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강 / 자기를 위하여 (33:12-20)

자기를 위하여

본문: 창세기 33:12-20

진화생물학자이자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쓴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따르면,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본능적으로 자기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기 위한 것이며,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설계된 기계적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기 유전자를 후대에 오래도록 남길 수 있겠습니까? 도킨스는 그 방법으로 인간이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선한 사람이 되는 것과 인간이 자기 유전자를 남기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곰곰이 따져 보면 상관이 있습니다.

악당이 되면 일찍 죽을 확률이 훨씬 높지 않습니까? 세상을 악하게 살아서 사람들과 원수를 지면, 오래 생존할 확률보다 일찍 사망할 확률이 훨씬 큽니다. 그래서 도킨스는 사람이 평범하게 살고 선하게 살면 자기 유전자를 후대에 오래도록 남길 확률이 그만큼 커진다고 말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사람이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착해서가 아니라, 원래 그렇게 기계적으로, 본능적으로, 자기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설계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진화론의 극단을 보여주는 논리입니다.

사실 그의 주장으로는 하나님을 만난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행동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 것을 취하지 않고 타인에게 모든 것을 양보합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한 사람들은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초개같이 버립니다. 이것은 도킨스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굳이 도킨스의 이야기를 들지 않아도 이기적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살고, 타인을 압제하며, 자기 욕심을 채우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움직이고 돌아갑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맘그렌이라는 사람은 2009년 영국의 경제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물가지표를 봐도 환율을 봐도 전부 평범했습니다. 살림살이가 힘들어졌다고 볼 만한 경제지표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비롯한 영국 시민들과 유럽 사람들은 먹고살기가 힘들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지표는 정상인데 실물경제는 왜 이렇게 나쁘게 느껴지는 것일까? 살펴보았더니, 서민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식료품의 가격은 그대로인데 부피와 양이 과거보다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슈링크플레이션'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줄어들다는 뜻의 '슈링크'와 물가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을 합친 경제학 용어입니다. 부피는 줄이고 양도 줄이되 가격은 그대로 두어, 체감적으로 물가상승의 효과를 유발한다는 개념입니다.

굳이 어려운 경제학적 개념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런 경험을 자주 합니다. 과거에는 가게에 가서 과자 한 봉지를 사면 제법 먹을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서 열어 보면 질소가스만 가득 차 있고 먹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 햄버거도 가격은 예전과 똑같은데 내용물은 부실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도 슈링크플레이션의 시대 한가운데를 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사람들이 저마다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돈은 벌어야겠고, 이전처럼 풍성하게 넣지는 못하겠고, 모두가 이기적으로 살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야곱의 이기심이 등장합니다. 야곱은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뜨겁게 하나님을 만났다가도 밑바닥으로 내팽개쳐지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다가도 다시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고,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야곱에게 실망감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의 이기심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이기심을 봅니다. 야곱은 왜 이런 것입니까? 야곱을 통해서 나의 모습을 보고, 내 속에 있는 이기심을 발견하여, 어떻게 하면 이것을 고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를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짓된 입술, 반복되는 자기기만

야곱과 에서가 20년 만에 만났습니다. 다리를 절뚝이고 온몸이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나타난 야곱을 보고 에서가 달려와서 끌어안습니다. 20년의 해묵은 감정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순간입니다. 야곱도 에서에게 고백합니다.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화해했습니다. 이제 에서가 야곱과 함께하기를 청합니다. 못다 한 세월들을 함께하고 싶다며, 세일산으로 함께 가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형 에서의 말에 야곱은 선뜻 반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함께 가기가 싫었습니다.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창 33:13-14)

결과적으로 야곱의 이 말은 거짓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해 놓고 세일로 가지 않았습니다. 형만 먼저 보내고 자기는 뒤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세일로 먼저 가 계시면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이렇게 말해 놓고 가지 않은 것입니다. 야곱은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눈앞에 있는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모면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을 이렇게 살았습니다. 자기 목적이 정해지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거짓말도 감행합니다. 장자권을 얻을 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금방 탄로 날 거짓말이었습니다. 형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오면 아버지와 형을 속인 것이 금방 드러납니다. 그런데 뒷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 거짓말을 감행합니다. 라반을 속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반도주해 버렸습니다. 혼자 도망간 것이 아니라 처자식들과 짐승들을 다 이끌고 도망갔으니 어떻게 발각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금방 뒤따라 잡힙니다. 그런데도 그는 라반을 떠나겠다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런 거짓말도 감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서와 함께하기 싫으니까 "먼저 가 계시면 뒤따라가겠습니다" 하고는 금방 탄로 날 거짓말을 합니다.

이 거짓말이 훗날 야곱에게 얼마나 큰 짐이 됩니까? 지금까지 야곱은 거짓말의 대가를 지불하며 살아왔습니다. 거짓말은 그 순간 면책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더 큰 무게로 어깨 위에 올라옵니다. 더 힘든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거짓말을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정직하신 분입니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사 26:7)

정직하신 하나님께서 정직한 의인이 가는 그 길, 그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하신 분입니다. 정직하신 분이 주신 이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1.1도 변함없고 틀림없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선지자들이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했고, 그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의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으니, 기록된 말씀 그대로, 하나님은 정직하시니,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실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직하신 하나님이 하신 이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정직하시니,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도 정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직한 자가 가는 그 길을 평탄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직하지 않고 거짓말하는 인생은 지금 당장은 평탄해 보일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대가는 반드시 치르고 가야 합니다. 야곱의 고생스러운 일생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역사 앞에서 진실하고 정직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파기된 언약, 사명 없는 안주

그렇다면 야곱은 도대체 왜 거짓말한 것입니까?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창 33:17)

짐승 때문이었습니다. 밧단아람에서 20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얻은 품삯인 짐승들을 돌보기 위해서 거짓말한 것입니다. 지금껏 짐승들은 이미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 짐승들을 거느리고 더 먼 길을 걸어가면 하나둘 쓰러져 다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어떻게든 짐승들을 빨리 쉬게 하려고 형을 먼저 떠나보내고 짐승들을 쉬게 할 공간을 찾았습니다. 그곳이 바로 숙곳이었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약 3.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지었고,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는데,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물론 야곱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벧엘에서 맺었던 하나님과의 언약을 완벽하게 파기했다는 데 있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 28:20-22)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께 두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의식주와 안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식주와 안전을 해결해 주시면 두 가지를 약속하겠다고 했습니다. 벧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는 것과,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반드시 드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약속을 완벽하게 지키셨습니다. 밧단아람에서 20년을 사는 동안 그를 굶기지 않으셨고, 헐벗게 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부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의식주를 완벽하게 해결하셨습니다. 또한 라반의 손에서도, 에서의 칼날에서도 그를 안전하게 지켜 보호하셨습니다.

이제 야곱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벧엘 언약을 지킬 차례가 아닙니까? 그러면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기 소유의 십분의 일을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창 33:18-19)

숙곳은 짐승을 목축하기 위한 거주지였습니다. 그런데 세겜 땅에서는 밭을 샀습니다. 땅을 산 것입니다. 처자식들이 거하는 공간을 마련한 것입니다. 이제 야곱은 작정했습니다. 숙곳과 세겜을 자기 처소로 삼아 완전히 뿌리내리고 정착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야곱을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약속의 계보의 중심인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신 것은 그를 쓰시기 위한 것입니다. 택하고 쓰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시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훈련입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다듬어 가는 과정을 우리는 훈련이라 부르고, 성화라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철저하게 당신의 손에 맞는 도구로 빚어 가시는데, 야곱의 인생을 보면 그 훈련 기간이 지나치게 길었습니다. 야곱의 훈련은 이보다 훨씬 짧게 끝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훈련이 이토록 길어진 이유는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훈련 프로그램에 자기를 온전히 맡기고 잘 따르면 훈련은 금방 끝납니다. 그런데 야곱은 제대로 훈련받지 않았고,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를 훈련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훗날 야곱이 애굽의 바로 왕 앞에서 자기 인생을 회고하며 "나그네 인생,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험악한 세월을 살게 하신 것입니까? 그가 순종하지 않으니 훈련의 기간이 길어져서 험악한 세월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고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훈련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하나님도 좋고 우리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오래도록 사용하실 수 있어서 좋고, 우리는 괴롭지 않아서 좋습니다. 그런데 재빨리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훈련의 프로그램에 나를 맞추어 가지 않으면, 그 기간은 지속되고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의 인생이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훈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은 야곱을 사명자로 키워 가기를 원하셨는데, 그는 다시 생활인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은 그를 만나시고 밧단아람에 사명자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밧단아람에서 사명자로 살지 않았습니다. 생활인으로 살았습니다. 거기에서 사랑을 쫓아 살았고, 물질을 쫓아 살았으며, 20년 동안 먹고 사느라 정신없이 살면서 사명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후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꿔 주셨습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면 사명자로 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명자로 살지 않습니다. 벧엘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숙곳에 정착하고 세겜에 뿌리내리며 땅을 사 버렸습니다. 그냥 거기서 살겠다는 강력한 결심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한 말을 단순히 성전 건축이나 십일조로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너무 좁은 해석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는 말은 "이제 제가 사명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겠습니다"라는 결단입니다. 지금까지는 나의 인생을 살았고, 내 집을 세우고 살았으며,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먹고 사느라 바빴고, 처자식 건사하느라 바빴고, 양 떼와 소 떼를 먹이고 돌보느라 바빴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벧엘에서 결단한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로 올라가야 합니다. 사명자의 인생은 하나님의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자기 집을 짓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집을 짓는 사명자의 인생을 살겠다는 결단 위에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주신 물질은 다 나를 위해서 썼고, 내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돌아보고 또 돌아보니 물질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며 살겠다는 결단이 십일조의 결단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사명자의 결단도, 감사의 결단도 파기해 버리고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빈 그물에서 발견하는 사명의 자리

그런 삶이 과연 행복하겠습니까?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 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은혜를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살 때, 그때 자기 존재감을 느끼고, 그때가 가장 자유롭습니다. 은혜를 떠나서 살면 물질은 많이 가지고 살지 몰라도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항상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시고 만나 주시며 평안을 주시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자기 갈 길로 가 버립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요 21:3-4)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고 가 버렸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를 따라 자기 생활의 자리로 가 버립니다. 사명을 포기하고 생활의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행복했습니까? 그들이 던진 그물에 물고기가 걸려 올라옵니까? 빈 그물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빈 그물은 단지 물고기를 잡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 만족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던지고 또 던져도, 사명을 떠난 사람의 인생은 만족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기쁘지 않습니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요 21:5-6)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 질문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나를 떠나, 사명을 떠나 갔더니, 너희에게 채워지는 것이 있더냐? 진정한 만족이 있더냐?" 이 물음이 아닙니까?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랬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던지는 그물이 사명자의 인생입니다. 예수님 없이 아무리 자기가 그물을 던져 봐야 그것은 빈 그물일 뿐입니다. 열심히 일은 하는데, 노력은 하는데, 땀 흘리고 수고는 하는데 얻는 것이 없습니다. 빈 그물입니다. 그런 허무한 인생을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야곱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세겜 땅에 땅도 사고, 밭도 사고, 숙곳에 자기를 위하여 집도 짓고,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도 지었습니다. 그런데 행복했습니까? 그때부터 그의 가정이 탄탄대로를 걸었습니까? 오히려 그때부터 그의 가정에 시험거리가 닥치고, 그때부터 그의 가정에 문제가 밀려오지 않았습니까? 잘 살려고 했는데, 좋은 일을 하려고 했는데, 그의 가정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빈 그물이었습니다. 건져 올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 야곱의 인생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향으로, 주의 말씀을 붙들고 그물을 던져야 거기에 물고기가 걸려 올라옵니다. 그것이 사명자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상당히 이율배반적입니다.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창 33:20)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혈혈단신 홀몸으로 밧단아람에 갔다가 20년 만에 큰 부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에서와의 해묵은 감정도 정리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집도 짓고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도 지었습니다. 땅도 샀습니다. 성공했습니다. 가족들을 다 불러 모으고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 잔치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자기 간증도 합니다. 사람들은 "정말 성공한 사람이군요. 당신이야말로 하나님께 큰 축복과 은혜를 받은 사람이군요" 하고 박수를 쳐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이 예배를 어떻게 받으셨을까요?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기뻐 받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가장(假裝)된 예배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벌이는 굿판과 다를 바 없는 예배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예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벧엘에 올라가서 사명자로 살겠다는 결단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모든 물질을 하나님께 받은 줄로 믿고 깨달아, 그 앞에서 자기가 약속한 십분의 일을 드리며 감사하는 예배입니다. 야곱이 세겜 땅에서 드린 예배는 자기 욕망의 투사에 불과합니다.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닙니다. "더 부자 되게 해 주십시오. 저를 안전하게 지켜 주십시오." 그런 예배를 어떻게 참된 예배라 할 수 있겠습니까?

결론

우리가 수없이 많은 예배를 드려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인지, 이기적인 예배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자의 삶,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명자의 삶이 우리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위한 집을 짓느라 분주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을 짓는 사명자의 인생이 우리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야곱은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짓고, 가족을 위하여 세겜의 땅을 샀지만, 하나님을 위하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빈 그물을 끌어올리는 허무한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는 삶, 그 충만한 사명자의 인생을 우리 모두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리에서 사명을 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받은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해 나가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는 나를 위하여 집 짓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사명자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집 짓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는 이 물질이 다 내 것인 줄 알고 쓰며 살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드리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야곱이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짓고 자기 가족을 위하여 세겜의 땅을 샀지만, 하나님을 위하여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우리는 이런 삶을 살지 않도록 도우시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