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얼굴
본문: 창세기 33:1-11
조선의 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탐구하면서, 그들은 인간에게 사단칠정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단이란 인간이 본성적으로 지닌 네 가지 마음을 뜻합니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그것입니다. 측은지심은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수오지심은 수치를 알고 악을 멀리하는 마음입니다. 사양지심은 자신의 분수와 형편을 알고 겸손히 사양하는 마음이며, 시비지심은 선과 악을 분별하는 마음입니다.
이 네 가지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놀랍도록 성경적이고 복음적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이 네 가지 마음을 지니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측은지심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요, 수오지심은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며, 사양지심은 겸손한 마음이요, 시비지심은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바로 이 측은지심을 가진 형제가 등장합니다. 20년 동안 떨어져 살던 야곱과 에서가 만났을 때, 에서는 야곱을 껴안고 울기 시작합니다. 성하지 않은 몸으로 다리를 절며 남루한 차림으로 나타난 동생이 마음에 쓰여 그를 끌어안고 운 것입니다. 야곱도 형 에서를 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극적으로 화해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마음에 측은지심이 어떻게 가능해졌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의 현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 이전까지 야곱은 하나님을 붙들고 산 적이 없었습니다. 자기 인생의 문제가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인생 문제만 붙들고 씨름했는데, 얍복 강가에서 드디어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야곱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복이 된다고 말씀하셨고, 야곱은 이 복을 참된 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그에게 에서 문제는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니,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충만한 기쁨을 가지고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 불렀습니다. 다리를 절어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상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괜찮았습니다. 지금까지 자기 인생을 붙들고 살았던 여러 가지 문제들에게서 이제는 자유함을 얻고, 하나님 앞에서 살겠다고 결단하며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는 충만했으나, 이제 현실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현실은 에서 문제였습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창 33:1)
은혜를 받았으나 눈을 들어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훈련된 장정들을 거느리고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야곱이 본능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은 받은 것이되, 그의 마음속에 본래부터 자리 잡고 있던 비열하고 비겁한 모습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창 33:2)
야곱은 자녀들과 부인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그룹에 빌하와 실바, 그리고 그들의 네 아들인 단과 납달리, 갓과 아셀을 두었습니다. 가운데 그룹에는 레아와 여섯 아들, 딸 하나를 세웠습니다. 루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 잇사갈과 스불론, 그리고 딸 디나입니다. 마지막 후미에는 라헬과 요셉을 두었습니다. 에서의 칼날에서 라헬과 요셉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라헬과 요셉은 보호해도 되고 나머지 자녀들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말입니까? 방패막이로 그들을 앞에 내세우고 라헬과 요셉을 가장 뒤에 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착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그 사람이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겉사람부터 속사람까지, 기질과 성격과 사고방식까지 모든 것이 뒤집어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야곱을 보면 과연 그러합니까? 야곱까지 볼 것도 없이 우리 자신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뜨겁게 만났던 그 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며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결단한 적이 있습니다. 매일 그렇게 살겠다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에서 같은 문제를 만나면, 인생의 커다란 문제가 다가오면, 우리는 과거의 옛사람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습니까? 과거의 옛 습관이 마음속에서 다시 일어나고, 그것 때문에 발목이 잡히며, 그 문제 때문에 또다시 좌절하고 낙심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야곱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도 끊임없이 겪고 있는 문제입니다. 매순간 2023년 한 해 동안 우리는 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런 야곱을 붙들고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때마다 야곱의 행위대로 책망하시고 회초리를 드셨다면, 야곱은 이미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올 한 해 우리가 하나님을 실망시킨 그대로 되갚아 주셨다면, 올해의 마지막 날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될 것입니다. 아마 아무도 없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참아 주시고, 기다려 주시며, 조금씩 성장하고 조금씩 발전하도록 돌보시고 기대하며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 그 은혜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에 줄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는 별개로 우리가 기억하고 깨달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입은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면, 그 책임은 자기가 져야 합니다. 야곱이 자녀들을 편애하고 세 그룹으로 나눈 그 책임을, 야곱은 자기 인생에서 고스란히 지게 됩니다. 제일 앞에 세웠던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 단과 납달리, 갓과 아셀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어머니는 비록 후처였지만 아버지는 야곱 아닙니까? 그렇게 믿었던 아버지가 자신들을 제일 앞에 내세운 것입니다. 요셉을 보호하기 위해 방패막이가 된 아들들이 아버지에 대해 느꼈을 그 배신감은, 평생 지고 가야 할 상처였을 것입니다. 내 아버지인데 어떻게 이 아버지가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바로 앞에 무서운 얼굴을 한 에서가 서 있고, 에서가 데리고 온 사백 명의 무장한 군사들이 칼을 차고 있습니다. 다리가 떨려 서 있을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무섭고 두렵습니다. 앞으로 살면서 단과 납달리, 갓과 아셀이 가지고 살아가야 했을 그들 가슴의 상처를 누가 치유해 줍니까? 그 뒤에 서 있는 여섯 아들과 디나의 가슴에 맺힌 상처는 또 누가 치유해 줍니까? 나중에 그 모든 책임은 야곱에게로 돌아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창 37:18-20)
형제들이 동생 요셉을 팔아치운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를 죽이려고 구덩이에 던져 놓았다가,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그의 옷을 벗겨 짐승의 피를 묻힌 뒤, 은 이십에 머나먼 애굽까지 팔아넘겼습니다. 아버지에게는 피 묻은 옷을 가져다 보여주며 짐승에게 잡아먹힌 것 같다고 속였고, 야곱은 십수 년 동안 요셉이 죽은 줄만 알고 지내야 했습니다. 그 십수 년의 가슴 아픈 비극은 누구 때문입니까? 야곱이 뿌린 씨앗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때 벌어진 일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인 마하나임도 지나쳐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이 되어 내려오셔서 얍복 강가에서 그의 허벅지를 붙잡고 씨름하시며 은혜를 주시고 이름까지 바꿔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며 나아갔어야 합니다. 이런 얕은 술수를 부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셨을 것입니다. 자기가 책임지려 하고 자기가 문제를 해결하려 하니 감당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영접한 우리 각 사람이 인생의 문제를 아버지께 맡겼다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이 모든 문제가 주 안에서 아름답게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의 힘
이제 야곱이 에서를 만납니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창 33:3)
야곱은 최대한 예를 갖추어 형에게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혀 절합니다. 지금 야곱의 몸이 온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하나님이 허벅지 관절을 쳐서 고관절을 다쳤습니다. 허리를 숙이기조차 힘든 상태입니다. 그런데 일곱 번 절을 해야 합니다. 허리에 통증이 극심합니다. 일어설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으며, 누울 수도 없는 상태에서 옆 사람의 부축을 받아가며 일곱 번 절합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에서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또 옷은 어떠했겠습니까? 밤새도록 씨름했으니 옷이 누더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꼴이 말이 아닙니다. 찢어지고 헤어진 누더기 옷을 입고 형에게 나와, 몰골이 말이 아닌 상태에서 일곱 번 절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야곱을 보고 에서가 반응합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창 33:4)
에서가 이러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에서는 이날만을 고대하고 기다렸습니다. 20년 동안 벼르고 별렀습니다. 사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훈련시키고 조련하여, 이날이 오면 야곱을 쳐 버리려고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 눈앞에 앉아 있는 야곱을 보니 그런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다 녹아버렸습니다. 병든 몸으로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다리를 절면서, 거지 같은 옷차림으로 와서 일곱 번 절하는 동생을 보니,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불쌍함과 측은지심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달려오지 못하고, 에서가 달려가 껴안고 목을 어긋 맞추며 함께 손을 붙잡고 울기 시작합니다. 에서가 이렇게 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신 일 이면에는 하나님의 섬세하고 치밀한 계획이 숨어 있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야곱과 씨름하지 않으셨다면 옷도 더러워지지 않았을 것이고, 몸에 병도 없었을 것이며, 허리도 멀쩡했을 것입니다. 멀쩡한 몸에 부유한 모습으로, 양과 소와 짐승 떼를 거느리고 자녀들과 부인들을 데리고 형을 만나면 에서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니가 나의 장자권을 빼앗아 가서 이렇게 큰 복을 받았구나. 이제 내 칼도 받아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큰 부자가 되어 "형 것입니다, 선물로 가져왔습니다" 하면 그 선물이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건강하고 기름이 흐르는 얼굴의 야곱을 보았다면 에서가 화를 참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약하고 연약하고 병든 모습을 보니, 에서의 마음속에 견딜 수 없는 측은함이 밀려 올라옵니다. 이것을 보면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몸을 고쳐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몸을 다쳤는데, 있는 모습 그대로 에서를 만나라고 하셨습니다. 야곱도 하나님을 만난 은혜 가운데 있다 보니, 다리를 저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누더기가 된 옷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대단한 경쟁력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없는데 있는 척하고, 약한데 강한 척하며, 모르는데 아는 척하려 합니다. 사람들이 무시할까 봐, 깔볼까 봐 더 많이 가진 것처럼, 더 힘센 것처럼, 더 많이 아는 것처럼 포장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모습이 드러나면 그때의 굴욕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리를 절면 저는 대로, 누더기 옷을 입었으면 입은 채로 그대로 나아가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속이지 않아야 합니다. 덧붙이거나 치장하거나 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덧붙이고 치장하고 과장하는 것은 세상의 권세자, 악한 영들이 시키는 것입니다.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계 13:5-6)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았습니다. 짐승은 사탄에게 권세를 받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요, 이 세상의 악한 권력입니다. 세상의 악한 사탄 마귀는 과장된 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이미지로 포장하고, 본래의 모습이 아닌데 과장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의 이미지를 가지고, 원래 이런 모습이 아닌데 과장하고 포장하려 합니다. 세상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지나치게 포장하고 지나치게 과장합니다. 그런 모습이 진짜인 것처럼 보여주려 하는 것은 짐승이 하는 일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악한 사탄 마귀가 오늘 이 시대를 그렇게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하면 약한 모습으로, 울고 싶으면 하나님 앞에서 울 수도 있습니다. 나의 처지가 이러합니다, 하나님 앞에 그대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있는 모습 그대로가 에서와의 20년 원한의 문제를 풀어버린 것입니다. 과장하면 풀 수 없었고, 치장하고 포장하면 해결될 수 없었던 문제가, 그대로 나아가니 다 해결되었습니다. 과장할 이유도, 포장할 이유도, 숨길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솔직한 것이 가장 좋습니다.
형의 얼굴에서 발견한 하나님
에서와 야곱이 끌어안고 한참 울고 난 뒤, 에서가 묻습니다. 뒤에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들은 누구냐?" "제 자식들입니다." 뒤에 있는 양과 소와 짐승들이 보입니다. "이것들은 무엇이냐?" "저의 재산이며, 형님에게 드리려고 준비한 선물입니다. 받으십시오." 에서가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야곱이 에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창 33:10)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 이 고백은 입에 발린 말이 아닙니다. 이 고백은 진심이었습니다. 야곱이 바로 어젯밤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브니엘이라 부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가 형성된 사람은, 타인의 얼굴을 볼 때에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형성되면, 사람과의 관계도 바르게 형성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풀려가면,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혹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 속에 있는 장점을 보고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각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넣어 두셨습니다. 자세히 보면 보입니다. 보려고 노력하면 그 사람 속의 장점과 하나님의 형상이 보일 것입니다.
올 한 해를 살면서 인연도 있었고 악연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불편한 사람, 그 사람만 떠올려도 화가 나고 치가 떨리도록 미운 사람이 왜 없었겠습니까?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년을 살면서 꿈에서라도 에서가 나타날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나니,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이 보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미워 죽을 것 같은 배우자의 얼굴에도, 너무 괴롭고 속 썩이는 자녀들의 얼굴에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얼굴이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되고 그 안에서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고 나면, 타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결론
올 한 해가 몇 시간 남지 않았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정리하며 내년을 준비하는 이 시간, 우리가 만난 사람들, 앞으로 만날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지 않고 자신의 본능과 계획대로 행했을 때, 야곱은 그 문제의 책임을 고스란히 져야 했습니다.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편애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하나님을 뒤로했던 야곱의 실수를 우리는 거울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영접한 후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한 야곱처럼, 우리도 그러한 은혜와 감격과 감사가 우리 안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가족들, 일터의 동료들, 함께하는 사람들, 심지어 미운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지혜와 측은지심이 우리에게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 주옵소서.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지 않고 자신의 본능과 계획대로 행하여 결국 그 문제의 책임을 스스로 져야만 했습니다.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편애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하나님을 뒤로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영접하여, 타인의 얼굴을 볼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내 가족들, 내 일터의 동료들,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 그토록 미운 사람들, 그들의 얼굴 속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찾기 원하오니, 주여,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서로 얽히고설킨 악연으로 살지 않도록 도우시고, 어떤 사람에게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지혜와 좋은 마음, 측은지심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