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나임
본문: 창세기 32:1-20
고려 말기, 공민왕은 소위 개혁 군주로 불리는 인물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지속된 원나라의 수탈과 압제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공민왕은 어떻게든 나라를 새롭게 하고 회복시키며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개혁 군주 아래에는 자연스럽게 개혁의 뜻을 품은 신하들이 모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개혁의 마인드를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철학을 공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급진적 개혁파도 있었고, 온건한 개혁파도 있었습니다.
급진적 개혁파는 고려라는 간판을 아예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고려의 유효기간은 이미 끝났으므로 처음부터 새롭게 갈아엎고 새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급진적 개혁파의 중심인물이 바로 정도전이었습니다. 반면 온건한 개혁파도 있었습니다. 하나부터 차근차근 고쳐가면 나라가 새로워질 수 있다고 보았고, 고려라는 간판을 떼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 대표주자가 정몽주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아무리 생각해도 고려를 그대로 두고는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킬 파트너를 찾았는데, 그 인물이 바로 이성계였습니다. 당시 이성계는 왜구를 소탕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며 백성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성계와 정도전은 손을 잡고 역성혁명을 이루어내어 조선을 건국합니다. 이성계는 정도전을 통해, 정도전은 이성계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었습니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뒤 정도전에게 나라의 설계를 맡겼습니다. 정도전은 경국대전의 기초가 되는 조선경국전을 저술했습니다. 법을 만들고, 한양을 건설하며, 경복궁과 사직단과 종묘와 사대문을 세워 조선의 기틀을 놓았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정도전이 만든 틀 위에 이성계가 올라앉은 것입니다. 만약 정도전이 없었다면 이성계는 태조 이성계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평범한 인간 이성계를 태조 이성계로 만든 사람이 바로 정도전이라는 인물입니다.
한 나라가 세워질 때 그 나라를 설계하는 사람이 있고, 그 설계대로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설계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거대한 하나님의 나라도 위대하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각각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빚어가시고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꿈과 비전과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시면, 우리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계획을 붙잡으면 됩니다. 거기에 올라타고 믿음의 길을 달려가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아름다운 영광의 날을 꿈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위해 이미 준비하신 것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위해 준비하신 선물, 야곱은 그것을 붙잡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 선물을 붙잡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계획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빚어지는 비극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찾아오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의 이십 년 세월을 청산합니다. 돌아보면 고난이었고 힘든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은혜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손해 보지 않게 하셨고, 그를 부자 되게 만들어주셨으며, 그를 지켜주셨습니다. 이십 년의 세월을 정리하고 이제 라반과 헤어집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라반이 동등하게 조약을 맺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라반이 야곱을 해칠 수도, 괴롭힐 수도 없습니다.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은 것입니다. 야곱은 라반을 뒤로하고, 그 치욕의 이십 년을 뒤로하고, 벧엘을 향하여 고향 땅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들을 보내 야곱을 만나게 하십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창 32:1)
이 짧은 말씀은 논리적으로, 구조적으로, 문법적으로 조금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자연스럽게 쓰려면 "야곱이 길을 가는데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난지라"라고 해야 훨씬 매끄럽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이렇게 주신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난지라"라고 했다면, 그것은 우연한 만남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은 자기들의 일을 하고 있었고, 야곱은 길을 가고 있었으며, 야곱이 길을 가다가 그들을 우연히 마주친 것이 됩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면 그만인 만남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주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자들이 목적을 가지고 야곱을 찾아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며,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그들을 야곱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사자들을 야곱은 어떻게 영접했습니까?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창 32:2)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자, 천군천사들이 하나님의 군대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이 서 있는 그 땅을 마하나임이라 불렀습니다. 마하나임은 '하나님의 군사들'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천군천사를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고, 그곳을 마하나임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야곱에게 천군천사들을, 하나님의 군대를 보내셨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며 언약의 성취입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이제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밧단아람을 떠나 벧엘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돌아가라."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말씀을 지금 지키고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최근의 약속만이 아닙니다. 이십 년 전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길을 떠날 때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 28:15)
"내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겠다" 하셨습니다. 이 '지킨다'는 말씀에 쓰인 히브리어 '샤마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가장 먼저 창세기 3장 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배경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선악과를 먹은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다시 들어와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키신 것입니다.
이때 '지키다'에 해당하는 '샤마르'는 '울타리를 치다'라는 뜻입니다. 빼곡하게 울타리를 쳐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창세기 28장 15절에 그대로 등장합니다. "내가 너를 지키겠다(샤마르하겠다)." 이 말씀은 곧 "야곱아,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를 울타리로 둘러주겠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나의 손이 강력한 울타리가 되어 악한 사람들이 너를 범하지 못하도록, 악의 세력이 너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내가 너를 샤마르하겠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 그대로 하나님은 라반의 집에서 행동하셨습니다. 때로는 피곤한 일도, 때로는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라반이라는 사람이 야곱을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울타리가 되어주셨고, 넘어오지 못하도록 강력한 보호막이 되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십 년 동안 하신 일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제 야곱이 길을 갈 때 다시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샤마르하시는 것입니다. 군대를 보내어 그와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이토록 요란하게 야곱을 지키신 적이 없었습니다. 라반의 집에서는 하나님이 조용히 그를 돌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하나님의 사자들, 천군천사들, 군대까지 보내어 그를 지키고 계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야곱의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금 야곱은 에서를 만나야 합니다. 이십 년 전 에서와 철천지원수가 되어 헤어졌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겠다고 날뛰었고, 야곱은 에서를 피해 도망갔습니다. 이제 벧엘로 돌아오는데, 에서가 야곱을 가만히 두겠습니까? 군사를 이끌고, 싸움에 능한 장수 에서가 들이닥칠 텐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에서에게서 야곱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당신의 천군천사, 하나님의 군대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토록 섬세하고 세심하며 세밀하게 야곱을 지키고 돌보고 계신 분입니다. 이 하나님은 성경 도처에서 믿음의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조카 롯이 왕들의 전쟁에 휘말려 포로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은 318명의 집에서 기른 군사들을 이끌고 야간 기습 작전을 감행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 작전은 무모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들어가면 잡혀 죽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셨습니다. 승리하게 하시고, 롯과 그의 가족들을 모두 구출해 건져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샤마르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이고 약속의 아들이기에 하나님이 지켜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평생 전쟁터에서 살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싸움에 능한 장수였고, 사울에게 쫓겨 십수 년간, 압살롬에게 쫓겨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도망 다닌 세월이 긴 인생을 보냈습니다. 평생 전쟁 속에서 잔뼈가 굵었습니다. 인생을 정리하면서 자기 삶을 돌아보니 아찔한 순간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삼하 22:30-31)
자기 인생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방패가 되셨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지키지 않으셨다면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울타리가 되어주시고 방패가 되어주셨다는 것, 이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도, 다윗도, 야곱도 이렇게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신데,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셨고, 우리를 지킨다고 하셨으니, 때로는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천군천사들을 군대로 보내셔서 우리를 호위하게 하시고 지키시며 돌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시니,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지나쳐버린 야곱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천군천사와 군대를 보내어 호위하시는데 야곱이 이것을 어떻게 수용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창 32:3-5)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를 지나쳐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를 그냥 보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를 붙잡고 "나를 살려주기 위해 오셨군요. 이제 저는 당신의 뒤를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 군대에 올라타면 되었습니다. 그러면 걱정할 것도, 염려할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 하나님의 군대가 그를 호위하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그것은 그것이고, 자신이 계획한 것을 그대로 실행합니다.
야곱은 자기가 준비한 사람들을 에서에게 보냅니다. 에서의 동태를 살펴보라고 합니다. 분위기가 괜찮으면 에서에게 말해보라고 합니다. 양과 소와 낙타와 노비가 많이 있으니 형님께 선물로 드리겠다, 나를 용서해달라고 떠보라 합니다. 그렇게 자기가 계획한 것을 그대로 실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영접하지 않고, 자기의 사자를 보냈습니다. 이것이 야곱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야곱은 바보 같고 어리석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야곱 같은 처지에 놓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야곱은 라반이라는 큰 산을 하나 넘은 후, 벧엘로 올라오는 매 순간 그의 머릿속과 가슴속은 에서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제 에서를 만나야 하는데, 에서가 자녀들을 쳐버리면 어떻게 하나, 헤어질 때 나를 죽이겠다고 날뛰던 에서의 무서운 눈이 기억나는데, 가진 것이라고는 재산밖에 없으니 반이라도 뚝 떼어 에서에게 주고 노여움을 풀 수 있다면 하는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자기 생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가슴과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으니, 하나님의 군대가 곁을 지나가도 "하나님의 사자가 지나가는구나, 이곳을 마하나임이라고 하자" 하고는 그냥 보내버린 것입니다. 바로 곁에 나를 도울 분이 있고, 바로 곁에 내 도움이 있으며, 하나님의 군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붙잡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합니다. 내 생각이 다른 것으로 충만하게 가득 차 있으니, 내 생각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으니, 자기 생각으로 가슴이 가득 차 있으니 하나님이 보내신 군대에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윗 시대에 나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 광야 생활을 했는데, 아둘람 굴에서 만난 사백 명의 군사들과 먹고 살 길이 막막했기 때문에 나발 같은 부자들의 양 떼를 돌봐주며 궁여지책, 호구지책으로 삼았습니다. 나발의 양 떼와 염소 떼가 약탈당하지 않도록 돌봐주고 먹거리를 제공받았습니다.
하루는 나발의 집에 잔칫날이 열렸습니다. 양털 깎는 날이었습니다.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떡과 고기와 음식을 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나발이 술에 잔뜩 취해 있었습니다. 술 취한 나발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하여 다윗을 모욕합니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즘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삼상 25:10-11)
이것은 심각한 모욕이었습니다. 다윗은 격분하여 나발을 죽이려고 칼을 들고 일어섰습니다. 그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의 지혜가 살인을 막았습니다. 나중에 술이 깬 뒤 나발이 이 사실을 알고 몸이 돌같이 굳어서 죽어버렸습니다.
나발은 다윗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발에게 다윗이라는 큰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나중에 왕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나발이 다윗을 선대했더라면, 떡과 고기를 마음껏 제공했더라면, 훗날 다윗이 왕이 되고 나서 나발을 얼마나 높였겠습니까? 반드시 은혜를 갚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발은 술에 취해 있어서 다윗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나발이 술에 취한 것처럼, 야곱은 에서에 대한 두려움에 취해 있었습니다. 자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술에 취하면 시야가 좁아지고 판단이 흐려지며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엡 5:18)
마시는 술에만 취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술로 대표되는 것들로 마음과 생각을 채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염려로 가득 차 있으면 마치 술 취한 것처럼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눈앞에 있는데도 그냥 흘려보냅니다. 물질로 가득 차 있으면 눈에는 돈만 보이고, 하나님의 군대는 보이지 않습니다. 정욕으로 가득 차 있으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욕심과 정욕과 걱정과 염려를 버리고 비워내야 합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며 그것들을 비워내고, 깨끗한 영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며 내 주변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엉뚱한 짓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군천사가 야곱을 호위하겠다고 나타났는데, 그것을 이용하지 못하고 거기에 올라타지 못하는 야곱의 모습이 미련한 나발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어리석음이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걱정이 낳은 비극, 믿음이 여는 승리
야곱이 이런 선택을 한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창 32:6-8)
사자들을 보냈으나 협상조차 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들을 거느리고 야곱을 치기 위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야곱은 두렵고 답답해집니다. 해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머리에서 나온 해답이라는 것이, 사람도 두 떼로 나누고 짐승도 두 떼로 나누어 에서가 먼저 한 떼를 치면 그 시간을 벌어 뒤에 있는 사람과 짐승을 대피시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한심하고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이제야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도움을 구합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창 32:11)
하나님이 이 기도를 받으시고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이 미련한 야곱아, 눈 좀 떠라. 정신 좀 차려라. 내가 너를 형 에서의 손에서 건져내기 위해 천군천사를 보냈는데, 그 천군천사들이 너를 돕기 위해, 호위하기 위해 주변에 둘러싸여 있는데, 왜 그것을 그냥 보내느냐. 왜 그렇게 사느냐."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게 여기셨겠습니까?
결론
우리 속에 있는 염려와 걱정과 근심이 가득 차 있으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보이지 않습니다. 봐도 못 본 것처럼 그냥 지나갑니다. 시야가 좁아지고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야곱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보내신 마하나임, 그 군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올라타야 합니다. 그 군대와 함께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코 패하지 않고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질에 대한 걱정, 사람에 대한 걱정, 건강에 대한 염려, 여러 가지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이제 그것들을 비워내야 합니다. 그것들을 정리하고 비워내며,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 붙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이 열려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를 보게 되기를 바라며, 그 군대와 함께 믿음의 길을 아름답게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내가 너를 지키고 보호하겠다, 나의 손으로 너를 지키겠다, 강력한 울타리로 너와 함께하겠다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 약속을 지키셨고, 여호와의 사자들과 군대를 보내셨건만, 야곱은 에서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어서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군대를 감사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가 어떤 걱정으로 휩싸여 있습니까? 마음을 가득 채우는 염려가 무엇입니까? 물질에 대한 걱정, 사람에 대한 걱정, 건강에 대한 염려, 정욕에 대한 욕심, 여러 가지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이제 그것들을 비워내겠습니다. 그것들을 정리하고 비워내게 하시옵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 붙들고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믿음의 눈이 열려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를 보게 하시고, 그 군대와 함께 믿음의 길을 아름답게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