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강 / 벧엘의 하나님 (31:1-13)

벧엘의 하나님

본문: 창세기 31:1-13

중국의 제자백가 가운데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한비자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가 남긴 책을 보면 법이 왜 필요한지, 왜 법이 우리에게 필수적인지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한 여인이 살았는데, 이 여인은 젊은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따라 남편이 갑자기 집에 일찍 들어왔습니다. 남편이 골목어귀를 지나 자기 집 앞에 섰는데, 갑자기 집 문이 열리며 안에서 젊은 남자 하나가 뛰어나오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남편이 그 젊은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집에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보아하니 우리 집에 오신 손님 같은데 용건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이 젊은 남자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 대답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뒤따라 나오던 아내가 남편에게 불같이 화를 냅니다. "당신, 여기 도대체 누가 있다고? 아무도 없는데 도대체 누구를 보고 손님을 운운하는 것이냐? 혹시 당신이 미친 것 아니냐?" 기가 막히고 황당한 상황이 이어져서 남자가 여인에게 말합니다. "지금 이 젊은 남자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도 이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에게 남편이 묻습니다. "지금 누가 미친 겁니까? 이 젊은 남자가 보이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마을 사람들도 "도대체 젊은 남자가 어디에 있느냐, 당신은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집에 들어가 물을 한 바가지 퍼다가 남편에게 끼얹어 버렸습니다. 귀신에 씌이면 물을 부어야 귀신이 떠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토록 극단적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이처럼 황당한 이야기를 한비자가 기록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말의 힘 때문입니다. 옛말에 '세 사람이 모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하면 처음에는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이 똑같은 이야기를 하면 '정말 그런가' 흔들리게 되고, 세 번째 사람이 또 같은 거짓말을 하면 '진짜인가 보다' 하고 믿어 버립니다. 말의 힘이라는 것이 이토록 한 사람을 미치광이로 만들 정도로 강력합니다. 다른 하나는 세력입니다. 아마 이 여인은 그 마을에서 무시 못 할 세력을 가지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힘이 있었기에, 세력이 있었기에 누구도 이 여인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힘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운 구조 아닙니까? 아니라고 말했다가 돌아올 불이익이 뻔한데 어떻게 반박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한비자는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이 황당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야곱이 바로 그런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라반과 그의 아들들이 야곱을 괴롭힙니다. 없는 말을 지어냅니다. 그리고 그를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에게는 자신을 지켜 줄 울타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돌봐주셔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라반 같은 사람들, 우리 주변에 악에 빠진 사람들, 그들로 인해 우리가 어떤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초자연적 역사 이면의 하나님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창 31:1)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야곱이 20년 동안 라반의 집에서 종처럼 일했습니다. 이제 외삼촌 라반을 떠나겠다고 결정하고 라반에게 가서 두 사람 사이에 품삯을 정하겠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품삯을 정했습니다. 얼룩이 있는 짐승들은 자기 것으로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라반이 얼룩이 있는 짐승을 모조리 모아 자기 아들들에게 맡겨 버렸습니다. 그리고 야곱과 거리를 두게 했습니다. 서로 섞이지 않게 하려고, 야곱에게는 얼룩무늬 짐승을 한 마리도 주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고 신비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야곱이 나뭇가지 몇 개를 꺾어다 가지고 다녔는데, 야곱의 양들이 새끼를 낳기만 하면 얼룩무늬 짐승, 점이 있는 짐승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야곱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야곱은 라반의 것을 훔친 적도 없고, 부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라반의 아들들이 이런 식으로 야곱을 모함하고 헛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아들들이 이렇게 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계약의 당사자인 라반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핵심 문제입니다.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창 31:2)

라반의 안색이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라반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을 우리가 그 자리에서 겪었다면 얼마나 황당하고 당황스럽겠습니까? 없는 사실을 지어내고 동네 사람들에게 이상한 헛소문을 내고, 나는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나를 도둑 취급하고, 라반과 그의 아들들은 시치미를 뚝 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거꾸로 생각해 보면, 라반과 그의 아들들은 대단히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임이 틀림없습니다. 그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들이 어리석은 이유는 자신의 경험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이면에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라반의 아들들이 평생 동안 이런 일을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얼룩무늬 짐승들만 태어나는 이 놀라운 현상, 자연계의 법칙을 거스르는 이런 일을 라반이나 그의 아들들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면에 도대체 어떤 힘이 역사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야곱이 하는 것마다 잘되고, 야곱이 손대는 것마다 열매를 맺는데, 도대체 야곱에게는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인지, 그 이면에 역사하시는 힘의 원천과 비결을 알아보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것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그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라반과 그의 아들들은 그것을 찾아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과 다르면 보기 싫고, 생각하기 싫으면 자기 생각대로 그냥 묻어 버립니다. 거짓말을 해 버립니다. "우리 아버지의 것을 훔쳐가서 부자가 되었다"고 없는 말을 지어내 버립니다. 보통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들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장사를 하는데 옆집 식당이 유독 번창하면 거기 가서 먹어 보지 않습니까? 나도 똑같은 업종에서 장사를 하는데, 우리 집은 그럭저럭 먹고사는 수준인 반면 저 집은 유난히 잘되어 사람들이 줄을 섭니다. 그러면 거기 가서 먹어 봅니다. 도대체 비법이 무엇인지, 이 집에서는 어떤 재료를 쓰는지, 손님을 대하는 노하우와 철학은 어떤 것인지 가서 면밀하게 살펴봅니다. 깨달은 것이 있으면 우리 집에 와서 적용해 봅니다. 그것이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하면 사람들은 그 교회에 와서 배웁니다. 탐방을 옵니다. 그 교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손길을 직접 경험해 보려고 와서 예배도 드려 봅니다. 기업이 잘되면 견학을 갑니다. 나라가 선진국이면 비싼 돈을 들여서 그 나라에 가서 유학을 하고 공부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비결을 배우기 위한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고, 나도 그렇게 성장하고 잘해 보고 싶으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 이면에 일어나고 있는 특별한 역사를 경험하고 보고 싶은 것이 상식입니다. 그것이 살아 있는 공부입니다.

그런데 라반과 그의 아들들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미련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면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살펴보았더라면, 그 하나님께 기도하면 될 일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믿음생활을 성실하게 감당하면 자기의 인생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보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창 41:38-39)

바로는 애굽의 왕입니다. 꿈을 꾸었는데 애굽의 점술가들과 박사들 가운데 해석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답답해하고 있던 차에 옥에서 온 요셉이라는 사람이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해몽이 놀랍도록 명쾌했습니다. 살펴보니 요셉은 히브리 사람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요셉 이면에 계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인정한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인데, 이런 초자연적인 역사를 행하시는 분은 요셉 뒤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바로는 고백했습니다.

바로는 참으로 지혜로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고 애굽의 왕이었지만, 요셉 뒤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정권을 위임하고, 7년 대풍년과 7년 흉년을 극복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나와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 그에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눈이 있습니까? 나와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 믿음생활을 성실하게 잘 감당하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이 사람이 하는 일마다 잘되는지, 왜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지, 그것을 보고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요 7:24)

예수님께서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께서야말로 외모로 판단당한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가장 큰 피해자이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놀리고 핀잔 줄 때, 비아냥거릴 때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며 예수님의 출생지를 가지고 비하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갈릴리에서 평생을 사셨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율법학자들, 지식인들은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가진 자들, 배운 자들은 예루살렘 중심부에 모여들어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변방에서 삶의 궤적을 걸어가신 분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외형을 보고, 그의 학벌을 보고, 그의 가난함을 보고 평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공의로 사람을 보라는 뜻입니다. 부디 편견 없이 사람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외모로 보지 말고 편견 없이 사람을 보면, 그 사람 뒤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보일 것입니다. 그분 뒤에서 지금도 능력으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면, 우리는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뛰어나게 잘하시는 분, 믿음생활 잘하시는 분, 그분이 일하기만 하면 역사가 일어나는 분, 그분을 통해서 우리도 성장하고 함께 배워 가시기를 바랍니다.

복덩이를 알아보지 못한 어리석음

둘째, 라반과 그의 아들들이 미련한 이유는 복덩이 야곱을 이런 식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 와서 라반의 두 딸의 남편이 되지 않았습니까? 만약 야곱이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레아와 라헬은 밧단아람의 한 총각에게 시집가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밧단아람 목자들의 실상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양들이 모이면 우물 뚜껑을 열고 물을 먹이되, 평소에는 우물 옆에서 먹고 놀다가 양들이 다 모여야 비로소 뚜껑을 여는 게으른 자들이었습니다. 양을 돌볼 생각이 없고, 양에게 관심도 없는 나태한 인간들이었습니다. 만약 야곱이 오지 않았다면 그런 사람 중 한 명에게 딸들을 결혼시켜야 했을 것입니다.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와서 그 성실한 야곱에게 두 딸을 시집보냈습니다. 야곱이 오기 전에 라반의 집은 그저 먹고사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실한 야곱 덕택에 이 집은 부자가 되어 갔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야곱이 오기 전과 야곱이 오고 난 후는 전혀 다른 가정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대접한다는 것이 어리석지 않습니까?

옛날 조선시대 우리나라에는 노비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894년부터 3년 동안 시행된 갑오개혁으로 노비 제도가 철폐되었습니다. 물론 중앙 정부에서 노비 제도를 없애라 한다고 해서 갑자기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의 삶이 명령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습니다. 노비는 없어졌지만 이름만 바뀌어 머슴이 생겼습니다. 노비와 머슴은 전혀 다릅니다. 노비는 사유재산을 인정받지 못했고 자유가 없었지만, 머슴은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계약직 근로자입니다. 주인과 머슴이 일대일의 관계로 계약을 맺습니다. 주인집 안에 살아도 되고 집 밖에 살아도 됩니다. 자기 재산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 머슴 제도는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는데, 머슴 가운데 일을 가장 잘하는 머슴을 상머슴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상머슴의 1년치 세경이 1960년대에 쌀 한 가마였습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의 가치인가 하면, 1960년대 우리나라 9급 공무원의 한 달 월급이 쌀 한 가마였습니다. 그렇다면 9급 공무원의 1년 연봉과 머슴의 1년 세경이 같은 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상머슴의 경우 주인이 머슴의 먹는 것, 입는 것, 살아가는 것, 자녀 교육까지 책임져 줘야만 했습니다. 좋은 상머슴을 구하기 위해 가격이 오르고 또 올라서 1960년대에 그 정도까지 머슴의 지위가 높아졌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습니까? 좋은 머슴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상머슴 하나, 좋은 머슴을 집에 들이면 이 머슴이 그 아래 머슴들을 데리고 일을 알아서 다 합니다. 논농사, 밭농사 할 것 없이 주인은 하나도 신경 쓸 것 없이 알아서 다 해 줍니다. 그러니 몸값이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상머슴 하나가 집에 들어오면 금이야 옥이야 해 달라는 것 다 해 주고 모셔야 합니다. 기분 나빠서 옆집으로 가 버리면 이 집 농사를 누가 짓겠습니까?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서도 유능한 일꾼을 귀히 섬기고 돌보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축복의 계보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라반의 집에 들어와서 이 집이 일어나고 부자가 되고 잘 먹고 잘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자명한 일입니다.

그런데 라반과 그의 아들들은 어리석고 미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보디발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굴러들어온 호박 같은 요셉을 그는 감옥에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복덩이 중의 복덩이인데 말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다윗을 자기 휘하에 두고 있으면 됩니다. 나갈 때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영토를 확장해 주는 최고의 장군인데, 그 다윗을 광야로 내쫓아 버렸습니다. 미련한 인간입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한 것입니까? 도대체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라반이 야곱을 이렇게 대하는 이유는  때문입니다. 이렇게 헛소문을 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하고 빈털터리로 만들어 내쫓아 버리면, 야곱이 가진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되니까, 돈 욕심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잠 23:5)

성경은 물질의 속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물질을 허무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허무한가 하면,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독수리를 따라갈 수 있습니까? 독수리를 쫓아가서 맨손으로 잡을 수 있습니까? 하늘을 향해 창공을 향해 비상하는 독수리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질의 속성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쫓아가면 갈수록, 물질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높이 날아가는 독수리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물질이 우리에게 오게 됩니까? 적어도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야곱 같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눈, 요셉이나 다윗 같은 사람을 알아보고 그들을 가까이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 안목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이면에 역사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하더라도, 그런 사람을 가까이할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있어야 복이 나에게도 올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질이건 건강이건, 쫓아가면 다 떠나가지만, 믿음의 눈을 가지면 나에게로 모여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라반과 그의 아들들은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벧엘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

이런 일을 겪고 있는 야곱의 마음이 심히 상하고 힘들고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위로하십니다.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창 31:13)

하나님께서 자신을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벧엘이 어떤 곳입니까? 야곱이 죄인 되었을 때,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빈털터리로 집을 나섰을 때, 야곱이 한곳에서 잠들었는데 천사들이 하늘에서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고, 저 끝 보좌 위에 하나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이곳에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 내가 너를 반드시 지키고 인도하겠다." 야곱이 잠에서 깨어 돌베개 했던 그곳에 기름을 붓고, 여기를 하나님의 집 '벧엘'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나를 지켜 주시면 제가 십일조를 반드시 드릴 것이며, 제가 돌아와서 이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삼겠습니다." 약속했던 그곳이 벧엘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라반의 집에 와서 20년 동안 단 한 번도 벧엘의 하나님을 입에 올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라반에게 상처 입었느냐? 너를 힘겹게 하는 사람들, 너를 모함하는 사람들, 너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벧엘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리로 돌아오라.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 하나님은 그렇게 야곱을 불러 주셨습니다.

결론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라반 같은 사람들을 매일 만납니다. 나를 인정하지 않고, 헛소문 내고, 거짓 소문 내고, 나를 수렁에 빠뜨리려는 수많은 사람들,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미련함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벧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비록 상처 입고 있다 할지라도, 일어나서 결단하고 돌아가려는 야곱을 하나님이 벧엘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우리는 돌아갈 곳이 있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벧엘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라반 같은 사람들 가운데서 힘겨워하지 마시고, 벧엘에서 주님과 함께 기쁨과 은총을 누리시는 믿음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에 벧엘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없을 때, 힘겨웠을 때,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만나 주신 하나님, 세상사에 지치고 힘겨워서 라반 같은 사람들 때문에 절망하고 있을 때 다시 우리를 벧엘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벧엘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다시 그곳으로 가서 위로받고 안식하고 힘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라반 같은 미련한 자 되지 않겠습니다. 초자연적인 역사 이면에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눈을 허락하여 주시고, 야곱 같은 복덩이, 요셉 같은, 다윗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는 영적 안목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