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강 / 잠잠하였고 (34:1-5)

잠잠하였고

본문: 창세기 34:1-5

2024년은 전 세계인에게 선거의 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7월과 8월에 걸쳐 열리는 파리 올림픽도 올 한 해 최대의 이슈 가운데 하나입니다. 파리 올림픽이 전 세계인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많은 사람이 모이며 수많은 사람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주목할 것은 지구촌 방방곡곡에서 치러지는 선거입니다. 1월에는 대만 총통 선거가 이미 끝났고, 2월에는 인도네시아 총선과 대선이 있습니다. 3월에는 현재 전쟁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선거가, 4월에는 우리나라 총선이, 5월에는 인도 총선이, 6월에는 유럽의회 선거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10월에는 브라질 지방의회 선거가, 11월에는 전 세계인이 가장 주목하는 미국 대통령 선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 세계 인구 약 81억 명 가운데 40억 명가량이 투표권을 행사하는 해이니, 세계인의 절반이 투표장으로 향하는 올해야말로 선거의 해라 부를 만하지 않습니까?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 부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한 사람이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이 제도가 위대한 까닭을 사람들은 잘 깨닫지 못합니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여성의 참정권은 제한되어 있었고, 노동자들의 투표권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과거에는 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참정권을 가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투표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남자나 여자나 누구나 동등하게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답답하고 바꾸고 싶고 목소리를 내고 싶다면, 가장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은 투표장에 나가 선거하는 것입니다. 한 번의 선거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다시 투표하고 또다시 투표하는 것입니다. 주식회사의 주주총회는 이와 다릅니다. 주식 보유액에 따라 의결권의 총량이 달라지기에 소액주주들은 자기 의사를 마음껏 표현할 수 없습니다. 소액주주들이 함께 모여 집단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그 영향력은 미미합니다. 그러나 선거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처럼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고 선거가 세상을 바꾼다고 외쳐도, 지난 20대 대선의 전국 투표율은 77.1%에 그쳤습니다. 유권자 100명 가운데 23명이 투표장에 나오지 않은 셈입니다. 저마다 이유가 있고 저마다 사정이 있겠지만, 100명당 23명은 잠잠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외치지 않고 잠잠해서는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야곱이 잠잠했다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아는 야곱이 잠잠할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야곱이 잠잠하고 잠자코 있었는지, 그가 잠잠한 이유가 무엇인지, 신앙인이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인지를 모색해야 합니다.

파기된 언약, 무너진 울타리

야곱과 에서는 20년 만에 재회했습니다. 에서는 야곱과 함께 지내고 싶었지만, 야곱은 에서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세일 산에 먼저 가 있으면 뒤따라가겠다고 했지만 그것은 거짓이었습니다. 형을 먼저 보낸 야곱이 정착한 곳은 숙곳과 세겜이었습니다. 숙곳에서는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며, 세겜 땅에서는 가족을 위해 밭과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정착했습니다.

하나님과 맺었던 벧엘 언약은 어느새 파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짓겠습니다"라고 서원했건만,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지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라고 약속했건만, 자기를 위하여 밭을 샀습니다. 이제 야곱은 세겜 땅에서 가족들과 행복한 삶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야곱 가족의 일상에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창 34:1)

디나는 레아가 낳은 딸입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밧단아람을 떠나 본 적이 없던 디나에게 이곳은 생애 처음 접하는 낯선 땅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가족을 이끌고 숙곳에 가서 우릿간을 짓고, 오빠들은 그곳에서 짐승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세겜에 와서 집을 짓고 정착하려 했습니다. 그러니 디나에게 호기심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 땅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까, 지형지물은 어떨까, 여기에 사람들은 어떨까, 친구는 있을까. 그래서 그 땅을 살피기 위해 길을 나선 것입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 아닙니까?

그런데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창 34:2)

전혀 예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누가 이런 일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지금까지 살던 곳에서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일인데, 이 땅을 살피러 나갔다가 이토록 심각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청하여 이르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창 34:3-4)

고대 사회에는 이러한 관습을 약탈혼이라 불렀습니다. 이런 일을 제재할 법적 근거도 없었고,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사회적 분위기도 조성되지 않았으며, 여성의 인권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함부로 유린하고, 마음에 들면 결혼하고 그렇지 않으면 내버려도 상관없는 세상이 고대 사회의 현실이었습니다. 수메르인들이 그렇게 살았고, 헷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고, 앗시리아인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이런 일이 일상이었고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겪고도 그것을 여성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가 자기를 어여삐 여겨 함께 살자고 하는구나, 결혼하자고 하는구나 하면 그것조차 감사해야 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하몰과 세겜입니다. 이 사건의 당사자 세겜은 그 땅의 추장이었고, 그의 아버지 하몰 역시 추장이었습니다. 대를 이어서 그 집안이 추장을 하는 것이 그 시대의 관습이었으니, 하몰도 추장이고 그의 아들 세겜도 추장이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집안이었습니다. 더욱 주목할 것은 이 사건을 일으킨 세겜이라는 인물의 이름과 성읍의 이름이 동일하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하몰이 아들을 낳아 이름을 지을 때 성읍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버지의 의도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이 아들이 자라면 우리 성읍과 동일한 인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성읍이 곧 내 아들이고 내 아들이 곧 이 성읍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아들의 이름을 성읍의 이름을 따서 지을 정도로 이 집안의 권세가 대단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큰 사건을 일으킨 세겜이 디나에게 연연하며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미안함의 표현입니까, 부탁입니까, 아니면 명령입니까? 이 청을 거절하면 그다음은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극히 심각한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문명 속에 숨은 야만의 얼굴

이 시대 사람들의 야만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는 폭력입니다. 어떤 이유를 갖다 붙인다 해도 이것은 성폭행입니다. 당시 사회 관습이 어떠하든 성폭행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남녀가 만나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감정이 싹트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미묘한 감정이 오가다가 누군가 먼저 마음을 표현해야 하며, 그 표현을 받은 사람은 수용할지 말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는 과정을 거쳐 비로소 가정이 탄생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런 절차가 하나도 없습니다. 일방적이고 무자비한 폭력만 있을 뿐입니다.

둘째, 여성을 차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폭행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목적 달성만 된다면 어떤 짓을 해서라도 이 여인을 차지하고 말겠다는 폭력성과 야만성이 이들에게 그대로 내재되어 있고,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셋째, 이 모든 일은 디나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디나는 다만 이 땅에 이사 와서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나갔을 뿐입니다. 남자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고 결혼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이 여인에게, 본인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이런 일이 벌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 상황을 야만적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수천 년 전 고대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 21세기 이 세상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명백한 폭력 행위입니다. 어떤 이유를 내세우더라도 전쟁은 폭력 행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러시아의 침공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흑해 연안의 비옥한 영토와 그 아래 매장된 지하자원이 탐났던 것입니다. 철광석 매장량 세계 1위, 석탄 매장량 세계 6위, 밀과 옥수수를 비롯한 비옥한 땅을 목적으로 전쟁을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명분을 내세워 이를 정당화합니다. 푸틴은 이 전쟁을 시작하면서 자국 국민에게 투표하지 않았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아무런 의사도 묻지 않은 채 전쟁에 내몰았습니다. 그 누구의 의지와도 상관없이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수천 년 전의 야만성이 이 문명사회에서도 고쳐지지 않고 수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주로 이러한 형국 속에 살고 있습니다. 폭력적이고,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이든 정당화하며,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을 끌어들여 이용하는 세상. 야곱과 그의 가족은 바로 이런 야만적인 세상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습니다.

잠잠함이 부른 비극, 부르짖음이 여는 회복

이 상황에서 야곱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창 34:5)

이 사실을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딸 디나가 돌아오지 않은 상황입니다. 세겜의 집에 억류되어 있고, 거기서 어떤 일을 지속적으로 당하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식을 들었는데도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면 이해가 됩니다. 일터에 나간 아들들이 숙곳 땅 우릿간에서 짐승을 돌보고 있었고, 그곳은 세겜과 거리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들들이 돌아오기 전에 성급하게 행동하면 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자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잠잠히 있는 그 시간, 야곱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흘렀겠습니까? 20년 전 벧엘에서 맺었던 언약을 파기한 자신에 대한 자책이 왜 없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겠다고,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과 맺은 20년 전 약속대로 이 땅에 돌아와 곧바로 벧엘로 올라갔더라면, 숙곳에 우릿간도 짓지 않고 집도 짓지 않았더라면, 세겜에 정착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자책이 왜 없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금까지 돌보시고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의식주를 해결해 주셨고, 안전하게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킬 것을 다 지키셨는데, 야곱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자기로 인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그 자책, 그 미안함이 왜 없었겠습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어서 잠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잠잠하고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야곱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 했습니다. 살려달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잘못했으니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또 부르짖어야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을 살펴보면, 좀 뻔뻔한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합니다. 죄를 짓고도 염치불구하고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며 엎드리는 사람, 넘어지고 무너지고 쓰러져도 "하나님,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매달리는 사람,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녀를 키우다 보면 자식들이 매번 잘못하고 매번 부모 속상하게 해도, "아버지,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하면 그것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살려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 살아서 우리 자식들이 이런 일을 겪고 우리 가정에 이런 큰 위기가 왔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 한마디를 왜 못합니까? 염치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잠잠하지 않고 소리치며, 옷을 찢고 재 가운데 회개하며 살려달라고 부르짖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냥 넋 놓고 앉아 있고 잠자코 있어서는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한 번만 더 매달려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두 명의 배신자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고,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유다는 원래 돈궤에 손을 댔던 인물이고,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조짐이 보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위대한 신앙 고백을 했고,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결단코 떠나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뻔뻔했습니다. 닭이 울자 통곡했고, 디베랴 호숫가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을 때 "예수님이시다"라는 말을 듣고 곧바로 물에 뛰어들어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뻔뻔하게 예수님께 달려간 것입니다.

반면 유다는 자기 잘못을 깨닫고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놓은 뒤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내가 벌인 일, 내가 책임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백 번 잘못해도 잠잠하지 않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살려달라고 부르짖으면, 백한 번 용서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했던 사람 아닙니까? 살려달라고 용서를 구하고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체면 차릴 필요 없습니다. 점잖게 굴 필요 없습니다. 인생의 위기가 닥치고 문제가 닥쳤을 때 "내가 잘못 살아서 이렇게 되었으니 내가 책임지겠다"고 해서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내 인생을 내가 어떻게 책임집니까? 이 사건을, 이 문제를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외쳐야 합니다.

결론

오늘 이 말씀을 통해 깊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곱이 아무리 견고하게 자기 집을 짓는다 해도, 하나님이 그 집을 짓지 않으시면 그것은 허사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 127:1)

야곱이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짓고, 가족을 위하여 세겜의 땅과 밭을 샀습니다. 거기에 농사를 지으며 정착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짓는다고 짓고 또 지었습니다. 인생에서 독립하여 지은 첫 번째 집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많은 돈을 들여 견고하게 지었겠습니까? 그런데 한순간에 뚫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집을 세워주지 않으시니, 하나님이 돌보고 지키지 않으시니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야곱이 20년간 밧단아람에서 라반의 집에 머물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라반이 얼마나 교활하고 치밀한 인간이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라반에게서 야곱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때 야곱은 자기 집을 지을 수도 없었고, 자기 울타리도 없었습니다. 라반이 마음만 먹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하나님이 그의 울타리가 되어 주시고 그를 지켜주셨습니다. 에서의 칼 앞에서도 하나님이 지켜주셨습니다. 야곱이 에서 앞에서 방어막을 구축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지켜주셨습니다. 그런데 에서도 없고 라반도 없는 세겜 땅에서, 자기가 집을 짓고 견고하게 성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이 하는 일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사 5:4-5)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극상품 포도를 심으시고 울타리를 둘러주셨건만, 극상품 포도가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주인이 실망하셨습니다. 더 이상 이 포도원을 두고 볼 이유가 없습니다. 울타리를 치워버리시니 야생 동물의 먹이가 됩니다. 지금 야곱의 처지가 꼭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실 때 야곱은 안전했습니다.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 그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었고, 하나님의 날개 그늘이 가장 견고한 보호막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날개 그늘을 벗어나 "내가 나를 위하여 집을 짓겠습니다, 내 가축을 위하여 내 우릿간을 짓겠습니다, 하나님의 손길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라고 선언한 그 순간, 하나님의 울타리가 걷혀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스스로 짓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허술하고 허무한 것인지, 오늘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집을 세워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울타리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잠잠히 있지 말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넘어져도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무너져도 다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 그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기도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삶 속에서 하나님이 내 일터도, 내 가정도, 내 자녀도, 이 나라와 민족도 든든하게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한 은혜와 지혜가 모든 주의 백성에게 함께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잠잠하지 말고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죄짓고 또 죄지어 염치가 없어 부르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해지라 하십니다. 주여, 용기를 내어 부르짖습니다.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살려 달라고 손을 내밉니다. 아버지,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옵소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의 탄원을 불쌍히 여기시며 응답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아무리 집을 견고하게 짓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시면, 하나님께서 내 집을 지키지 않으시면 이 모든 것이 허사라고 말씀하시니, 주여,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날개 그늘이 가장 안전한 곳임을 깨닫고 그곳에 머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