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과 라반
본문: 창세기 30:25-43
옛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산 너머 서당까지 다니며 공부하는 학동이 있었습니다. 자기 마을에는 서당이 없어서 늘 산 하나를 넘어 이웃 마을까지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학동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놀기 좋아하는 아이였습니다. 산을 넘어갈 때마다 그 산에 커다란 굴이 하나 있었는데, 그 굴 속에는 집채만한 구렁이가 산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곳에 구렁이가 있다 하여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동네 사람들도, 학동 자신도 구렁이를 실제로 본 적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으니 학동에게는 오히려 좋았습니다. 그곳에서 낮잠도 자고 놀다가 산 너머 마을 서당에 도착하면 거의 공부가 끝날 때쯤 얼굴만 비추고 돌아오면 그만이었습니다. 그것이 늘 버릇이었습니다. 그런데 놀기만 하자니 심심했던지 늘 그 굴 속을 향해 "구렁아! 구렁아!" 하고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매일 그랬습니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 몸에 배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여느 때처럼 낮잠 한번 자고 구렁이를 크게 부르는데, 집채만 한 구렁이가 모습을 드러내며 왜 불렀느냐고 말합니다. 학동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뒤로 나자빠졌는데, 딱히 부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구렁이가 화를 내며 말합니다.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나왔다고, 이제 너를 잡아먹어 버리겠다고 합니다.
학동이 울면서 말합니다. 나는 곧 혼인을 해야 하는데 잡아먹히면 어떻게 되느냐고. 그러자 구렁이가 한 달간 말미를 줄 테니 가서 혼인하고 다시 오라고 합니다. 만약 오지 않으면 내려가서 집안사람들을 모두 잡아먹겠다고 협박하고 돌려보냈습니다. 학동이 돌아가서 혼인을 하고 시간이 지나는데,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고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습니다. 초췌해지고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잠도 못 자고 밥도 먹지 못합니다. 신부가 걱정이 되어 묻습니다. 도대체 왜 이러느냐고. 결혼하고 나서 이렇게 되면 자기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계속 묻습니다. 그러자 학동이 모든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신부가 앞장서라고 합니다. 신랑을 앞장 세워 굴 앞까지 왔습니다. 구렁이를 불렀습니다. 구렁이가 나왔습니다. 신부가 말합니다. 두 사람 다 잡아먹든지, 둘 다 살려 주든지 하라고. 구렁이가 말합니다. 너는 필요 없으니 집에 돌아가고 나는 이놈만 잡아먹으면 된다고. 신부가 울기 시작합니다. 신랑 없이 어떻게 살겠느냐고, 같이 잡아먹든지 둘 다 살려 주든지 하라고. 구렁이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갑자기 입에서 무언가를 토해냅니다. 백옥으로 만든 삼각 기둥이었습니다. 한 면을 문지르면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신부는 세 번째 면을 힘껏 문지르며 "너 같은 구렁이는 죽어 버려라!"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니 구렁이가 픽 하고 쓰러져 죽었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이 보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옛이야기의 매력은 이처럼 해피엔딩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못된 습관이 사람을 잡아먹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학동의 사명은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이 돈을 벌어 이웃 마을 서당에 보냈는데, 공부는 하지 않고 잠이나 자며 괜히 구렁이를 불렀다가 잡아먹힐 뻔했습니다. 못된 습관은 나를 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 교훈은, 잘못된 습관에서는 혼자 힘으로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결단을 하고 누군가에게 말해야 합니다. 학동이 혼자 구렁이에게 갔다면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신부에게 말했기에 지혜롭고 용감한 신부가 남편을 건져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사명자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언약의 계보 한가운데 선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사명을 잊어버린 채 라반의 곁에서 이십 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내를 네 명이나 두고 아들 열한 명과 딸 하나, 열둘을 낳을 때까지 사명은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사는 것이 몸에 배고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명을 잊고 사는 것이 습관이 된 야곱은 혼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움직여 주셔야 합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사명을 잊고 살아온 것은 없는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믿음으로 힘껏 감당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며, 하나님 안에서 새로워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십 년의 침묵을 깨뜨린 결단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창 30:25-26)
야곱이 이 말을 한 것은 이십 년 만에 처음이었습니다. 그 이십 년 동안 야곱은 떠나겠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냥 살고 있었습니다. 처음 이곳에 올 때는 이렇게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습니다. 화가 난 에서의 낯을 피해 잠깐만 머무르려 왔다가, 그 세월이 이십 년이 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야곱은 벧엘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약속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전을 세우겠다고 서원한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곳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이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그 약속을 떠올리지 않았고, 단 한 번도 라반에게 돌아가겠다고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입을 열지 않으면, 말하지 않으면, 스스로 깨우쳐 행동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돕지 않습니다. 내가 스스로 이 습관의 고리에서, 이 덫에서 빠져나오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입을 열고 말을 하고, 발이 걷고, 손이 움직이고, 몸이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일하십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데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었습니다. 유다 말기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의 젊은이들을 데려갔습니다. 포로로 데려갔지만 사실은 뽑혀간 것이었습니다. 유다에서 공부를 잘하고 뛰어나며 좋은 가문에 속했던 젊은이들을 바벨론으로 데려다가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쳤습니다. 유능한 인재로 기르기 위해서 데려간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자기들의 양심상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방 신전에서 제사 지낸 음식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먹겠습니까. 다니엘과 세 친구는 고민하다가 결단합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단 1:8-9)
이것이 순서입니다. 먼저 뜻을 정해야 합니다. 결단하고, 입을 열어서 환관장에게 말해야 합니다. 자기를 관할하는 사람에게 나는 먹지 않겠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습니다. 내가 뜻을 정하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은데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꿈에 환관장에게 나타나셔서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먹이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율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본인이 결단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다음에 일하십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 야곱이, 자기가 결단해야 하나님이 일하실 것 아닙니까. 사명이 있는데 그 사명을 잊어버리고 라반이라는 덫에 갇혀서 습관적으로 그냥 살고 있는 야곱에게 사탄은 끊임없이 속삭였을 것입니다. "나쁘지 않잖아. 부인이 네 명이나 되고, 아들 열한 명에 딸 하나까지 둘이나 되고, 장인 라반이 죽으면 이 재산은 다 네 것인데, 굳이 왜 떠나려고 하느냐. 그냥 여기서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않느냐. 벧엘은 왜 돌아가려 하느냐. 사명이 뭐라고. 아브라함도 잊어버리고 아버지 이삭도 잊어버리고 그냥 여기서 부자로 살면 된다."
그것은 마치 인도 코끼리를 길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 인도 코끼리가 태어나면 발에 밧줄을 묶고 말뚝을 박아 둡니다. 힘이 없으니 말뚝을 뽑지 못하고 그 반경 안에서만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코끼리가 성체가 되어 덩치가 커져도 발에 밧줄만 묶어두고 말뚝만 꽂아두면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자기는 이 한계 안에 갇혀 사는 존재인가 보다 하고 체념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그렇게 길들여 가고 있습니다. 사명을 잊어버리라고, 굳이 힘들게 사명을 감당하며 살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주일날 예배당에 한 번만 가면 되는데 왜 굳이 피곤하게 신앙생활을 하느냐고 사탄은 끊임없이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인생에게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크건 적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열심히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야곱처럼 사명을 묻어놓고,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느라, 자기 인생길을 사느라 이십 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습니다. 끊어버리고 떠나겠다고 결단해야 비로소 하나님이 함께 일하십니다. 우리에게 어떤 사명이 있었습니까. 처음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큰 비전과 뜻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묻어놓고 잊어버리고 살았다면, 다시 한번 꺼내놓고 결단하고, 우리 스스로 먼저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다음에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 역사가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자의 민낯
야곱의 이 말에 라반이 반응합니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또 이르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창 30:27-28)
"그대로 있으라." 보낼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품삯을 정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처음 하는 말입니다. 처음 왔을 때 야곱은 품삯이 필요 없었습니다. 라헬을 사랑하니 칠 년 동안 라헬을 위해 외삼촌을 섬기겠다고 했고, 그 세월이 이십 년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야곱이 품삯을 정합니다. 그 방식이 독특합니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에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며 또 염소 중에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가려내리니 이같은 것이 내 품삯이 되리이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내 대답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것이나 점이 없는 것이나 양 중에 검지 아니한 것이 있거든 다 도둑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창 30:32-33)
한마디로 얼룩무늬 짐승들만 자기 품삯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라반은 이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야곱의 의지를 꺾기는 어렵게 보입니다. 이제는 정말 가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십 년 동안 일한 대가로 무언가를 줘야 하는데, 야곱이 요구하는 것은 얼룩무늬 짐승뿐입니다. 오 대 오도 아니고, 육 대 사도 아니고, 칠 대 삼도 아닙니다. 짐승들 가운데 얼룩무늬가 많습니까, 민무늬가 많습니까. 얼룩무늬는 사실 얼마 되지 않습니다. 라반으로서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반은 그것조차 주기 싫었습니다.
"그 날에 그가 숫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양 중의 검은 것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맡기고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 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 떼를 치니라" (창 30:35-36)
짐승들을 모아놓고 얼룩무늬를 전부 가려낸 후, 그것을 자기 아들들의 손에 맡겼습니다. 야곱에게는 무늬가 없는 짐승들만 맡겼습니다. 그리고 사흘 길이나 거리를 띄웠습니다. 성인이 부지런히 걸어서 사흘이 걸릴 만큼 멀리 떼어놓은 것입니다. 섞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얼룩무늬 짐승들끼리 살아야 얼룩무늬 새끼가 태어날 텐데, 얼룩이 하나도 없는 짐승들만 야곱에게 맡겨서 시간이 지나면 빈털터리가 되도록 만들려 한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열두 명의 자식이 있고 네 명의 아내가 있습니다. 빈털터리로는 나갈 수 없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보낼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구실을 만들어 영원히 묶어 두려 한 것입니다.
우리는 라반을 비난하지만, 라반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도 적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도 라반 같은 모습일 수 있습니다. 라반을 보면 하나님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이 이런 일을 하는 것 아닙니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창조 이전의 상태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혼돈이요, 둘째는 공허요, 셋째는 흑암입니다. 창조되기 전의 상태, 이것을 우리 인생에 적용해 보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의 상태가 바로 이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혼돈입니다. 야곱은 라반의 사위입니다. 두 딸이 야곱의 아내가 되어 있고, 외손주가 열두 명이나 됩니다. 모두 자기 가족입니다. 그런데 라반은 가족보다 돈을 더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가족과 물질 사이에 혼돈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을 먼저 앞세워야 하는데 돈이 인생의 우선순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일이 이런 것입니다. 가족 간에, 부모 자식 간에 돈 문제를 가지고 서로 소송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형제들 간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돈 문제 때문에 서로 감정이 상해서 보지도 않습니다. 가족 간의 우애가 먼저입니까, 물질이 먼저입니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지 못하니 이런 혼돈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나의 욕망이 앞서며, 육체적 욕망이 우선순위가 됩니다. 이것이 혼돈스러운 인생입니다.
둘째, 공허합니다. 라반은 이미 큰 부자입니다. 얼룩무늬 짐승들을 야곱에게 다 주어도 엄청난 부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주지 않으려 합니다. 채워도 채워도, 가져도 가져도 모자라다고 느낍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끊임없이 자신을 채우려 합니다. 복음이 없는 사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셋째, 흑암입니다. 누군가에게 일을 시켰으면 임금을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십 년 동안이나 일을 시켜놓고 한 푼도 주지 않으려 하는 것, 이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흑암 가운데 있으면 내가 죄를 지어도 죄짓는 줄 모릅니다. 잘못된 것인지, 잘하고 있는 것인지 라반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접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영접한 우리의 삶은 창조 이후의 상태와 같아야 합니다. 혼돈에서 질서가 생겼습니다. 공허에서 채움이 생겼습니다. 흑암에서 빛이 생겼습니다. 이제 우리 인생은 혼돈이 아니라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앞뒤 좌우가 명확해야 합니다. 우선순위가 확실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모든 일에 우선순위가 명확해야 합니다. 가족이냐 물질이냐,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물질 한 푼을 쓰더라도 순서가 있습니다. 아낌없이 쏟아부어야 할 자리가 있고,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내 재능과 능력을 사용하더라도 우선순위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것이 질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신데, 이 질서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가 왜 어지러워집니까. 질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라고, 가방 들고 교회에 다닌다고 다 질서 안에 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욕심과 자기 의와 자기 분노가 하나님 말씀의 질서보다 우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공허하지 않습니다. 예수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고 예수로 충만하면 하루 세끼 밥 먹고 사는 것으로 족합니다. 물질이 더 있으면 감사하고 없어도 그뿐입니다. 있으면 나누어주면 됩니다. 베풀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충만하니 가득 차 있는데 더 가지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나누고 베풀며 사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죄짓지 않습니다. 빛 가운데 거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빛 가운데 걸어가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영접한 인생입니다.
엉뚱한 방법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손길
라반이 이렇게 행동하는데 야곱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뜻입니다. 이십 년 동안 장인을 경험했으니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항의도 하지 않고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나뭇가지를 몇 개 꺾어다가 껍질을 벗겼습니다. 그리고 이 나뭇가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짐승들이 새끼를 밸 때 그 가지를 보여줍니다. 그랬더니 얼룩무늬 짐승이 태어납니다. 야곱이 데리고 있는 짐승들에는 얼룩무늬가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하얀 민무늬 짐승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룩무늬 짐승들이 태어납니다. 튼튼한 짐승들이 새끼를 밸 때 이 가지를 보여주니 튼튼한 짐승이 태어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 (창 30:43)
매우 번창했습니다.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학적으로, 유전학적으로 올바른 방법입니까. 야곱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을 따라 해 보았지만 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전혀 근거 없는 행동입니다.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엉뚱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과학적이지 않은, 엉뚱한 행동을 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누가 하신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얼룩무늬 짐승 몇 마리 태어나게 하는 것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런 일까지 개입하시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에도 개입하십니다. 야곱이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사명자로 살려고 결심하고 자기 입을 열어서 라반에게 돌아가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돕는 것입니다. 이십 년 동안 침묵하던 야곱이 이제서야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약속의 계보의 사명자로 살겠다고 결단하니, 하나님이 그를 돕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손해 보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십 년 동안 종처럼 일했는데 빈털터리로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십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는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렇게 일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출 12:35-36)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애굽 사람들이 은금 패물을 구하는 대로 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 사람들이 왜 금은보화를 주겠습니까. 마음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백삼십 년 동안 종살이했는데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풍성하게 채워 돌려보내신 것입니다. "이제 종살이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끊어버리고 떠나겠습니다." 그 마음의 결단을 보시고,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애굽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여시고 그들의 은금 패물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얹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결론
이제 우리의 결단만 남았습니다. 우리가 결단하고 사명자로 살겠다고 결심하면 하나님은 신묘막측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야곱의 엉뚱한 나뭇가지 방법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줄로 믿습니다. 머물러 있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코끼리의 발목에 묶인 밧줄처럼, 우리를 옭아매는 습관과 안주의 끈을 끊어야 합니다. 야곱이 이십 년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을 때 하나님이 움직이셨듯이, 우리가 떨치고 일어날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끊고 떨치고 일어나는 결단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머물러 있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습관에 잡아먹히지 않고, 이제는 떨치고 일어나서 결단하고 나서면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그 자리를 벗어나게 하심을 배웠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사명,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 그 사명을 잊고 살았는데 이제는 다시금 깨어 일어나서 사명자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믿음으로 승리하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능력과 은혜를 더하여 주시고, 하나님 믿는 자로서 혼돈이 아니라 질서 가운데 살게 하시고, 공허함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고 예수로 충만한 인생을 살게 하여 주시며, 흑암이 아니라 빛 가운데 걸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