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강 / 증거의 돌무더기 (31:43-55)

증거의 돌무더기

본문: 창세기 31:43-55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연합군을 이루었고, 반대편에서는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이 또 다른 축을 형성했습니다. 연합군의 주도국이었던 영국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오스만 제국을 고립시키는 것이 급선무라 판단하고, 아랍 국가들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때 영국이 제시한 조건은 전쟁이 끝나면 팔레스타인 땅을 아랍 국가들에게 넘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915년에 이루어진 이른바 맥마흔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자금난에 봉착한 영국은 자국 내 유대인 재벌이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에 긴급 자금을 요청합니다. 영국은 전쟁이 끝난 뒤 팔레스타인 내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917년 벨푸어 선언입니다. 맥마흔 선언과 벨푸어 선언은 결국 이중 계약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힘입은 유대인들은 1948년 5월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선포합니다. 아랍 국가들이 이를 좌시할 리 없었습니다. 네 차례에 걸친 중동 전쟁이 일어났고, 매번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이기고 지느냐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긴 쪽도 진 쪽도 심각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승리와 패배가 교차하는 그 지점이 끝이 아니라, 그 너머에는 수많은 인명 피해가 쌓여 갔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뉴스를 통해 목도하고 있는 것, 그 이상의 피비린내 나는 보복이 그 땅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맺은 약속, 인간이 맺은 조약은 이토록 허무합니다. 강력한 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약속 이행을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무효가 되어버렸습니다. 강력한 힘 앞에서 불평등 조약을 당해도 항변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야곱과 라반의 조약이 등장합니다. 액면 그대로 보면 라반이 훨씬 유리했을 것 같습니다. 라반 같은 사람이 야곱과 평등하게 조약을 맺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뒤에 계셨고, 하나님이 주도하셨고, 함께하셨기에 야곱에게 결코 손해가 돌아가지 않게 하셨습니다. 오히려 라반을 두렵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사람을 이렇게 인도하시고 손해 보지 않게 이끌어 가시는 분이심을 오늘 본문은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내 것이라는 집착, 놓지 못하는 탐욕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창 31:43)

라반의 말은 탐욕 그 자체입니다. 딸들도 내 딸이요, 자식도 내 자식이요, 양 떼도 다 내 것이라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전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아는 라반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탐욕이 줄줄 흐를 정도로 그는 욕심 많은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 뒤에 이어지는 말이 논리적으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내가 내 딸들과 그들의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다 자기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힘과 권력을 가지고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군사들을 이끌며 640km를 뒤쫓아왔으면서도, 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쳐버리고 빼앗아 가면 그만인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난밤에 현몽하셨습니다. 선악간에 야곱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그에게 어떤 말도 하지 말고 어떤 짓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하심을 분명히 보았기에, 어떤 실력 행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라반을 비난하지만, 사실 라반과 비슷한 구석이 적지 않습니다. 탐욕스럽고, 붙들고 있는 것을 놓지 못합니다. 라반이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자기 자식들과 물질입니다.

딸들을 시집보냈으면 자기 딸이 아닌 것입니다. 혈통상 자기 딸이지만, 시집보냈으면 분리시키고 독립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내 딸'이라고 말하고, 그들이 낳은 손주들까지 '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가정을 세우시고 가정의 원리를 말씀하실 때,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떠나야 합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야 둘이 한 몸을 이루고 가정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떠나려 해도 부모가 떠나보내지를 않습니다.

부모의 역할은 잘 키워서 떠나보내는 데 있습니다. 떠나보내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영적인 독립입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설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이 자기 인생에 적용하며 살아낼 수 있도록 훈련시켜서 떠나보내야 합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분별할 수 있도록 키워서 보내야 합니다.

경제적인 독립도 중요합니다. 딸들을 시집보내고 아들들을 장가보냈는데도 부모가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시집장가 보냈으면 그들이 스스로 삶을 꾸려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도 행복하고 부모도 행복합니다. 정서적인 독립도, 경제적인 독립도, 신앙적인 독립도 부모가 최선을 다해 키우고, 내보내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라반은 딸들을 시집보내고 자녀를 여럿 낳았음에도 여전히 내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두가 불행해지는 길입니다. 자녀들을 여전히 내 것이라고 쥐고 있으면, 내가 세상을 떠난 뒤 내 자녀는 누가 돌봅니까? 놓지 못하고 살고 있다면 모두가 불행해질 뿐입니다.

라반은 물질도 놓지 못합니다. 근본적으로 라반은 이 모든 것이 다 자기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원래 내 것이었던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태어나면서 우리는 적신(赤身)으로 왔습니다. 빈손으로 왔습니다. 아무것도 내 것이 없었습니다.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하나 채워주신 것입니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라반은 야곱이 가진 양 떼까지 내 것이라며 끝없는 탐욕을 부립니다.

성경은 물질은 내 것이 아니니 나누고 흘려보내라고 말합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전 11:1-2)

네 떡을 물 위에 던지라 했습니다.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눠 주라고 하셨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있으면 나눠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재앙이 임할 때, 환란이 임할 때 도로 찾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솔로몬은 부귀와 영화와 권세를 다 가진 인물입니다. 그가 모든 것을 소유했지만, 인생 말년에 전도서를 기록하면서 평생 나누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이 말씀을 남겼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에 빠진 것을 보고, 그가 다니며 개척했던 마게도냐 지역 교회와 아가야 지역의 고린도 교회를 돌면서 연보를 모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했습니다. 한 교회가 위기에 처하면 다른 교회들이 돕고, 또 다른 교회가 어려움에 빠지면 또 다른 교회들이 일어서서 도울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원래 내 것이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가정에 하나님께서 이만큼 먹고 살게 하셨으면, 나눌 수 있을 때 베풀고 나누는 것이 지혜입니다. 라반처럼 붙들고 움켜쥐고 있으면, 물질이 근심이 되어 자신을 찌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눌 수 있을 때 베풀고 흘려보내야 합니다. 쌓아 두면 다툼만 일어날 뿐입니다. 나누고 베풀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곳에 드리면, 우리는 라반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돌무더기 위에 새겨진 평등한 언약

이제 라반과 야곱은 조약을 맺습니다.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창 31:44)

두 사람이 언약을 맺습니다. 그런데 의심의 눈길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라반과 야곱이 조약을 맺다니,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것 같고, 숨은 뜻이 있을 것 같습니다. 라반을 어떻게 믿고 야곱이 언약을 맺느냐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조약은 지극히 평등한 조약이었습니다.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창 31:47)

사막에 아무것도 없으니 돌을 가져다가 높이 쌓았습니다. 라반은 그것을 아람 방언으로 '여갈사하두다', 곧 '증거의 돌무더기'라 불렀고, 야곱은 히브리 방언으로 '갈르엣', 역시 '증거의 돌무더기'라 불렀습니다. 만약 이것이 불평등 조약이었다면 야곱은 이름을 붙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라반만 이름을 붙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라반도 이름을 붙이고 야곱도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이것이 지극히 평등한 조약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라반이 어떻게 야곱과 이토록 평등한 조약을 맺었을까요? 두 사람이 약속을 했다면 분명 내용이 있을 터인데, 도대체 무슨 내용으로 언약을 맺었을까요?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창 31:51-52)

해치지 말라는 조약입니다. 내용은 상호 불가침 조약입니다. 이 증거의 돌무더기를 기준으로 나도 넘어가지 않을 테니 너도 넘어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라반은 군대를 일으켜 640km를 쫓아왔습니다. 야곱을 치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합니다. 넘어가지도 않을 테니 넘어오지도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태도가 바뀐 이유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라반은 야곱 뒤에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알고는 있었습니다. 20년 동안 자기 집에서 야곱이 양을 치고 염소를 치고 소를 치는 동안 단 한 마리도 낙태한 적이 없었습니다.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도대체 이 사람에게는 어떤 비밀이 있기에, 그가 손대는 것마다 흥하고 하는 것마다 형통하는가? 처음에는 우연이려니 생각했지만, 날이 갈수록 시간이 지나도 한결같은 것을 보면서, 야곱의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 누군가가 확실해진 것은 그 전날 밤 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현몽하시어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마라, 아무 일도 하지 마라, 손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제야 라반은 겁이 났습니다. 20년 동안 야곱을 학대하고, 야곱에게 한 짓들이 있으니, 등골이 서늘해지고 소름이 돋았습니다. 큰일 날 뻔했구나. 하나님께서 그 20년 동안 자기를 징계하셨으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재빨리 조약을 맺자고 한 것입니다. 선을 긋고 넘어오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라반에게는 본받을 구석이나 배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눈치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손대면 안 된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챘습니다. 기민하고 예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하시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더 이상 손대지 않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 정도 눈치는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직접 꿈에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데리고 온 군대를 동원하여 야곱을 쳤다면, 하나님이 그를 가만히 두셨겠습니까?

당신의 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방식

이 사건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어떤 방식으로 지키고 돌보시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여기서 야곱은 이 당시의 야곱이기도 하고,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적으로 부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각자가 다 야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리브가의 태중에서부터 야곱을 불러 '내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야곱이 왜 그토록 자신감이 없었습니까? 라반의 집에 가서 눈치를 보며 생활인으로만 살았지, 사명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라반에게 눌려서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20년 동안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는 동안 그곳에서 숨죽이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내 등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당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왜 눈치를 보고, 하나님의 백성이 왜 20년 동안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야곱에게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시고, 이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하게 선언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사 43:5-6)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동서남북 사방에 명령하십니다. "내놓으라, 가두어 두지 말라, 오게 하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두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다 불러 모으시겠다 하시고, 사방 팔방으로 뻗어 나가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야곱은 등 뒤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느끼고 있으면서도,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스스로 갇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갇혀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자신감 없이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숨죽여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거기서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 한 분 믿고 일어나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야곱과 라반의 언약을 통해서, 그 조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 바로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하게 여기시는지 모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언약과 조약들이 나옵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은 조약입니다.

창세기 15장에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10년이 지나도록 자식을 낳지 못합니다. 낙심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말합니다. "이제 저도 포기하겠습니다. 우리 집 종 다메섹 엘리에셀이 나의 후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하시며, 짐승을 잡아 오라고 하십니다. 잡은 짐승을 반으로 쪼개어 길 양쪽에 놓고, 가운데로 길을 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길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 15:17-18)

고대의 왕들이 서로 약속을 맺을 때, 짐승을 잡아서 반으로 쪼개고 양 길가에 세운 뒤 가운데 길을 만들어, 그 사이를 두 왕이 함께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둘 중 하나라도 이 약속을 어기면 이 짐승들처럼 쪼개어져도 좋다는 의미입니다. 이 언약을 저주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저주 언약의 당사자가 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비천한 인간 아브라함과 왜 이런 언약을 맺으셔야 합니까?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절대적으로 손해 보는 불평등 조약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언약의 백성입니다.

내 등 뒤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이 은혜가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도우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야곱처럼 여전히 라반 같은 존재를 두려워합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두려워하고, 그 안에서 닥치는 대로 생활인으로만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그 사명의 계승자가 야곱임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생활인으로 20년을 사니까 떨쳐 일어서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작정하고 사명자로 살겠다고 일어서니 하나님께서 전폭적으로 지지하시고, 전폭적으로 도와주셨습니다. 우리가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아가겠다고 하면, 믿음의 백성이 길을 가겠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사방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가두어 두지 말라 하시고, 길을 열어주시고, 힘을 주시고, 승리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결론

야곱은 20년 동안의 라반의 집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길을 떠납니다. 돌무더기 위에 세워진 언약은 라반의 두려움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뒤에 서 계셨기에 라반이 두려워했고, 불평등할 수 있었던 조약이 평등한 조약으로 체결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의 뒤에 서 계십니다. "너는 내 것이라"고 부르셨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갇혀 있지 말고, 힘을 내어 일어서고, 믿음의 길을 온전히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을 떠나 사명의 길로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들을 떨치고 일어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나아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라반 같은 사람, 지독하고 염치없으며 탐욕스러운 사람에게 갇혀서, 내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고 내 마음속에서 나를 이끄시며 내 앞에서 오라고 손짓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보아도 못 본 체하며 20년을 살았던 야곱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시고, 어떤 것도 너를 가두지 못할 것이니, 동서남북 사방이 문을 열고 너를 부르며 너를 구원해 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믿고 우리도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발목을 잡고 있는 것들을 떨치고 일어서게 하여 주시고, 우리 존재의 숨통을 죄고 있는 것에서 다시금 숨 쉬게 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일어서서 달려가고 건너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을 더하여 주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