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하와 실바
본문: 창세기 30:3-13
역사는 과거를 살피고 들추어내며 반추하는 학문입니다. 역사는 과거의 자료를 찾아서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데, 자료를 발견하기도 어렵고 자료를 찾았다 해서 거기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역사는 가장 탁월한 미래학입니다. 어떻게 이 논리가 성립될 수 있을까요? 과거를 살피는 역사가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는 미래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한없이 짧은 인생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천 년 만 년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한정된 시간을 살아갑니다. 한번 실수하고 두 번 실패해서 쓰러지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기가 어렵습니다. 다시 일어서서 궤도 위로 올라오는 데 시간이 필요하고, 에너지가 필요하며,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몇 년의 시간을 허비하고 나면 이미 기력도 쇠하고 젊은 사람은 나이가 들어갑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은 인생에 치명적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과거를 보면 나와 똑같은 상황에서 선택한 사람들의 결과가 나옵니다. 어떤 이는 지혜롭게 좋은 선택을 해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고, 어떤 이는 어리석고 미련한 선택을 해서 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보고 나는 똑같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찾아내고 발견해야 합니다. 역사가 탁월한 미래학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과거 수나라가 남북조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 왕국을 이루었습니다. 수나라가 거대하고 넓은 중국 대륙을 통일했는데, 마침 그때 598년 고구려의 영양왕이 중국의 요서 지방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전략적 요충지를 빼앗아 버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통일 제국을 이룬 수나라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거대한 대륙의 지배자인데 저 변방에 있는 고구려에게 당했다니, 이를 갈며 시간을 한참 동안 가지고 준비했습니다.
드디어 때가 됩니다. 612년 어느 날 수나라의 양제가 113만 명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쳐들어옵니다. 지도에서 없애 버릴 심산으로 쳐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침착하게 수나라 대군을 막아냅니다. 요서 지방의 전략적 요충지에서 한 번 걸러내고, 평양성에서 두 번째 걸러냅니다. 원하는 대로 싸움이 진행되지 않자 수나라 양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그래서 주력 부대 30만 명을 청천강 살수로 보냅니다. 하지만 살수에는 을지문덕 장군이 있었습니다. 살수대첩으로 30만 대군이 거의 몰살하고 몇천 명만 살아서 돌아갑니다. 113만 명의 대군을 빌려 왔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게 612년입니다.
그런데 돌아가서 반성하지 않습니다. 분석하지 않습니다. 전쟁에서 왜 졌는지 살피지 않습니다. 그 이듬해 613년 다시 군사를 일으켜서 고구려를 쳐들어옵니다. 이번에는 요동에도 미치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오지도 못하고 다시 돌아가서 반란을 제압했습니다. 이제 약이 올라 죽을 것 같습니다. 614년 3차 침공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미 그때는 수나라가 힘이 다 빠져 버렸습니다. 고구려는 가만히 앉아서 수나라를 방어하면서 힘이 더 강해집니다. 결국 수나라는 3차 침공에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국력을 지나치게 낭비했습니다. 결국 618년 당나라에 의해서 수나라는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고구려는 생각보다 강한 나라였습니다. 겨울은 길고 성은 산성에 있어서 높습니다. 춥고 기간이 길어지면 보급로가 차단되고, 먹고 살 길은 없어지며, 군사들은 동상에 걸립니다. 그게 패인인데 패인을 분석하지 않아서 두 번 세 번이나 침공하고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돌이키지 않은 나라는 미래 없이 망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되풀이되는 실패의 역사
오늘 본문에도 야곱과 라헬과 레아의 어리석음이 나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이 실패한 길을 따라갑니다. 잘못된 길을 또다시 답습합니다. 오늘 이들의 실패를 보고 이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창 30:3-4)
이 모습은 어디선가 익숙한 모습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아들을 취하는 모습, 우리는 이 모습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창 16:2)
이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결과가 행복했습니까? 평안했습니까? 모두가 다 즐거웠습니까? 이건 이미 실패한 작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녀 이삭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진짜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납니다. 그 과정에 불화가 일어납니다.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아야 했습니다. 그 안에서 심각한 갈등들이 그 가정에 계속해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결국 이삭은 이스마엘 때문에 힘겨워했고, 야곱의 형 에서는 아버지 이삭을 괴롭게 하려고 이스마엘의 딸과 결혼하지 않습니까? 야곱의 할아버지가 아브라함입니다. 야곱이 이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선택하는 것은 온 가족 모두에게 실패와 패망이 온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실패한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이 길을 걸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가 낳은 또 다른 죄
이미 실패했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명명백백하게 역사를 통해서, 자기 집안의 역사를 통해서 다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이런 미련한 선택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 정도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가 또 다른 죄를 낳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이루는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에덴에서 가정을 창설하실 때 아담과 하와를 짝 지으시고 가정을 선포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야곱의 가정을 보십시오. 처음부터 기형적이었습니다. 일주일 사이에 두 여자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들은 한 집안의 자매들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이 가정은 죄로 시작된 가정입니다. 기도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선택을 해서 시작된 가정 아닙니까? 처음부터 틀려 먹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가정의 각종 불화와 두 여인 사이의 시기와 질투와 다툼이 끊이질 않습니다.
첫 출발이 잘못됐습니다. 처음에 죄로 시작하니까 두 번째, 세 번째가 쉬워집니다. 아내가 둘이었는데 셋은 또 무슨 문제가 되며, 넷은 또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죄를 쉽게 용인해 간 것입니다. 우리가 죄 지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 순서를 지납니다. 처음에 죄 앞에 섰을 때는 두렵고 떨립니다. 죄가 주는 말초적 달콤함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렵습니다. 이 선을 넘어가면 죄인데, 이 죄를 내가 잡으면 죄를 짓는 것인데 망설여지고 불안합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데 내가 이렇게 해도 되나 싶습니다. 그런데 덥석 그걸 잡아 버립니다. 그 선을 넘어가 버립니다. 그러면 두 번째, 세 번째는 쉽게 들어갑니다.
그것을 우리는 중독이라고 부릅니다. 처음에 죄짓기가 어렵지, 그다음 두 번째, 세 번째, 그게 수십 번이 되면 무감각해집니다. 양심에 화인 맞아서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거짓말도 그렇고 도박도 그렇고, 죄짓는 것이 모든 것이 같은 법칙과 같은 원리를 따라서 진행되지 않습니까? 지금 야곱의 가정이 그렇습니다. 처음이 어렵지 세 번째 부인, 네 번째 부인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처음부터 우리 마음에 파수꾼을 세우고 잘 지켜야 합니다. 순결하게, 깨끗하고 정결하게 지켜야 합니다. 한번 거기에 빠져 들어가 버리면 다시 발을 빼고 나오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에, 처음부터 우리 생각과 마음을 잘 지키지 않으면 쉽지 않습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21-22)
범사에 헤아려 판단을 잘하라는 말씀입니다. 좋은 것, 선한 것을 취하라. 악은 그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남들이 다 하니까, 누구나 그렇게 하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시작했는데 나중에 빠져 들어가면 빠져나올 길이 없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살피셔야 합니다. 처음부터 내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정의가 빠진 사랑
둘째로 야곱이 이렇게 행한 이유는 라헬을 지금도 너무나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헬이 말했습니다. "나에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 그때 야곱이 화를 냈습니다. 불같이 화를 냅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화를 내고 이렇게 말했지만 가슴이 아픕니다. 내가 사랑하는 라헬, 내가 이 여인을 위해서 14년 동안 종처럼 일했는데, 내가 사랑하는 라헬이 죽겠다는 말을 입에 올리니 어떻게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가슴 아픔을 부여잡고 있는데 라헬이 빌하를 데리고 와서 말합니다. "나 정말 아이 한번 안아 보고 싶은데, 내 몸종 빌하를 통해서 자식을 낳으면 이 아이가 내 아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거절할 명분이 없습니다. 거절할 방법이 없습니다. 라헬을 너무나 사랑하는 야곱이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진짜 사랑입니까? 야곱이 라헬을 사랑한 이 방식이요, 야곱의 사랑의 문제점은 정의가 빠진 사랑입니다. 사랑에 정의가 없으면 사랑은 맹목적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정(正)이란 곧 기준을 의미하는데, 선이 있고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선과 기준이 없는 사랑은 끌려다니기 쉽고 맹목으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진짜 사랑했다면 그것을 끊어 줬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가 작다고 생각하느냐? 이미 우리 가정에는 아내가 둘이나 되는데, 이것만 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고 살아가는 것인데, 거기에 하나 더해서 또 다른 죄를 짓자고 말하는 거냐?"고 끊어 줘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 줘야 합니다. 그게 진짜 사랑 아닙니까? 야곱이 라헬을 진실로 사랑했다면 "더 이상 우리 죄짓지 말자, 여기서 멈추자"고 말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의가 빠진 사랑이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다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도 망하고 상대도 망하고 공동체도 망합니다. 같이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부모에게 뭔가를 요구하면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정의가 없고 기준이 없으면 자녀들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줍니까? 집 팔고 땅 팔고 재산 팔고 모든 것 다 해서 자녀들에게 다 갖다 주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정의라고, 그것을 진실로 내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기준이 없으면, 정의가 없으면 그것은 자식을 망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을 통해서 이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십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느 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거닐다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고난당하고 십자가 지고 죽고 3일 만에 부활할 것을 말해도 되겠다.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반응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1-22)
베드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니까요. 인간적인 마음으로 내가 정말 사랑하는 주님이 어떻게 십자가에 죽도록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이 일이 결단코 주님께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말할 수 있죠. 그런데 만약 이 말을 예수께서 듣고,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랑하셨지 않습니까? 수제자인데 너무나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맹목적으로 그를 사랑하셔서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안다. 그래 너의 마음을 내가 받아들여 십자가 지지 않으마" 하시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3-24)
"내 뒤로 물러가라"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니까요.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인 일을 생각하지 않고 너는 어떻게 너 자신만 생각하느냐?" 강력한 책망입니다.
정의가 포함된 사랑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정확하게 짚어주고, 끊어주고, 할 말은 해주는 사람, 이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할 말 못하고 덮어가고 끌려가고 넘어가면 나도 죄 짓고 상대도 죄짓고 공동체는 엉망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혹시 야곱처럼 이런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들이 볼 때 이런 사랑은 낭만적입니다. 이런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무조건적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너의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기 좋게 말하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은 그 안에 정의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정이 없는 사랑은 거짓이요 가짜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선 관리의 실패
이렇게 해서 단과 납달리를 낳습니다. 억울함을 푸셨도다, 경쟁에서 내가 이겼도다. 라헬이 두 아이를 가슴에 안고 품고 행복해하고 즐거워합니다. 이 모습을 레아가 봅니다. 이제 레아의 반응입니다.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그의 시녀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더니" (창 30:9)
우리는 이 말씀이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레아는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레아가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고 태의 문을 열어 주셨고,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까지 낳게 하실 때까지는 레아의 눈이 야곱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넷째 아들 유다를 낳을 때 "이제야 내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시선이 야곱에게서 하나님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는 고통을 받았지만 고난 가운데 있었지만 믿음이 성장하고,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고 찬란한 그의 영광을 보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는 레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레아의 믿음이 한층 더 깊어지고 한층 더 넓어졌으니 그는 이제 이렇게 쭉 살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진흙탕 싸움 속으로 같이 빠져 들어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레아가 이렇게 된 까닭은 무엇이며, 우리는 여기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합니까?
한때 불같이 뜨거웠던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고, 한때 뜨겁게 일어나는 신앙을 가진 적이 있었으나, 그러나 그 믿음이 시간이 지나도 금이든 그대로 있지 않고 점점 사라지고 쓰러져서 나중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어 버리는 경험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합니까? 아마 그런 적이 있을 것입니다. 내 기억에 믿음이 좋았던 사람, 하나님 없이는 못 살 것처럼 그렇게 보였던 사람이 10년 뒤쯤 만났는데 이제는 교회도 나가지 않습니다. 이제는 자연인이 되어 있습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요. 그때 당혹스럽지 않습니까? 당황스럽지 않습니까? 내가 10년 전 그분에 대해서 가졌던 기억이 이토록 틀릴 수가 있는가.
그런데 혹시 바로 그런 사람이 나인 것은 아닌지요. 한때 나는 정말 진실로 뜨거웠는데, 레아처럼 사람 보지 않고 하나님 바라보고 살았는데,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이런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지는 않습니까?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시선 관리에 실패했습니다. 그는 야곱에게서 하나님께로 시선을 올려서 믿음의 성장이 이루어진 인물이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위를 보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 3:1-2)
구원받은 사람, 믿음의 사람은 위의 것을 보고 땅의 것을 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시선 처리 잘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레아는 야곱을 보고 라헬을 봅니다. 이것들 하는 짓거리를 보니까 부아가 나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야곱은 라헬에게 놀아나고 라헬이 하라는 대로 다 하고, 라헬은 자기 몸종을 데려다가 남편에게 주고 거기서 아이를 낳는데, "억울함을 푸셨도다"라고 합니다. 억울한 건 내가 더 억울한데, 자기가 왜 억울한 것인지. "언니와 경쟁에서 이겼도다"라고 합니다. 자존심을 한없이 짓밟아 버립니다.
그리고 나를 봅니다. 나를 보니 출산이 멈추었습니다. 이제 나는 이 집안에서 존재감이 없습니다. 누구도 나를 봐주지 않습니다. 나는 거기서 철저하게 소외되어 가고, 라헬에게는 두 아이가 무릎에 올라와 있습니다. 남편의 눈도 라헬 쪽이고, 자기는 전혀 관심 밖입니다. 그래서 이 싸움에 다시 뛰어들어갑니다. 실바를 남편에게 준 것입니다. 똑같이 시선이 위를 보지 않고 하나님 보지 않고 땅을 보고 하향 평준화되어 버리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닙니까?
무엇을 보십니까? 누구를 보십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위를 보고 살아야 합니다. 발은 비록 이 땅을 딛고 살지만 우리의 시선은 하나님을 향해 보고, 우리의 시선은 나보다 믿음 좋은 사람의 뒤통수를 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나는 언제 저분처럼 믿음 좋게 성장할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나보다 못한 사람 보기 시작하면, 세상에서 진흙탕 싸움하고 있는 사람 보면서 그들과 뒤엉키기 시작하면, 신앙 식어버리는 것, 믿음 잃어버리는 것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또 레아가 실패한 이후 그는 훈련도 받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 뜨거워지고 불타오르면 그다음 훈련이 필요합니다. 말씀과 기도의 경건 훈련이 필요하고, 봉사와 충성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 훈련 받지 않으면 신앙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가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부름받기 전과 부름받은 후에 생활의 형편이 가장 극적으로 달라진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마태입니다.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예수님께 부름받기 전에 마태는 부자였습니다. 세리였으니까 최상위층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난 이후에 그는 가난해졌습니다. 거의 거지꼴 아닙니까?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최상류층에 살다가 저 밑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눈으로 볼 때는 죄 가운데 살다가 예수를 만나서 믿음의 눈을 하나님을 향하여 고정시키고 나아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3년 동안 훈련 잘 받았습니다. 그는 한때 돈을 좋아하고 돈을 만지는 사람이었지만 가룟 유다처럼 돈궤에 손을 대지도 않았습니다. 유다처럼 돈에 목숨 걸고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훈련 잘 받아서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마태복음의 저자가 됩니다. 훈련 잘 받아서 시선을 철저하게 그리스도께 고정하고 살아간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한때 뜨거웠다가 식지 않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나는 과거에 이랬는데, 나 옛날에 정말 열심히 믿었는데"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 현재 그 믿음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훈련받아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의 경건 훈련과 봉사와 충성의 훈련, 이 훈련이 우리 믿음을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줄 것입니다.
오늘 이들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시고 살피고, 회개할 것도 회개하고, 본받을 것 본받아서 믿음의 길을 온전히 한 주간 승리하며 걸어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의 실패를 야곱이 그대로 답습합니다. 죄가 또 다른 죄를 낳고 철저하게 자기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죄에 무감각해진 그들의 모습을 봅니다. 아버지, 우리는 죄를 경계하기 원합니다. 죄의 길로 아예 들어서지 않도록 도우시고 붙잡지 않도록 도우시고 순결한 영혼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우리는 정의가 빠진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진정한 사랑, 정의가 세워진 사랑을 하도록 주께서 도우시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존재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눈을 들어 주를 보게 하시고, 위의 것 찾게 하시고, 좋은 것 보게 하시고, 믿음의 길을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선 관리에 실패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훈련 잘 받아서 예수님 보고 오직 믿음의 길만 승리로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