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강 / 내가 즐기는 별미 (26:34-27:4)

내가 즐기는 별미

본문: 창세기 26:34-27:4

요즘 사람들은 사이버 세상에서 챗GPT를 많이 사용합니다. 챗GPT는 사이버 세상을 평정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분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제 우리는 끝났다, 인간의 일자리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은 오히려 이런 기회를 통해서 우리가 지금껏 누리지 못했던 유토피아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챗GPT는 오픈AI라는 회사가 새롭게 개발한 대화형 인공지능 챗봇으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창의적이고 특별하며 독특합니다. 과거 40여 년 전에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30여 년 전에 개인용 PC가 각 가정마다 보급되었을 때, 2007년도에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내놓았을 때, 그때 느꼈던 충격에 버금가는 충격이 지금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아도 이것을 사용하려면 질문을 해야 합니다. 질문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제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초중고 학교 교실에서, 대학교 강의실에서 질문하는 학생들은 무언가를 좀 아는 학생들입니다. 학습 내용에 대해서 선행이 되어 있어야 하고, 그 내용을 숙지하고 있어야 선생님과 주고받으며 질문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면 던져주는 수업을 따라가기에 바쁠 텐데, 물어보고 싶어도 물어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챗GPT도 마찬가지로 질문거리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나오는 답이 훨씬 더 다양하고 깊이 있습니다.

제가 창을 열고 세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첫 번째,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어떤 분이신가?"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서 알려주었습니다. 30초도 안 되어 깨끗하고 깔끔하게 정리해서 보여줍니다. 두 번째 질문, "언더우드 선교사와 새문안교회 관계에 대해서 알려달라." 그것도 역시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세 번째 질문,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를 비교해 달라." 그것도 일목요연하게 군더더기 없이 깨끗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언더우드 선교사에 대해서 보여달라"고 할 때는 아펜젤러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질문하기 나름입니다.

사실 이렇게 질문하려면 뭔가 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에 대해서만 알려달라고 하는 것과 새문안교회와의 관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다릅니다. 언더우드가 새문안교회를 세웠다는 사실, 1885년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인천 제물포항에 함께 이 나라 이 땅에 최초의 선교사로 들어왔다는 사실, 그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질문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챗GPT를 사용하려고 해도 무엇을 좀 제대로 알아야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는 자의 비극

신앙생활도 역시 그렇습니다. 궁극적으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묻고, 이해가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여쭈고, 내 인생에서 도무지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하나님께 따져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묻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심각합니다. 잘 몰라서 묻지 않고, 별 필요가 없어서 묻지 않고, 혹은 자기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서 꼭 필요한 질문을 그냥 삼켜버리고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이삭이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자기 욕심에 가득 차서 하나님께 꼭 물어야 하는데 질문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믿음의 계승을 아주 완벽하게 잘 이루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 생활을 훌륭하게 했고, 그 아들 이삭도 믿음 생활을 아주 잘했습니다. 아버지의 믿음이 아들에게로 그대로 잘 계승되고 흘러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삭에서 에서로 넘어가는 과정입니다. 에서에게는 문제가 참 많았습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창 26:34-35)

에서가 40세에 결혼을 합니다. 이삭도 40세에 결혼했는데 자기 아버지가 결혼한 나이와 똑같은 나이에 결혼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의 원리를 한꺼번에 깨뜨려 버립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의 원리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를 보면 한 번에 두 여자와 결혼합니다. 결혼과 동시에 가정이 파탄 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런 결혼을 어떻게 상상한 것인지, 심각한 문제가 벌어진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가정의 영적 정통성을 그냥 무시해 버렸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 그 아들 자기 아버지 이삭까지는 그 땅에서,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에 그냥 일반적인 가정이 아닙니다. 열국의 아비요, 열국의 어미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사라가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이 그것 때문에 자기 아들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 잘 믿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사람을 저 먼 곳 밧단아람 하란까지 보낸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까지 사랑하는 아들의 아내감을 열심히 찾고 또 구했습니다.

에서가 정말 그 가정에 영적인 정통성을 그대로 이어받을 적장자였다면 자기는 이런 식으로 결혼하면 곤란합니다. 가정의 영적인 정통성을 한꺼번에 깨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에서가 도대체 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요? 나이가 적으면 철이 없다고 할 텐데, 도대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주 강한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해도 아버지는 나에게 장자권을 물려주실 것이라는 자신감, 내가 사냥하는 고기를 아버지께 가져다 드리면 아버지는 그것을 좋아하신다, 장자권을 팔아먹어도 아버지는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고, 결혼을 이런 식으로 해도 아버지는 나에게 장자권을 물려줄 것이라는 자신감이 그에게 내재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 이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에서는 그냥 자기 닥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갑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도 팔아버린 망령된 사람이었고, 결혼하자마자 가정을 위기에 빠뜨렸고, 자기 가정의 영적인 정통성도 그냥 한 번에 무시해 버렸습니다.

부모의 책임, 자녀의 책임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궁금증이 들지 않습니까? 보통 믿음의 가정에서 부모가 신앙생활을 잘 하면 그 자녀도 믿음을 잘 이어받는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했는데,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 믿음의 정통성을 잘 계승했는데 에서는 도대체 왜 이런 것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된 것입니까?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자녀가 나고, 악한 부모 밑에서 당연히 악한 자녀가 날 줄로 생각했는데 이 원리가 왜 이렇게 꼬이는 것입니까?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겔 18:2-3)

에스겔 선지자는 남유다가 망하고 나서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그 당시 포로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패배의식이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의 잘못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 우리 할아버지들의 잘못 때문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 부모가 신 포도를 먹어서 이가 시기 때문에 우리도 지금 이가 시린 상태에 처해 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상식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부모의 이가 시다고 너희 이가 시겠느냐? 거꾸로 말하면 부모가 믿음 생활 잘했다고 해서 어떻게 너희 자식들이 믿음 생활을 잘한다고 보장할 수 있겠느냐? 그런 생각을 걷어내라고 말씀합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겔 18:20)

무슨 말입니까? 자기 행한 대로 복 받을 사람은 복 받고 벌 받을 사람은 벌 받는다는 말 아닙니까? 이삭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 생활 잘했으면 그 자체로 하나님 앞에 상을 받을 것입니다. 에서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저질렀으면 그는 자기 저지른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삭과 리브가가 부모 된 책임을 다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부모 된 책임을 다했습니까?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이삭과 리브가는 걱정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근심했다고 말합니다. 아들 에서가 그들에게는 근심거리였습니다.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을 불러 앉혀놓고 책망했다는 말을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아들을 불러놓고 "내가 들으니 너 동생한테 장자권 팔아먹었다며? 팥죽 한 그릇에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거룩한 권리인 장자권을 네가 팔아치웠다며?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할 일이냐?" 한 번이라도 부모가 자식을 불러놓고 초달하고 책망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걱정만 합니다.

이런 식으로 결혼을 하고 한 번에 두 여자를 데려다가 이방 여인을 데려다가 결혼 생활을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아들 에서를 불러다가 책망하지 않습니다. 걱정만 하고 있습니다. 부모 된 책임을 다한 것입니까? 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 부모 된 책임을 다하지 않은 책임, 그것은 이삭과 리브가가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책임을 다하고, 성실하게 울타리를 치고, 때로는 기다려 주기도 하고, 때로는 책망도 하고, 때로는 걱정도 하고, 때로는 부여잡고 함께 울기도 하고, 그렇게 아들을 길렀어야 하는데 한 발짝 물러서서 걱정만 하고 있으니, 이것은 그들이 짊어져야 할 문제 아니겠습니까?

영안이 어두워진 이삭

그렇다면 이삭은 도대체 왜 그렇게 행동한 것일까요?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창 27:1)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이 표현은 중의적인 표현입니다. 첫째는 진짜 나이가 들어서 기력이 쇠해서 시력이 나빠졌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두 번째는 영안이 어두워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삭의 경우는 후자가 더 강력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창 27:2-4)

사실 저는 이 말씀이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삭의 삶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충격적인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이삭 일생에 이보다도 부끄러운 말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서 가져와라" 여기까지는 부모로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에서는 타고난 사냥꾼 아닙니까? 너의 그 사냥의 기술을 발휘해서 내가 좋아하는 사냥감을 잡아 와서 별미를 만들어서 갖고 와라. 부모가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평생 동안 입히고 먹이고 돌보고 키워줬는데, 부모에게 용돈 가져와라, 부모가 당연히 이런 말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내가 먹고 너를 마음껏 축복하게 하라." 이 말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그 아들 이삭에게도 축복의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가 아들을 축복하면 그 축복의 권한이, 장자에 대한 권한이 그대로 흘러내려 가도록 그 좋은 특권을 주셨습니다. 위대한 특권 아닙니까? 그리고 이 일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대를 이어 이삭, 이삭의 대를 이어 그다음, 그 가정의 영적 주도권을 이어갈 영적 리더를 세우는 과정입니다. 이보다도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중요한 일을 자신의 욕망 덩어리인 "내가 즐기는 별미" 그 아래에다가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삭은 고기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사냥한 고기 때문에 에서를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내가 즐기는 별미를 먹기 위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적 사역을 그 아래에다가 종속시키는 것, 이것이 수치스럽고 이것이 부끄럽고 우리가 볼 때도 황당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돌아보면 지금 이 시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정치인들 한번 보십시오.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을 시민들이 뽑아서 국회로 보냈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이 나라를 위해서 일해 주십시오. 국민들의 세금으로 그들을 먹이고 입힙니다. 섬겨줍니다. 그렇게 보냈더니 이해충돌 방지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일반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정보를 가지고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고 있습니다.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 덩어리인 "내가 즐기는 별미"를 가장 최상에 놓고, 국민을 위해서 일해야 할 그 일을 "내가 즐기는 별미"를 먹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자들을 보면 우리 국민들이 화가 납니다. 그 사람들을 뽑아서 국회로 보낸 내가 더 부끄럽습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욕망을 세우기 위해서 교회를 이용해 먹는다면 하나님이 가만히 두고 보시겠습니까? 성도들이 실망하고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교회를 이용하고 함께 동역하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이용해 먹으려면 이삭 같은 사람 아닙니까? 이삭은 "내가 즐기는 별미"가 자기 인생의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믿음의 동역자를 세우고 자기 가정에 영적 계승을 이루어 가는 일은 "내가 즐기는 별미"보다 그 아래에 있는 하위 개념이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이삭에게는 아주 수치스럽고 말년에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확증 편향에 빠진 이삭

그러면 질문해 봐야 합니다. 이삭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질문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 에서가 맞습니까? 에서가 정말 이 가정에 영적 주도권을 이어갈 영적 장자가 맞습니까? 우리 가정에 장남으로 태어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이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도 합당합니까? 이 아들에게 안수해도 됩니까? 이 아들을 세워도 됩니까?" 하나님께 물어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묻지 않습니다. 단 한 번도 묻지 않습니다. 불러다가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와라, 그러면 너에게 마음껏 축복하마."

그런데 왜 그렇게 안 했을까요? 이삭이 이렇게 한 것은 확증 편향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확증 편향이라고 부릅니다. 답을 하나 딱 가지고 있으면 다른 것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답을 정해 놓으면 누가 옆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도 하나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확증 편향입니다. 증거가 차고 넘쳐나는데, 그게 아닌 증거가 수십 가지 수백 가지가 되는데도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니까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미 태평양함대 제독이었던 킴멜 장군은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전선이 여러 군데 있었습니다. 일본이 저렇게 동아시아에서 싸운다고 분주한데 비행기를 띄워서 바다 건너까지 와서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할 것이다, 폭격할 것이다, 그것은 넌센스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신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보다 두 달 전부터 증거가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첩보가 들어옵니다. 무시했습니다. 부하들이 보고하는데 그럴 일이 없다고 들여다보지도 않았습니다. 2주 전, 그때는 그 첩보가 구체화됩니다. 아주 믿을 만한 증거들이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 회의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를 가지고 이것이 정말 제대로 된 것인지 한번 검증해 보자, 테이블을 열지도 않았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이 시작되고 미국 7개의 군함 중에 5개가 박살났습니다. 비행기 200대가 파괴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넋 놓고 있다가 킴멜 제독의 그릇된 확증 편향 때문에, 자기가 옳다고 믿고 있으니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그냥 옳다고 믿으니까 누가 말해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단 한 번 회의라도 했더라면, 증거를 가지고 한번 검증이라도 해봤더라면 그렇게 꽃다운 젊은이들이 죽어가지 않았을 텐데,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이삭도 그렇지 않습니까? 차고 넘칩니다. 에서가 영적인 계승자가 아닌 증거가. 장자권을 팔아먹었지요. 가정을 엉망으로 세워 가지고, 이삭 빼고 다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확신하고 있으니까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즐기는 별미"가 단단한 반석이 되어서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뚫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질문하는 삶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즐기는 별미는 무엇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릇된 확증 편향 때문에 믿음 생활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깨뜨리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기도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입을 열어 기도하고, "하나님 그것 깨게 해달라"고 하고, 그래야 인생이 새로워집니다. 모든 것을 무전제로 놓고 하나님 앞에 끝까지 물어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질문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선교 여행을 앞두고 에베소에 가고 싶었습니다. 에베소는 그 당시에 최고로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거기에서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전 세계로 복음이 뻗어 나갈 것 같았습니다. 그리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전제 없이, 자기 확증 편향 없이,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합니다. 에베소가 아니라 유럽으로 가라고 합니다. 당황했습니다. 유럽에 선교 기지가 없습니다. 그냥 유럽으로 가라고 합니다. 마게도냐로 건너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합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행 16:9-10)

바울이 얼마나 인간성이 강한 사람입니까? 고집쟁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어떤 고집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질문한 것입니다. "하나님 이것 해도 됩니까? 이리로 갈까요?" 질문하니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의 인생이 유연하고 부드러워졌습니다. 우리 인생도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삭을 보면서 우리는 슬퍼집니다. 이삭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과 모리아 산에 올랐습니다. 그랄 땅에 거하면서 초보 농부가 농사지어서 한 해에 백 배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파서, 팔 때마다 물이 나왔습니다. 샘의 근원을 얻었던 인물입니다. 아버지가 심은 에셀 나무에 가서 하나님께 결단하고 거기에 브엘세바라고 다시 이름 지었던 인물입니다.

그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노후에, 말년에 영안이 어두워져서 이렇게 되는 것을 보고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하나님 나라 가는 그날까지 끝까지 우리는 믿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기도를 쉬면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 가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기도하고 묻고 또 묻고, 믿음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히 13:7)

끝까지 충성하라는 말 아닙니까?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부디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충성된 종으로, 하나님께 질문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서,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 믿음의 후손들에게 그 선한 영향력을 보내주고 흘려보내는 하나님의 자녀,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이삭처럼 되지 않기 원합니다. "내가 즐기는 별미" 그것 붙들고 있다가 그릇되고 거짓된 확증 편향에 빠져 살다가,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잃어버리고 놓치고 살아갔던 어리석은 이삭처럼 살지 않겠습니다. 주여, 우리 입을 열어 기도하기 원하오니, 주의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옵소서. 그 어떤 것이라도 전제 없이 하나님 아버지께 묻고 또 묻고 또 구하고 기도하기 원하오니, 기도하는 주의 자녀들에게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나이가 들어가고 시간이 가면서 영안이 흐려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눈을 더 크게 들어 세상을 바라보고 아버지를 바라보게 하옵시고, 우리의 믿음의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고 선한 결정의 지혜로움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