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강 / 일어나 벧엘로 (35:2-5)

일어나 벧엘로

본문: 창세기 35:2-5

미국이 전 세계 패권 국가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달러화는 기축 통화이며, 미국은 전 세계 분쟁 지역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눈에 보이는 부분일 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미국의 진정한 강함이 드러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통하는 문화입니다. 상명하복의 경직된 조직 문화가 아니라, 어떤 말이든 어떤 주장이든 자유롭게 나누고 대화할 수 있는 근본적 토대가 그들이 지닌 강력한 힘입니다.

한 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미국 국무장관 토니 블링컨이 중동 주재 미국 외교관들을 만난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반대 의견을 개진하는 '반대 채널'의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중동 주재 외교관들은 국무장관에게 두 가지를 건의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에서 미국이 휴전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는 것이 첫째였고,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민간인 거주 지역을 폭격하지 못하도록 막아 달라는 것이 둘째였습니다. 이 두 가지를 주장하며 반대 문서에 서명하고, 공적 문서에 자기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사상의 불이익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문화는 1971년 닉슨 행정부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입니다. 당시 베트남 전쟁의 교착 상태에서 다양한 출구 전략을 모색하던 닉슨 행정부는 반대 채널을 가동하여 반대 의견을 청취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내건 조건이 두 가지였습니다. 인사상의 불이익이 없다는 것, 그리고 건설적인 반대에는 상을 수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관료 조직 안에서는 반대 의견이 자유롭게 개진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말하면 들어주고, 수용하며, 반대할 것은 반대하는 이 문화가 오늘의 미국을 강하게 만든 힘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는 있지만, 그것을 얼마나 진심으로 수용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누군가 나를 반대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라는 인격에 대한 반대로 여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반대를 진심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때, 사람은 성장하고 발전합니다. 믿음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씀 앞에서 제대로 반응하며 살아낼 때 비로소 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모른 척하고 귀를 닫으면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이 그러한 인물입니다. 야곱은 적지 않은 흠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씀을 주시든지 듣고 반응하며, 즉각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함께 살피고자 합니다.

말씀 앞에 일어선 사람

야곱과 그의 가족은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세겜 사람들을 야곱의 자녀들이 몰살시켰고, 그들의 재물을 사로잡아 왔으며 노략까지 해 버렸습니다. 이제 세겜과 동맹을 맺은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빠져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위기 상황마다 야곱을 찾아오신 것, 그 자체가 이미 은혜였습니다. 야곱은 그 놀랍고 귀한 은혜를 거듭 덧입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 은혜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야곱과 그 가족의 몫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모른 척할 것인가. 본문 2절의 말씀입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창 35:2)

'이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한 즉각적 반응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그 가족에게 말씀하신 것에 야곱이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야곱은 그의 가족들과 함께한 모든 사람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하자'라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탁월한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씀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적극적으로 모색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하는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소통에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사회성이 결여되었거나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는데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영적인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야곱은 적극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이 반응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인생이 달라지고 삶이 놀랍게 변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베드로가 대표적입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 5:4-5)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처음 만나신 자리에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베드로가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만약 베드로가 '나는 이곳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인데, 당신이 무엇을 안다고 말씀하십니까'라며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말씀을 내쳐 버렸더라면, 그의 인생에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반응하고, 깊은 데로 나아가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고, 열두 제자 가운데 수제자가 되었으며, 예루살렘 교회의 탁월한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주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말씀에 대한 반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죄가 우리를 유혹할 때 죽은 자처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반응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죽은 자가 반응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누가 죽은 자를 향하여 발길질을 해도, 입에 담기 어려운 욕을 해도, 죽은 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 우리가 이처럼 반응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반응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반대로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마음에 일어나는 죄의 욕망에 대해서는 욕망이 일어나자마자 그대로 행동합니다. 죄가 유혹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붙잡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일어나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진리인 줄 알면서도, 그 말씀을 따라가야 살아남을 수 있는 줄 알면서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귀도 닫고 눈도 감고 마음도 닫은 채 삽니다. 그렇게 해서는 믿음 생활이 제대로 될 리 없습니다.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야곱처럼. 그래야 우리는 성장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아서 무너진 인물도 있습니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령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왕상 11:9-10)

솔로몬이 얼마나 위대한 왕이었습니까. 그런데 바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이후 그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반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그가 살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하나님의 금지 명령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솔로몬 사후에 나라는 둘로 갈라졌습니다. 그의 아버지 다윗이 피와 땀으로 세운 나라, 조상들이 사랑하고 아꼈던 나라가 반토막이 나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해야 살 길이 있습니다. 야곱은 거짓말쟁이였고, 자기 편의대로 행동했으며, 인간적인 결함과 약점이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야곱과 우리가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 말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야곱을 야곱 되게 하셨고,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약속과 축복의 계보 중심에 세우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한다면, 하나님께 사랑받고 인정받기 원한다면, 주의 말씀이 주어질 때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행동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상을 묻고 벧엘로

이제 야곱이 하나님 말씀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봅니다. 야곱은 가족들에게 세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이 세 가지를 행하고 벧엘로 올라가자고 했습니다.

여기서 충격적인 것은 '이방 신상들을 버려라'라는 말씀입니다. 충격적인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이방 신상들'이라는 복수 표현 때문입니다. 우리는 라헬이 자기 아버지 라반의 드라빔을 훔쳐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방 신상들'이라 했습니다. 라헬뿐 아니라 레아, 빌하, 실바, 야곱의 자녀들까지 각자 이방 신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충격적인 이유는 야곱이 이 사실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묵인했다는 점입니다. 알고도 묵인하고 있다가, 이제 궁지에 몰리니 비로소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야곱의 가족은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 신상도 섬기는, 전능하신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의 신들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좋은 것은 다 가져가자는 식이었습니다. 송구영신 예배도 드리고 음력설에 점집에 가서 토정비결도 보는 사람들, 예배당에서 성대하게 결혼 예배를 드리면서 동시에 점집에 가서 사주도 보는 사람들, 아이를 낳으면 하나님 앞에 예물도 드리고 작명소에 가서 이름도 지어 오는 사람들. 전형적인 혼합주의자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방의 신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혼합주의자들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이제 야곱의 가정에서 우상이 효험 없음이 입증되지 않았습니까. 드라빔을 가지고 목숨 걸고 훔쳐 나왔는데, 그 드라빔이 무슨 효험이 있었습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방의 신상들이 어떤 효험이 있었습니까. 아무 효험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고난의 유익입니다. 만약 야곱의 가정에 디나 사건으로 인한 이 심각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이 가정에서 우상을 버릴 수 있었겠습니까. 이방 신상을 과연 정리할 수 있었을까요. 버리지 못합니다. 그냥 그대로 가지고 평생 들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었기에, 심각한 두려움에 사로잡혔기에, 이제 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방 신상을 믿다가 패가망신하게 생겼으니, 벼랑에 몰려서 다 털어내고 가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사 48:10)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실 때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십니다. 풀무불 속에서 정련되어 나오는 사람을 택하십니다. 불순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제거될 것은 제거되고, 빠져나갈 것은 빠져나가고, 해결할 것은 해결되어 순전한 상태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취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그의 가정을 쓰고 싶지 않으셨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들로, 백성으로 쓰시기 위해 이러한 어려움을 허락하셔서, 정금처럼 단련시켜 불순물을 남기지 않고 빼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들을 들어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난이 없으면 우상은 제거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들이 있습니다. '버리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수르'는 '떼어내다', '제거하다', '벗겨내다'라는 의미입니다. '정결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타헤르'는 '환하게 빛나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것을 한번 상상해 봅니다. 환하게 빛나는 등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등불을 빛이 전혀 투과되지 않는 검은 천으로 감싸두면 어떻게 됩니까. 불빛이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우상이라는 것, 죄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 앞에서 빛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한 사람 한 사람은 환하게 빛나는 빛과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우상이 들어오고, 물욕이 들어오고 정욕이 들어오고, 세상의 나쁜 것들이 들어와서 우리에게 덕지덕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을 다 떨어내고 벗겨내고 녹여내면 정결하게 됩니다. 빛이 납니다. 적어도 벧엘에 올라가는 사람, 적어도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야곱은 가족들에게 눈에 보이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고 했지만, 야곱 자신에게는 우상이 없었습니까. 그는 비록 눈에 보이는 신상을 섬기지 않았을지라도, 물욕을 섬겼습니다. 세겜의 땅을 사고,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지었습니다. 물질이 그에게는 우상이었습니다. 돈을 벌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고,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은 그 욕망이 그에게는 큰 우상이었습니다. 그것이 빛나는 야곱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제거하고 벗겨내야 환하게 빛납니다. 깨끗하게 되려면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 인생을 다듬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 어려운 일들, 지금도 고난의 기나긴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면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 터널을 다 지나고 나면 정결하게 되고, 연단되어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히고 쓰임 받을 훌륭한 그릇이 됩니다. 깨끗한 그릇이 되어서 하나님이 쓰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도 묵묵히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이 터널을 다 지나고 나면 우리 아이들도 하나님이 쓰시리라는 그 믿음을 가지신다면, 우리는 조급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쓰실 것이기에, 어려운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게 될 것이기에, 그렇게 해서 정결하게 된다면 고난은 우리에게 위대한 유익이 됩니다.

벧엘에 합당한 옷을 입자

야곱이 가족들에게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옷을 갈아입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1-12)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라는 옷을 벗고, 하나님 방식의 옷을 새롭게 입자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가족들이 입고 있던 옷은 세겜의 옷이었습니다. 세상의 문법에 의존한 옷이었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 옷을 입고 있었고, 야곱의 자녀들은 세겜 사람들보다 더 악해야만 했습니다. 할례 언약을 지렛대 삼아 사람들을 살해하는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대로, 그 옷을 입고 살았기에 더 치열하게 살아야 했고, 더 많은 것을 취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세겜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을 벗자고 합니다. 벧엘에 합당한 옷을 입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옷을, 빛의 갑옷을 입자, 하나님 사람들의 방법과 문법에 맞는 올바른 옷을 입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백성으로서, 벧엘에 올라가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야곱이 이렇게 반응하고 나서, 한 번 더 가족들을 독려합니다. 3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창 35: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이렇게 말하는 야곱의 마음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자녀들이 반응하지 않으면, '당신이 뭔데 우리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느냐'고 한다면, 이미 야곱은 가장의 권위를 상실한 상태가 아니었습니까. 이방 신상들을 버려라, 정결하게 하라, 의복을 바꾸어 입어라, 일어나서 벧엘로 올라가자. 이 말이 통할지, 각자 뿔뿔이 흩어지며 안 된다고 하고 집안싸움이 나면,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4절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창 35:4)

가족들이 순순히 내어놓았습니다. 이방 신상들을 모두 가지고 나왔습니다. 심지어 귀고리들까지 가지고 나왔습니다. 세겜 사람들의 문법에 익숙했던 삶을 치장하던 귀고리들, 그것을 다 내놓았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받아다가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버렸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이미 가장의 권위를 상실했습니다. 디나 사건 때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그의 아버지로서의 권위, 가장으로서의 권위가 회복된 것입니다.

권위란 무엇입니까. 나이로 됩니까. 권력으로 살 수 있습니까. 돈이 많다고 생깁니까.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다고 생깁니까. 그렇게는 생기지 않습니다. 영적인 권위, 영적인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에게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야곱이 적극적으로 반응하니 잃어버린 가장의 권위가 회복되지 않았습니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고, 그 말씀을 받아 가족들에게 전한 것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잃어버린 권위를 회복하려면 큰소리 낼 필요도 없습니다. 돈도 필요 없습니다. 권력도 필요 없습니다. 야곱처럼 하나님 말씀에 반응하면 됩니다. 그 모습을 우리 자녀들이 볼 것이고, 우리 믿음의 후배들이 볼 것입니다.

결론

교회가 가진 권위가 예전 같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하나님 말씀에 제대로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목회자와 장로들과 성도들이 그렇게 살아내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향한 교회의 권위가 예전만 못한 것입니다. 야곱은 흠이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이 주어질 때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순종했습니다.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는 말에 가족들이 순종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반응하니 가족들도 야곱의 말에 반응한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교회 공동체에서, 어디서든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반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권위도 회복되고, 문제도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야곱은 흠이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이 주어질 때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순종했습니다.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는 이 말에 가족들이 순종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반응하니 가족들도 야곱의 말에 반응합니다. 주여, 우리도 이와 같이 하나님 말씀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여 잃어버린 영적 권위를 회복하게 하여 주시고, 교회에도 가정에도 우리 삶의 자리에도 권위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