새의 집에서 양을 칠 때 하나님은 그의 마음 중심을 보셨습니다. 충성스러운 그의 마음 중심을.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데려다가 기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가 골리앗과 맞서 싸울 때 하나님은 그의 마음 중심을 보셨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 중심을. 그래서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사울의 군대 장관이 되었을 때, 이방 민족과의 싸움에서 가는 곳마다 승리하게 하신 것도 그의 마음 중심이 하나님 앞에 똑바로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 십수 년을 광야를 헤매고 다닐 때도 하나님이 그를 도우신 것은 그의 마음 중심이 똑바로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마음 중심 때문에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 밧세바 사건부터 마음 중심이 흔들립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데,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다 감찰하고 알고 계시는데, 감히 하나님을 속이려 했습니다. 남편 있는 여인 밧세바를 데려다가 자기 욕심을 채웠습니다. 일이 탄로 나려 하자 그 남편 우리아를 적진 제일 앞에 세워 보내고 그를 살해합니다. 한순간에 간음과 살인죄를 동시에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완전 범죄를 꿈꾸는 그를 책망합니다. 나단을 보내서 그를 책망하시고,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내리막입니다. "너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부터 그 집안에 정말로 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 간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때부터 그 집안에 심각한 문제들이 매일 일어납니다.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다시 광야로 내몰립니다.
하나님이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중심을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손만대 오고 오는 모든 인류가 다윗의 죄를 기억하도록 기록까지 남겨 두셨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 1:5-6)
이 족보를 자세히 보십시오.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룻이 초혼입니까, 재혼입니까? 보아스와 재혼입니다. 룻의 죽은 남편 이름이 여기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냥 담백하게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고 기록한 이유는 룻이 깨끗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도 깨끗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그대로 결혼했고, 그대로 두 사람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에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고 기록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윗의 경우는 다릅니다. 마태복음 1장 6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기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간의 순서에 따르면 우리야가 죽고 나서, 외부에서 사람들이 볼 때는 다윗이 밧세바를 취해서 아내로 삼고 그리고 나서 솔로몬을 낳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해도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다윗이 밧세바를 취했던 그 중심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확하게 기록합니다. 밧세바는 다윗의 아내가 아니라, 밧세바는 우리야의 아내라고. 그래서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그것도 무려 예수님의 족보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하는 그 예수님의 족보에 하나님이 다윗을 가장 사랑하시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죄는 죄대로 정확하게 적시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른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다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마음을 돌보시고, 내가 억울한 것, 마음 아픈 것,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 레아의 마음도 아시고, 하갈의 마음도 아시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네가 죄 짓는 것, 네 마음에 계획하는 것, 부끄러운 뜻까지 내가 다 알고 있다"고.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보실 때 바른 인생, 하나님 보실 때 정결하고 깨끗한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라
이제 하나님이 레아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태를 열어 주셔서 출산이 시작됩니다.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창 29:32)
르우벤, 큰아들이 태어납니다. 르우벤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보라 아들이라"입니다. 누구더러 보라는 것입니까? 야곱에게 "보십시오, 제가 당신의 아들을 낳았습니다"라고, 라헬에게 "봐라, 내가 너보다 먼저 아들을 낳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이제 내 남편의 사랑이 나에게로 향할 것이다. 이제는 내 남편 야곱의 사랑이 나를 향할 것이다." 자신감에 충만해서 외칩니다. "르우벤이라. 보라 아들이라!"
그러나 과연 야곱의 사랑이 레아를 향합니까?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창 29:33)
여전히 르우벤을 낳고도 남편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실망스럽습니다. 그것이 탄식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탄식과 실망도 들으시고 둘째를 주셨고, 그 이름을 "하나님이 들으셨다" 해서 시므온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이제 아들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남편 야곱이 레아를 봐야 될 것 아닙니까? 레아에게 사랑이 주어집니까? 그것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창 29:34)
레위, 연합함이라는 뜻입니다. 삼세판인데, 아들을 하나도 둘도 아닌 셋이나 낳았는데, 이제는 남편이 나와 연합하겠지, 이제는 남편의 사랑이 나를 향하겠지. 그러나 그 기대도 헛된 기대였습니다.
지금 여기 레아의 눈이 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야곱을 향하고 있습니다. 큰아들 낳을 때 "보라 아들이라"고 외치다가 실망해서, 여전히 나는 사랑받지 못한다고, 남편의 눈에 주눅 들고, 그 눈빛에 기가 눌리고,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을 연민하고, 그것 때문에 절망하는 레아의 눈, 레아의 마음. 셋째 아들을 낳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그 눈은 자기 남편 야곱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그녀를 불쌍히 여기시고 태의 문을 열어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봐야 합니다. 고통 가운데도, 이 절망 가운데도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태의 문을 열어 주시고 자녀를 셋이나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봐야 하는데, 고통의 원인이 되는 남편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언제 내 남편의 사랑이 나에게 주어질까? 언제 내 남편의 눈길이 좀 따뜻해질까?"
그런데 그녀는 남편의 눈길보다, 남편의 사랑보다 더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녀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 자녀를 셋이나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보시고 기억하시고 그에게 사랑과 은혜를 풍성히 내려주시지 않았습니까?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봐야 하는데, 고개를 숙이고 여전히 사람을 보고, 야곱을 보니, 그 채워지지 않는 사랑 때문에 여전히 힘들고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고통이 왜 없겠습니까? 크고 작은 고통이 우리에게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이 있을 때 고통의 원인만 보고 있어서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 고통의 원인을 보면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식 때문에 힘들어서 자식만 바라보면 더 고통스럽습니다. 물질 때문에 힘들어서 돈 없는 현실을 바라보면 살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 때문에 힘들어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만 보면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때때로 나를 보시고 기억하시고 때마다 은혜 주시는 하나님을 보면 살 만합니다.
거기서 이제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넷째 아들을 주시고 난 이후에 그녀는 달라집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창 29:35)
유다, 찬송이라는 뜻입니다. 레아가 이제 깨달았습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제는"이라고 말합니다. 큰 깨달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내 남편만 보았는데, 아들을 셋 낳도록 남편은 나를 보지 않는다. 이제는 남편에게서 내 눈길을 거두고,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겠다. 여기서 신앙 성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큰 깨달음이 있어서 영적 성장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고통이 왜 없겠습니까? 큰 고통과 어려움과 환란이 있을 때, 그 고통의 원인을 묵상하지 마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을 쳐다보고, 그 믿음의 길을 따라가면 우리는 거기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형들에게 팔려 보디발의 집에 갔을 때, 믿음으로 잘 버티고 또 버텼는데, 보디발의 아내가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계속 유혹합니다. 그때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창 39:9-10)
요셉은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가 이 극심한 고통에서 어떻게 견디고 이겨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견뎠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려움과 환란을 당할 때, 아버지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눈을 들어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십시오. 그러면 얼마든지 이기고 견딜 수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를 견디게 하시고 이기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신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것이 때로 위로가 되지만, 한편 부담스럽고 두렵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는데, 하나님을 속이려 들지 않기 원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죄짓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속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정직한 마음, 정직한 영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일이 있어도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도우시고, 사람 바라보고 실망하고 낙심하고 눈물 짓는 일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