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강 /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30:1-8)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본문: 창세기 30:1-8

1958년 안도 모모후쿠가 라면을 개발한 이후로 라면은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기호식품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라면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이들은 거의 주식처럼 라면을 먹기도 하고, 야식으로도, 간식으로도 라면을 즐깁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아하는 라면이 왜 국수와는 달리 꼬불꼬불하게 되어 있는지 생각해 본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과학적인 비밀 두 가지가 함께 녹아 있습니다.

첫 번째는 라면이 부서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입체적인 형태, 3차원적 형태로 꼬불꼬불하게 만들어 놓으면 힘을 받을 때 그 힘이 분산되어 운반 과정에서 귀퉁이 부분이 잘 부서지지 않습니다. 보관에 용이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조리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입니다. 인스턴트 식품에서 조리 시간은 거의 생명처럼 중요한데, 뜨거운 물에 라면을 넣고 끓이면 꼬불꼬불한 면 사이로 뜨거운 물이 빠르게 순환하면서 빨리 골고루 익습니다.

사람들이 먹는 라면, 자취생의 배고픈 한 끼를 해결해 주는 라면도 만든 이유가 이렇게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운행하시고 천지를 이루어 가시는 방식에 어찌 이유가 없겠습니까? 돌아보면, 한 걸음 떨어져서 곰곰이 생각하고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운행하시는 방식에는 다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습니다. 그중에 창조의 으뜸이고 피조물 중에 으뜸인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내 인생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이 일에 이유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돌아보면 원인이 있고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일에 원인과 이유를 찾지 못하기도 합니다. 왜 자기 인생인데 나에게 일어나는 일의 이유를 찾지 못할까요? 그것도 생각해 보면 한두 가지 정도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성격이 괴팍합니다. 말도 함부로 하고 화도 불같이 잘 냅니다. 그러면 그 주변에 누가 붙어 있겠습니까? 그 옆에 있다가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두려워서 사람들은 곁에 가기를 두려워하고 싫어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돌아보지 않으면 이분은 불평합니다. "왜 내 주변에는 사람이 없느냐, 좋은 사람이 내 곁에 왜 오지 않느냐"고 불평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면 금방 알 텐데, 자기 성격이 그런 것을 금방 알 텐데,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니 자기 인생에 일어나는 일의 이유를 모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입체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눈으로만 상황을 보면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타인의 눈으로 봐야 하고, 가족의 눈으로 봐야 하고, 공동체 식구들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선으로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일을 봐야 합니다. 그러면 문제의 원인이 보입니다. 그것을 못하니까 문제는 일어나는데 원인을 찾지 못하고, 원인을 찾지 못하니 똑같은 문제가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야곱과 라헬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갈등이 심각해집니다. 갈등은 있는데 이 두 사람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이 가정에 왜 문제가 일어났으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내 인생에 일어나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완벽을 꿈꾼 여인의 절망

레아는 아버지에게 이용당했습니다. 남편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계속해서 갈망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레아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레아에게 태의 문을 열어 주시고 자녀를 선물로 주십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까지 세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세 아들을 낳아도 여전히 목마릅니다. 남편의 사랑이 자신을 향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괴롭습니다.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계속해서 남편의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네 번째 아들을 주신 후부터 그가 달라집니다. 유다를 낳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제는 레아의 시선이 사람을 향하다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고통이 있었는데,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닥치고 괴로웠는데, 이제는 그의 시선이 사람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어려움을 통해서 한층 깊어지고 믿음은 더 좋아지고 신앙이 성장했습니다.

반면, 라헬은 어떻게 지냅니까? 라헬은 레아와의 경쟁에서 승자 독식을 한 사람입니다. 레아가 그토록 기대하고 원했던 남편의 사랑이 라헬에게 집중되어 있지 않습니까? 남편의 사랑은 철저하게 라헬 중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라헬도 가지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창 30:1)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내가 죽겠노라." 거칠고 과격한 말을 합니다. 죽어버리고 싶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 지금 라헬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몹시 불행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라헬을 이렇게 죽고 싶도록 불행하게 만든 것일까요?

라헬은 완벽한 인생을 꿈꾸었던 여인입니다. 창세기 29장 17절에 보면 레아와 라헬을 비교해서 설명하는데,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모가 좋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름다웠습니다. 타고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사랑도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남자가 이 한 여인을 얻기 위해서 14년 동안이나 종처럼 일하겠습니까? 그런데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서 14년 동안이나 종처럼 일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가 모자랐습니다.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녀는 죽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라헬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 품에는 아들을 안고, 등 뒤에는 남편의 든든한 사랑이 배경이 되고 울타리가 되고, 타고난 미모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으며 평생을 누리고 살고 싶다." 그런데 그중에 딱 한 가지 안 되는 것이 있으니 자녀가 없습니다. 이것이 라헬에게는 심각한 고민이고 문제였고, 그것 때문에 그녀는 죽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이 됩니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라헬에게 부어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타고난 외모를 주셨습니다. 야곱의 사랑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시간을 들였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받아왔고 누려왔던 모든 일들은 하나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딱 한 가지 모자란 것 때문에, 딱 한 가지 내 인생에 자녀가 없는 것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객관적으로 한번 보십시오. 라헬이 어떤 사람입니까? 다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볼 때는 열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데 한 가지가 모자랍니다. 그런데 그 한 가지 때문에 자기 인생에서 지금까지 가져왔던 모든 것을 다 부정하고 남을 만큼 그녀는 괴롭습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자세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지금까지 베풀어 주셨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나에게 한 가지 모자란 것조차, 결여조차, 부족한 것조차 오히려 은혜가 됨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보면 성경 전체를 보면, 결여된 것, 모자란 것이 오히려 축복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모자라는 것이 많은 인간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새의 집에 사무엘 선지자가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가장 특별했고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 집에 왔습니다. 보통의 아버지 같으면 그 집에 있는 모든 식구들을 다 불러 모아서 사무엘에게 안수기도 받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각 다른 형들은 다 그 집에 모여 있는데, 다윗은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불러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일곱 형들은 다 그 집에 불러왔는데 다윗은 아버지가 아예 만나지도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모자란 구석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1)

부족한 것이 왜 없습니까? 객관적으로 보면 부족한 것 투성이입니다.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아버지의 사랑도 부족하고, 가지고 있는 능력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부족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에 그는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있기 때문에, 은혜가 넘치면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이 모든 것이 감사가 됩니다. 그러나 은혜가 없으면 다 가져도 부족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모든 것을 다 가지게 되었습니다.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니까 다 가지지 않았습니까? 왕궁에 사니까 없는 것이 없습니다. 다 가졌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때 부족한 것을 느낍니다. 남편이 있는 여인을 데려다가 자기 욕심을 채웁니다. 부족한 것이 없는데, 그런데 그는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우리가 볼 때 부족함이 없는데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떨어지니까,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떨어지고 그 자리에 욕심이라는 것이 자리 잡으니까 채워도 채워도, 가져도 가져도 항상 부족한 것뿐입니다.

라헬을 보십시오. 다 가졌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니까 부족하다고 느끼고 죽고 싶습니다. 은혜만 있으면, 그 빈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차면, 한두 가지 부족해도, 혹은 더 많이 부족해도 충분히 살 만한 가치와 살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역대급으로 가장 완벽했던, 모든 것을 다 가진 왕입니다. 아버지 다윗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창고에 차고 넘칩니다. 이스라엘 역대 왕들 중에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습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받았습니다. 충만했습니다. 다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이방의 여인들을 데려다가 아내로 삼습니다. 한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처첩들이 천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부족하다고 느끼니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데려다가 아내로 삼습니다. 더 많이, 더 많이. 솔로몬 속에 하나님이 없으니까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늙어 죽기 전에 전도서를 기록하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나님 없이 가지려고 하고 채우려고 했던 것, 모든 것이 다 헛되다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은 무엇으로 충만합니까? 내 마음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충만하다면 한두 가지 모자라고 부족해도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빈자리를 우리는 말씀으로, 그리스도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

질그릇은 우리 자신입니다. 질그릇은 금그릇과 은그릇에 비교해 보면 모자란 것이 많습니다. 질그릇은 잘 깨어집니다. 색을 예쁘게 발라 두어도 색이 금방 벗겨집니다. 오래 쓰면 금도 가고 이도 빠집니다. 그런데 나 같은 이 질그릇 속에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그러니 우리는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질그릇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한 것 투성인데, 질그릇 같은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 계시니 우리는 그것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질그릇 같은 내 인생 속에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오면 우리는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8-9)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 있으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수많은 핍박과 고난과 환란에도, 보배 되신 예수가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안전하고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내 마음 중심에 없으면 다 가져도 한 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죽고 싶습니다. 그것이 라헬입니다.

우리는 라헬 같은 인생을 살면 곤란합니다. 한 가지를 가지고 불평불만하는 인생, 그 속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 속에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그 인생은 그 한 가지가 채워져도 또 다른 것을 욕망할 것입니다. 또 다른 것을 갈망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인생을 고칠 수 있습니다.

시기심이 부르는 파멸

라헬이 죽고자 하는 두 번째 이유를 1절에서 다시 한번 보십시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창 30:1)

두 번째 이유는 언니를 시기한 것입니다. 레아와 라헬의 어린 시절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레아는 시력이 약했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는 안경이 없습니다. 시력이 약하면 사물을 눈을 찌푸리고 봅니다. 찌푸린 미간을 가진 여인이 예뻐 보일 리가 없습니다. 갈수록 눈은 점점 작아져 보입니다. 어른들이 비교했을 것입니다. "너는 왜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고 보니?" 레아는 예쁘지 않고 라헬은 예쁩니다. 곱고 아리땁다 했습니다. 사람들이 비교했을 것입니다. 똑같은 자매인데 한 여인은 아름답고 한 여인은 그렇지 못합니다.

레아에게서 라헬은 볼 때마다 열등감을 주는 존재입니다. 라헬이 볼 때 레아는 볼 때마다 우월감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항상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언니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것도 넷이나 낳았습니다. 나에게 부족한 것 딱 한 가지, 이 부족한 것이 내 언니에게 있습니다. 그것도 내가 사랑하는 남편 야곱의 아이를 넷이나 낳아서 기르고 있습니다. 견딜 수 없습니다. 시기심이 나서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심이라는 것이 사람의 뼈를 마르게 합니다. 피를 마르게 합니다. 사람을 곧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시기심의 대명사 사울 왕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시기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이 되어서 가는 곳마다 승리합니다. 연전연승을 합니다. 여인들이 노래 부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그때부터 사울이 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삼상 18:8-10)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다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주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랑해서, 좋아해서 그렇지 않습니다. 시기해서입니다. 시기하는 대상이 생기면 그 사람을 주목합니다. 그 사람이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그 누군가를 만나서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무엇을 먹는지, 거기서 어떤 말이 오갔는지를 계속해서 관찰하고 주목합니다. 소문의 근원지를 긁어냅니다. 혹시 그 공동체에서 나를 욕하는 것은 없는지 계속해서 그를 주목하고 따라다닙니다.

그러니 그런 과정에서 악령이 힘 있게 그에게 내렸습니다. 그런데 왜 악령이 그에게 힘 있게 내리는 것일까요? 사울은 왕 아닙니까? 하나님을 주목해야 될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봐야 될 사람입니다. 그의 눈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눈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주목해야 될 것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인데, 주목해야 될 것은 주목하지 않고, 바라봐야 할 것은 주목하지 않고, 시기할 대상을 쫓아다니고 바라보고 그를 주목하고 묵상하고 있으니 사탄이 거기에 틈타지 않겠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사탄이 틈타는 방식은 바로 이런 방식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시기하고,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사람을 우리의 눈이 계속해서 따라다닙니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어느 공동체에서 무엇을 먹는지 우리는 계속해서 그 소문에 귀를 쫑긋 세웁니다. SNS를 팔로우하고 그 사람이 오늘 어디를 갔는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를 계속해서 관찰합니다. 왜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까? 왜 그것을 하고 있습니까? 거기서 말을 만들어 내고 소문을 만들어 내고 사람들에게 그 사람을 뒷담화하고 험담합니다. 왜 그런 일을 합니까?

우리 인생은 시간이 부족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주목하고 하나님을 바라봐도 이 시간이 얼마나 부족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한정된 시간 안에서 왜 내가 시기하는 사람을 주목합니까? 그러니 거기에 사탄이 틈탑니다. 내 마음에 사탄이 들어오게 하려거든 남을 시기하십시오. 우리 가정에 사탄이 뛰어놀도록 하려면 남을 주목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그 시간에 하나님 바라보고, 그 시간에 말씀 읽고, 그 시간에 하나님의 형상을 사모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울처럼 악령이 힘 있게 내립니다.

라헬을 한번 보십시오. 라헬이 누구를 봤겠습니까? 자기 언니 레아를 주목합니다. 언니 레아가 어떤 말을 하는지, 흠잡을 것은 없는지, 트집 잡을 것은 없는지, 그래서 남편에게 이를 만한 것이 없는지. 그러니 그 마음에 악령이 지배하고 그 마음에 사탄이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녀는 그만 살고 싶은 것입니다. 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이라면 모든 것을 다 가졌는데 죽고 싶겠습니까? 한 가지가 부족한데 사탄이 틈타고 사탄이 역사하니까 이런 일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기심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눈을 돌려 하나님을 보십시오. 눈을 돌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것을 하고, 봐야 될 것을 보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리를 대신한 죄

이제 라헬의 이 말에 야곱이 어떻게 응답합니까?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창 30:2)

인생이 참 허무하고 무상하지 않습니까?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었다 했습니다. 불같이 화를 냈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라헬에게 생명처럼 그토록 사랑하고 14년 동안이나 노동하면서 얻었던 이 여인에게 불같이 화를 냅니다.

인간의 사랑이 이렇게 보잘것없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 가운데 하나님이 마음속에 좌정하지 않으면, 인간의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식고 사라지고 증오와 미움만 남게 되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탁월한 로맨티스트고, 겉보기에는 이 한 여인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바친 야곱 같지만, 사실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니 썩어 가는 갈등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사랑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부부싸움 가운데 야곱이 한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여기에 정답이 있습니다. 이 가정이 왜 이 모양이 되었는지의 정답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기 입으로 정답을 말해 놓고서도 이것이 정답인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오를 수 있습니까? 오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야곱은 하나님의 일을 자기가 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올라 있었습니다.

첫 번째, 결혼 문제입니다. 라반과 야곱이 품삯을 정하는 그때, "삼촌, 품삯 필요 없습니다. 제가 라헬을 사랑하니 라헬을 위해서 7년 동안 일하겠습니다." 결혼 문제, 하나님께 맡겨야 될 문제 아닙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축복의 계보에서 결혼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자기가 해결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하나님을 대신해 버렸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행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될 일을 자기가 하고 하나님 자리에 야곱이 올라앉아 있었습니다.

두 번째, 7년이 지났습니다. 첫날 밤이 지났는데 레아가 누워 있습니다. 눈 떠보니 레아입니다. 자기 인생에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그때 다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제 하나님이 일하셔야 합니다. 도대체 내 인생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묻지 않습니다. 쫓아갑니다. 라반에게 달려가니 라반이 달랩니다. "일주일 잔치를 그대로 잘 지내라. 그러면 라헬을 주겠다. 그리고 7년간 나를 섬겨라." 그것도 덥석 받아버렸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을 대신해 버렸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하나님 자리에 자기가 올라앉아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 집이 이꼴이 된 것입니다. 자기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행동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문제입니다.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창 30:3-4)

이것도 하나님 자리에 앉는 것 아닙니까? 이미 그 집에 아내가 둘입니다. 라헬이 자녀를 낳지 못하자 성경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옳지 않은 방법을 권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방법도 덥석 받아버렸습니다. 이제 아내가 셋이 됩니다. 이것도 야곱이 하나님을 대신한 잘못된 행동입니다. 입으로는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라고 말하면서도 행동은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0-21)

입으로 믿는 신앙과 행동으로 하는 신앙이 이율배반인 사람들입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입으로는 온갖 미사여구를 다 동원해서 좋은 말, 옳은 말 다 하지만 행동은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입니다. 야곱이 그런 사람 아닙니까? 야곱이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라고 말해 놓고서는 행동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대신하는,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 있는 이 이율배반적인 야곱. 자기 인생에 이것이 문제인데 문제를 모르고 있는 자들입니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왜 가정의 갈등이 일어나는지, 충분히 묵상하면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고 있습니다.

결론

라헬처럼, 야곱처럼 살면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결여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부족한 자리를 하나님의 은총으로 채워 가시기 바랍니다. 남을 시기해서 그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주목해서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리에 서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시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 문제들을 우리 스스로 답을 찾아가길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살피지 않고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지 않아서 답을 찾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라헬처럼 모든 것 다 가져도 한 가지 때문에 죽고 싶어 하는 마음 들지 않도록 도우시고,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충만한 인생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남을 시기하고 그를 바라보지 않도록 도우시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묵상하며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여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무서운 죄 범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하나님 자리를 비워 두고 나는 나의 자리에서 성실히 주신 것들을 감당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