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본문: 창세기 31:21-29
자주 사용하지는 않지만 전해 내려오는 고사성어 중에 '여장절각(汝牆折角)'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의 집 담벼락이 내 소의 뿔을 부러뜨렸다'는 뜻으로, 상대의 과실을 빌미 삼아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 하는 행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보다 우리에게 더 익숙한 표현은 '적반하장(賊反荷杖)'일 것입니다.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뜻입니다. 어느 집에 침입하여 온갖 물건을 쓸어 담은 도둑이 되레 주인을 꾸짖습니다. "도대체 문단속을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방치합니까? 그러니 도둑맞지 않습니까?" 이런 도둑이 과연 있을까 싶지만, 세상에는 염치를 모르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착한 사람들은 그저 당하고만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입니다. 이러한 악한 자들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먼저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 생활을 올바로 하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우리 인생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단도리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값을 물어내라 하는 자들, 도둑질을 다 해 놓고 회초리를 드는 자들이 언제나 우리 곁을 얼쩡거리며 위협합니다. 그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라반이 바로 적반하장의 전형적 인물입니다. 안타깝게도 야곱은 그에게 빌미를 주고 말았습니다. 틈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결국 야곱이 위기에 빠졌는데,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를 살피시고 돕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어떻게 감찰하시고 인도하시는지, 우리가 이런 자들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목숨을 건 도주, 집요한 추격
"그가 그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삼 일 만에 야곱이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창 31:21-22)
야곱은 야반도주해 버렸습니다. 자녀들과 아내들과 짐승들을 모두 이끌고, 라반에게 알리지 않은 채 길을 떠나버렸습니다. 라반이 양털 깎으러 간 그 틈을 타서, 멀리 떠나 있는 사이에 그냥 떠났습니다. 라반이 이 사실을 안 것은 삼 일이 지나서였습니다. 그냥 갈 사람이 갔거니 하고 "잘 가거라" 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라반은 그런 인물이 아닙니다. 끝까지 쫓아옵니다.
"라반이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이르렀더니" (창 31:23)
라반이 살았던 하란에서 야곱이 도망가다 붙잡힌 길르앗까지의 거리는 약 640킬로미터에 달합니다. 삼 일이 지나서야 라반이 이 사실을 알았고, 칠 일을 쫓아가서 붙잡았으니 야곱은 열흘 안에 640킬로미터를 간 셈입니다. 하루 평균 약 64킬로미터를 도망간 것입니다.
이 숫자가 피부에 잘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당시 유목하는 사람들이 짐승을 몰고 하루 종일 걷는 거리, 짐승에게 풀을 뜯기고 물을 먹이면서 이동하는 거리는 약 10킬로미터 내외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혼자 간 것도 아니고, 여인들과 자녀들과 짐승들을 모두 이끌고 하루에 64킬로미터를, 그것도 열흘 동안 지속적으로 달렸습니다. 그것은 목숨을 건 행군이었습니다. 그만큼 야곱은 라반에게서 절박하게 벗어나고 싶었고, 그래서 온 가족이 목숨을 걸고 640킬로미터를 달려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라반이 그들을 '쫓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뒤쫓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출애굽기 14장 9절에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아갈 때 사용된 동사와 동일합니다. 열 가지 재앙 이후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을 후회한 바로가 군대를 보내어 뒤쫓게 하는데, 그때 사용된 바로 그 동사입니다. 이 동사는 군사 작전을 수행할 때 쓰이는 표현입니다. 라반은 군대를 이끌고 군사 작전에 버금가는 추격전을 벌이면서 야곱 일행을 뒤쫓아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야곱은 왜 그토록 목숨을 걸고 도망가야만 했으며, 라반은 왜 그렇게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추격을 감행해야만 했던 것입니까?
빌미를 준 자의 고통
이 의문은 창세기 30장 25절과 26절을 보면 이해됩니다.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창 30:25-26)
야곱이 떠날 결심을 하고 라반에게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내가 외삼촌에게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셔서 떠나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시점은 야곱이 라반의 집에 온 지 이십 년이 지난 때입니다. 네 명의 아내가 있습니다. 레아와 라헬, 빌하와 실바가 있고 열두 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이미 그의 처자식인데 왜 굳이 '달라'고 말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냥 데리고 떠나면 될 일인데 왜 라반에게 허락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까?
당시 고대 근동의 관습법에 따르면, 한 남자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려면 그녀의 아버지, 곧 장인에게 결혼 지참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 여인이 친정에서 평생 일하며 제공했을 노동력에 대한 대가를 물질로 치르고 여인을 데려와야 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늙은 종 엘리에셀을 보내어 리브가를 데려올 때, 은금과 패물을 넉넉히 안겨 주고 데려왔던 것처럼 야곱도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빈털터리였습니다. 라헬을 사랑했기에 몸으로 때웠습니다. 칠 년을 일하고 라헬을 받으려 했는데, 눈 떠보니 레아가 누워 있었습니다. 칠 일간의 잔치를 망치지 않으면 라헬을 주겠다는 조건에 또 칠 년을 일했습니다.
그렇게 이십 년 동안 자기 몸으로 대가를 치르고 처자식을 모두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라반은 법적 권리를 이양해 주지 않습니다.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네가 결혼 지참금을 한 푼도 가져오지 않았잖아. 내가 너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돌봐주었는데, 그걸로 퉁치자." 이런 식입니다. 라반이 얼마나 악한 인간입니까?
야곱은 그래서 라반에게 처자식을 보내 달라고 말해 봐야 들어줄 리도 없을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자신도 안심할 수 없으니, 그냥 야반도주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라반에게 빌미가 됩니다. 법적 권리를 이양받지 않은 상태에서 도망가 버린 것 아닙니까? 더구나 라헬이 드라빔을 도둑질했습니다. 라반으로서는 쫓아가서 여차하면 야곱을 해치고 딸들과 손자들을 되찾아오며 얼룩무늬 짐승들도 모두 가져올 핑계거리를 잡은 셈입니다. 꼬투리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며 칠 일 동안 쫓아가 결국 잡은 것입니다.
라반은 본래 그런 인간이니 그렇다 치고, 이 상황에서 야곱이 잘못한 것은 없습니까? 야곱이 결정적으로 잘못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창 31:2-3)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너는 고향으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이 이렇게 약속하시면 겁날 것이 없습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당당하게 라반에게 가서 "딸들을 주십시오. 내 처자식을 주십시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고 선포하면 됩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인생을 돌아보면, 벧엘의 하나님이 줄곧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벧엘에서 "내가 너를 지키고, 이곳으로 돌아올 때까지 너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이십 년 동안의 힘든 시간을 함께 걸어오셨습니다. 야곱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은 그를 부요하게 하셨고, 라반의 집이 부흥하고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여전히 지키고 돌보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라반이 너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라반이 거대한 산처럼 보이고 넘을 수 없는 성처럼 보였습니다. 그에게 감히 대들 엄두도 나지 않았고, 처자식을 달라고 말할 용기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도망가 버린 것입니다.
절대 상수이신 하나님
우리가 수학이나 통계학에서 상수와 변수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상수는 변하지 않는 수입니다. 안정적이고,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변수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 변할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 개념은 수학과 통계학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 생활 속에 그대로 들어와 있습니다.
예컨대 삼십 대의 젊은 남녀가 만나 결혼했습니다. 두 사람이 인생 계획을 세웁니다. 자녀는 몇 명을 낳을지, 어떻게 기를지, 돈이 얼마나 들 것인지, 은퇴 이후의 노후는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계획을 세웁니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들이 볼 때 탄탄한 직장입니다. 매달 월급이 꼬박꼬박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직장과 월급을 자기 인생의 상수로 잡았습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년 건강 검진을 받는데 아픈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족력도 없습니다. 건강 또한 인생의 상수로 잡았습니다.
변수도 있습니다. 여유 자금으로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를 했습니다. 주식은 등락을 거듭하고, 부동산도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합니다. 오르면 좋지만 폭락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으니 그것은 변수로 둡니다. 그런데 자기 인생의 상수로 잡았던 것이 삶을 마치는 날까지 상수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 그렇습니까? 살다 보면 상수가 변수로 돌변합니다. 그토록 탄탄했던 직장이 한순간에 흔들리더니 부도가 납니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어버립니다. 살 길이 막막해집니다. 건강하다고 자부했는데 갑자기 몸이 아프고, 수술을 해야 하고, 돈이 끝없이 들어갑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생의 고난이라 부릅니다. 내 인생의 상수로 잡았던 것이 흔들리고 무너지고 송두리째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그것이 인생의 고난입니다.
변수는 변수대로 요동치고 상수마저 상수가 아닌 이 세상에서, 이것을 신앙의 영역으로 가져와 봅니다. 믿음의 영역에서 영원토록 변치 않는 상수는 누구이십니까?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변치 않는 절대 상수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영원토록 변치 않으십니다.
야곱에게도 절대 상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태중에서부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밧단아람으로 떠날 때,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떠날 때, 벧엘에서 하나님이 그를 만나 주시고 지켜 주시며 "너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라반의 집에서 이십 년을 살면서도 하나님은 그에게 든든한 의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영원한 상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변치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라반은 어떤 인간입니까? 그 속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종잡을 수 없는 변수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것을 뒤바꾸어 생각했습니다. 거대한 산처럼 라반을 상수로 여겼습니다. 절대로 변치 않을 사람,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을 사람, 그 앞에 서면 두렵고 떨리고 겁이 나서 도망가 버려야 할 사람으로 라반을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절대 상수로 붙잡고 라반에게 도전했으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라반 앞에서 선포했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신뢰하지 않고 라반을 상수로 삼은 것이 야곱의 실패였습니다.
우리 인생에 믿을 만한 구석이 있습니까? 직장을 믿습니까? 사람을 믿습니까? 내 건강을 신뢰하십니까? 그것은 절대적인 상수가 될 수 없습니다. 변합니다. 사람도 변하고 모든 것이 흔들리고 변합니다. 우리 인생을 지탱하는 절대 상수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만이 지금까지 우리 인생을 붙들어 주셨고, 앞으로도 인도하시며,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그날까지 우리를 세우시고 함께하실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 성공한 이유는 하나님을 절대 상수로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요단강 앞에 섰을 때, 마침 곡식 거두는 때라 요단강이 창일하여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앞에 저 강을 어떻게 건너나 하는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배도 없는데 이 많은 백성이 저 강을 어떻게 건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에 들어가는 순간 강물이 멈출 것이라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흘러 넘치는 요단강이 상수였습니다. 변치 않는 것,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상수로 붙잡았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그 강에 발을 디뎠습니다. 강물이 멈추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요단강은 흐를 수도 있고 멈출 수도 있으며, 마를 수도 있고 넘칠 수도 있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으면 그 강물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다음 여리고성 앞에 섰습니다. 여리고성은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무기가 없었습니다. 군사 훈련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성에 맞서 싸울 능력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루에 한 바퀴씩 성을 돌고,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아라. 나팔을 불고 큰 소리로 외쳐라. 그러면 성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앞에 있는 여리고성이 상수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상수였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상수로 붙잡았습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나가면 그토록 견고하고 단단한 성도 무너져 내리는 변수가 됩니다.
야곱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라반에게 도전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눈앞에 라반 같은 강한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창일하여 넘치는 요단강이 있다 할지라도, 견고하고 단단한 여리고성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있다면 그 강은 멈추어 설 것이고, 그 사람은 무너질 것이고, 여리고성처럼 산산이 조각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절대 상수로 붙잡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야곱에게 있어 절대적인 상수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창 31:24)
하나님은 라반에게 살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가만히 두면 야곱을 해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선악간에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선악'이라는 표현을 보면, 하나님도 야곱이 잘못한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손대지 말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철저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야곱 편에 서서 견고한 언덕이 되시고 피난처가 되시고 위로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빼앗겼을 때, 하나님이 바로에게 나타나셔서 손대지 말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도우신 하나님, 야곱을 도우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돕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반드시 도우시고 함께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라반이라는 인간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셨는데도 할 말을 다 합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속이고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창 31:26)
야반도주했다고 야곱을 책망합니다. 이어서 마음에도 없는 말까지 합니다.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으며 내가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으니 네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도다" (창 31:27-28)
이것이 진심이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속값을 물어내라는 말과 다를 바 없고, 도둑질 다 해 놓고 주인에게 회초리를 치는 것과 똑같습니다. 라반이 바로 이런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 어이없는 거짓말을 들어야 하는 야곱은 자기가 빌미를 제공했기에 이런 말을 듣는 것입니다. 야반도주해 버렸기 때문에, 라헬이 드라빔을 도둑질해 버렸기 때문에, 빌미를 제공하고 꼬투리를 주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듣는 것입니다. 라반 같은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것, 이것은 빌미를 이미 주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순결하고 순수하게 세상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끝없이 발목을 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인 상수로 붙잡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런 말을 듣지 않아도 됩니다. 당당하게 세상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엉뚱하게 라반 같은 사람에게 꾸지람을 당하고 손가락질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부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당하고, 어깨를 펴고, 정직하게, 그리고 용기 있게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여,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의 기댈 바위이시고 언덕이시며 우리의 도움이심을 고백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살피시고 도우시는 절대 상수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요단강도 갈라지고, 하나님 앞에서는 여리고성도 무너지고, 하나님 앞에서는 라반 같은 사람도 힘을 잃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주여,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능력과 사랑이 오늘 우리 삶을 붙잡는 힘과 은혜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주여, 우리가 이 삶을 믿음으로 온전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 세상의 라반 같은 사람들과 함께 뒤섞여 살아가는데, 그들에게 꼬투리를 주지 않고 빌미를 주지 않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순결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고, 빛과 소금이 되어 그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