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강 / 벧엘로 올라가라 (35:1)

벧엘로 올라가라

본문: 창세기 35:1

두더지의 결혼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두더지가 딸을 하나 낳았는데, 자기가 보기에 그 딸은 천하일색 절세가인이었습니다. 금지옥엽 잘 키워 마침내 결혼할 때가 되었는데, 흉측하게 생긴 이웃집 두더지 총각에게 시집보낸다는 생각만 해도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딸에게 가장 어울리는 멋진 신랑을 찾아주기로 결심하고, 온 세상을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해가 떠 있었습니다.

해님이 가장 높은 곳에 있으니 가장 위대한 존재라 생각하고 찾아가 딸을 거두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해가 말합니다. 자기가 높은 곳에 있는 것은 사실이나, 구름이 자기를 가리면 꼼짝도 못 하니 구름에게 가보라고 했습니다. 구름을 찾아가자 구름도 고백합니다. 바람이 불면 도망가기 바쁘니, 바람이 훨씬 강하다고 했습니다. 바람을 찾아가니 바람 역시 담벼락 앞에서는 무력하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세게 불어도 담벼락은 꿈쩍도 하지 않으니 담벼락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담벼락에게 갔더니 담벼락이 말합니다. 요즘 두더지들 때문에 죽을 것 같다, 매일 땅을 파서 곧 무너지게 생겼으니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는 두더지라는 것입니다. 결국 두더지 어미는 딸을 이웃집 총각 두더지에게 시집보냈고, 둘은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이 딸이 해와 결혼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높은 곳에 있는 것은 사실이되, 평생 바라만 보다가 외롭게 살았을 것입니다. 구름과 결혼했다면 잔뜩 찌푸린 얼굴 앞에서 한번 피어보지도 못하고 불행하게 살았을 것이며, 바람과 결혼했다면 찬바람 속에서 늘 외롭고 눈물 나는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담벼락과 결혼했다면 든든하기는 하나 평생 벙어리에 냉가슴 앓으며 답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두더지는 두더지와 결혼해야 가장 행복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언제 가장 행복합니까? 믿음의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야곱의 이야기로 말하면 벧엘에서의 삶을 살 때 가장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짓고, 주의 일에 힘쓰며, 맡겨주신 재능으로 열심히 섬기고 일할 때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세겜에서의 삶이 화려해 보입니다. 그러나 세겜에 내려가면, 마치 두더지가 해와 바람과 구름과 담벼락과 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그리고 그 은혜 위에 어떤 그림을 그려가야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

지금 야곱은 안팎으로 큰 위기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그가 직면한 내적 위기는 가정의 위기입니다. 가정에서 그는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얍복 강에서 사랑하는 자녀를 세 그룹으로 나누었을 때부터 그는 아버지로서의 지도력을 상실했습니다. 레아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협상 테이블에서 끌어내렸습니다. 야곱은 이미 내적으로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긴 사람이었습니다.

외적으로도 위기는 심각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사람들을 칼로 도륙했습니다. 할례 언약을 미끼로 통혼하기로 하고는 세겜의 남자들을 살해하고 전리품과 부녀자들을 사로잡아 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세겜과 동맹을 맺었던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이 보복하러 올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런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서 야곱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창 35:1)

이 말씀에는 놀라운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야곱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위기에 처한 야곱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야곱을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야곱은 잠잠히 있었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습니다. 벧엘로 올라갔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세겜에 정착한 결과 이 모든 일이 벌어졌으니 그 책임이 고스란히 자기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야곱의 일생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먼저 찾아오신 것이 세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벧엘에서였습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여 장자권을 빼앗은 채 도망갈 때, 꿈속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사닥다리 환상을 보여주시며, 그 사닥다리 끝 보좌 위에 하나님께서 좌정해 계셨습니다. 두 번째는 얍복 강가에서였습니다. 에서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야곱을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셔서 씨름을 걸어오셨고,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꿔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세 번째입니다. 두려움에 떨며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있는 야곱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성경에는 야곱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입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행 9:3-5)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옥에 넘기려고 가던 사울을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 만나주셨습니다. 사울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 만나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 적이 없는데도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 주신 것, 이것은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기다리며 찾고 계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 야곱에게도, 사울에게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임했고, 오늘 우리에게도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야곱에게도 사울에게도 제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가셨는데, 왜 나에게는 먼저 찾아오시지 않느냐고 의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오해한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찬찬히 반추해 보면,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신 적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됩니다. 믿음의 눈으로 살펴보면 매 순간이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는 은혜의 순간들입니다.

오래전에 한 나이 드신 집사님이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6남매를 남겨놓고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6남매를 먹여 살려야 하는데 가진 돈도, 배운 기술도, 학벌도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장사뿐이었습니다. 소금에 절인 생선을 고무 다라이에 담아 머리에 이고 골목골목을 다니며 생선을 팔았습니다. 허리는 끊어져 나갈 것 같고, 목은 풀어질 것 같고, 어깨는 빠질 것 같았습니다.

그날도 골목길에 접어들었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그 소리가 들리는 곳에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구역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선 좀 사달라고 하니, 연세 지긋한 분이 어서 내려놓고 올라오라며 냉수 한 잔 먹고 함께 예배드리자고 했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생선을 팔아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 불렀던 찬송이 찬송가 337장이었습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며, 근심에 쌓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리 은혜의 주님 오셨으니." 세상 모든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지는데, 나를 불쌍히 여길 분이 있다니 그분을 만나고 싶었다고 합니다. 교회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분이었고, 그 찬양은 평생 처음 들었는데 은혜가 벅차올랐다고 합니다. 그 찬양의 가사에 은혜를 받고, 그 길로 예수를 믿고, 그때부터 성실하게 믿음 생활을 감당하여 6남매를 잘 키워 모두 시집장가 보냈다고 간증하셨습니다.

이분이 먼저 하나님을 찾아간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날 그 골목길 어귀에서 구역 예배의 찬양 소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분의 인생에 깊숙이 개입하여 찾아오셨습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고, 내가 들어주겠다고 하나님께서 그 순간 이분의 인생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분이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였습니다. 자기 인생을 저주하지 않고, 이 무거운 짐을 들어줄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그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기로 결단한 결과 인생에 놀라운 역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간순간 이렇게 우리에게 들어오시는데,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해서, 마음이 완악해서 깨닫지 못하고 밀어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찾아오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교회에 등록한 한 가족을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처음 복음을 영접했느냐고 물었더니, 중고차를 한 대 구입했는데 카세트 테이프 데크 안에 복음 성가가 하나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출퇴근하면서 그 복음 성가를 계속 들었는데, 그 은혜가 마음에 깊이 스며들어 믿음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특별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야곱에게 먼저 말씀하시는 것도 은혜이고, 무거운 짐 진 자에게 그 짐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은혜이며, 이런저런 방식으로 우리 인생에 깊숙이 개입하시는 것, 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세상의 다른 종교에서는 사람이 신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방법도 모르고 길도 모르는 피조물이 어떻게 조물주를 찾아갈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우리를 가장 잘 아시기에, 먼저 찾아오시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다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영접하고 맞아들일 수 있는 영적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매 순간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자유라는 선물, 그리고 인생의 그림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때입니까? 야곱도 이런 의문을 가지지 않았겠습니까?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에서와 헤어진 다음, 세겜에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났을 때,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으려 했을 때, 그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막으셨다면 인생이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이제서야 말씀하십니까? 우리도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때 내가 그 선택의 경계를 넘어가지 않도록, 그 사람을 믿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그때 개입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디나 사건이 일어나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된 이때서야 나타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 성장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가장 귀한 선물 한 가지를 주셨는데, 그 선물이 바로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는 상당히 위험한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로봇으로 창조하신 적이 없습니다. 순종 모드로 설정해 놓고 모든 일에 무조건 복종하게 만드신 적이 없습니다. 인간을 인격으로 대우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방식이 바로 여백이었고, 자유였습니다. 자유는 우리 인생에 주신 하나님의 가장 값진 선물이자 여백입니다. 그 여백을 우리가 채워가야 합니다.

자녀를 낳아 길러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거부할 가능성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춘기 자녀가 부모를 향하여 눈을 부라리고 소리를 지르며 집을 나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부모의 진심을 알고, 그런 마음이 있어도 억누르며 순종할 때, 그 순종이 얼마나 값지고 귀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순종을 바라시기에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20년간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훈련받았으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왔으면,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약속의 계보에 들어왔으면, 에서 문제까지 해결되었으니 이제 자유의 여백을 선물로 받아 아름다운 인생의 그림을 그려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린 그림은 망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하얀 도화지에 자기 마음대로 엉망으로 그림을 그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미술 시간에 손 스케치에 대한 이론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손에 음영을 넣고 질감을 살리는 법, 다양한 손 모양을 그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선생님께서 배운 대로 직접 스케치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잘 그리지는 못해도 최선을 다해서, 성의를 보여서 한번 그려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미술에 소질도 없고 관심도 없었기에, 도화지 위에 왼손을 엎어놓고 손가락을 따라 그렸습니다. 3분 만에 끝냈는데, 다 그리고 보니 고무장갑 같은 모양이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그림을 말리지도 않고 물끄러미 보고 계셨습니다. 수업이 끝난 후 그 그림을 달라고 하시더니, 다른 반 수업에서 잘못된 예시로 보여주셨습니다. 한 달 내내 교실 뒤에 가장 잘 그린 그림과 가장 못 그린 그림을 나란히 붙여놓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적어도 초등학교 6년 동안 미술 교육을 받았고, 중학교 1년 동안 이론 수업을 들었으면, 잘 못 그려도 최선을 다하고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유치원생도 이런 식으로 그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마음에 원망이 생겼습니다. 손을 엎어놓았을 때부터 보셨으면서 그때 혼내시고 그리지 말라고 하시지, 왜 가만히 두고 보셨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6년간 미술 수업을 듣고 1년간 열심히 배웠으면 적어도 흉내는 낼 수 있어야 했고, 적어도 최선은 다해야 했습니다. 선생님은 그것을 지켜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화폭에 그림을 스케치하라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훈련을 받았습니까? 목사가 될 때까지,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직분자로 수십 년 동안 훈련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시며 인생의 화폭에 멋진 그림을 그려보라 하셨는데, 우리 인생에 그린 그림은 과연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래도 성의는 있구나, 최선은 다했구나, 멋진 그림은 아니어도 성실하게 그렸구나' 하실 정도의 그림은 올려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야곱은 잘못된 그림을 그린 사람으로 창세기에 영원히 기록되었습니다. 한 달 동안 벽에 붙어 있던 그 그림과 달리, 야곱의 인생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가 보고 교훈으로 삼도록 성경에 영원히 박제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자녀들과 자손들이 내 인생의 그림을 보고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고 이 그림을 아름답다 하시겠습니까? 지금부터라도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가지고, 내 인생의 그림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아름답게 그려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길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내 인생의 그림은 누가 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스스로 망치는 것입니다. 타인을 원망할 이유도 없고, 상황과 환경을 핑계할 이유도 없습니다.

벧엘 정신으로 사는 삶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창 35:1)

벧엘에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라는 말씀에서 '거주하다'는 히브리어 '야솨브'라는 동사를 씁니다. '살다', '앉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 벧엘이라는 장소를 신성시하신 것은 아닙니다. 벧엘에 가서 꼼짝하지 말고 거기서만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라고 하신 것은 벧엘 정신을 가지고 살아내라는 뜻입니다.

벧엘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짓겠다는 정신, 하나님을 위하여 살겠다는 정신, 내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인생을 살겠다는 정신입니다. 인생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벧엘 정신으로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장소를 특별히 생각하고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만나셨을 때, 이 여인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린다 하니, 무엇이 옳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1)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것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간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배당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믿음 생활을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이 벧엘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내 인생이 하나님 우선순위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벧엘 정신으로 내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가치를 최우선에 놓고 살아가야 합니다. 일터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은혜의 진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신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라는 여백을 선물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매 순간 붙잡되, 그 은혜 위에 내 인생의 그림을 아름답게 그려가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야곱처럼 엉망으로 그리고 나서 후회하는 인생이 아니라, 비록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그려가는 인생이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붙잡고, 어디를 가든 벧엘 정신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아름다운 그림이 될 것입니다. 그 그림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도록,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셨음을 믿습니다. 매 순간 찾아오시고 말씀하시고 불러주시는데, 우리는 미련하고 아둔하여 영의 눈이 가리워져서 주님의 부르심을 깨닫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 인생에 하나님께서는 자유를 주시고 여백을 두시며 그림을 그려보라 말씀하셨는데, 야곱처럼 망쳐버린 그림을 그릴 때가 많았습니다. 아버지, 이제 지금부터라도 좋은 그림, 성실한 그림, 최선 다한 그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그림을 그려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후세대와 우리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내 인생의 그림을 잘 채워가기로 결단하오니, 하나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벧엘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