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
본문: 창세기 34:15-31
우리 민족은 해마다 두 번의 큰 명절을 맞이합니다. 멀리 흩어져 살던 일가친지가 한자리에 모여 사랑을 나누고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세계적으로도 독특한 문화입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가운데 정이 깊어지고, 마음에 쌓인 것들을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모이다 보면 갈등도 생기고, 불편한 일을 겪거나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가족 간 명절 모임에서 빚어질 수 있는 대표적 갈등 가운데 하나가 제사 문제입니다. 과거에는 제사 문제가 종교적 갈등의 발화점이었으나, 최근에는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한 해 추석 명절이 지나고 나서 정부 기관에서 국민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앞으로 제사를 계속 지낼 것인지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약 60% 이상이 앞으로 제사를 지속할 생각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해당 기관은 이 충격적인 결과를 마주하고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기자회견장에 들고 나온 것이 '전통 제례 보전을 위한 현대화 권고안'이라는 문건입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그중 핵심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제사 음식은 여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모여 만들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축문을 한문으로만 쓰지 않아도 되고 한글로 써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자정에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되고 초저녁에 지내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현대화 권고안을 발표한다고 해서 제사를 지낼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마음을 바꾸겠습니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이유가 더 적나라합니다. 우선 제사 비용 문제입니다. 가족 간 비용 문제로 분쟁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또 제사 음식을 함께 장만하지 않는 데서 불만이 계속 누적되었습니다. 어떤 가족은 제사 때마다 빠지지 않고 오는데, 어떤 가족은 제사 때마다 오지 않는 것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명절이라는 본연의 취지가 무색해졌습니다. 서로 함께 모여 교제하고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데, 비본질이 본질을 집어삼키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자리에서 어찌 이것뿐이겠습니까? 비본질이 본질을 삼키는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할례가 핵심 키워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할례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할례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비롯된 할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으로서의 할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할례는 그런 할례가 아닙니다.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인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 이면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도구로 전락한 거룩한 언약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땅의 추장 세겜에게 강간당하고 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적반하장으로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은 오히려 야곱 가족에게 찾아와 혼인을 요청합니다. 이 협상의 자리에서 불의한 일을 당한 야곱의 아들들이 협상을 주도합니다. 디나의 오라비인 야곱의 아들들, 이들이 협상을 주도하면서 내건 조건이 할례였습니다.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데려오며 너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창 34:15-16)
할례를 받으라, 그러면 디나를 내주는 것은 물론이고 서로 통혼하고 한 민족이 될 수 있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할례를 결혼의 도구로, 수단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세겜과 하몰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의 말을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좋게 여기므로" (창 34:18)
하몰과 세겜이 이 제안을 좋게 여겼습니다. 이제 서로 협상이 완성되기 직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할례를 이런 식으로 사용해도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할례 언약을 이런 식으로 이용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주셨을 때, 그 본질적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할례가 성경에서 처음 등장하는 자리는 창세기 17장입니다. 창세기 17장은 16장과 연결 선상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부르셨을 때, 너의 자손을 저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지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도 자식 하나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85세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이 결심합니다. 사래의 몸종이었던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86세에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은 아들 이스마엘에게 깊이 빠져서 13년을 지냈습니다. 한 번도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고 찾지도 않았습니다.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 할례 언약입니다. 그 할례 언약은 끊어내고, 단절하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 끊어냄과 단절과 결단을 살에 새기는 언약이 할례입니다. 지금까지 너는 네 욕망대로 살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지키지 않고 그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떠나 살았는데, 이제는 제발 그렇게 살지 말고 그런 생활을 끊어내고 결단하라. 그것을 말로만 해서는 도대체 기억하지 못하니 살에 새기라. 이것이 할례 언약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 할례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만약 야곱의 가족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서 할례가 본질적 의미대로 이루어지려면, 세겜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상을 척결하고 정리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여자를 데려다가 약탈혼을 일삼았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대로 사람을 대하겠습니다." 이렇게 모두가 결단해야 합니다. 그 후에 함께 모여서 그 결단과 약속의 의미로 할례를 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할례의 본질적인 의미입니다.
서로 다른 꿈, 같은 배반
그런데 야곱의 가족과 세겜 사람들은 서로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를 제안하면서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디나를 돌려보낼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습니다. 할례를 일단 제안해 두고, 그들이 수술 후 아직까지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쳐들어가서 모두 죽여버리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습니다. 정상적으로 맞붙어서는 승산이 없기 때문에, 할례를 그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지렛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세겜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할례를 허락했습니까? 하몰과 세겜은 디나만 데려오면 그뿐이었습니다. 디나를 데려오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할례를 그렇게 쉽게 수용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하고 고결한 언약인 할례를 이런 식으로 사용해도 되는 것입니까?
하몰과 세겜은 협상을 성사시키고 자기 사람들을 설득하러 갑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들의 말대로 하자 그러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 (창 34:23)
그 시대는 지금처럼 재화가 풍부하지 않았습니다. 먹고사는 것이 늘 숙제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야곱 가족은 가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축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하몰과 세겜은 이 점을 가지고 자기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일단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할례를 행해 주자, 우리가 그들과 한 민족이 되어버리자, 그 후에 그들의 재산을 가져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재산을 가져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야곱 가족을 죽여야 합니다. 이 말은 상당히 무서운 계산입니다.
모두가 다른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할례를 기점으로 해서 야곱의 아들들이 꾸는 꿈과, 하몰과 세겜이 생각하는 것과, 세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모두 달랐습니다. 세 측이 할례를 중심으로 한 행위를 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선수를 친 것은 야곱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제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창 34:25-26)
그들의 의도대로 되었습니다.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단 두 사람, 둘째 셋째인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가지고 가서도 세겜의 남자들을 모두 죽일 수 있었을 만큼, 그들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세겜 사람들의 남자를 모두 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디나를 구출해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승리한 것입니까?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 (창 34:29)
분노가 멈추지 않아서, 분이 풀리지 않아서 약탈까지 자행했습니다. 부녀자들을 모두 사로잡아왔습니다. 이것을 가정의 승리라고 치부해도 됩니까? 잘한 일입니까?
수천 년 전 야곱의 가족과 세겜에서 일어난 이 일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이 일이 오늘 이 땅에서, 우리 가운데서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결혼과 세례를 연결시키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례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시절에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흐르는 강물에 세례를 베푸는 사람과 세례받는 사람이 함께 들어갑니다. 흐르는 강물에서 세례를 받는 이유는 과거의 옛 자아를 흘려보낸다는 뜻입니다. 세례를 베푸는 사람이 세례받는 사람을 강물 속에 잠기게 하고, 다시 끌어올립니다. 옛 자아의 죽음과 새로운 자아의 탄생입니다. 옛사람은 죽고, 새로운 나는 하나님 앞에서 태어난다는 뜻이 세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세례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는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며느리나 사위를 볼 때, "그래도 세례는 받아야지"라고 하여 결혼을 위한 세례가 하나의 형식이 되고 의무가 된다면, 그 세례가 지금 세겜 사람들이 행하는 할례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의 신앙 고백도 아니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선다는 결단도 아닌 그 세례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하고 고결한 세례를 이용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것을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거기에 인간을 두신 이래로, 하나님은 인간을 수단으로 삼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사람 자체는 목적이었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죄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에도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 가죽을 벗겨서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수치를 가리고 인격적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신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위해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오직 인간을 사랑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 세계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이 피조 세계를 자기의 수단으로 삼지 않습니까? 한겨울에 난방이 잘되는 아파트에서 반바지를 입고 민소매를 입은 채 기후 위기를 걱정합니다. 이것은 넌센스입니다. 무더운 여름에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집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오존층 파괴를 걱정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이기적입니다. 불편하게 살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피조 세계를 보존하고 지키고 관리할, 청지기적 사명을 우리는 애초부터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 원하는 대로 이용하기에만 급급합니다. 할례를 사욕의 도구로 이용하고, 세례를 결혼의 수단으로 삼으며, 하나님이 주신 피조 세계마저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믿음의 백성은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하나 잘 짚어가며 그 본연의 의미와 본질적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좋은 대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자기 멋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것을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본래적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잘 새겨 가시는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좁은 문, 생명으로 이끄는 길
이제 하몰과 세겜은 협상을 성사시키고 자기 사람들을 설득하여 세겜 성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먼저 선수를 친 것은 야곱의 아들들이었고,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의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디나를 구출한 뒤 약탈까지 자행했습니다.
이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길을 가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을 예수님께서 이미 알려 주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좁고 협착한 길이 이어지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광활하고 넓은 길,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협착한 길을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 길을 이렇게 규정합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 1:6)
좁은 길은 의인의 길이요, 넓은 길은 악인의 길입니다.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가족이 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이었습니까? 벧엘로 올라가는 길 아니었습니까? 벧엘로 올라가는 길은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짓는 길이었습니다. 벧엘로 올라가는 길은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드리고 헌신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로는 아무도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짓는 일,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짓는 것보다 자기를 위하여 자기 집을 짓고 싶어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넓은 길을 가려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세겜 땅에서 밭을 사고, 가족을 위하여 터전을 잡기를 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고 가는 길입니다. 야곱의 가족도 좁고 협착한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향하는 세겜을 향하여 수꼿을 향하여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그 넓은 길 속에는 세겜 사람들도 있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 자기 방식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뒤엉켜 살아야 하고, 그들과 갈등하고 다투어야 합니다. 세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이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강간해버립니다. 얻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탈취하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식조차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뒤엉켜 살려면 내가 더 비열해져야 하고, 더 잔인해져야 하고, 더 야비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인 할례를 지렛대로 삼아 이용한 것 아닙니까? 세겜 사람들보다 더 교활하게, 더 잔인하게, 더 비열하게 사람을 죽인 것 아닙니까?
이것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살면 불안이 끊이지 않습니다. 지금은 이들에게서 딸을 구해왔지만, 지금은 이기고 승리하고 개가를 불렀지만, 그다음을 보장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넓은 길 위에서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뒤엉켜 사는 자에게는 근원적 불안이 따라다닙니다. 그 존재의 불안을 야곱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창 34:30)
지금은 세겜 사람들을 쳤지만, 그들은 동맹 관계에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 등 동맹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일어나서 보복할 것입니다. 악취를 풍기게 되었다며 두려워하는 야곱의 모습, 그것은 불안 그 자체입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고,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 존재의 근원적 불안을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창 12:12-13)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도망갔습니다. 좁고 협착한 길에 머무르지 않고 넓은 길로 갈아타버린 것입니다. 그때부터 불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이 느꼈던 그 불안을 야곱도 똑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결론
좁은 길, 협착한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면 우리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 길 끝에 하나님께서 두 팔 벌려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해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좁은 길이 예수 믿는 사람이 선택할 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짓고, 아버지를 위하여 헌신하는 그 길을 걸어가기를 주저하지 마시고, 그 길을 통해서 우리가 기쁨과 은혜와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믿음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례의 본질적인 의미를 야곱의 가족은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세겜 사람들은 디나를 데려오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과 진리의 말씀을 본래의 의미대로 붙들고 살아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본래적 의미를 지키게 하옵소서. 헌신도, 충성도, 봉사도, 기도도, 예배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본래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걷는 그 길이 좁은 길, 십자가의 길 되기를 원합니다. 넓은 길을 걸어가며 그 길에서 대가를 지불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좁고 협착한 길이지만 예수님과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며 결국에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야곱의 가족이 걸어간 자기를 위한 길이 아니라, 이제는 벧엘로 향하는 길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