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강 /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27:24-36)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본문: 창세기 27:24-36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단거리 육상 선수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우사인 볼트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불과 십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같은 질문에 사람들은 칼 루이스라는 이름을 말했습니다. 칼 루이스는 탁월하고 위대한 육상 선수였습니다. 그는 1984년 LA 올림픽 육상 4관왕이었습니다. 100m, 200m, 400m 계주, 멀리뛰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4년 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100m와 멀리뛰기 금메달을 땄습니다. 또 4년 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400m 계주와 멀리뛰기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도 멀리뛰기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는 총 네 번의 올림픽에서 아홉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멀리뛰기에서는 올림픽 4연패를 달성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칼 루이스가 올림픽에 나간다고 하면 당연히 금메달 몇 개쯤은 따올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칼 루이스는 펄쩍 뛰었습니다. 그는 TV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올림픽에 나오는 사람은 모두가 재능이 출중한 천재들입니다. 거기에서 메달을 따고 못 따고 하는 것은 누가 더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고, 당일 컨디션에도 달려 있습니다." 그는 화를 내며 반문했습니다. "칼 루이스가 올림픽에 나가면 당연히 금메달 딴다는 건 누가 한 말입니까?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살면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 그것이 당연하지 않을 때가 곧 다가옵니다. 지금 우리는 밥 먹고 생활하고 걷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걷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 때가 다가옵니다. 걷는 것이 불편하고 힘든 시기가 머지않아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불과 몇십 년 안에 식사를 하고 소화시키기 어려울 때가 다가오지 않겠습니까?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 그러나 세상에 당연한 것은 우리 인생에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 에서가 나옵니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권을 부여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그가 사냥한 고기를 아버지께 가져다 드리면, 그는 아버지의 맏아들이자 장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장자권을 부여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당연한 것은 없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혹시 나도 에서 같은 착각을 하고 사는 건 아닌지, 혹시 우리도 에서와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사냥한 고기로 복을 얻으려 한 이삭과 에서

이삭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에서인지 야곱인지 분별하지 못합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즐기는 별미를 위해서 너는 고기를 잡아 사냥하고 별미를 만들어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너를 마음껏 축복하겠다고 했습니다. 에서가 이 말을 듣고 사냥하러 밖에 나갔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리브가가 야곱을 부추겨 아버지에게 축복받으러 왔습니다. 이삭은 리브가와 야곱이 이 일에 개입되어 있는 것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리브가가 급하게 염소 요리를 해서 이삭에게 갖다 줍니다. 야곱은 형의 털옷을 입고 아버지 앞에 섰습니다.

"이삭이 이르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창 27:25)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창 27:27)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가 마음껏 너를 축복하겠다." 이삭의 이 말은 상당히 이교도적이고 불신앙적이며,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에도 반대되고 어긋나는 말입니다. 이교도의 사제들이 사람들을 어떻게 미혹합니까? "금덩어리, 은덩어리를 가지고 와라. 돈을 잔뜩 가지고 와라. 금은보화를 잔뜩 가지고 와라. 그러면 내가 신들에게 부탁해서 너희들을 마음껏 축복할 테니 정성을 보여라, 성의를 보여라." "사냥하는 고기를 가져오면 너를 마음껏 축복하겠다"는 말이 이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무당들이 이렇게 합니다. 점쟁이들이 이렇게 합니다. 무당의 상 위에 놓인 봉투의 두께를 보고 굿을 정성껏 할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점쟁이의 상 위에 놓인 돈의 액수를 보고 점을 제대로 칠지 성의껏 할지 말지, 아니면 혼을 내고 돌려보낼지를 결정합니다. "사냥하는 고기를 가지고 오면 내가 너를 마음껏 축복하겠다"는 말이나, "돈을 많이 가지고 오면 나의 신에게 빌어서 너를 복 주게 하겠다"는 말이나 무엇이 다릅니까?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삭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영안이 어두워져서 이런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자기 동생 야곱이 그의 복을 가로챈 줄도 모르고 밖에 나가서 힘껏 고기를 잡았습니다.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가지고 옵니다. 그런데 이미 그때는 야곱이 지나간 이후입니다.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창 27:31)

에서가 하는 말을 보십시오. 어쩌면 자기 아버지 이삭과 이렇게 똑같은 말을 합니까?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나를 마음껏 축복하소서." 이삭이나 에서나 지금 공로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사냥하는 고기를 드릴 테니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이것이 공로주의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도 이렇게 생각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복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사냥하는 고기를 갖다 드리고 "하나님 저를 복 주십시오, 저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주십시오"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시고 하란에서 불러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복이 될지라"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겠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왜 부르셨는지, 왜 하필 수많은 사람들 중에 아브라함이셨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신비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리브가의 태중에 있는 에서와 야곱 중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말씀하시고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태중에 있는 야곱이 하나님 앞에 사냥하는 고기를 갖다 드리고 "하나님 이것 드시고 저를 선택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야곱입니까?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신비이고, 하나님의 선택의 영역,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에 속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고 하나님의 주권 아닙니까? 이것을 우리가 설명할 방법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 33:12)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시 33:16)

어떤 백성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백성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우리가 바로 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군사로 구원 얻은 왕이 없고, 그 용기로 전쟁에서 승리한 병사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삭과 에서 식으로 얘기하면, 사냥한 고기를 아무리 많이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올려 드려도 그것 가지고는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냥한 고기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가 있습니까? 선택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공로주의라는 독버섯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이후에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2000년이 넘는 교회 역사 동안 마당에 자라나는 독초처럼, 독버섯처럼, 잡초처럼 교회를 병들게 하고 성도들을 시험에 들게 한 것이 바로 공로주의입니다.

초대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할례주의자들과 굉장히 많이 싸웠습니다. 할례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할례와 구원을 연결시켰습니다. 행위 구원 아닙니까? 할례받아야 구원 얻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할례 받아야 구원 받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얻는 것이지 할례 받는다고 구원받습니까? 바울이 복음 전하는 곳마다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사랑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라고 바울은 그토록 자주 외쳤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고 은총입니다. 초대교회 때 바울은 유대주의자들 때문에 옥에 갇히고, 돌에 맞고, 감옥에 갇히고, 수없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았습니다.

중세 교회에서 교황의 권위가 세속의 권위를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교황이 돈 쓸 일이 많아졌습니다. 면죄부를 팔기 시작합니다. 이 면죄부 판매 대금 중 일부가 베드로 대성당 건축기금으로 흘러들어갑니다. 드디어 교황 레오 10세가 결단합니다. 1513년 면죄부 판매를 공식화합니다. 면죄부 판매를 앞장서서 주도할 사람을 임명했습니다. 요한 테첼이라는 수도사였습니다. 이 사람은 탁월한 설교가였습니다. 신학 연구가였습니다. 수도사였습니다. 성경에 능통하고 신학에 능통하고 역사에 밝고 교리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설교한 내용이 이렇습니다. "면죄부는 죄를 사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처럼 살아있는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죽은 자의 죄를 사하는 위대한 능력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금화가, 여러분의 부모가 연옥에 있으면, 그분들을 하늘로 구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금화가 헌금함에 떨어지는 순간 여러분 부모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믿어지십니까? 위대한 설교가이고 매일같이 성경을 끼고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또 읽는 수도사가 이런 식으로 설교했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 중세시대, 라틴어를 모르는 무지몽매한 성도들, 글을 읽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이런 설교를 듣고 마음이 감동되고 뜨거워져서 집을 팔고, 재산을 팔고, 없는 돈 있는 돈 다 가지고 와서 교회에 갖다 바치고 면죄부를 샀습니다. 불안하니까요. 그래서 교회가 부자가 되고, 그것으로 지은 곳이 베드로 대성당 아닙니까?

이것이 중세 사회의 공로주의에 병든 모습입니다. 그 뿌리가 어딘가 해서 올라가고 올라가고 또 올라가 봤더니 이삭과 에서가 나옵니다. "사냥하는 고기를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복을 줄 테니." "사냥하는 고기를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복을 빌어줄 테니." "사냥한 고기 가지고 왔습니다. 저에게 복을 주십시오." 그 뿌리가 바로 이삭이었고 에서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신앙생활 해오면서 "헌금 많이 하십시오, 열심히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창고를 가득 채워 줄 것입니다. 열심히 봉사하십시오, 수고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자손들을 복 주시고 또 복 주실 것입니다"라는 설교를 수없이 많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복음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사냥한 고기를 갖다 드리고 하나님은 나에게 복을 주시면, 그것은 거래 아닙니까? 내가 준 만큼 받으니까요. 나는 사냥한 고기를 드리고 나는 하나님께 복을 받으면, 그것은 철저한 거래관계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은혜입니까? 그것에 하나님의 은총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거기에 십자가 사랑이 자리 잡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헌금 많이 하고 수고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면 당연히 받는다? 그것은 점쟁이도 말할 수 있고, 이방의 종교를 얘기하는 사제들도 말할 수 있고, 무당들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 55:1)

이 말은 모순입니다. 역설입니다.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했습니다. 재화를 사려면 돈이 있어야 됩니다. 화폐가 있어야 됩니다. 교환 수단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해놓고, 돈 없이 값 없이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이고 은총입니다. 오기만 하면 됩니다. 주 앞에 나와서 앉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 나와서 앉아 있고 엎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 주시고 은총을 한없이 내려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사냥하는 고기 잔뜩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드려 보셨습니까? 복 주시던가요? 얼마나 많이 사냥해서 하나님께 드렸습니까? 그래서 복 받으셨습니까? 사실 우리는 하루하루 버티고 먹고 살기에도 힘겨운 인생입니다. 하루하루 살고, 정신없이 일터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살아가다가 또 주일날 교회 오면, 하나님 앞에 미안한 마음, 죄스러운 마음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옵니다. 그렇게 우리가 6개월을 지냈습니다. 사냥한 고기 한 번도 하나님 앞에 제대로 드려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하나님은 돈 없이 값 없이 포도주와 젖을 주셨습니다.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에 복 주시고 은혜 주시고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를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지난 6개월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 전체가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 전체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은총으로 함께하시고, 은혜로 함께하시고, 사냥한 고기 하나도 가지고 나오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 아래 있기만 하니까, 잘했다고, 그 자리에 잘 머물렀다고 하나님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냥 십자가 안에만 있었는데 구원해 주시고 사랑한다 하시고 모든 것 다 부어 주시니, 그것이 은혜 아닙니까?

교회도 누구도 우리에게 사냥하는 고기를 강요할 권리가 없습니다. 사냥한 고기 가지고 나온 에서를 보십시오. 빈털터리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야곱은 사냥하는 고기를 가지고 나올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복 받은 이는 야곱입니다. 사냥하는 고기가 우리에게 복을 담보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릇되고 허황된 공로주의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은혜를 율법으로 만들어 버리고, 은혜를 하나님과 교환 가능한 가치로 만들어 버리는 싸구려 복음에서 벗어나시고, 하나님의 철저한 은혜 가운데 살아가시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혈통주의의 허상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창 27:32)

이삭이 지금 혼란스럽습니다. 방금 축복했는데 또 에서라고 하고 복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삭이 "너는 누구냐"하고 놀라서 묻습니다. 그러자 에서가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 속에 에서의 자신감이 녹아 있습니다. 그는 이 정체성을 가지고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장자의식입니다. 혈통주의입니다. 내가 어떤 잘못을 해도,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장자이기 때문에 장자권이 내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방 결혼도 하고 자기 멋대로 방종하며 살았던 것 아닙니까?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이기 때문에, 나는 장자이기 때문에, 누구도 나의 장자권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다." 이것을 가지고 살아온 것입니다.

이삭은 그럴지 몰라도, 하나님도 그러실까요? 에서가 간과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가인과 아벨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를 받습니다. 가인이 "하나님, 저 이래봬도 아담의 큰아들입니다. 제가 장자입니다. 왜 저의 제사를 받지 않습니까?"라고 항변했다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통합니까? 그런 항변이 하나님 앞에 먹힙니까? "하나님 이래봬도 제가 장남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절대로 설득할 수 없습니다.

에서와 야곱, 하나님은 야곱을 택합니다.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통하지도 않는 말입니다. 이새의 8명의 아들 중에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고 하나님의 선택 아닙니까?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의 제자를 삼으실 때, 그 당시에 똑똑한 자들, 그 당시에 돈 많은 자들, 그 당시에 권력 있는 사람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선택은 사회 끝자락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갈릴리의 가난한 어부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천대받는 세리 마태였습니다. 예수님의 선택도 그렇고 하나님의 선택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에게, 그런 하나님에게, 그런 예수님에게 "제가 이래봬도 아무개 집에 장남입니다"라고 하면, 웃기는 말 아닙니까? 그것이 통한다고 생각합니까?

이런 그릇된 혈통주의에 유대인들이 빠져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내가 그냥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나는 자동적으로 구원받는다. 우리 조상이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는다." 조상이 아브라함인 것과 그 사람의 구원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1885년도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항에 첫 발을 딛고 138년이 지났습니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계산하면 이제 4세대가 지나 5세대가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도 4대째, 5대째 예수 믿는 가정이 심심치 않게 눈에 보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우리 증조부가 교회를 수십 개를 개척했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얼마나 믿음이 좋았는데요. 우리 증조부가 저 이북 땅에서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과 지금 나의 믿음 상태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감사할 것이지, 그것이 자랑거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모리아 산에서 여호와 이레를 경험했던 인물입니다. 그 이삭의 믿음과 에서의 방종함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아버지 이삭이 이런 인물인데, 내가 당신의 맏아들 에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통한다고 생각한 것이 웃기지 않습니까? 이것은 전혀 통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릇된 혈통주의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에서는 혈통은 강조했으나 장자답지 못했습니다. 그가 장자답지 못했다는 말은 그의 행동이 부모의 근심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혈통만 믿고 방종하게 살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분을 주십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성도. 여러 가지 직분과 직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직분이 우리에게 구원을 줍니까? 직분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을 믿고 있다가 큰코다칩니다. 직분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되고, 목사답게, 중직자들답게, 성도답게 살아야 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지역에서 아름답게 성장하고 이 지역의 장자 같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장자다움이 있어야 됩니다. 오늘 주보에도 나왔지만 우리 성도님들이 정성껏 헌금해서 광야 주차장을 만들었습니다. 주중에 조건 없이 이웃 주민들과 동네 주민들, 그리고 지역의 관공서 직원들에게 개방합니다.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그냥 개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가 장자이기 때문에, 장자답게 성장했기 때문에 그런 역할과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조건 없이 나누어 줘야 됩니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건축을 했습니다. 교회가 건축을 하면 가장 손쉬운 것이 구제비 줄이고 선교비 줄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교 그대로 하고 구제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보를 보시면 나눔창고가 지난 6개월 동안 얼마나 많이 베풀었는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답고, 교회가 장자답게 성장하면 당연히 해야 되는 일입니다. 마땅히 해야 되는 일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칭찬받지 않겠습니까?

장자다움은 없고 혈통만 주장하고 자랑하고 교회의 역사만 자랑하는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도 손가락질을 받고 하나님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릇된 공로주의, 거기서 벗어나시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혈통주의의 꿈에서 깨어나시고, 하나님께 받은 그 은혜 가지고 올 한해 남은 6개월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나머지가 복되고, 기쁨이 가득하고, 은혜가 넘치는 인생의 나머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때로는 이삭처럼, 때로는 에서처럼 사냥한 고기를 가득 가지고 나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실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릇된 공로주의에 매여 살았습니다. 우리가 복 받지 못하는 이유는 사냥하는 고기를 가지고 나오지 않아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를 자책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사냥한 고기가 없어도 우리를 품으시고 안으시고, 지금까지 살게 하시고 도우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을 우리가 왜곡하고 살았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아래만 머물면 된다고 하셨는데, 그 보혈의 공로를 싸구려 복음으로 바꿔 버리고 살았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릇된 혈통주의에 매여 살았습니다. 직분만 가지면 구원받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장자답게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직분자답게 행동하게 하여 주시고, 성도다움이 우리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