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강 / 협상 (34:6-14)

협상

본문: 창세기 34:6-14

인류는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을 경험했습니다. 언제나 전쟁의 위기 가운데 있었고, 실제로 전쟁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독특한 이성이 있기에 무력 충돌과 전쟁만을 반복한 것이 아니라, 전쟁을 피하기 위한 협상도 이어왔습니다. 1962년, 미국과 소련은 핵전쟁의 위기 앞에서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1959년 쿠바에 수립된 공산혁명 정권이 소련으로부터 핵미사일 42기를 들여와 전격적으로 실전 배치해 버렸습니다. 미국의 코앞에 핵미사일이 자리 잡았고, 미국 전역이 사정권 안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를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련에 통첩합니다. 소련이 핵미사일 기지를 철수하지 않으면 쿠바를 폭격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제3차 세계대전의 기운이 짙게 드리워진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통첩하고 난 뒤에도 이면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협상을 이어갔습니다. 그 협상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소련은 전격적으로 핵미사일 기지를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미국은 쿠바에 대한 공습을 취소하기로 결정합니다. 더 나아가 미국은 터키에 배치했던 미사일 기지까지 철수합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양국 정상이 가설한 핫라인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합니다. 뒤이어 양국은 부분적이나마 핵실험금지조약에 서명했습니다. 핵전쟁의 위기가 평화 무드로 뒤바뀐 극적인 순간이었습니다.

협상에는 이러한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협상이 이처럼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려면 두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협상 당사자들이 비본질이 아닌 본질에 집중해야 합니다. 케네디 대통령과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는 적어도 평화라는 본질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전쟁은 인류를 공멸로 몰고 가는 것이며, 절대로 전쟁해서는 안 된다는 본질 말입니다. 둘째, 협상 당사자들 사이에 신뢰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서로를 신뢰하지 못했지만, 흐루시초프와 케네디는 협상을 거듭하면서 상대가 믿을 만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적극적으로 협상을 이어갔습니다. 이것이 협상 성공의 전제조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야곱의 가정과 세겜 가족이 협상합니다. 협상의 내용은 결혼 문제입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것은 단순한 결혼 문제가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민낯이 드러나고, 믿는 야곱 가정의 믿음 없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결과만 좇는 세상의 논리

야곱의 가족이 세겜 땅에 정착했습니다. 숙곳에 집을 짓고 우릿간을 만들었으며 세겜의 땅을 샀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딸 디나가 그 땅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큰 봉변을 당합니다. 그 땅의 추장 세겜에게 강간당하고 욕을 보았으며, 그 집에 억류되었습니다. 세겜은 이 여인을 달래며 자신이 결혼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다 듣고서도 야곱은 침묵했습니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습니다. 실력 행사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자식들이 일터에서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하몰과 세겜이 야곱의 집에 들이닥칩니다.

"하몰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너희 딸을 연연하여 하니 원하건대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 (창 34:8)

이것은 부탁이 아닙니다. "아내로 삼게 합시다"가 아니라 "아내로 삼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에는 미안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압적이고 지시적입니다. 그리고 나서 한 가지 당근을 제시합니다.

"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여 너희 딸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 딸을 너희가 데려가고 너희가 우리와 함께 거주하되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여기 머물러 매매하며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 하고" (창 34:9-10)

자신들이 이 땅의 실세이자 권력자이니, 딸을 넘기기만 하면 이 땅에서 장사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기업을 주어 부유하게 해주겠다며 통혼을 제안합니다. 여기서 한 술 더 떠서 사건의 당사자인 세겜이 직접 나섭니다.

"세겜도 디나의 아버지와 그의 남자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말하는 것은 내가 다 주리니" (창 34:11)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의 말 속에서 미안한 구석이 있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잘못을 저지른 아들을 데리고 야곱 앞에 무릎을 꿇려야 합니다. 사과해야 합니다. 이 일의 책임이 전적으로 자기 아들에게 있다고, 어떻게 보상하면 되겠느냐고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어난 일이 없었던 것이 되지는 않으나, 적어도 사과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는 사과할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사과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과할 이유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들의 관념 속에는 이것이 잘못이라는 생각 자체가 없었습니다. 약탈혼이 성행하던 시대에 이것이 무슨 잘못이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하고, 이 땅에서 장사하게 해주며, 기업을 주어 부유하게 해주겠다는데 자신들이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냐는 태도입니다.

세겜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동기와 과정은 철저히 무시하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결과주의를 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가정을 이루실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 2:22-23)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이 홀로 사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시어 돕는 배필 하와를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습니다. 여기까지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두 사람을 만드셨다고 해서 "지금부터 너희는 부부다, 무조건 결혼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고압적으로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조차도 동기와 과정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 다음은 아담과 하와의 몫이었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했고, 하와가 그 고백을 받아들여 결혼이 성사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대로 두 사람을 짝지으신 것이 아니라, 이끌어 오신 것까지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토록 인간의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사랑에는 동기가 필요하고, 사랑에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시간, 상호 인격적인 교류의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겜 사람들에게는 그 과정이 없습니다.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폭력으로 여인을 제압해 놓고 와서 한다는 말이 무조건 이 딸을 달라는 것입니다.

결과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러한 태도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선거 때마다 정당과 후보자들이 공약을 제시합니다. 조금만 분별력이 있으면 그 공약들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국가 예산과 세금 수입이 있고, 엄격한 절차를 통해 세금을 거두어들이며, 정당한 과정을 거쳐 국민복지, 국방, 교육 등에 배분합니다. 그런데 선거 공약에는 이런 절차가 없습니다. 세금을 깎아주겠다, 무엇이든 퍼주겠다, 도로를 깔아주겠다, 건물을 지어주겠다고 합니다. 그 재원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선거에만 이기면 그만이라는 식입니다. 절차도 없고 과정도 없으며 동기가 불순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는 이런 정치인들을 비난하지만 우리 역시 다를 바 없습니다. 명절이 다가와 친척 집 조카들을 만나면 어떤 질문을 합니까? "취직은 했느냐, 연봉은 얼마냐, 결혼은 했느냐, 아이는 얼마나 낳을 거냐?" 결과만 묻습니다. 시험에 붙고 떨어지는 결과, 취업 여부의 결과, 성공과 실패의 결과만을 추궁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 피땀 흘려 노력하는 과정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과정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동기가 선해야 하고 과정이 정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년들에게, 우리 자녀들에게 과정에서 성실하라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입니다. 세겜 사람들은 결과만 좋으면 그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동기가 하나님 앞에 올바르고, 과정이 성실하며 정당해야 합니다. 과정에서 문제가 있고 잘못이 있었다면 사과하면 됩니다. 용서를 구하면 됩니다.

아버지의 자리를 잃은 야곱

고압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하몰과 세겜 앞에서 야곱 집안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창 34:7)

근심하고 분노했습니다. 이것이 야곱 집안의 분위기입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이런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몰과 세겜 사람들에게 이것은 일상이었습니다. 이처럼 서로 맞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세계관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세계관은 결코 하나가 되기 어렵습니다.

야곱은 신앙의 롤러코스터 같은 부침을 경험했지만, 분명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니 이런 일 앞에서 분노가 치밀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의 원초적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은 야곱의 잘못입니다. 그가 벧엘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입니다. 벧엘 언약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 벧엘로 올라갔더라면, 거기서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었더라면, 거기서 하나님께 헌신했더라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지은 집은 허무합니다. 자기 손으로 아무리 단단하게 지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한순간에 부서지고 무너져 내립니다.

이제 협상 테이블을 차려야 합니다. 하몰과 세겜이 최후 통첩을 가지고 왔습니다. 저쪽에는 하몰과 세겜이 앉았습니다. 이쪽에서 누군가가 나서서 이 협상을 매듭지어야 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음이라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니라" (창 34:13-14)

13절의 주어가 야곱의 아들들이고, 14절의 주어도 야곱의 아들들입니다. 협상 테이블에 야곱의 아들들이 앉았다는 뜻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레아가 낳은 아들들입니다. 레아는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입니다. 그중 잇사갈과 스불론은 나이가 어린 터울이 나는 아이들이니 제외한다 하더라도, 디나의 오빠 네 명이 이 협상의 주체가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고대 사회에서 상당히 특이한 일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버젓이 살아 있지 않습니까? 야곱이 협상 테이블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야곱의 아들 네 명이 주도권을 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야곱의 아들들 마음속에서 야곱은 이미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얍복강가에서 야곱은 이미 아버지의 권위를 상실했습니다. 에서의 칼 앞에서 가족들을 세 그룹으로 나눌 때, 첫 번째 그룹에 빌하와 실바 그리고 그들이 낳은 자녀들을 방패막이로 세웠습니다. 두 번째 그룹에 레아와 그 자녀들을 세웠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그룹에 라헬과 요셉을 세웠습니다. 라헬과 요셉을 보호하기 위해 나머지 자녀들을 방패막이로 세운 아버지 앞에서, 그 순간 아들들이 겪었을 마음의 고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순간 그들 마음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좌절과 절망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다시는 이 사람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야곱에게 어떻게 동생의 구출을 맡기겠습니까?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지금 억류되어 있는 디나를 이 사람이 찾아오겠습니까? 디나의 오빠들은 그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빠지시라, 우리가 하겠다고. 네 명의 아들이 협상 테이블의 주도권을 쥐었습니다.

자식을 낳았다고 다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로서 부모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부모로서 희생하고, 자녀를 길러내며, 그들을 위해 피땀을 쏟고, 기도하며 양육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은 아버지로서의 자격을 이미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사명을 가볍게 여긴 자의 결말

이 이야기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필요한 사명과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 사명을 믿음으로 감당하며 살아내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야곱처럼 굴욕을 당합니다. "너는 빠지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 자리는 네게 합당한 자리가 아니니 뒤로 물러가 있으라"는 수치를 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주인이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달란트를 맡깁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각각 맡겼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은 열심히 일해서 각각 그만큼을 더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귀찮고 하기 싫어서 땅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이 종은 변명합니다.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마 25:25-26)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당신의 달란트"라고 말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내가 언제 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이런 재능을, 이런 직분을 내가 원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왜 떠맡겼습니까? 귀찮고 하기 싫어서 파묻어 두었는데, 이제 와서 왜 책망합니까? 그래서 주인이 말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주인은 분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냥 주신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고 남기라고, 그 자리에 합당한 인생을 살아내라고 주신 것입니다. 목회자는 목회자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양떼를 먹이고 돌보며 치라고 주셨습니다. 그 사명에 목숨을 걸고 양떼를 치고 돌봐야 합니다. 직분자로서의 사명을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하다 보면 사람에게 마음 상할 수 있고,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며, 속상한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그렇다고 해서 내팽개쳐서는 안 됩니다. 그 사명을 붙잡고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 오시는 그날까지, 하나님 나라에 가는 그날까지 성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야곱처럼 제외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굴욕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장자였습니다. 그러나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창 25:34)

"가볍게 여기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자'(בָּזָה)는 경멸하다, 멸시하다라는 뜻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멸시하고 가볍게 여기니, 하나님이 그 장자권을 거두어 야곱에게 주셨습니다. 에서는 그렇게 제외되었고, 야곱은 이번에 아버지의 자리에서 밀려났습니다.

결론

사명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겜 사람들은 동기와 과정, 절차를 무시하고 결과만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세겜 사람들과 같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동기가 선하고 과정이 성실해야 하며,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예수님 오시는 그날까지 성실하게 지키고, 최선을 다해 감당하며, 야곱처럼 제외되는 굴욕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맡겨주신 십자가를 성실하게 지고 자릿값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세겜 사람들은 과정과 동기, 절차를 무시하고 결과만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주여, 우리는 세겜 사람들과 같지 않았는지요. 우리의 인생이 이들과 같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동기도 선하고 과정도 성실하여, 하나님께 모든 결과를 맡기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사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사명을 예수님 오시는 그날까지 성실하게 지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최선을 다해 그 사명을 감당할 테니 하나님, 우리를 영화롭게 하여 주옵소서. 야곱처럼 쫓겨나는 굴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언제나 우리에게 맡겨주신 십자가를 성실하게 지고 자릿값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