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강 /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32:21-25)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본문: 창세기 32:21-25

뛰어난 사람은 자기 공동체 안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금방 파악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 속으로 직접 들어가 해결해 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아예 판을 바꿔 버립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러나저러나 기존의 판을 수선하는 것보다 판 자체를 바꾸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 판단하고, 근본적인 전환을 시도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위대한 인물이고 역사를 바꾸는 인물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인물은 적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 가운데 하나가 코페르니쿠스입니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세계관은 천동설이었습니다. 지구가 중심이 되고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관측 결과 코페르니쿠스는 그 반대라고 생각했습니다. 태양이 중심이 되고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사후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 주장을 뒷받침하면서 과학적으로 입증되었고, 세상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미술 분야에서도 이런 인물이 있었습니다. 16세기 화가 가운데 티치아노라는 대가가 있었는데, 그의 작품 「엠마오의 저녁 식사」를 보면 등장인물들의 표정이 무미건조합니다. 식탁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고 양옆에 두 제자가 앉아 식사를 하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깨닫는 장면인데, 표정이 어둡습니다. 예수님도 무표정하고 제자들도 무표정합니다. 이것이 1530년 당시 16세기 화풍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런데 70여 년이 지나 카라바조가 같은 제목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역동적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수염이 없어 훨씬 친근하고, 양옆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 한 사람은 양팔을 벌리고 다른 한 사람은 의자를 밀치며 일어섭니다. 빛과 어둠의 묘한 대비가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카라바조를 기점으로 미술의 판도가 바뀌었고,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는 이후 루벤스와 렘브란트로 이어졌습니다. 판도를 바꾼 인물들입니다.

고기를 구워 먹어도 불판을 여러 번 바꿔야 하는데, 80평생 90평생을 사는 인생의 판을 몇 번이나 바꿔야 하겠습니까. 여러 번 판을 바꾸고 여러 번 인생을 갈아타야 비로소 하나님의 제자다운,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믿음의 패턴, 같은 신앙 생활, 같은 자기 방식을 고수해서는 성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은 지금 판을 바꾸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판을 뒤집으시고 야곱의 성장을 위해 원하시는 일을 도모하며 이끌어 가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바꾸어 가시는지를 함께 느끼고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야곱은 에서 때문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정을 아시고 천군 천사들을, 하나님의 군사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들을 알아보고 그곳을 마하나임, 곧 '하나님의 군대'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는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걱정으로 가득 차 있고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돕기 위해 보내신 천사들마저 그냥 흘려보내고 만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사자를 에서에게 보내 형의 동태를 살폈습니다. 사자들이 돌아와서 보고합니다. 에서가 400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이리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야곱은 두렵고 답답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기껏 생각해 낸 것이 자기 무리를 두 떼로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도 두 떼로, 짐승도 두 떼로 나누어 먼저 한 떼를 치면 나머지가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스스로 생각해 보면 한심한 일이었습니다. 400명의 장정 앞에서 한 번에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불면의 밤, 미해결의 대가

그래서 야곱은 불면의 밤을 보내는 중입니다.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창 32:21)

야곱은 우선 선물을 먼저 강 건너로 보냈습니다. 혹시라도 에서가 선물을 받고 마음을 돌이킬까 하는 기대였습니다. 조금이라도 형의 마음에 위안이 될까 해서였습니다. 그러고도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걱정이 그의 머릿속과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창 32:22-23)

밤에 일어나 자녀들과 아내들과 짐승들을 모두 건너보냈습니다. 이제 야곱은 홀로 남았습니다.

그가 이토록 불면의 밤을 보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해결해야 할 시기에 해결하지 못하고 놓쳐 버렸기 때문입니다. 과거 20년 전, 야곱은 에서를 속였습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장자권을 얻기 위해 형의 옷을 입고 아버지에게 머리를 들이밀며 축복 기도를 받았습니다. 장자권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나중에 에서가 이 사실을 알고 동생을 죽이겠다고 벼르자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멀리 밧단아람으로 떠나보냅니다.

그런데 그때 야곱은 어머니 등 뒤에 숨어 형에게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형, 내가 잘못했다"라고, 형이 때리면 맞겠다고 말했더라면 끝났을 일입니다. 차라리 그때 따귀 한 대 맞고, 멱살 한 번 잡히고, 흠씬 두들겨 맞았으면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을 일을 그는 어머니 등 뒤에 숨어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직면하지 않았습니다. 피해 버렸습니다.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그때 해결해야 할 일을 해결하지 못했기에 지금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온 것입니다.

그때는 야곱 혼자였습니다. 맞아 죽더라도 혼자 맞아 죽으면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잃을 것이 너무 많습니다. 처자식이 있고, 짐승이 있고, 재산이 넘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에서의 마음속에 원망과 저주가 세월의 무게만큼 켜켜이 쌓이고 말았습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엡 4:26-27)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만약 그 분노를 가지고 잠들면, 잠드는 그 순간부터 밤새도록 사탄이 내 마음속에 집을 짓습니다. 그 분노를 해결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탄은 우리에게 엄청난 상상력을 부여합니다. 아침이 밝으면 이제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 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나는 왜 그때 가만히 있었을까, 화가 나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풀고 가야 할 것을, 털고 가야 할 것을, 그때 해결하지 않고 풀지 않고 털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 집채만 한 파도가 되어 나를 덮치는데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습니다.

20년 동안 야곱은 에서에게 바로 이 일을 저질렀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에서는 아마 자기 상상 속에서 야곱을 수천 번은 죽였을 것입니다. 그 세월 동안 에서는 400명의 장정을 훈련시켰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그때 야곱을 만나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그때를 대비하여 장정을 기르고 정예 부대로 훈련시켰습니다. 이제 그 군대를 이끌고 야곱을 만나러 오는 길입니다. 우리가 그때 해결하지 않으면, 그 순간 풀지 않으면, 그 순간 매듭짓고 가지 않으면, 시간이 지난 후에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홀로 남은 자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

야곱이 불면의 밤을 보내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호위하기 위해 보내신 군대를 지나쳐 버렸기 때문입니다. 걱정이 가득하고 고민이 가득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보내고 만 것입니다. 이제 결국 그는 홀로 남았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창 32:24)

야곱이 홀로 남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낯설게 다가옵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입니다. 태어날 때 혼자 나지 못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어머니의 온기를 느끼고, 사회화 과정을 거쳐 한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혼자서는 사람이 되어 갈 수 없습니다. 공동체 속에서 자랍니다. 사람은 사람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야곱이 홀로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뿐이었습니다. 야곱의 인생을 한번 반추해 보십시오. 그는 태중에서부터, 어머니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에서와 쌍둥이로 함께 있었습니다. 함께 살았습니다. 태어나 보니 쌍둥이 형이 있었고, 같이 먹고 같이 자며 함께 자랐습니다. 일정 기간 크고 난 후 형이 사냥을 좋아해 들판으로 산으로 돌아다니게 되자 야곱은 그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가정에 머물렀습니다. 그의 주변에서 사람이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번, 야곱이 홀로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밧단아람으로 떠나던 그 먼길에서였습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거짓말쟁이가 되고 사기꾼이 되어, 손에 쥔 것 아무것도 없이 빈털터리 인생의 실패자가 되어,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도 없이 길을 떠날 때 그는 오롯이 혼자였습니다. 그런데 혼자 있는 야곱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벧엘에서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15-16)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홀로 있는데, 진짜 홀로 있는데, 하나님께서 함께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인생이 완전한 실패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그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꿈에 하나님께서 하늘문을 여셨고, 사닥다리가 내려왔으며, 그 사다리 위로 천사들이 오르내렸습니다. 하늘문이 활짝 열린 그 너머 보좌 끝에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선언하셨습니다. 야곱은 감격했습니다. 나는 패자인 줄 알았는데, 빈손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홀로 있는데 홀로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 감동을 안고 외삼촌 집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감격도 잠시였습니다. 20년 동안 야곱은 홀로 있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얻기 위해 살았고, 먹고살기 위해 분주했습니다. 네 명의 아내를 얻고 열두 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라반과 뒤엉켜 살았습니다. 돌아서면 자식이 태어나고, 또 돌아서면 자식이 태어나며 20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과 독대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20년이 지나고 이제서야 다시 혼자가 되었는데, 얍복 강가에 홀로 서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이번에는 사람의 모양으로 불현듯 나타나셔서 다짜고짜 야곱에게 씨름을 걸어오셨습니다. 야곱의 허리춤을 붙잡으셨습니다. 20년 전 벧엘에서 하나님은 먼 하늘 위 보좌에서 얼굴도 보이지 않는 채 목소리로만 들려오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은 실제가 되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내 허리를 붙잡고,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붙드시고, 나에게 씨름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이 현실 가운데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야곱이 홀로 있기를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너, 나와 독대하자." 과거 20년 전, 내가 찾아가서 만나 주었는데 너는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고, 베델에서 만나 주었는데 왜 20년 동안 외삼촌 집에서 그렇게 고생하면서 나와 함께하지 않았느냐고 하시는 듯합니다. 하나님은 홀로 있는 야곱을 또 찾아가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정체성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권력 있는 사람, 돈 있는 사람, 세상에서 출세하고 싶은 사람은 모두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반대로 광야로 나가 버렸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기 위해 먼 광야까지 찾아갔습니다. 훗날 세례 요한의 영성을 본받기 원하는 초대교회 교부들이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막의 교부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남긴 유명한 명언이 있습니다. "홀로 하나님과 함께." 고독하고 외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리였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얼마나 분주하게 살았습니까. 사람이 끊인 적이 있었습니까. 외로우면 내가 사람을 찾기도 하고, 외로운 사람이 나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가족에 둘러싸이고 친구에 둘러싸여 외로울 겨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나와 만나기를 원하시는데 내가 홀로 있는 시간이 없으니, 홀로 하나님과 함께하고자 내가 애쓰지 않으니, 밧단아람의 야곱처럼 먹고 사느라 분주해서 하나님을 찾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찾아올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가 되셨습니까. 외롭다고 느끼십니까. 그러나 이 기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는 은혜의 기간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오히려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위로하시며, 때로는 하늘문을 여시고 "너와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시고, 때로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내 허리를 붙잡으시고 씨름을 걸어오시며 살을 맞대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힘을 내려놓을 때 시작되는 은혜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창 32:25)

이 씨름에서 누가 이긴 것입니까. 야곱이 이겼습니까, 하나님이 이기셨습니까. 야곱은 인간적으로 강한 사람입니다. 한번 돌아보십시오. 야곱이 마음먹고 손에 넣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까. 장자권을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물질도 모두 거머쥐었습니다. 이런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할 때도 놓지 않았습니다. 힘을 빼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이겨 먹으려고 하나님을 꼭 붙들고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허벅지 관절을 가볍게 치시니 관절이 어긋나 힘이 빠지고, 다리를 질질 끌며 설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핵심이 있습니다. 지금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에 야곱은 장자권을 붙들고 씨름했습니다. 사랑을 붙들고 씨름했습니다. 라반과 씨름했고, 물질과 씨름했습니다. 태어나면서 자기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았던 야곱, 장남 독식의 사회에서 철저하게 주변인이요 소수자로 살았던 야곱은 장자권을 가지고 싶어 평생을 씨름했습니다. 팥죽을 가지고 형에게 덫을 놓아 형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어리석은 형의 그 경솔한 약속을 얻어낸 것입니다. 장자권을 결국 자기 손에 넣고 먼길을 떠났습니다. 빈털터리 몸으로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만났습니다. 지참금 한 푼 없었습니다. 14년 동안 몸으로 때웠습니다. 사랑을 붙들고 투쟁했고 사랑을 붙들고 싸웠고, 결국 그 사랑을 쟁취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야곱보다 훨씬 교활한 인간이었던 라반을 이겨냈고, 결국 라반에게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20년 동안 일한 임금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 돌아다니며 짐승들 앞에 비추면서 얼룩무늬 짐승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갔습니다. 결국 야곱은 평생을 그렇게 씨름하고 살았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씨름하며 살았습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장자권을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자권을 얻고 나니 하나님은 뒷전이었습니다. 사랑을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사랑을 쟁취하고 나니 하나님은 또 뒷전이었습니다. 라반 때문에 힘들다고 기도했는데 라반을 이겨내고 나니 또 하나님은 뒷전이었습니다. 물질이 없어 힘들다고 기도했는데 물질을 얻고 나니 또 하나님은 뒷전이었습니다. 지금 야곱은 에서와 씨름하고 있습니다. 제목만 바뀔 뿐 평생 같은 패턴을 반복합니다. 하나님 자체를 붙들고 씨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품에 안겨 울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10대에는 대학을 붙들고 씨름하고, 20대에는 취업과 사랑을 붙들고 씨름합니다. 30대, 40대에는 물질을 붙들고 씨름하고, 50대, 60대에는 건강과 자식을 붙들고 씨름하다가 결국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근본 문제였습니다. 그것을 붙들고 씨름하느라 하나님께 기도는 하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하나님은 또 뒷전입니다. 하나님의 천군 천사가 눈앞에 보이는데도 나와는 무관하다며 흘려보냅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직접 찾아오셔서 야곱의 허리를 꽉 껴안으셨습니다. 여전히 힘을 빼지 않고 하나님을 이겨 보려는 그 강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툭 치셨습니다. 관절이 어긋나 힘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놓아 버리시면 야곱은 길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놓지 않으시고 꼭 붙들고 계십니다. "이제 힘쓰지 마라, 이제 제발 내 앞에서 힘쓰지 마라" 하시며 그를 꼭 붙들고 계십니다.

처음부터 하나님 품에 안겼더라면, 힘을 빼고 하나님 안에 있었더라면 장자권 문제도, 사랑도, 물질도, 라반과의 갈등도 해결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해보려고 버둥거리며 살아간 야곱의 인생이 우리 인생과 너무나 닮지 않았습니까.

결론

하나님께서 야곱을 직접 찾아오신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부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성육신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대림의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셔서 그의 허리를 꽉 껴안으시고 놓지 않고 계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그 은혜 가운데 살면서 부디 하나님의 손을 놓지 마십시오. 뿌리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꼭 껴안고 가시는데, 이제는 힘을 빼고 하나님 품에 안기십시오. 울기도 하고, 외롭다 하지 마시고, 하나님과 함께 독대하십시오. 우리 속을 다 터놓고 살아가시면 그 안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가 풀리고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그 은혜가 이 대림의 계절에 우리 가정의 삶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를 부르시고 도우시며 은혜의 손길로 붙드시고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홀로 있기를 바라셨는데 야곱은 홀로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고 그가 홀로 있었던 벧엘로 찾아가시고, 그가 홀로 있었던 얍복 강가로 찾아가셔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얍복 강가에서는 사람의 모양이 되셔서 야곱을 깨워 주셨습니다. 야곱은 평생 동안 장자권과 씨름했고, 사람과 씨름했고, 사랑과 씨름했고, 물질과 씨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야곱을 껴안으시고 그의 허벅지를 치시며 이제는 버둥거리지 말라고, 힘을 빼고 나와 함께하자고 그를 껴안아 주셨습니다. 주여, 우리가 지금까지 무엇과 싸워 왔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씨름하고 버둥거린 것, 이제는 다 내려놓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힘을 빼고 안기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껴안으시고 품으시고 위로하시는 그 놀라운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기억하게 하시어, 우리 인생에 아름다운 열매로 화답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