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강 / 가만히 떠났더라 (31:14-20)

가만히 떠났더라

본문: 창세기 31:14-20

수능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오면, 새로운 내용을 익히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복습하고 정리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그래야 머릿속이 정돈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험이란 본래 신비로운 것이어서, 아무리 준비해도 모르는 문제가 반드시 나오게 마련입니다. 시험장에서 모르는 문제를 만나면 결국 '찍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수험생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조삼모사." 우리가 아는 그 고사성어가 아니라, '조금 모르면 3번을 찍고, 아예 모르면 4번을 찍으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농담이 아닙니다. 수험생들이 오랜 세월 평가원의 출제 패턴을 분석해 낸 통계적 노하우입니다. 탐구 영역의 난이도 높은 객관식 문제에서 정답이 4번에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평가원은 방법을 바꿉니다. 4번에 감추어 두었던 답을 1번과 2번으로 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한 수 더 나아가 질문 자체를 바꿉니다. "적당한 것을 고르시오"라고 물으면 정답률이 높아지는데, "적당하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라고 물으면 정답률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평가원의 사명은 매력적인 오답을 만드는 것이고, 수험생의 사명은 그 매력적인 오답을 분별하고 가려내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의 치열한 다툼이 시험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공부란 본래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인데, 매력적인 오답을 걸러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시험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 인생 곳곳에 매력적인 오답을 심어 두었습니다. 정답처럼 보여서 다가가 보면, 그것은 오답이요, 벼랑 끝이며, 절벽입니다. 매력적인 오답의 덫에서 벗어나려면 영적 분별력이 필수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은 바로 이 매력적인 오답의 덫에 걸린 인물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매력적인 오답을 피하고 정답을 찾을 수 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상호적 관계의 원리

야곱은 20년 동안 장인 라반 밑에서 심히 일했지만,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야곱의 재산이 늘어나자, 라반의 아들들이 헛소문을 퍼뜨립니다. "아버지의 소유를 모두 빼앗아 갔다"고 하며, 라반의 안색도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이에 야곱은 떠날 때가 되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서도 "네 본토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은 두 아내 라헬과 레아를 불러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이에 라헬과 레아가 대답합니다.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창 31:14)

자기 아버지 라반을 누구보다 잘 아는 딸들이었습니다. 물질에만 천착하는 아버지, 두고두고 욕심만 부리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들은 아버지의 집에 자신들을 위한 분깃도, 유산도 없다고 단언합니다. 떠나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말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창 31:15)

딸들은 아버지가 자신들을 팔아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야곱이 7년 동안 라헬을 위해 일했는데, 결혼 첫날 밤 눈을 떠보니 레아가 누워 있었습니다. 라반이 꾸민 일이었습니다. 라반은 야곱의 노동력과 성실함을 탐내어 그를 묶어두기 위해 두 딸을 이용했습니다. 14년, 그 후로 또 6년, 도합 20년을 묶어 두었습니다. 딸들은 아버지의 욕심에 자신들이 팔려 갔다고 느꼈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전혀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라반이 자기 인생에서 실패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내리는 평가가 가장 정확합니다. 몇 달에 한 번 만나는 사람은 그의 미소만 기억하지만, 가족으로 평생을 부대끼며 살아온 사람들이야말로 그 사람의 진면목을 꿰뚫어 봅니다. 라반의 두 딸 라헬과 레아가 "우리 아버지가 우리를 팔아버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상호적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일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고, 죄 지은 인간이 가만히 있으면 죽을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상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일방적인 은총입니다. 구원도, 구원을 향한 모든 길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열어 두셨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상호적입니다. 아버지가 딸들을 이렇게 대하면, 딸들도 아버지를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2천 년 전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2천 년 전에도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 자녀를 분노하게 하지 말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관계가 상호적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고 분노하게 하면, 그 가정의 모든 불화가 거기서 시작됩니다. 부모도 자녀에게 효도를 기대하기 어렵게 됩니다.

성도들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롬 12:10)

'서로'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는 사랑을 받기만 하고, 누구는 사랑을 주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 사람은 왜 나에게 친절하지 않은 걸까." "저분은 왜 나에게 인상만 쓰고 있을까."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남에게 웃는 모습이었는가, 나는 타인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는가, 나는 타인에게 친절한 존재였는가, 내가 먼저 은혜를 베풀고 존경을 표현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야곱의 두 아내 라헬과 레아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 이런 감정을 품는 것은, 아버지와의 상호적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라반은 자기 인생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상호적인 관계에서, 특히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 성도들 간의 관계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먼저 손을 내밀고 사랑과 존경을 베푸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곁에서

라헬과 레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창 31:16)

이 말은 신앙 고백에 가까운 발언입니다. 자기들이 직접 보아도, 남편 야곱의 물질이 늘어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분명했습니다. 어떻게 얼룩무늬 짐승 중 튼튼한 것만 그토록 많이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목격하고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곁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 곁에 있으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야곱이 이 집에 오지 않았더라면, 라헬과 레아는 아버지 라반과 평생을 살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시는 것을 볼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그 집에 없었으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기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축복의 계보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었고, 하나님은 이 사람을 복 주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이런 사람 곁에 있으니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 곁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습니다.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깨닫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제 준비가 되었습니다. 아내들에게 허락을 받았고, 재산도 늘어났으며,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도 있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라반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합니다.

"그 모은 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창 31:18-19)

라헬이 아버지 라반의 드라빔을 도둑질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야곱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드라빔이란 고대 근동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가정 수호신 우상을 가리킵니다. 손바닥만 한 것도 있고 제법 큰 것도 있었는데, 나중에 라헬이 낙타 안장 밑에 깔고 앉아서 숨겼다는 것으로 보아 작은 크기였음이 분명합니다. 드라빔은 그 가정에 물질적 풍요와 번영과 안녕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던 우상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대대로 장자권을 물려줄 때 드라빔을 유산으로 함께 전승했습니다. 그만큼 드라빔은 우상숭배의 핵심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라반이 드라빔을 섬기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라반은 자기 입으로 하나님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셔서 네가 우리 집에 온 이후부터 복을 주셔서 우리가 부자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드라빔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였던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런 '라반'이 있습니다. 몸은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고, 입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을 부르고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섬기는 혼합주의자들입니다. 입으로는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면서도, 심령 깊숙한 곳에서는 출세와 번영과 부귀와 물질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향력 없는 20년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야곱의 모습입니다. 야곱은 이 집에 자그마치 20년을 살았습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약속의 계승자,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이 집에 와서 20년을 지냈는데, 그 집의 영적 흐름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20년을 살았는데, 그 집은 여전히 드라빔을 섬기는 집이었습니다. 야곱이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드라빔을 훔치고 도둑질할 정도로, 그의 아내조차 우상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20년 동안 야곱은 무엇을 한 것입니까. 그 집에서 영적 물결을 일으키고 흐름을 좌우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영향력 없이 그 집에서 20년 동안 먹고살았을 뿐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어떠했습니까. 평생 이방인의 땅 가나안에서 살았는데,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헷 족속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세우신 지도자입니다. 당신이 땅을 택하십시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에서 "당신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세운 지도자"라는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브라함이 불신자들에게 거대한 영적 영향력을 끼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어떠했습니까. 블레셋 사람들과의 우물 다툼에서 다투지 않았습니다. 땅을 파면 우물이 나오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빼앗으면 다른 데로 가버렸습니다. 또 땅을 파고 우물이 나옵니다. 그러기를 세 번, 이제 블레셋 사람들이 오히려 두려워졌습니다. 도대체 저 사람 뒤에는 누가 계신 것인가. 그래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창 26:28)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영향력 있는 삶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삭도 이러했고,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그러했는데, 야곱은 20년을 그 집에 살면서 어떤 영향력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왜 그런 인생을 살았을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는 사명자가 아닌 생활인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14년 동안은 한 여인을 쫓아다니느라 거기에만 골몰했고, 그 이후에는 처자식이 많이 생기니 12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건사하느라, 네 명의 아내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툼에 휘둘리며, 먹고 사느라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인생, 입에 풀칠하느라 바쁘게 사는 인생이 되어 사명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는 본래 사명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 주신 사명, 약속의 계보를 이어가는 사람이었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버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3-14)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때 거대한 바람이 일어나고, 그 바람 속에 사람들이 함께 들어가고, 영적 분위기가 바뀌어 버립니다. 바울이 가면 감옥의 분위기도 바뀌었습니다. 바울이 가면 이방인들이 사는 동네의 분위기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푯대가 있었기 때문이고,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는 곳의 분위기가 바뀝니까. 내가 사는 곳에 영적 분위기가 바뀌어야 합니다. 나로 인해서 이 지역이 바뀌고, 나로 인해서 가정이 바뀌고, 일터가 바뀌어야 합니다. 푯대가 있고, 사명자로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먹고 사는 일에만 천착하며 살다 보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망각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부디 영향력 있는 인생이 되어서, 내 주변에 있는 드라빔을 소멸할 수 있는 영적 거장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도피의 유혹, 직면의 용기

라헬은 왜 드라빔을 훔쳐 간 것일까요. 가만히 돌아보면, 라헬이 불안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입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고백하기는 했지만, 한 번도 떠나보지 않은 고향을 떠나려 하니, 하나님 한 분만 믿고 가기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버지가 섬기는 우상은 손에 딱 들어오고 잡힙니다. 라헬도 역시 혼합주의자의 다름 아니었습니다. 드라빔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고, 물질도 섬기는 혼합주의자가 바로 라헬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 (창 31:20)

이 말씀이 가장 충격적입니다. "가만히 떠났더라." 가만히 떠난다고 떠나집니까. 야곱 혼자 야반도주하는 것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네 명의 아내가 있고, 열두 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식구만 해도 이미 열여섯 명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복 주신 수많은 소와 양 떼, 짐승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모두 이끌고 떠나는데, 가만히 떠난다고 되겠습니까. 라반이 드라빔을 도둑맞은 것을 알고 뒤쫓아 오면 금방 따라잡힐 텐데, 이렇게 미련한 결정을 야곱이 내리고 만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한 것일까요. 이것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것이 야곱의 인생 문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직면하기 싫어하고, 정면 돌파하기를 꺼리며, 일단은 피하고 보는 것. 그의 인생이 늘 그러했습니다. 돌아보면 그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형에게 사과 한 번 하지 않고 밧단아람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형, 내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싶은 건 사실이었는데,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어. 형, 나를 용서해 달라." 이렇게 한 번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일체 없이 도망가 버렸습니다. 직면하기 싫으니까 도주해 버린 것입니다.

밧단아람에 와서도 장인 라반이 20년 동안이나 드라빔을 섬기는 것을 보면서, 직면하지 않았습니다. 부딪혀 봐야 좋을 것 없다고 생각하니까 말하지 않고 피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에서가 나중에 얍복 강가에서 사백 명의 장정을 이끌고 옵니다. 일이 더 커져 버린 것입니다. 그때 직면하지 않았으니까, 그때 부딪히지 않았으니까,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딪히기 싫으니까 도망가 버리는 것, 두려우니까 나중에 따라잡히더라도 부담스러운 사람을 피하고 보는 것. 이래서는 성장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성장은 직면하고 돌파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은 우리 앞에 문제가 있고, 시험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로 무릎 꿇고 "이 문제를 해결하게 해 주십시오" 하며 붙잡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부여잡고 이 문제 앞에서 넘어서게 해 달라고 직면하고 부딪쳐야 합니다. 돌아간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피하면 나중에 집채보다 더 큰 파도를 만나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마가 요한이 동행했습니다.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마가 요한은 부담이 너무 커서 야반도주해 버렸습니다. 훗날, 바울의 말년이 되어서야 마가 요한을 불러들였고, 둘은 극적으로 화해했습니다. 그러나 그 오랜 기간 마가 요한은 선교의 동역자로 쓰임받지 못했습니다. 도망가 버렸으니 성장이 일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가기 위해서는 직면해야 합니다. 사탄은 곳곳에 매력적인 오답을 숨겨 둡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드라빔도 섬기면 좋지 않겠느냐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라고,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도망가는 것도 결코 정답이 아닙니다. 부딪히고 직면하고 넘어서고 돌파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길 수 있습니다.

야곱은 가만히 떠나버렸지만,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하나님을 붙잡고 정면으로 맞서는 것. 매력적인 오답의 유혹을 분별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순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 이 믿음의 길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걸어가야 할 여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이 말씀을 깊이 새깁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일하심을 고백합니다. 사탄은 곳곳에 덫을 놓고 매력적인 오답을 숨겨 두었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라고, 하나님도 섬기고 물질도 섬기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 길을 따라가면 그곳이 사망의 길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직면하지 말고 도망가라고, 힘든 일은 피하라고 사탄은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야곱은 그 속삭임에 넘어가 가만히 길을 떠나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주여,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부딪히고 직면하기 원하오니, 하나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이겨낼 수 있는 은총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