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흉년이 들매
본문: 창세기 26:1-6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를 통해 배움을 얻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 배움이 오늘의 삶에 실질적 도움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현재에 일어나고, 현재 일어난 일이 미래에도 되풀이됩니다. 상황은 달라져도 그 본질과 내용을 들여다보면 다르지 않습니다. 과거에 실패했더라도 그 실패를 거울 삼아 제대로 살아낸다면, 현재와 미래는 훨씬 나은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기에 같은 문제 앞에서 쓰러지고, 같은 자리에서 넘어지기를 반복합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앗시리아라는 거대한 제국이 일어났습니다. 이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주변 나라를 점령해 나갔지만, 얼마 가지 못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지나친 팽창 정책과 피정복민에 대한 가혹한 통치가 그 원인이었습니다. 아시리아에 이어 일어난 바벨론도 같은 전철을 밟았고, 역시 멸망했습니다. 바벨론 뒤에 일어난 페르시아는 앞선 두 제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성했습니다. 세계 제패의 야망을 품을 정도의 국력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 황제가 그리스 원정을 무리하게 시도하다가 실패하면서 국력이 기울기 시작했고, 결국 알렉산더 대왕에게 멸망당했습니다.
페르시아의 황제들이 앞선 바벨론과 앗시리아의 역사를 공부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제왕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들은 역사를 배우고 깨닫고, 그 가치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선대 제국이 왜 망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공부를 통해서도, 머리로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앎을 자기 삶에 적용하지 못했기에 같은 전철을 밟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결정적 강점이 있으니, 바로 기도입니다. 흔히 기도라 하면 무엇인가를 청원하는 것만 떠올립니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은 자기 반성에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자기 인생과 삶을 반추하는 것, 우리는 그것을 회개라 부릅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돌이킬 때 비로소 발전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달라고만 구하는 것으로는 어떤 성장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기도하지 않아서 범했던 실수를 가만히 살피고 돌아보며,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다시는 같은 상황에서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단할 때, 비로소 비슷한 상황이 찾아와도 더 나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강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삭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아브라함 때 첫 흉년이 들었는데, 아브라함은 그 흉년을 잘못 다루어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아들 이삭은 달랐습니다. 이삭 때에도 흉년이 찾아왔지만, 그는 이 흉년을 잘 헤쳐 나갔습니다. 무엇이 달랐는지,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살았던 가나안 땅, 팔레스타인은 사람이 살기에 만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농사짓기도, 목축하기도 힘든 땅이었습니다. 이른 비가 내려야 파종과 경작을 시작할 수 있고, 수확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늦은 비가 내려야 농사가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늘 하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이른 비가 적절히 내릴지, 늦은 비가 제때 와서 농사를 풍성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지, 그 걱정 속에서 항상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살기 힘든 땅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훈련시키기에 더없이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을 그곳에 불러 하늘을 바라보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니, 훈련의 장소로 이보다 적합한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 땅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그 후손들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반복되는 역사, 엇갈리는 선택
그런데 그 땅에 흉년이 찾아옵니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창 26:1)
아버지 아브라함 때 흉년이 들었고, 이제 이삭 때에 와서 또 흉년이 찾아옵니다. 이삭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 땅에 계속 살아야 합니까? 걸핏하면 흉년이 찾아오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걱정과 고민과 염려 속에서, 차라리 다른 곳으로 떠나버릴까 하는 마음이 왜 들지 않았겠습니까.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흉년이 찾아왔을 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행동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창 12:10)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왔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물을 주셔야 마땅한데, 그를 맞이한 것은 심한 기근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실망하고 이집트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은 채 그냥 내려가 버린 것입니다. 내려가면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고,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기는 치욕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아내를 되찾게 하셨고, 바로는 속은 것을 알고 아브라함을 꾸짖은 뒤, 은금과 패물과 가축과 노비를 잔뜩 안겨 돌려보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자가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부가 아니라 재앙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조카 롯의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노비 가운데 하갈이라는 여인이 아브라함의 집에 들어왔고, 하갈로 인해 그 가정에 불어닥친 풍파가 얼마나 심했습니까. 이것이 첫 번째 흉년, 아버지 아브라함이 흉년을 잘못 다룬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의 피해를 이삭이 고스란히 받았습니다. 자라면서 이스마엘과 하갈로 인해 집안에 닥친 고난을 목도했고, 자기 인생에도 위기가 찾아오는 것을 지켜보며 성장한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흉년이 찾아옵니다. 이삭도 목축하는 사람이었으니,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습니다. 가축을 이끌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옮겨 가며 목초지를 찾았지만, 팔레스타인 남동쪽 블레셋 지방까지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이삭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창 26:2)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 내가 지시하는 땅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중대한 교훈을 발견합니다.
첫째,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때 흉년이 들었고, 아들 때 또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들의 시대에 흉년이 올 것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이런 지형, 이런 기후, 이런 장소에 살다 보면 흉년은 불가피하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흉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겨 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했다면, 자신이 실패한 이유를 아들에게 알려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아들은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무너졌고, 쓰러졌고, 실패했다. 그러나 아들아, 너는 그래서는 안 된다. 내가 왜 실패했는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낱낱이 알려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아들은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정신입니다. 성경에는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업적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부끄러운 과거까지 낱낱이 드러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지만, 그의 부끄러움과 수치와 잘못이 성경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범한 추악하고 무시무시한 죄가 성경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선언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예수님의 조상입니다.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이들의 허물을 하나님이 덮어 주셔도 될 법한데, 하나님은 그런 일에 타협이 없으십니다. 모든 것을 드러내시고, 수치와 부끄러움과 연약함까지 남김없이 보여 주십니다.
그 이유는 후세대를 교육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이처럼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도 이런 죄에 빠졌다는 사실 앞에서, 나 같은 존재가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믿음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과 과오를 숨기려 합니다. 묻어 버리려 합니다. 보여 주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정신이 아닙니다. 깨닫고 고쳤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후세대에게 그대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부모의 실패와 잘못을, '너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반복되는 역사 가운데 이겨 내고 승리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1938년 9월 9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열렸습니다. 전국에서 목사와 장로 대표 193명이 모였고, 그 자리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습니다. 그들의 명분은 '이것은 종교 행위가 아니라 황국 신민으로서 내선일체에 동의하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의가 끝난 후 총회 임원들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평양신사에 올라갔고, 사진기자를 대동하고 참배했습니다. 그 다음 날 전국 신문에 대서특필되었습니다.
이 사진은 잊을 만하면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 자손들에게, 교회의 선배들이, 우리의 조상들이 우상 앞에 무릎 꿇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상에게 무릎 꿇고 신사참배한 그 결과가 나라의 멸망으로 돌아오고,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돌아와서, 온 나라가 잿더미가 되고 초토화된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 지도자들이, 목사와 장로들이 이 지경에 이르면 나라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것을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숨기고 아닌 척한다고 역사가 사라지지 않으며, 잘못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은 작은 성과를 크게 부풀리고, 큰 잘못은 자기 탓이 아니라고 합니다. 지난 정권이 판을 깔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 하고, 다른 사람들 때문이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꺼립니다. 죄는 덮으려 하고, 공은 드러내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반대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가 잘한 것은 가만히 두어도 하나님이 알아주십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 잘못 살아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 역사가 반복되어 자녀들이 같은 문제를 겪게 될까 염려된다면,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돌이키며, 다음 세대에게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너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흉년을 잘못 다루었습니다. 약속의 땅을 떠나 이집트로 내려갔고, 그 결과 수십 년 동안 그 집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모든 것을 이삭에게 차근차근 알려 주었습니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아들에게 그대로 전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땅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도 이런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임하는 응답
두 번째 교훈은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는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라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이삭에게는 말씀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더라면 아브라함도 내려가지 않았을 텐데, 왜 아브라함에게는 침묵하시다가 이삭에게만 말씀하셨습니까.
그때 아브라함은 신앙생활을 막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막 가나안 땅에 도착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닥쳤는데도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상의하지 않고 그냥 내려가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삭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내 리브가를 다메섹 엘리에셀이 데려올 때, 그는 들판에서 묵상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결혼 후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자, 그 문제를 자기 문제로 끌어안고 20년 동안 기도한 인물입니다. 이런 이삭이 자기 가정과 일터에 큰 문제가 생겼을 때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 흉년이 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쪽으로 내려가고 또 내려가도 목초지를 발견하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구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방향을 주십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 그 자리에 머물러라.
평소에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결정적 순간에 응답하십니다. 기도는 평소에 하는 것입니다. 아무 일이 없어도 늘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결정적 순간에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평소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 닥쳐도 기도할 생각조차 나지 않습니다. 설령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삭처럼 평소에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결정적 순간에 길을 알려 주시며 방향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창 26:3)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 26:4)
거대한 축복의 약속을 하나님이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이삭의 선택만 남았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여기 머물라, 그러면 이런 복을 주겠다. 이삭이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창 26:6)
하나님 말씀대로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단순하게 읽어 넘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삭의 자리에 자신을 한번 놓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머물라 하셨지만, 하늘에서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습니다. 흉년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땅에서 초목이 자라게 하신 것도 아닙니다. 없던 곡식이 갑자기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이삭의 가축들이 죽어 가고 있는데 목초지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으시고 그저 머물라고만 하셨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은 당장 손에 쥐어지는 현재의 복이 아니라, 저 먼 미래에 이르러 성취될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지경을 건너가기만 하면, 조금만 더 내려가면 이집트가 있었습니다. 이집트에는 나일강이 있고, 나일강 주변에는 풍요로운 목초지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가축을 먹이고 가족을 살릴 수 있는 손쉬운 선택이 눈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손쉬운 선택을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 땅에 머물라 하셨습니다. 머물라 하시면서도 당장의 해결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고, 땅에서는 여전히 초목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 땅에 머물렀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손쉬운 선택을 좇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손쉬운 선택은 이집트로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이삭은 하나님 말씀대로 그 땅에 머물렀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룻 1:1)
나오미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유다 땅 베들레헴에 살았습니다. 하나님 약속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흉년이 찾아왔고, 먹고살기 힘들어지자 약속의 땅을 떠나 이방 땅 모압으로 가 버렸습니다. 거기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까.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아들을 모압 여자와 결혼시켰는데, 두 아들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순식간에 세 과부만 남았습니다.
그때 멀리서 소식이 들려옵니다. 고향 유다 땅 베들레헴에 다시 먹고살 만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룻 1:6)
이것을 믿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먹고살기 위해 약속의 땅을 떠났다가, 다시 먹고살기 위해 돌아오는 것입니다. 자기 편의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부족함이 빚어낸 은혜
우리의 선택이 부디 하나님 말씀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기를 바랍니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손쉬운 선택을 했습니다. 기근이 오자 약속의 땅을 버리고 이집트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이 어려운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셨을 때, 그 선택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그 땅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이 머물라 하신 그 땅의 정체는 무엇이었습니까. 부족함의 땅이었습니다. 모자란 곳이었습니다. 결여된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사랑하시는 이삭에게 결여되고 모자라고 부족한 땅에 머물라 하신 것입니까.
생각해 보면, 모자람이 은혜가 됩니다. 부족함이 살아 보면 은혜가 됩니다. 이삭이 부족했기에 그 땅에서 하나님 앞에 필사적으로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가축을 먹여 살려야 하고, 이제 막 태어난 쌍둥이를 먹여 살려야 하니,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족하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모자라기에 하나님께서 살게 하신 그 땅에서 버티며 견디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건강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수십 년 동안 건강의 문제를 가지고 엎드려 기도하지만,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건강이 부족해서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다른 영역에서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나 주시고, 삶이 풍성해집니다. 물질이 부족해서 하나님께 채워 달라고 기도했는데 부자로 살지는 못했지만, 돌아보니 자녀들 공부시키고, 시집장가 다 보내고, 그럭저럭 살 만큼은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했습니다. 모자랐는데, 그것이 은혜였습니다. 부족했는데, 돌아보니 그것이 은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이 세 번은 단순히 숫자적 의미가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수없이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의 병은 낫지 않았습니다. 부족함이었습니다. 모자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바울은 그 말씀 앞에서 깨달았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끌어안고 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도 함께 가지고 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의 인생에서 부족하고 모자란 것을 채우려고 이집트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믿음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 불신의 자리로 떠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을 가득 채워 돌아왔지만, 그것은 재앙이요, 저주요, 독이었습니다. 롯의 믿음을 잃어버렸고, 하갈 때문에 온 집안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자란 것을 은혜로 여기고, 부족한 것을 복으로 여기며 그 땅에서 버텼습니다. 하루하루 견디며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간증이 됩니다.
결론
부디 우리도 이삭처럼 그 땅에 머무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모자람이 저주가 아니라, 부족한 것이 부끄러움과 수치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더 가까이 찾아가고,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은혜의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아브라함의 시대에 찾아온 흉년이 이삭의 시대에도 찾아왔듯이, 우리의 삶에도 흉년은 찾아옵니다. 그때 이집트로 내려가는 손쉬운 길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앞에 머무는 믿음의 자리를 선택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평소에 기도하는 삶을 통해 결정적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고, 부족함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는 고백이 우리의 삶 가운데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에게는 잘못한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것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다음 세대들에게, 부끄러워 말하지 못하고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수치도 부끄러움도 드러내는 책입니다. 아브라함의 부끄러움도, 다윗의 수치와 죄악도 낱낱이 기록하셨습니다. 후세대를 잘 교육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 우리가 자녀들에게 역사가 반복될 때 그들이 이집트로 내려가지 않도록, 또 흉년이 찾아올 때 믿음으로 견디고 이겨 내도록,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자녀들을 잘 교육하는 부모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이 결여된 땅이요, 모자란 땅입니다. 그것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주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지키며 견뎠던 이삭처럼, 우리에게도 견디는 힘을 주옵소서. 이기게 하여 주시고,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히려 부족하기 때문에 기도하고 엎드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간구하여, 주께서 주시는 놀라운 복을 받아들이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