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강 /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30:22-24)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본문: 창세기 30:22-24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연만물을 운행하시는데, 하나님이 아무렇게나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원리가 있고 이유가 있으며, 우주를 운행하시는 방식에도 하나님만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깊이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별 생각 없이 그냥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우주를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고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우주 창조의 계획과 섭리, 그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뜻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하는 이들은 크게 두 부류입니다. 발명을 하든지 발견을 하든지 해야 합니다. 발명을 하는 이들은 인류의 생활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놓아야 하며, 이는 탁월한 천재성과 창의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발견은 또 다릅니다. 자세히 관찰하고 잘 살펴보면 지금까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던 것들을 찾아낼 수 있고, 그것이 노벨상으로 이어집니다.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왓슨이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간 DNA 속에 있는 DNA의 구조를 이중나선 구조로 발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린 시절이 좀 특별했습니다. 아버지가 이 사람에게 새를 관찰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숲속으로 데리고 가서 어릴 때부터 새소리를 듣게 하고 새의 생태를 관찰하게 했습니다. 세상살이에 마음이 번잡해지면 항상 숲에 와서 새를 관찰하라고, 그러면 마음의 평화를 얻고 새를 통해서 기쁨이 회복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새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는 책을 선물해 주며, 새의 생태를 관찰에만 그치지 말고 기록해 두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새를 언제나 관찰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어 갔습니다. 그런데 새를 관찰하다 보니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관찰도 그에게는 별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학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또 관찰하여, 다른 사람들은 그냥 흘려버렸던 인간 DNA의 구조를 마침내 찾아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왜 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까?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관찰하는 것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한 곳을 가만히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할 일 없는 사람이나 하는 짓이라고 치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 위에 집을 짓고 결과만 취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도 그렇게 자녀들을 가르칩니다. 관찰에 힘이 없기 때문에 가설을 세울 수 없고, 가설을 세울 수 없으면 실험으로 입증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초과학 분야가 그토록 힘이 들고 더딘 것입니다.

성경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원리와 인간의 운행 법칙이 잘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이 복을 받고, 어떻게 행동하면 벌을 받는지가 성경 속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도 주의 깊게 읽지 않고 관찰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패턴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짧은 말씀이지만, 하나님의 패턴이 이 본문 속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살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깨닫는 은혜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꼴찌로 밀려난 사랑받는 여인

야곱에게는 네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네 명의 아내를 얻어 가는 과정이 비신앙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네 명의 아내를 통해서 열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레아를 통해서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고, 빌하를 통해서 두 명, 실바를 통해서 또 두 명을 낳았습니다. 네 명의 아내를 통해서 열을 낳았다고 했지만, 그중에 한 명인 라헬은 그때까지 자녀가 없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셋을 통해서 열을 낳은 셈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라헬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라헬은 레아를 경쟁 상대로도 여기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외모부터 시작해서 레아는 별로 아름답지 않았고, 라헬은 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14년 동안 일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 것도 라헬이었습니다. 라헬은 그런 의미에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언니 레아는 여섯 명의 아들을 낳는데, 라헬은 그때까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하나님께서 라헬을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신지라" (창 30:22)

하나님이 드디어 라헬을 생각하시고,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습니다. 여기서 기억하고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순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라헬을 제일 마지막에 생각하셨습니까? 레아, 빌하, 실바, 그 이후에 라헬을 생각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첫째가 되고 싶어 합니다. 최고의 자리에 서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충만한 라헬을 가장 마지막에 두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헬이 누구보다도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제일 뒤로 보내시는 분이십니다.

라헬이 교만했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 레아가 네 명의 아들을 낳은 후에 라헬은 질투가 나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남편에게 화를 내며 "나에게 아들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에게 못 살게 굴고 화를 냅니다.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질을 칩니다. 죽겠다고, 내가 죽어 버리겠다고 말해 버립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큰 교만입니다. 생명을 가지고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뱉는 것 자체가 큰 교만이 아닙니까?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헬에게 자녀가 생기지 않자 자기의 몸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마땅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구하고 기도했어야 하는데, 라헬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인간의 방법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인간의 수법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 버렸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 앞에 큰 교만입니다.

셋째, 르우벤이 합환채를 가지고 왔을 때 당당하게 빼앗아 버렸습니다. 가져가 버렸습니다. 르우벤이 상처를 받든 말든, 레아가 그것을 가지고 기분 나빠하든 말든 그것은 자기가 알 바 아닙니다.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 버렸습니다. 안하무인이었습니다. 이 또한 큰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교만한 자를 제일 뒤로 보내십니다. 평소에 자기가 무시하고 멸시했던 언니보다도 뒤로, 자신의 몸종보다도 뒷자리에, 언니의 몸종보다도 뒷자리에, 가장 마지막 자리에 하나님은 라헬을 두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겸손의 두 얼굴 — 인정과 존중

교만한 사람에게는 대개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라헬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자기의 현실이 이러합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둘째, 타인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레아가, 자기가 그렇게 무시하는 레아가, 아들만 여섯이요 딸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정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무시합니다. 높여 주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그런 교만한 자를 하나님은 그냥 두지 않으시고, 그 교만이 하늘 꼭대기까지 치솟지 않도록 제일 끝에 두시는 장치를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거꾸로, 우리가 꼴찌 되지 않으려면 교만하지 않으면 됩니다. 교만의 반대는 겸손입니다. 겸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만한 사람의 반대로 행동하면 됩니다.

첫째, 겸손한 자는 자기의 현실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있는 것 그대로 인정하면 됩니다. 나는 아들을 원하나 아들이 없습니다. 간절하게 구하고 원하나 아들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구하고, 인정하고,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고 구하면 됩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예수님 시절에 그런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방 여인으로서 헬라인이며 수로보니게 족속인 한 여인의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렸습니다. 그 여인의 인생을 한번 생각해 봅니다.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려 아무리 애를 써도 낫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와 딸을 고쳐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26-27)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이 여인을 개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겠습니까? 자존심이 상하고, 눈물이 나고, 화가 나고, 내가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이 하실 말씀이 아닌 것 같고, 견딜 수가 없고,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나를 이렇게 취급하다니, 얼마나 속상하고 기분 나쁜 상황이겠습니까? 그냥 떨치고 일어나서 가 버려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막 7:28-29)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그런 존재가 맞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처럼 취급합니다. 사람보다도 못한 존재로, 짐승보다도 더 낮은 자로 취급합니다. 그것이 나의 현실입니다. 그러면서도 주의 은총을 구했습니다. 유대인들, 곧 아이들이 먹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이 어미가 먹어서 딸이 나을 수만 있다면, 이런 굴욕과 수치를 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겠다고 나온 것입니다.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지금 도움을 구하는 이 여인의 태도를 예수님께서는 겸손으로 보셨습니다. 이 겸손한 자에게 예수님께서 병을 낫게 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있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 곧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인정해야 회개가 되고, 회개가 되어야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를 해 줍니까?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찾아와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용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눈물로 회개해야 거기서 은혜가 있고, 용서가 있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회개가 되고 용서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겸손한 자가 회개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자가 자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미련하고, 지식이 부족하고, 판단력이 떨어지면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저는 많이 배우지 못했습니다. 잘 모릅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그래야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손을 내밀면 사람들이 잡아 줍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면 사기만 당합니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인정하지 않는데 누가 도와줍니까? 누군가 손을 내밀어 도와주려 해도 자존심 때문에 도움을 거절하고 받지 않으려 하면 도울 수가 없습니다. 없으면 도와 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없는데 있는 척하면 인생만 피곤해집니다. 모르는데 아는 척하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라헬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텅 빈 인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도와 달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인정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이런 겸손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4-15)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위대한 사도가 된 후에 에베소 교회의 후임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믿음에서 낳은 아들, 사랑하는 아들이라 일컫는 후배 목회자 디모데에게 자기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입에 발린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 성찰의 결과입니다.

자기를 돌아보니, 하나님의 맑은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 자신을 정직하게 비추어 보고 세워 보니,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냥 죄인이 아니라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사도라고 말하지만, 날마다 자기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욕망의 덩어리를 하나님 말씀 앞에서 성찰하고 비추어 보니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인정하는 것이요, 현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 성찰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 앞에 자기를 정직하게 세우지 않으면, 나는 꽤 괜찮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이렇게 살면 좋은 인생이 아닌가? 정직하고, 바르고, 성실하고….' 자기 내면을 볼 수 없으니까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겸손은 자기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 현실을 인정하려면 잘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성찰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겸손한 사람은 남을 인정해 줍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3)

겸손은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겸손을 타인 앞에서 나를 낮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 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이 어렵습니까, 남을 인정하고 높여 주는 것이 어렵습니까? 높여 주는 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속이 뒤틀려서 못하겠습니다. 그 집 자녀 잘 되는 것을 인정해 주기 싫고, 그 집 사업 잘 되는 것을 인정하며 "복 많이 받으셨네요" 하고 말하기 싫습니다. 옛날에 그 집이 어떻게 살았는지 다 아는데 그것이 화가 나서 인정하기 싫은 것입니다.

라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라헬에게는 자녀가 하나도 없는데 레아에게는 여섯 명이나 있었습니다. 르우벤부터 막내 스불론까지 아이들이 어머니 곁에 옹기종기 모여 있고, 딸 디나까지 있었습니다. 쳐다보기도 싫고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라헬이 마음을 고쳐먹고, 르우벤이 합환채를 가지고 온 것을 보며 "참 귀하고 착하다, 어머니를 이렇게 섬기다니 귀하다"고 인정해 주었다면, 딸 디나를 보며 "얼마나 귀여운지 한번 안아 봐도 되느냐"고 칭찬해 주었다면, 라헬의 인생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순서가 그 순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끝내 인정하지 않았고, 높여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하는 분들을 진심 어린 마음으로 칭찬할 수 있습니까? 인정해 주고 높여 줄 수 있습니까? 그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겸손한 자를 사용하십니다. 인정해 주지 않고 높여 주지 않으면 우리의 순서가 제일 뒤로 갑니다. 그것은 굴욕이요 수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 곧 나의 현실을 인정하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끄러움을 덮으시는 하나님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창 30:23)

라헬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지금까지 라헬이 한 말 중에 가장 귀한 말입니다. 지금까지 라헬은 그 부끄러움을 자기 힘으로 씻으려 했습니다. 마음속에 결핍이 있으니 그 결핍을 자기가 숨기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더 강해져야 했습니다. 남편에게 큰소리를 쳐야 했습니다. "나에게 아들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 벼랑 끝 전술도 펼쳐야 했습니다. 르우벤의 합환채도 당당하게 빼앗아야 했습니다. 가정의 모든 권리를 자기가 장악하고 좌지우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라헬을 사랑해서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을 뿐, 식구들이 라헬을 존경했겠습니까? 돌아서면 욕했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아무것도 없으면서 성질만 더럽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욕하지 않습니까? 다 돌아서면 그렇게 욕합니다. 자기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더 강하게 되려 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자기를 더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악순환 가운데 라헬이 살았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그런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내 약점이 있고, 수치가 있고, 부끄러움이 있는데, 그것을 덮으려고 더 센 척합니다. 목소리도 크게 하고, 남들에게 함부로 대합니다. 그러면 그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지만, 돌아서면 다 욕합니다. 돌아서면 아무도 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나의 부끄러움과 약점, 수치를 덮을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라헬이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가려 주셨다.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덮어 주시고 해결해 주셨구나." 이제야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시 25:2-3)

주를 의지하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주를 의지하면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칼을 의지하고 활을 의지해도 부끄러움을 당하고, 권력과 물질을 의지해도 부끄러움을 당하지만, 주를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부끄러워서 덮어 버리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결단코 덮을 수가 없습니다. 그럴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결론

라헬은 이 은혜를 경험하고 나서 하나님께 더 큰 은혜를 구합니다.

"그의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창 30:24)

요셉, '더함'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은혜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비밀한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또 다른 은혜를 소망하게 됩니다. 더 큰 은혜를 갈망하게 됩니다. 라헬이 이런 은혜, 곧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니, 또 다른 은혜를 더 경험하고 싶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은혜의 맛을 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뒤늦게라도 발견한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를 발견한 라헬이 귀하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도 스스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나의 수치와 부끄러움은 내가 덮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 귀한 경험이 우리의 인생에 가득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교만한 자를 가장 뒤로 물리시고, 겸손한 자를 세우시며 들어 사용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있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게 하시고, 우리의 현실을 보기 위해서 말씀을 묵상하게 하시고, 말씀의 거울에 나를 정직하게 비추게 하옵소서. 타인의 장점과 타인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며 그들을 높여 주는 넓은 마음을, 주여,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진정한 겸손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부끄러움은 하나님만이 덮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뒤늦게 그 은혜를 경험하고 발견한 라헬이 또 다른 은혜를 더해 달라고 고백한 것처럼, 주여, 우리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내가 더 강해져서 덮을 수 있다는 그 생각을 버리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께 나아와 주를 의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