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 사람들
본문: 창세기 26:7-15
중국 전국 시대에 순우곤이라는 탁월한 지식인이 있었습니다. 통찰력이 남달랐던 그는 어느 날 이웃집 부뚜막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위험한 상태임을 즉시 알아본 그는 집주인을 불러 "부뚜막을 이대로 방치하면 머지않아 불이 날 것입니다. 서둘러 정리하십시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그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 집에서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달려와 급히 불을 꺼주었지만, 순우곤은 마침 출타 중이어서 자리에 없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불난 집 주인이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놓고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우리 집에 불이 났을 때 함께 도와주셔서 불을 꺼주신 것에 감사합니다"라며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순우곤 선생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며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초대하지 않으셨습니까?" 집주인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내가 이분을 초대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불이 날 것이라고 저주하더니 진짜 불이 났기에 기분이 나빴고, 둘째는 집에 불이 났을 때 자리에 없어서 불을 끄는 데 힘을 보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집주인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실 순우곤 선생이야말로 집주인이 직접 찾아가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당신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우리 집에 불이 날 줄을. 우리 집에 한번 오셔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살펴봐 주십시오"라고 간청해야 할 분이었습니다. 불난 집에 달려와 불을 꺼준 사람들에게는 감사하면서, 화재를 미리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은 홀대하는 것이야말로 미련한 처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어리석은 자, 악한 자, 성격이 괴팍한 사람, 비겁한 사람, 대충 살아가는 사람, 완고한 사람 등 별별 부류의 사람들이 뒤엉켜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방법이겠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삭도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어울려 살고 있습니다. 이삭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삶의 방식을 모색하기를 바랍니다.
깨어진 상식, 무너진 신뢰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창 26:7)
이 장면에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도 아내 사라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갈 때, 사라가 아름다워서 자기 목숨에 위협이 될까 두려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이삭도 똑같은 상황 앞에서 똑같이 행동하고 말았습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입니다.
이 행동은 두 가지 심각한 문제를 수반합니다. 결단코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아내를 부정한 것입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어떻게 결혼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리브가를 어떤 방식으로 데려왔는지도 기억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도하셔서 아브라함의 며느리, 이삭의 아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아내를 아내라 말하지 않고 누이라 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기만하고 부정하는 행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입니다.
간혹 부모의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부모를 부정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부모 중에도 자식이 자기 뜻대로 자라주지 않아서 자녀를 부정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부모를 부모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식을 자녀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부부의 관계를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이 분명한데도 내 아내를 아내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기만하는 행동입니다.
둘째, 이삭의 이 행동은 리브가와의 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금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리브가는 이삭의 본심을 알고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어려울 때 자기를 위해 기도해 준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 앞에서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실망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남편을 믿고 평생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리브가는 이삭을 이해하고 수용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서운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첫째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가치입니다. 그러나 이 가치가 사람과의 관계로 내려오면 상대적인 가치로 전환됩니다.
사람 사이의 믿음은 상호적입니다. 믿을 만한 행동을 해야 상대방이 믿는 것입니다. 남편이 평생을 살면서 입만 열면 거짓말이고 믿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믿겠습니까? 믿음이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그 사람의 삶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나도 믿음을 주고 신뢰를 줘야 상대방이 나를 믿고, 상대방도 믿음을 줘야 내가 상대방을 믿을 수 있습니다. 상호적인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삭은 리브가에게 믿음의 금이 가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현실이 누추하고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그 사람이 성실하고 정직하면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미래를 꿈꿀 수 있습니다. '저 사람과 함께라면 나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미래를 향한 것이지만, 그 미래는 현재의 모습에 달려 있습니다. 이삭의 이런 모습이 리브가에게 어떤 소망을 줄 수 있었겠습니까?
사랑 또한 주고받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사랑이 서로 오가면서 커지고, 싹이 트고,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을 받아야 줄 수 있고, 주면 또 돌아오면서 더 커지는 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삭은 리브가에게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온전히 주지 못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결단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짓말이 영원히 감추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블레셋 사람의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이삭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껴안는 것을 보았더라" (창 26:8)
아브라함의 거짓말도 금방 탄로 났고, 이삭의 거짓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도 불신자인 아비멜렉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짓말하는 것을 본 아비멜렉은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자기 지경에 살게 해주었는데 이런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깊은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추방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이 거짓말을 대하는 태도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리라 하였더라" (창 26:10-11)
아비멜렉은 이삭을 향해서는 가볍게 책망하고, 오히려 자기 백성에게 엄하게 단속합니다. 이삭이나 리브가를 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겠다고 철저하게 자기 백성을 단속한 것입니다. 본래대로라면 아비멜렉이 이삭과 리브가를 추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켜주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창 21:22-23)
아브라함과 블레셋 족속은 이미 조약을 맺은 적이 있었습니다. 서로 거짓되이 행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것입니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블레셋 조상이 함께 약속한 것을, 이 사람들이 기억하고 지켜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약속했기에, 거짓되이 행하지 않기로 했기에, 블레셋 사람들이 — 그 곳 사람들이, 이방인들이 —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먼저 깨뜨린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을 먼저 깨뜨린 것은 바로 이삭 자신이었습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블레셋 사람들이 약속을 지켜가고 있었습니다. 사회적 합의, 곧 약속은 상식에 속하는 영역입니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법으로 정하지 않아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보편적으로 알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을 상식이라 합니다. 블레셋 백성들은 자기 조상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상식의 영역에서 성실히 지켜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불신자도 지키는 상식을 하나님의 백성 이삭이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수많은 상식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공정에 민감합니다. 누군가가 일터에서 일을 합니다. 일을 하면 노동력이 투여되고, 시간이 들어가고, 재능이 들어갑니다. 그러면 정당한 임금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상식입니다. 임금을 받았으면 그 돈으로 세금을 내야 합니다.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는 것이 상식입니다. 세금을 국가가 거두었으면 그 세금으로 정당하게 분배하고 투명하게 집행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이 일련의 과정 가운데 어느 한 과정이라도 무너지면 사회가 복잡해지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열심히 노동하고 일했는데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하면 문제가 일어납니다. 임금을 받았는데도 세금을 내지 않으면 탈세입니다. 세금을 국가가 거두었는데 투명하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국가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상식에 속하는 영역입니다. 세상은, 사회는, 국가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합의한 상식에 따라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경험했던 교회가 보편적 관점에서 상식에 부합하는 교회였습니까? 그렇게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상식에 의거한 교회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습니까? 교인들이 헌금을 합니다. 교인들이 정성을 다해 헌금하면 그 헌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적어도 공개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얼마가, 어떤 영역에서, 어떻게 집행되었는지를 합의에 따라 운영하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니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는 철저하게 상식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흔히 '교회와 세상은 다르다'고 말하지만,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는 상식보다 더 넓은 범위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세상의 상식은 하나를 주면 하나를 얻으려 하는 '기브 앤 테이크'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를 받으면 열을 줘야 합니다. 상식 위에 집을 짓되, 그 상식을 뛰어넘어야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은혜를 끼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좋은 교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가치를 전하는 교회가 됩니다.
기본적인 상식조차 지키지 않는 교회가 어떻게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젊은이들이 왜 교회를 떠나겠습니까? 청년들이 왜 교회를 떠나겠습니까?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부끄럽고, 종교란에 기독교라 쓰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상식적이지 않으니, 세상의 상식과 정반대로 가니 부끄러운 것입니다. 상식을 뛰어넘어 세상을 감동시키는 교회는커녕 기본적인 합의와 상식조차 지키지 않는 교회가 부끄러워서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 청년들에게 자랑스러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에 다니는 것이 자랑스럽다, 적어도 우리 교회는 상식을 뛰어넘어 이웃들에게 감동을 주고 세상을 섬기는 교회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되어야 청년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 일은 바로 오늘 우리의 몫이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이삭의 행동이 잘못된 결정적 이유는 세상 사람들의 상식에조차 미치지 못하는 약속 파괴를 자기 스스로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본적인 합의는 지키고, 그것을 뛰어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순종이 빚어낸 백배의 복
그런데 이런 이삭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또 한 번 우리의 상식을 벗어납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창 26:12-13)
하나님이 이삭을 징계하셔야 합니다. 불신자를 시험에 들게 하고 약속을 파괴했으니 마땅히 꾸짖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하나님은 오히려 이삭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백배나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은 살다 보면 죄를 짓습니다. 거짓말도 하고,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삶을 살 때도 있고, 이런저런 이유로 온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삭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에게 한 가지 귀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을 때, 아직 흉년이 끝나지도 않았고 기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삭은 굶어 죽을 각오를 하고 그 땅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순종시킨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삭의 직업은 목축업이었습니다. 양 떼와 소 떼를 기르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목초지를 찾아 내려오다가 블레셋 땅까지 이른 것입니다. 한 번도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땅에 머물라 하시니, 양과 소를 먹일 목초지는 없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농사뿐인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삭은 먹고 살기 위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우리 같으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평생 목축업만 했지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 땅은 낯선 땅이고, 어떤 씨앗을 뿌려야 할지 토양도 모릅니다. 게다가 기근입니다. 어떻게 농사를 짓겠습니까? 차라리 애굽으로 가겠습니다." 아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 땅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순종해 보려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농사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아홉 가지, 열 가지를 다 잘못해도, 하나님 앞에 딱 한 가지 — 그 자리에 머물고,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버텨 보려고 농사를 지은 그 순종을 하나님은 귀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백배의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복의 근원이 누구이십니까? 성경은 명확하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고 기록합니다. 이삭은 초보 농부였습니다. 한 번도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잘해서 농사를 지어서 백배의 복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명확하게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 67:6-7)
땅이 소산을 내어 주지만,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복을 받는 길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해 환경이 중요하다고, 실력이 필요하다고, 갖춰야 할 것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 앞에 철저히 순종하고,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굳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흉년에도, 기근에도 백배 넘치는 복을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물질이라는 우상 앞에 선 사람들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창 26:14-15)
블레셋 사람들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파괴하는 결정적 계기가 생겼으니, 바로 이삭이 부자가 된 이후였습니다. 이삭이 도둑질을 해서 부자가 되었습니까? 남의 밭에서 물건을 가져다가 백배의 복을 얻었습니까? 이삭이 부자 된 것과 그들의 재산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기심이 일었습니다. 기근에 자기들은 다 망해가는데, 굴러 들어온 이방인 이삭이 백배의 복을 얻었으니 화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실력 행사에 나섰습니다. 우물을 메워 버렸습니다. 떠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토록 신사적이었던 그 곳 사람들이 이렇게 무섭게 변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불신자들에게, 그 곳 사람들에게 물질이 곧 우상이었습니다. 나보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 나보다 형편없는 실력인데도 성공하는 사람을 보면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이 그들의 본모습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2차 선교 여행 때 빌립보성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여종은 귀신의 힘을 빌려 점을 쳤고, 사람들이 찾아와서 돈을 주면 그 돈은 모두 여종의 주인에게 돌아갔습니다. 주인은 자기 여종이 귀신 들려 점을 치니 앉아서 큰 부를 쌓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여인을 보니 불쌍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 버렸습니다. 여인은 자유로워졌지만, 이 여인의 주인은 그때부터 돈을 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주인은 바울과 실라를 고발해 버렸습니다.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행 16:19-21)
이런 명분으로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결국 이들에게도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돈이 우상이었습니다. 여종의 귀신이 떠나간 것은 축복이니 감사해야 마땅한데, 물질이 우상이니 오히려 은인을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그 곳 사람들이 물질을 우상으로 섬긴다고 지적하지만, 사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자신이 있습니까? 우리도 맘몬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이라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헌금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헌금의 액수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 저는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이 고백을 우리가 헌금으로, 예물로, 물질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물질에 매여 살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
그 곳 사람들은 상식대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 상식을 뛰어넘어 세상에 감동을 주는 인생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곳 사람들은 물질에 매여 살았습니다. 우리는 물질이 아닌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믿음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상식조차 지키지 못하는 교회가 아니라, 상식 위에 집을 짓고 그것을 넘어서는 은혜를 베푸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삭의 실패에서 깊이 배우고, 이삭의 순종에서 힘을 얻어, 오늘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 곳 사람들, 블레셋 사람들, 이방인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상식을 잘 지키는 신사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상식을 파괴하는 미련한 자가 되지 않도록 도우시고, 오히려 그 상식을 뛰어넘어 감동을 주는 그리스도인, 감동을 주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는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 곳 사람들은 물질이 우상이고 오직 물질이라면 어떤 행동도 서슴치 않는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돈을 뛰어넘어, 물질을 뛰어넘어, 하나님만 섬기는 백성으로 온전히 우리를 하나님 앞에 드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