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강 / 복을 받은 자 (26:23-33)

복을 받은 자

본문: 창세기 26:23-33

지난 4월 28일,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백낙선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1967년 마산 합포구에서 신신예식장을 개업하여 55년 동안 운영하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무려 만 4천여 쌍에게 무료 결혼식을 선물하신 분입니다. 지독하게 가난한 집에서 나고 자라 가진 것이라곤 사진 기술밖에 없었는데, 그 기술 하나로 길거리 사진사로 떠돌다가 31세에 아내를 만났습니다. 그 아내를 깊이 사랑했는데, 면사포 한 번 씌워주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되어 '나는 돈을 벌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웨딩드레스와 멋진 턱시도를 입혀 결혼시켜주고 싶다'는 소원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소원을 55년 동안 4천 쌍에게 이루어 주며 사셨습니다. 이렇게 긴 세월 동안 선행을 베푸니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각종 방송과 언론에서 그를 취재했고, 2019년에는 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사진값도 받지 않고 웨딩드레스, 턱시도, 신부 화장까지 모든 것을 무료로 제공하셨습니다. 이분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참 복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받은 복을 나누며 살았더니, 그 나눈 복이 결국 나에게 또 다른 복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오복을 가지고 태어나서 복 받으며 살다가, 이제 살 만큼 살고 세상을 떠나니 호상입니다. 그러니 슬퍼하지 마시고 웃음꽃 피우시며 경사스럽게 장례를 치러 주십시오." 그리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사실 이 말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인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정말 큰 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복 중에 가장 큰 복, 구원의 은총을 입은 자들입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복입니다.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장 큰 구원이라는 복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이 복에 겨워 사는 인생, 이 복을 흘려보내지 않고 나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복을 흘리고 나누고 베풀면, 다른 데 가지 않고 다시 우리에게 그대로 되돌아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설계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삭 이야기가 바로 그 사실, 그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삭은 블레셋 지방 그랄에 가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한 해에 백 배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합니다.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그의 우물을 메워버렸습니다. 아비멜렉이 그를 찾아와서 "이제 네가 강성하니 우리를 떠나라"고 합니다.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랄 골짜기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삭에게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미 그곳에 옛날 우물을 파둔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삭은 그 장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 우물을 파서 다시 가족과 함께 삽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그것마저도 빼앗습니다. 그것 때문에 세 번이나 옮겨야만 했습니다. 르호봇에 이르러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넓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곳에 와서야 그들의 침탈이, 침략이, 그들의 심술이 멈춥니다. 이제 평안을 찾았습니다. 더 이상 분쟁하지 않습니다. 걱정이 없습니다.

에셀나무의 기억

그 후에 이삭이 하나님 앞에 올라갑니다.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창 26:23)

이삭이 브엘세바로 간 것은 예배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창 26:24-25)

그 옛날 아버지 아브라함도 블레셋 지경에서 이삭과 비슷한 인생을 산 적이 있습니다. 거기 와서 살았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괴롭힙니다. 우물을 그냥 빼앗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에게 항의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더 이상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고, 맹세의 우물 브엘세바에서 함께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거기서 아브라함이 한 가지 의미 있는 행동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창 21:33)

아브라함이 기념식수를 했습니다. 그곳에서 맹세의 우물, 브엘세바라고 조약을 맺고 거기서 나무 한 그루를 심었는데, 그 나무가 에셀나무입니다. 에셀이라는 이름은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셨다는 고백입니다. 아브라함이 그곳에 혈육 하나 없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이 그곳에서 도움받을 한 사람도 없었는데, 하나님이 그를 도우시고 함께 하셔서 역사하셔서, 거기서 살게 하시고 아무런 문제 없이 일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감사하고 고마워서 아브라함은 거기서 에셀나무 한 그루를 심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에셀나무를 심은 이유는 또 다른 데 있습니다. 나무의 특징 때문입니다. 이 나무는 잘 자랍니다. 위로가 아니라 아래로 잘 자라는 나무입니다. 사막에서 살기에 적합한 나무인데, 뿌리가 30미터 이상이나 내려가는 나무입니다. 사막에는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건조합니다. 그런데 이 나무가 사막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은 뿌리에 있습니다. 견고한 뿌리가 밑으로 밑으로, 땅으로 땅으로 파고 내려가고 또 내려가서, 거기에서 물줄기를 만나 그곳에서부터 물을 빨아올려 생명력을 유지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나무를 심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여기는 풀 한 포기 없는 사막 같은 땅이다. 누구도 나를 돕지 못하고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는 이 땅에서 내가 살아갈 힘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밖에 없다. 내 인생의 뿌리가 하나님 말씀에 닿아 있지 않으면, 저 깊은 곳으로 뿌리를 내리고 또 내려가서 그곳에서부터 하나님 말씀을 길어 올리지 않으면 나는 살 수가 없다.' 이러한 신앙의 고백이 바로 에셀나무 아니겠습니까?

이건 나뿐 아니라 오고 오는 내 후손들, 내 자녀들, 모든 자손들에게도 함께 해당되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내가 에셀나무를 심는 것은 내 아들 이삭도, 그리고 그 자손도, 그 자손의 자손도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라.' 그런 마음으로 그가 에셀나무를 심었을 것입니다.

이제 시간이 한참 지난 후입니다. 이삭이 어릴 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지 따라다니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뛸 때, 그 어릴 때는 의미를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가는 곳에서 우물을 팝니다. 그러면 이삭도 함께 뛰어다니며 우물을 팝니다. 새 샘이 솟아오릅니다. 아버지가 그 샘의 이름을 불러줍니다. 그러면 같은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땅을 파고 나무를 심습니다. 이 나무의 이름과 나무에 얽힌 이유와 나무를 심는 이유까지 아버지가 들려줍니다. 이삭은 이제서야 그 나무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고 되새깁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한참 시간이 지난 이후에 이삭이 그곳에 갔습니다. 아버지와 아비멜렉이 함께 언약을 세웠던 브엘세바, 그곳에 가보니 그때 아버지와 함께 심었던 나무 한 그루, 에셀나무가 여전히 거기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그 땅은 사막인데, 누구도 돕는 사람이 없는데,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거기에 그 나무는 여전히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나무가 살아있는 이유는 나무의 뿌리가 저 깊은 곳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아마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가 이 귀한 교훈을 나에게 주시는구나.'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립니다. '하나님, 저도 여기에서 하나님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고 살겠습니다.' 이 결단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더 놀라운 사실은 지금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 시절은 성막 시절이 아닙니다. 성전 시절도 아닙니다. 성막도 없고 성전도 없는 시절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모 세대로부터 자녀 세대로 믿음이 전승되고 내려가는 유일한 한 가지 방법, 바로 예배의 자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부모가 예배드린 것이 그 자녀에게 기억되고, 그 자녀의 예배는 그 자손들에게도 흘러가고 흘러가고 내려갑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믿음의 전승을 일깨워주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런 예배 DNA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시 125:1-2)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어가 여기에 붙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나라가 망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포로 후기쯤 되니 느슨해집니다. 이제 그들이 그 옛날 자기 할아버지와 자기 아버지와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그곳으로 올라가서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감시가 느슨해지고, 그들의 핍박이 느슨해지는 틈이 생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옛날 성전을 기억하며 올라옵니다. 시온산이 그대로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도 그대로 있습니다. 산은 변함이 없습니다. 산천도 변함이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은 불타 없어졌습니다. 남유다가 망할 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와서 성전을 다 불태워 버렸습니다. 성전에 있는 그릇과 보물을 다 훔쳐 가버리고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올라오는 것입니까? 왜 그들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이름 지은 것입니까? 성전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가족들과 함께 예배드렸던 그 예배의 기억, 그 예배의 기억이 강렬하고 뜨거웠고 간절해서,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에도 그 예배의 자리가 생각나서 견딜 수 없어서, 성전에 올라와서 그 터라도 한번 보려고,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 터를 보기 위해서 그 자리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전승 가운데, 전통 가운데, 공동체성으로 흘러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부모가 자녀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유산이 무엇입니까? 썩어 없어지고 써버리면 없어질 물질, 돈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하나님과 함께 살았던 그 기억', 예배의 기억이 가장 소중한 유산 아니겠습니까? 흘러가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에셀나무의 기억,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살아가면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견디고 살 수 있다는 에셀나무의 기억, 예배의 자리의 기억이 오늘 우리 자손들, 우리 후손들에게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우리가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이 귀한 기억을 물려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복을 받은 자의 삶

이삭은 그 자리에 서서 아버지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이제 나도 앞으로 여기에서 에셀나무처럼 믿음의 뿌리 잘 내리며 살겠다'고 결단했을 것입니다. 그가 브엘세바에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동안, 일단의 무리가 그를 찾아옵니다.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창 26:26)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그 친구와 군대 장관이 이삭을 찾아왔습니다. 이들이 왜 찾아온 것일까요? 사실 악연 아닙니까? 아비멜렉은 불과 얼마 전에 이삭에게 "네가 강성하니 이제 이곳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우물을 흙으로 메워버렸습니다. 우물도 여러 번 빼앗았습니다. 이사도 세 번이나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찾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 빼앗기 위해서, 이제는 생명을 빼앗기 위해서, 물질을 빼앗기 위해서 온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창 26:28)

계약을 맺자, 언약을 맺자고 말합니다. 뻔뻔하지 않습니까? 만약 우리가 이삭이었다면, 이 자리에서 "네, 계약을 맺읍시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한번 여기 앉아보십시오. 종이 한번 가져와 보십시오. 지금까지 당신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 한번 다 적어봅시다. 따져봅시다.'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염치가 있다면, 낯이 있다면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옵니까?' 이런 말을 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더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합니다.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창 26:29)

성경에 나오는 여러 말 중에 가장 기가 막힌 말입니다.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평안히 가게 하였다." 이런 새빨간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거짓말도 이 정도 되면 이분의 정신상태가 의심이 될 정도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우물은 생존 아닙니까? 그 우물을 빼앗고, 그 우물을 흙으로 메워버리고 돌을 집어넣어 버리고,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그렇게 했다는 것은 이삭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삭이 물 근원을 찾아서 우물을 팔 때마다 우물이 나와서 그렇지, 그렇지 않으면 이삭과 그의 가족들과 그에게 딸린 식구들, 그 짐승들까지 그냥 다 죽는 것입니다. 이삭을 죽이려고 그렇게 한 것 아닙니까? 여기서 그냥 떠나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온 식구들과 심지어 짐승들까지 그렇게 해놓고서는 "우리가 너에게 선한 일만 행하여"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말이 감히 나올 수 있습니까?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한 모든 말이 다 거짓말인데, 딱 한 가지 진실이 있습니다. 그 진실이 무엇입니까?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로다." 이 한마디는 진실입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삭은 미스터리한 인물입니다. 도무지 이삭을 아무리 그들의 논리로 이해해보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되는 인물입니다. 세 가지 정도가 이해가 안 됩니다.

첫째, 초보 농부가 그 땅의 토질과 지형 같은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농부가 농사를 지었는데, 그 해에 백 배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고, 이건 도무지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둘째, 땅을 팔 때마다 우물이 나옵니다. 자기들은 아무리 땅을 파도 우물이 나오지 않는데, 이삭은 땅을 파기만 하면 우물이 터져 나옵니다. 이것도 이해가 안 됩니다.

셋째, 아무리 빼앗아도 다투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시비를 붙어도 싸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자기 논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 블레셋 수뇌부들이 모여서 회의도 여러 번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의 정체가 뭐냐?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느냐? 농사면 농사, 우물이면 우물,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싸우지도 않고,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 이들이 내린 결론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삭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다.' 이삭이 섬기는 신이 있는데, 그 신의 이름이 여호와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그것 아니면 이건 우리의 논리로는 해석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해서 이들이 이 이야기를 들려준 것입니다.

이런 블레셋 사람들 같은 존재가 지금은 우리 주변에 없겠습니까? 지금은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만나지 않습니까?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습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지독하게 모질게 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짓밟아 버립니다. 들개처럼 달려들어서,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서 물어뜯고 다 가져가 버리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강한 자들에게는 비굴하리만큼 비겁하게 굽니다. 비겁하게 자기 속을 다 보여주면서까지, 조그만 것 하나라도 돈이 있는 사람, 권력이 있는 사람, 권세가 있는 사람 앞에 붙어서 무엇이라도 가져가고 뜯어내고 얻어내려고 하는 블레셋 같은 사람들, 거짓말하기를 손바닥 뒤집듯이 하는 사람들, 이 정도 거짓말은 거의 거짓말 축에도 들지 않도록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부화뇌동하는 사람들, 여기에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사람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시험에 들지 않습니까? 화가 나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 때문에 내가 시험에 들고, 그 사람 때문에 당한 것이 억울하고, 이해가 안 되고, 고통스럽고, 이 고통을 어디다가 하소연할 데도 없고 풀어낼 데도 없어 화병이 납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성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그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3년 기간 동안 오직 한 가지만 하셨습니다. 십자가 길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냥 십자가 길만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아첨꾼들도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붙어서 입방정을 떨기도 하고, 예수님에게 교언영색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말로 예수님을 띄워주기도 했습니다.

벳세다 들판에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사건을 행하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여자, 노인, 어린아이까지 하면 2만 명, 3만 명이 넘는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이 먹이셨습니다. 사람들이 거기에 열광하지 않겠습니까? '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면, 임금으로 세우면 우리는 적어도 먹고사는 것은 걱정이 없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일절 반응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요 6:11, 15)

"그들의 원대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배고픈 자들에게 물고기도 원대로 주시고, 떡도 원대로 주셨습니다. 이러니 이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임금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으로 그냥 피해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띄워주고 "당신이 임금이 되셔야 됩니다" 해도 예수님은 거기에 일절 반응하지 않습니다. 주변의 수많은 아첨꾼들이 입방정을 떨어도 예수님은 거기에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야 될 길이 십자가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변합니까?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주니라" (요 19:15-16)

언제는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하더니, 이제는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습니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자들이 이제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시험에 들 만하지 않습니까? 따져 묻고 싶지 않겠습니까? '너희들 어떻게 그렇게 한 입으로 두말하니? 어떻게 그렇게 새빨간 거짓말하고 살아가니?' 불러다가 예수님이 호통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어떤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주님이 걸어가셔야 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기 때문에, 그런 자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주님은 그냥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의 시험거리들이 있습니다. 블레셋 같은 존재들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힘들게 하지만, 우리는 그저 우리의 길을 걸어가면 됩니다. 믿음생활을 그냥 올곧게 하면 됩니다.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십자가 붙들고 그 길을 그냥 걸어가시면 됩니다. 때로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칭찬받기도 하고, 존경받기도 하고, 우리 마음이 교만에 들뜨도록 사람들이 수많은 말로 우리를 띄워내기도 하지만, 거기에도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주께서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오해를 받아서 돌팔매질을 당하기도 하고, 많은 오해 때문에 힘겨운 길을 걷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우리는 맡은 사명 감당하며 걸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삭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창 26:30-31)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오히려 "여기 한번 앉아봐" 하고 따져 묻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너희들 새빨간 거짓말을 하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맛있는 것 대접하고 평안히 보내주었습니다. 이삭이 딱 한마디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로다."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복이란 복은 다 주시고, 구원의 복도 주시고, 은혜도 주셨는데,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다 누리고 있는 내가, 구원받지 못해서 그저 남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저 블레셋 사람들과 다투어서 무엇하겠는가. 이것이 그에게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냥 잔치를 베풀고 많은 먹을 것을 베풀고 평안히 보내줍니다. 맹세 언약도 해주고 그랬더니, 생각하지 않았던 놀라운 은혜가 부어집니다.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창 26:32)

우물이 또 터졌습니다. 바로 그날, 그가 은혜를 베푼 그날, 원수 갚지 않고 오히려 은혜를 베풀어준 그날, 이삭의 종들이 다시 우물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베풀면 다른 데 가지 않고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한 자 아닙니까? 원천을 가진 자들 아닙니까? 근원을 가지고 있고, 세상 전부를 다 가진 구원받은 백성들입니다. 자그마한 것 때문에 다툼하지 말고, 그런 블레셋 같은 사람들 때문에 힘겨워하지 말고, 넓은 마음으로 그들을 끌어안고, 우리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나누고 베풀고 살아가면,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다시 우리 인생에 생수가 터지게 하시고 샘물을 샘솟게 하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에 에셀나무를 심고 싶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믿음의 깊은 뿌리가 내려가서, 아무리 우리 주변 환경이 사막같이 황폐하다 할지라도 그 깊은 곳에서 믿음의 샘물을 길어 올리는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로 자라게 하시고, 우리 부모가 모범을 보이게 하옵소서. 황폐한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영접하고, 그 말씀으로부터 살아갈 수 있는 귀한 능력과 지혜와 은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은 블레셋 사람 같습니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비겁한 세상, 이런저런 일로 우리를 시험 들게 하는 사람들, 그러나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삭처럼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우리는 원천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한 자들이고, 구원받은 은혜가 있는 자들입니다. 그 구원의 은혜를 헛되이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오히려 베풀고 나누고 품어주고 이해하는 마음 넓은 백성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때 하나님께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우리 인생의 생수를 다시 부어주실 줄로 믿사오니, 인생의 샘물이 가는 곳마다 터져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