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의 눈물
본문: 창세기 27:36-41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울기도 많이 울고 슬퍼하기도 많이 슬퍼합니다. 눈물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기뻐도 울고, 아파도 울고, 슬퍼도 울고, 그 밖의 여러 이유로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나이가 들다 보면 눈물이 많아지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눈물이 마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든 눈물은 우리 일생에서 떼어낼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한 부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눈물의 종류 중에 악어의 눈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악어가 먹이를 잡아먹을 때 먹이를 눈앞에 두고 눈물을 흘립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악어가 상당히 인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슬픔을 표현하고, 살기 위해서 너를 먹지만 그래도 너를 위해서 애도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악어를 비인간적이지 않고 상당히 괜찮은 동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악어의 인간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메커니즘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악어는 입을 크게 벌리면 눈물샘이 자극받아서 눈물이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생겨 먹은 것입니다. 눈물이 흘러내려서 그 눈물이 입으로 들어가고, 입안에 수분을 보충하면 먹이를 삼키기가 용이해집니다. 그래서 악어는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과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이고, 과거에 악어를 관찰하던 사람은 악어의 눈물을 위선자의 그것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관용적으로 악어의 눈물을 위선의 눈물, 거짓의 눈물, 이중적인 눈물이라고 부릅니다.
청개구리의 눈물도 있습니다. 개구리가 엄마 말을 정말 안 들었습니다. 엄마가 이렇게 하라고 하면 저렇게 하고, 늘 반대로 행동합니다. 엄마가 아들 개구리 때문에 너무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날 때가 되어 유언을 남깁니다. "너 내가 죽거든 나를 산에다 묻지 말고 반드시 강가에다 묻으라." 그렇게 해야 아들이 반대로 산에다 묻어줄 거라고 생각하며 단단히 일렀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갑자기 회심했습니다. 내가 엄마 살았을 때는 반대로 했지만 이제 한 번은 엄마 말을 들어야지 하며, 그만 엄마 묘를 강가에 쓰고 말았습니다. 큰 비가 내리는 날이면 청개구리가 엄마 묘가 떠내려갈까 봐 울었다고 합니다. 그 눈물은 회한의 눈물이고 후회의 눈물입니다.
분노의 눈물도 있습니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분노해서 흘리는 눈물이 가장 짜다고 합니다. 사람이 화가 나면 교감 신경이 흥분해서 눈동자가 커집니다. 그리고 눈의 깜빡임이 느려집니다. 눈을 크게 뜨고 눈을 깜빡이지 않으면 눈에 있는 수분이 증발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눈물이 짜집니다.
우리가 살면서 분노의 눈물도 흘리고, 위선의 눈물도 흘리고, 후회의 눈물도 다 흘려봤을 것입니다. 다양한 종류의 각종 눈물을 우리는 다 흘리고 삽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 말씀 본문에도 눈물이 나옵니다. 에서가 흘린 눈물입니다. 에서의 눈물은 이 중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요? 에서가 흘리는 눈물은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눈물일까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어떤 눈물을 원하시는지, 에서의 눈물은 과연 합당한 눈물이었는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남 탓하는 자의 비극
아버지 이삭은 야곱을 축복하고 말았습니다. 자기도 에서인 줄 알았는데 야곱이었습니다. 에서는 산에서 짐승을 잡아 와서 사냥한 고기를 가지고 별미를 만들어서 아버지에게 가지고 옵니다. 아버지가 이미 축복이 끝났다고 말합니다. 에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동생이 복을 받고 가버린 후였습니다. 이제 화가 났습니다.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길길이 날뜁니다.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창 27:36)
에서가 한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가 나를 속인 것이 이미 두 번째입니다. 처음에는 장자권을 빼앗았고, 이번에는 내 복을 빼앗았습니다. 에서의 이 말이 과연 진실입니까? 한번 따져봅시다.
먼저 장자권에 대해서입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에서가 산에서 짐승을 잡다가 사냥하다가 배가 너무너무 고팠습니다. 집에 들어오니 마침 동생 야곱이 팥죽을 쑤었습니다. 팥죽 냄새가 온 집에 진동합니다. 팥죽 한 그릇을 달라고 말합니다. 야곱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팥죽을 줄 테니 형의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라. 에서는 망설이지도 않습니다. 두 번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시장하여 죽게 되었는데 장자의 명분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며 그냥 팔아버렸습니다.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상황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이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더라."
장자의 명분을 야곱이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입으로, 자기 손으로 그냥 팔아치워버렸습니다. 야곱이 힘이 세서 형과 싸워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을 수 있습니까? 상대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장자의 명분을 자기 손으로, 자기 입으로 그냥 팔아치운 것은 에서 자신이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기억에 오류가 있든지, 자기중심적이든지, 이 사람은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야곱이 내 복을 빼앗았다는 말입니다. 여기 이 '내 복'이라는 말 속에는 그의 깊은 교만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언제부터 자기 복이었습니까? 그것이 정말 자기 복이었습니까? 그 복이 원래부터 자기 것이었습니까? 사냥한 고기를 가지고 오면 아버지가 너를 마음껏 축복하겠다 한 것, 이것은 공로주의에 휩싸여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맏아들이기 때문에 날 때부터 복 받은 존재라고 생각한 것, 이것은 혈통주의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까?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 받을 사람을 찾아보시다가 복 받을 자격이 되는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것이 원래부터 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복을 빼앗겼다고 지금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복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장남답게 행동한 적이 없었습니다. 부모에게는 근심과 걱정거리가 되었고, 동생에게는 짐덩어리였습니다. 복 받을 짓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 복이 자기 복입니까?
이 두 가지를 보더라도 이 사람은 지금 이런 상황에서 남 탓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 닥치면, 자기 인생에 큰 문제가 생기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 수렴됩니다. 첫 번째 사람은 무조건 남 탓하고 봅니다. 환경을 탓합니다. 주변 이웃을 탓합니다. 부모 탓을 합니다. 조상 탓을 합니다. 3대째, 4대째 할아버지까지 올라갑니다. 이 나라의 이 민족의 대통령 탓까지 합니다. 자기 문제는 하나도 찾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주변 사람들 탓입니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합니다.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에서 같은 인간입니다.
또 다른 유형의 사람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일단은 멈추고 판단을 중지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내면을 돌아봅니다. 내가 잘못한 건 없는지, 혹시 나로부터 비롯된 문제는 아닌지 자기를 돌아봅니다. 모름지기 신앙인은 후자여야 하지 않습니까? 신앙한다는 것, 믿음을 가진다는 것, 그것은 문제가 생기면 자기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에게는 그런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조건 남 탓부터 하고 봅니다. 야곱 탓입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빼앗았고, 야곱이 내 복을 빼앗아 가버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을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마 13:40-42)
지금 종말의 때입니다. 심판의 때입니다.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심판당하는데 여전히 울고 이를 갈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직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불타고 있는데, 알곡은 모아서 천국 곳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모아서 태워서 없애버리는 그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불타 없어지는 그 순간에도 울며 이를 갈고 있습니다. 남 탓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있어야 돼? 나는 왜 천국 저 곳간에 들어가지 못하는 거야?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에서 같은 사람입니다. 지금 에서는 심판당하는 중입니다. 지금 이 사람은 여전히 심판당하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신 못 차리고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같은 밭에서 자랍니다. 그런데 왜 주인이 가라지를 뽑아내치지 않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다칠까 두려워서 그냥 그대로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서 추수 때가 되면 알곡은 모아다가 천국 곳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모아서 불태워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에서는 자기가 심판당하지 않으니까,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 팔아먹어도, 불신 결혼하고 가정을 파괴해도 심판당하지 않으니까, 자기가 알곡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를 뽑다가 야곱까지 다칠까 해서 에서를 그냥 가만히 두었더니, 자기가 알곡인 줄 알았습니다.
자기 성찰 없는 신앙의 위험
가라지는 왜 자기가 가라지인 줄 모르는 것일까요? 자기를 돌아보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반성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얼굴을, 내 모습을 하나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서 전신을 낱낱이 살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쭉정이인지, 내가 알곡인지 한 번도 살펴 본 적이 없으니까 자신이 가라지임을 모르고 산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 자의 특징이라고 부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소개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 18:11-12)
바리새인 얼마나 훌륭합니까? 이레에 두 번 금식합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3일에 한 번은 금식합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만한 신앙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것을 기도로 표현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기도로 자기 자랑을 일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자랑하고, 큰소리로 기도하면서 성도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나 이런 사람입니다 라고 홍보하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자기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죄짓지 않았겠습니까? 하루 살고 나면 수십 가지 죄가 나에게 들어와 있는데,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죄 문제를 살피고, 하나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봐서 나는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내 이 죄를 용서해 달라고 죄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야 되는데, 자기 자랑을 가지고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이러니 자기 반성이 없는 이 바리새인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반면, 세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13)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세리는 정말 죄인입니다. 매국노입니다.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나쁜 인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리가 죄인인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내가 죄인임을 발견하는 것이 쉽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정직하게 살펴봐야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너 죄인이야 라고 말해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살피지 않고, 반성하지 않고, 성찰하지 않으면 죄의 고백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그 악한 바리새인과는 달리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하나님 앞에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 이거 부족해요. 하나님 저 이거 모자랍니다. 이번 달까지, 오늘까지 이거 채워주십시오. 달라는 기도는 엄청나게 많이 하고, 무지하게 하나님 앞에 많이 하는데, 나를 하나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내가 알곡인지, 내가 가라지인지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수많은 문제의 시작이 어디서부터 이루어진 것인지 분별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투사해버립니다. 던져버립니다. 남 탓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 탓으로, 이웃 탓으로, 가족 탓으로 돌립니다. 에서처럼 자기 성찰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신앙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를 살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거울에 나를 정직하게 비추어서 나를 꺼내보고 나를 살펴봐야 진실로 제대로 된 신앙인인지, 잘 가고 있는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살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랑하기 전에, 달라고 청하기 전에, 나를 하나님 앞에 꺼내놓고 성찰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야 에서 같은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믿는 자의 좌절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창 27:37)
이삭의 이 말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내 아들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배신감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버지 이삭이 에서에게 한 말입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이삭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냥한 고기를 가져와라. 내가 그걸 먹고 너를 마음껏 축복하겠다. 내가 즐기는 별미를 먹고 내가 너를 마음껏 축복할 테니 어서 가서 사냥한 고기를 가져와라.
그렇게 말했던 아버지 이삭이 불과 몇 시간 이후에 안면을 바꿉니다. 말을 바꿉니다. 내 아들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으랴. 사람은 원래 이런 존재입니다.
에서가 이렇게 아버지에게 뒤통수를 맞는 이유는 육신의 아버지 이삭을 하나님 아버지보다 더 믿었기 때문입니다.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 아닙니까? 장자권을 주시는 분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아버지 이삭이 내가 맏아들이니까, 내가 어떻게 행동을 하건 내가 어떤 비행을 하건 내가 어떤 잘못을 하건 아버지께서 나를 복 줄 거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장자권을 하사해 줄 거라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사람 믿으면 이렇게 됩니다.
그가 비록 내 육신의 부모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비록 내 형제자매라 할지라도, 내 속으로 낳은 내 자식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결단코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믿음의 대상, 신뢰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 아버지밖에는 없습니다.
아브라함 믿을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얼마나 거짓말 자주 했습니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그 아들 이삭도 똑같이 아버지처럼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자기 자식 에서에게도 이렇게 거짓말합니다. 내 아들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으랴.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들 다 알면서도 여전히 미련하게도 사람 쫓아다닙니다. 나는 저 사람처럼 믿음 좋은 사람 되고 싶다고 사람 믿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무너지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이 믿음에서 타락하고 실족하면 내 믿음은 어떻게 됩니까? 사람 믿었다가 마음에 깊은 상처받고 지금까지 그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역시 그런 경험이 없습니까? 사람 믿으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를 위해서 일하시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는데, 그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어야지 육신의 아버지를 믿으면 이 꼴 당합니다.
분노의 눈물, 회개의 눈물
에서는 이제 믿을 구석이 없어졌습니다. 망한 것입니다. 이제 에서의 절절한 눈물을 보십시오.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창 27:38)
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할 수 있는 것이 눈물밖에 없습니다. 통곡합니다. 에서가 흘리는 눈물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악어의 눈물입니까? 개구리의 후회의 눈물입니까? 그렇게 짜다고 하는 분노의 눈물입니까?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창 27:41)
이 눈물의 정체는 분노였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면 내 아우 야곱을 죽이고 말겠다. 어리석게도 야곱을 죽이고 나면 장자권을 되찾아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야곱을 죽이고 나면 그에게 흘러간 복이 내 것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빼앗아 올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에서가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평소에 회개하는 훈련이 안 되어 있으니까, 평소에 하나님 말씀 앞에 자기를 세워서 정직하게 내가 가라지인지 알곡인지 살펴보는 훈련이 안 되어 있으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눈물로 회개하지 않고 눈물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합니다. 살인충동을 느낍니다. 눈물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시 6:1, 6)
다윗입니다. 밧세바 사건 이후에 선지자 나단에게 책망받고 난 이후에 기록한 시편입니다. 가정이 있는 여인, 남편이 있는 여인을 데려다가 범했습니다.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여인이 임신한 것을 알고 여인의 남편을 적진 가장 깊숙한 곳에 보내서 살해했습니다.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십계명에 내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한 죄도 범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십계명 가운데 세 가지나 범했습니다.
선지자 나단이 찾아왔습니다. 책망합니다.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발가벗겼습니다. 적나라하게 나의 연약함과 부끄러움이 드러납니다. 그러자 그 앞에 엎드려집니다. 그리고 울었습니다. 통곡했습니다. 회개했습니다. 얼마나 울었던지 자기의 눈물로 침상을 띄울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매일 밤마다 그 눈물로 요를 적십니다.
다윗의 회개의 눈물이 그를 살렸습니다. 그를 구원했습니다. 다윗을 왕 중에 가장 하나님께 사랑받는 왕으로 만들었고,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그가 하나님 앞에 새롭게 설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또 어떻습니까? 네가 닭 울기 전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한 여종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닭이 웁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말씀 앞에 자기가 서 있습니다. 너무너무 부끄럽습니다. 통곡했습니다. 베드로의 그 눈물이 베드로를 살린 것입니다. 베드로의 그 통곡이 베드로를 베드로 되게 했고, 그를 초대 교회 지도자로 만들었습니다.
에서의 눈물은 어떻습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 마지막 기회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이런 충격을 받음으로 그는 자기를 돌아보고 회개해야 옳았습니다. 장자권을 팔아먹은 것, 바로 내가 팔아먹었구나. 하나님의 복을 복되게 하지 못한 것, 나의 잘못이구나. 울긴 우는데 회개의 눈물이었다면, 그 눈물이 정말 회개의 눈물이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는 회개의 눈물이었다면, 에서의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떤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까?
열매 없는 눈물
이도 저도 아닌 정말 허무한 눈물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 정복 전쟁을 끝내고 열두 지파가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 땅에 가나안 잔당이 남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 잔당들을 다 몰아내라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전쟁하기 귀찮았습니다. 싫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전쟁했는데 또 싸우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하지 않습니다. 그들과 조약을 맺고 그냥 종 삼아서 편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를 보내서 책망합니다. 일어나라, 전쟁하라, 그들을 쫓아내라, 말씀대로 하라고. 그때 이들의 반응이 이렇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삿 2:4-5)
울었습니다. 회개했다는 말입니다. 거기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배 드렸습니다. 예배는 곧 결단입니다. 회개하고 결단했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남은 게 무엇입니까? 실천입니다. 행동의 변화입니다.
눈물로 회개하고 예배드리면서 결단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나가서 가나안 잔당들을 내쫓아야 됩니다. 백성들을 모아서 이제까지 우리가 잘못했으니 가나안 잔당들을 내쫓자고 해야 됩니다. 그런데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행동에 변화가 없습니다. 눈물도 흘리고 결단도 했는데 삶이 똑같습니다.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들이 그렇게 울고 통곡하고 예배드린 그곳 이름을 보김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너희들 울기만 하는구나, 회개만 하는구나. 우는 자들이라고.
오늘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매주 주일이 되면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배드리고 나름대로 은혜도 받습니다. 웁니다. 통곡하고 울고 하나님 앞에 결단합니다. 그런데 예배당 문만 나서면 똑같습니다. 잊어버립니다. 삶이 변하지를 않습니다. 행동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드리고 눈물 흘리고 결단한 대로 삶을 살아내기만 하면 세상이 바뀔 것입니다. 세상이 더 좋아질 것입니다. 세상이 바뀌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보김에서 울기만 하는 자들처럼 여전히 울고 있으니 세상은 똑같습니다.
우리의 눈물이 에서의 눈물입니까? 보김에서 울기만 하는 자들의 눈물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눈물은 다윗의 눈물이요, 베드로의 눈물이요, 세리의 눈물입니다. 부디 우리의 눈물이 열매 있는, 회복이 있는, 은혜가 있는 눈물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 에서가 있습니다. 문제만 있으면 남을 탓하고 핑계했습니다. 나는 피해 가려고 하고, 책임지지 않으려 하고, 다른 사람 핑계하고 탓하기만 좋아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돌아보면 장자권을 팔아먹은 것도 나이고, 복 받지 않게 행동한 것도 나인데, 남 핑계하고 탓하는 건 너무너무 잘하고 살았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회개하는 습관 가지기 원합니다. 매일같이 하나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나로부터 일어난 문제들을 살피고 회개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분노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살리는 눈물을 가지게 하옵소서. 다윗처럼, 베드로처럼 울게 하시고, 그 눈물이 나를 구원하고 우리를 건지는 눈물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울기는 하는데, 예배드리고 결단은 하는데, 행동하지 않는 보김에서 우는 자들과 같은 어리석은 자 되지 않도록 도우시고, 우리가 울고 결단했다면 삶의 변화가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