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강 / 브니엘 (32:29-32)

브니엘

본문: 창세기 32:29-32

중국이 낳은 위대한 소설가 루쉰이 1921년에 발표한 「아Q정전」은 널리 알려진 명작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 아Q라는 인물은 성밖 절간에 기거하면서 하루하루 날품팔이로 먹고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술과 도박으로 매일 탕진해 버립니다. 어느 날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인 척하면서 인생 역전을 꿈꾸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습니다. 그러다가 강도 사건에 연루되어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서명하면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립니다.

줄거리만 보면 허무하기 짝이 없는 소설인데, 이 작품이 위대한 이유는 아Q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정신승리의 일관성 때문입니다. 아Q는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돌팔매질을 하고, 동네 불량배들이 돈을 빼앗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그가 취하는 마음 자세가 있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돌을 던질 때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에게 어떻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나에게 돌을 던지는 걸 보니 저건 사람이 아니고 짐승임에 틀림없다. 사람인 내가 짐승과 상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니 상대하지 않겠다.' 동네 불량배들에게 돈을 빼앗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빼앗는데, 내가 그들과 상대하면 나도 똑같은 미숙한 사람이니 상대하지 않겠다.' 그는 죽을 때도 그렇게 죽어갑니다.

아Q라는 인물을 통해서 루쉰이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그 당시 중국인들 가운데 깊이 뿌리 내린 병폐였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장자 때부터 내려오는 존이불론(存而不論), 즉 '존재하지만 논하지 않는다'는 태도입니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 기근이 몇 년 동안 들었습니다. 백성들의 삶이 팍팍하고 먹고살기 어려우니 도적들이 들끓고,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합니다. 그런데 신하들은 임금 앞에서 백성들의 원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근이 찾아왔으나 논하지 않고, 도적이 있으나 말하지 않고, 백성이 고통을 받으나 입을 열지 않습니다. 이것이 존이불론입니다. 그러면 임금은 어떻게 합니까.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 그 앞에서는 문제가 없는 것이 됩니다. 궁궐에서는 날마다 술판이 벌어지고,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지냅니다. 그렇게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1921년, 20세기 초반의 중국이 바로 그런 병든 모습이었습니다. 서구 열강의 놀이터가 되고 표적이 되어가는데, 마치 아이들이 돌을 던지듯 매일같이 얻어맞으면서도 정신승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의 중심이었으니까, 저들은 나라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국인들의 나라를 망하게 한 병폐였습니다. 없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돌을 던지는데, 그 아이들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없어지겠습니까. 고통도 당연히 그대로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신앙의 영역으로 가져와 봅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도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를 논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탄을 앞두고 세상에 나가보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고 맞이하는 인파로 넘쳐납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계시지 않고 물건만 있습니다. 사고파는 장사치들만 있습니다. 분명히 계시고 분명히 살아서 역사하시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논하지 않는 것입니다.

야곱의 일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야곱은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꿈속에서라도 만난 것은 벧엘에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밧단아람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논하지도 찾지도 않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하나님이 그를 찾아와서 씨름을 걸어오십니다. 하나님과 씨름하고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자체를 갈망하는 믿음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창 32:29)

고대사회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이름을 묻지 않습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이름을 묻는 것이지, 그 반대는 예의에 어긋납니다. 이는 지금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야곱이 하나님께 이름을 묻는 것은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통성명하자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이 하나님께 이름을 물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간절히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 하나님이 진실로 누구이신지, 지금까지 귀로만 듣던 이 하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 궁금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본 것입니다.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모세를 만나주셨을 때, 바로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묻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겠습니까. 그들이 누가 나를 여기로 보냈냐고 물으면 제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존재의 규정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이름을 짓지 않습니까. 부모의 염원을 담아서 이름을 짓습니다. 부모가 자식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라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하나님 이전에 존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 이전에 누구도 계시지 않았고,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를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그러했고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 그 자체를 알고 싶었습니다. 오늘 이 질문은 야곱의 믿음이 한 단계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하나님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궁금했던 것은 물질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장자권을 차지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랑을 쟁취할까. 이런 것이 궁금했지, 하나님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인생이 궁금했습니다. 자기 인생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부자가 되고 흥왕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자신의 성공을 위한 디딤돌에 불과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야곱은 그런 것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 자체가 궁금해졌습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이 성장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무엇이 궁금했습니까. 아니, 지금도 무엇이 제일 궁금합니까. 내 인생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10년 뒤에 묻어놓았던 것이 터져서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인지, 내 자녀의 미래는 어떨지, 내 인생이 꽃피는 날이 언제쯤 될지, 막혔던 것이 언제쯤 뚫리게 될지. 그것이 궁금해서 하나님께 나와 묻고 여쭈고, 뚫어달라고 해결해 달라고 매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작 하나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우리 믿음이 성장하면, 그런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궁금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싶어집니다. 그때가 우리 믿음이 성장한 때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복이십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궁금하게 여기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창 32:29)

이것이 논리적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름을 물었으면 이름을 대답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시든지. 그런데 하나님이 그냥 축복하셨습니다. 축복하셨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그 다음을 빨리 읽어봅니다. 축복의 내용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무엇에 대해서 축복하셨을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뒤를 읽어보아도 하나님이 야곱에게 축복하신 내용이 없습니다.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창 27:28-29)

이것은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내용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축복하는 내용처럼, 적어도 축복의 내용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축복하셨다면 그 다음 내용이 분명히 있을 텐데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의 기자가 생략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소중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생략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야곱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고,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대답하셨는데, 그 대답이 곧 "나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복이십니다. 우리는 축복의 내용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곧 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곧 복인데 복의 내용이 무슨 상관이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복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자체가 복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것 자체가 복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그 복을 모르고 하나님을 등진 채, 복의 부산물인 자기 욕망을 진짜 복이라고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에게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복이시니까.

예수님을 복이라고 믿으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예수님 자체를 복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과 예수님 제자들 가운데 대다수도 예수님을 통해서 독립을 꿈꿨습니다. 이 정도 능력을 가진 분이라면 로마에게서 해방시켜 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해방자로, 독립투사로 여겼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복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해서 민족의 해방을 꿈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돈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돈을 벌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안 될 것 같으니까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팔아치웁니다. 적어도 은 삼십은 건지려고.

그런데 예수님 자체가 복이라는 것은 예수라는 이름에도 나와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원죄 위에 살면 살수록 죄를 쌓아갑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가져가 주셨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말은 곧 예수님이 우리의 죽음의 문제도 동시에 해결하셨다는 뜻입니다. 죄와 사망의 문제가 예수 안에서 동시에 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그 자체가 복입니다. 예수님이 복인데 더 이상 어떤 복이 또 필요합니까. 하나님 자체가 복이시기에, 하나님이 복의 내용을 별도로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이 거기서 한 단계 더 성장합니다.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

이제 야곱은 복 자체이신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창 32:30)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던 그곳을 브니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이곳을 브니엘이라고 고백한 것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는 감사입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면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곱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죽지 않고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죄 많은 인간을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이유가 심판하시기 위함이라고 단정적으로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 죄 많은 인간을 하나님이 찾아오셨음에도 내가 살았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사야가 하루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때 하나님의 천사가 제단에서 핀 숯을 가지고 그의 입술에 대고 죄를 용서해 줍니다. 이사야를 용서하시고, 죄 많은 야곱을 대면하고도 죽이지 않으시고, 모세를 대면하여 보시고도 살려두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지도자의 사명이요, 이사야의 사명은 선지자의 사명이요, 야곱의 사명은 약속의 계보를 이어가는 사명입니다. 이제 얍복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가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약속의 계보의 중심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 할 일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살려두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텔레비전 뉴스를 시청하면 지난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살아가는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릅니다. 사건사고 속에 우리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늘도 호흡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처럼, 야곱처럼, 모세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부탁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숨 쉬라고, 잘 먹고 잘 살라고 살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일터에서 예수 믿는 자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의 교회에서 작은 부분이라도 섬기고 봉사하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두시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발견하시고, 사명자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정결한 삶에 대한 결단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한번 보았습니다. 이것은 영광 중의 영광이요,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그 영광과 은혜를 경험하면 이제는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그런데 죄짓지 않고 정결한 인생을 살면 하나님의 얼굴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고백합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17:15)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뵙는다고 고백합니다. 의롭게, 죄짓지 않아야 주의 얼굴을 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을 단절시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사건 이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어버렸습니다. 선악과 사건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동행하며 산책했던 인물들이, 죄짓고 나니까 하나님을 피하게 됩니다. 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탄은 지속적으로 우리를 죄짓도록 유혹합니다.

야곱이 이곳을 브니엘이라고 부른 것은 그의 결단입니다. 다시는 죄짓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브니엘의 영광이 충만할 때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창 32:31)

이 말씀이 가장 난해한 구절입니다. 야곱이 다리를 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와 씨름하셨을 때 그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그때부터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절고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고 브니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다리를 고쳐주지 않으십니다. 허벅지 관절을 치신 그 상태 그대로 놔두셨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야곱도 하나님께 다리를 고쳐달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야곱 같으면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길길이 뛰고 야단법석을 피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다리를 치셨는데 왜 그대로 두시느냐고, 빨리 고쳐달라고 떼를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도 하나님께 떼쓰지 않습니다. 고쳐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대로 다리를 절며 에서를 만나러 갑니다.

이 상태에서 에서를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에서가 400명의 훈련된 군사를 거느리고 옵니다. 칼을 빼들면 몇 걸음 가지 못해서 잡힙니다. 멀쩡해도 싸워보지 못할 형편인데, 다리가 만신창이가 된 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원망하지도 않고, 고쳐달라 말하지도 않고, 하나님도 고쳐주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크고 놀라운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을 경험하지 못하면 알 수가 없습니다. 가장 큰 영광, 가장 놀라운 일을 경험하고 나니, 다리를 저는 것쯤은 자기 인생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 것입니다. 좀 부족한 것이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으니 이것은 전혀 불편하거나 화나는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삼층 천 체험을 한 후에 자기 인생의 가시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 것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야곱의 인생은, 장자권 없으면 죽을 것 같고, 자존심 상해서 견딜 수 없고, 가져야만 숨 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랑을 쟁취해야만 존재감이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손에 물질을 쥐어야 살아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야곱입니다. 그런데 이제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나니, 그런 것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입니다. 다리를 절어도 부끄럽지 않고 자존심 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해도 여유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그 영광이 가슴속에 충만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가지지 못해도 손에 쥐지 못해도 아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세상 욕망 속에 매여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제대로 만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그 영광을 제대로 경험하고 나면, 내가 좀 가난해도, 무명해도, 배운 것이 없어도, 몸이 아파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소유했는데 다른 것 좀 못 가지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복이 되시는데, 이것이 바로 브니엘의 영광입니다.

내일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성탄은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뵙는 그 영광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내가 못 가진 것, 못 배운 것, 좀 부족한 것이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브니엘의 영광으로, 이 성탄의 기쁨을 마음속에 충만히 품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브니엘 이전의 야곱은 장자권을 탐했고, 사랑을 갈망했고,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죽을 것 같고, 그것이 없으면 자존심 상해서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브니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나니,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니, 다리를 절어도 괜찮게 되었습니다. 부끄럽지도 않았고, 그것을 고쳐달라고 말하는 것조차 잊어버렸습니다. 영광 가운데 거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우리가 열심히 살아도 가지지 못하고 채우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것이, 지금까지는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고 화나는 일이었으나, 영광 중에 계신 주님을 뵙고 나니 그런 것이 없어도 괜찮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제 아기 예수님을 만날 그날이 다가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며, 브니엘의 영광을 경험하고 본 자들이, 이제 세상 욕망에 취해 있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아가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명자로서 이 땅에서 사명을 감당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