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강 /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35:1-7)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본문: 창세기 35:1-7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뜻밖의 발견이나 발명을 하게 되는 일을 가리킵니다. 주로 과학 분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그 전형적인 사례가 영국의 미생물학자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견입니다. 플레밍은 1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하여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습니다. 병사들이 팔다리에 상처를 입고 후송되어 왔지만, 변변한 소독제가 없어 상처가 썩어 들어가고 결국 팔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생명까지 잃었습니다.

플레밍은 전쟁이 끝난 후 소독제를 개발하겠다는 뜻을 품고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상처를 썩게 만드는 원인이었던 포도상구균을 배양하며 관찰하던 어느 날,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는데 포도상구균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을 발견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니 푸른곰팡이가 우연히 배양액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푸른곰팡이를 연구하고 배양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푸른곰팡이가 포도상구균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페니실린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항생제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 공로로 그는 194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업적을 평가절하합니다. 얻어걸린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뜻을 가지고 일했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하려고 노력하며 발버둥 쳤기 때문에 이 위대한 발견이 가능했습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어떤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일하는 사람이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움직이고 일하면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그 방향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이라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길 위에서 열매를 맺게 하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과 그의 가족이 움직이고 일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걸어가서 아름다운 열매를 경험한 사건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자에게 일하시는지를 함께 살펴보고,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의 형통

야곱과 그의 가족은 세겜에서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두려움이 엄습했고, 앞날을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야곱은 가족을 모아 놓고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야곱의 가족은 이방 신상들을 내어놓았고, 귀고리를 빼었습니다.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창 35:5)

그들은 걱정했습니다. 세겜 사람들과 동맹을 맺었던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이 어디에 매복했다가 뛰쳐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두렵고 겁이 났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추격하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분명히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면 고을들로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추격하는 자가 없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는 언제입니까? 하나님은 어떤 자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십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소망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야곱은 세겜 땅에서 밭을 일구고, 집을 지었습니다. 이미 가진 부가 적지 않았는데도 더 많은 재물을 축적하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그런데 그 물질이 그를 구원했습니까? 돈을 벌기 위해 세겜 땅에 머물렀다가 디나 사건으로 심각한 위기가 벌어졌고, 급기야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물질이 그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야곱과 하나님 사이에 물질이 놓여 있었고, 그 물질이 야곱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의 가족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우상을 끼고 살았습니다. 라헬은 드라빔을 섬기고 있었고, 다른 가족도 저마다 우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우상이 그들을 구했습니까? 결국 그것들을 모두 모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버렸습니다. 귀고리도 묻고, 신상도 묻었습니다. 그들은 비로소 순전하고 깨끗해졌습니다. 이제는 물질도 바라보지 않고, 신상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우상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는데 하나님이 일하시겠습니까? 혼합주의로 살아가는데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만 섬길 때, 그때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해야 합니다.

남유다의 왕들 중에 악한 왕도 있고 선한 왕도 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님 보시기에 합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히스기야입니다.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왕하 18:4-5)

히스기야가 네 가지를 깨뜨렸습니다. 산당, 주상, 아세라 목상, 모세가 만든 놋뱀이었습니다. 이 네 가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상이고, 또 하나는 전통입니다.

왕으로서 우상을 깨뜨리는 일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주상은 부어 만든 우상을 통칭하는 말이고, 아세라 목상은 나무로 여신의 형상을 새긴 것입니다. 길거리마다, 동네 곳곳마다 이런 우상이 있었는데, 왕의 명령으로 쓸어버리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 전통을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산당은 당시 성전의 부속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성전에는 제사장이 있고 격식을 갖춘 예배가 있었지만, 산당에는 제사장이 없었기에 자유로운 예배가 이루어졌습니다.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린 것처럼 초기에는 좋은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산당이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사장이 없으니 욕망대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방의 제사까지 산당에서 드리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이런 산당을 없애버렸습니다. 산당은 사유재산이었습니다. 5대째 대물림되어 온 산당을 왕이라고 해서 함부로 철거할 수 있겠습니까? 유다 온 나라에 있는 산당을 문닫게 하면 백성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럼에도 히스기야는 왕의 자리를 걸고 이 일을 감행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강력한 도전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만든 놋뱀을 없애버린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자 하나님께서 광야에 불뱀을 풀어놓으셨습니다. 모세가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장대에 놋뱀을 만들어 높이 매달라고 하셨고, 그것을 바라본 자마다 살아났습니다. 그때부터 이 놋뱀은 신성시되어 대대로 전해 내려왔습니다. 출애굽 당시가 대략 기원전 14세기이고 히스기야가 왕이 된 때가 기원전 7세기경이니, 약 700여 년 동안 모세가 만든 놋뱀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이 이 놋뱀에 신통력이 있다고 여기며 엎드려 분향하고 절하는 일이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땅의 어떤 왕도 7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것에 손대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기에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어 보니 백성이 순전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걸림돌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주상, 아세라 목상, 산당, 모세가 만든 놋뱀까지 이 모든 것을 제거해야 백성이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모세가 만든 놋뱀을 부숴버리며 말했습니다. "이것은 놋 조각이 아니냐. 여기에 무슨 능력이 있고, 여기에 무슨 권능이 있느냐." 왕의 자리를 걸고 강력한 저항을 각오하며 부숴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왕하 18:7)

모든 것을 깨뜨리고 없애버렸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고,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야곱은 돈이 없으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물질이 없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추격하는 자가 없게 하셨습니다. 야곱의 가족은 드라빔을 비롯한 이방 신상들이 없으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땅에 파묻어 버리고 떠나도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셔서 추격하는 자가 없게 하셨습니다. 히스기야 시대에도 주상과 아세라 목상과 산당과 모세가 만든 놋뱀, 이것들이 없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것을 모두 없애니 오히려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형통을 바라십니까? 하나님 앞에 복받기를 원하시고, 맺혀 있는 것이 풀리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물질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방 신상과 우상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보다 더 섬기던 견고한 우상과 견고한 전통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순도 높은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불순물이 가득 찬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그런 것을 하나하나 버리고 끊어내고 던져버리고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겠다, 이제는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겠다, 믿는 구석 하나도 없이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고백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 한 분을 붙잡으면 형통합니다. 이 형통의 비결이 우리 인생의 열매가 되기를 바랍니다.

떨쳐 일어나는 자의 경험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창 35:5)

하나님이 사면 고을들로 두려워하게 하신 것은 언제 일어난 일입니까? 야곱과 그의 가족이 떠나고 난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들이 떠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사면 고을들을 두렵게 하시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확인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벧엘이라는 방향을 보고 움직이고 일어나 떠났기 때문에,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와 걱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니 한번 해보자 하고 일어나 떠났기 때문에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구나, 우리를 추격하는 자가 없구나, 하나님이 손을 쓰셨구나 하는 사실을 말입니다.

만약 일어나서 떠나지 않고, 두려워서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면 확인할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지 않는데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는지 어떻게 확인하겠습니까? 도전하지 않는데 기적이 일어나는지 일어나지 않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기도하지 않는데 응답이 되는지 안 되는지 어떻게 확인하겠습니까? 전도하지 않는데 상대방의 마음이 열리는지 열리지 않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라면, 그 방향을 향해 해봐야 합니다. 도전하고 전진하고 일어나서 두려움을 떨치고 걸어가면, 거기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떨쳐 일어날 때 일하시는 분입니다. 가만히 있는 자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일하시겠습니까? 야곱과 그의 가족은 두려움이 가슴속에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사방으로 뚫린 광야 길을 걸어가느니 차라리 이 집이 안전하니 여기 숨어 있자고 했다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일어나 달려갔기 때문에 경험한 것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창 13:14)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창 13:17)

아브라함에게 롯이라는 존재는 아들 이상이었습니다. 자녀가 없었던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거의 아들처럼 여기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 땅으로 가버렸습니다. 상실감이 컸습니다. 배신감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머물러 앉아서 우울감에 사로잡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눈을 들라고 하셨습니다. 고개 숙이고 앉아 있지 말고 눈부터 들어보라, 고개를 들라, 일어나라, 종과 횡으로 다녀보라, 네 발이 닿는 모든 땅을 네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처럼 두려워서 그 자리에 있는 분도 있고, 아브라함처럼 실패와 배신감 때문에, 절망과 낙심 때문에, 상처 때문에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유이든 머물러 있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일어나서 움직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벧엘, 그 방향으로 일어나 달려가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뒤에서 우리를 도우시고, 사면 고을들로 두렵게 하셔서 우리에게 해가 미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주의 일에 애쓰고 힘써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벧엘로 달려가는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사랑의 자리로 돌아온 자의 예배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창 35:7)

드디어 벧엘에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올라오면 될 것을, 이렇게 쉽게 올 수 있는 벧엘이었는데, 이 길을 올라오기까지 오래오래 걸렸습니다. 벧엘에 올라와서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며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고, 엘벧엘은 하나님의 집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할 때 벧엘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이전까지 야곱은 아버지의 하나님, 어머니의 하나님만 믿었습니다. 그런데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날이 바로 벧엘에서였습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거짓말을 하고 도망자가 되어 피해 다니던 그 시절, 얼마나 곤궁하고 가련한 인생이었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고맙고 놀라워서 야곱은 거기서 결단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겠다, 앞으로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겠다고 헌신을 결단했습니다.

벧엘은 야곱에게 첫사랑의 자리입니다. 그 첫사랑의 자리로 야곱이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맺었던 그 첫사랑의 자리를 단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하나님은 한 번도 첫사랑의 벧엘을 잊지 않으셨는데, 야곱은 까맣게 잊고 있다가 다시 궁한 상태가 되어서 벧엘로 올라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늦었지만 다시 첫사랑의 자리로 올라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2:4-5)

에베소 교회의 첫사랑은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전도하고 두란노 서원에서 3년간 성경 공부를 힘껏 가르쳤습니다. 말씀 공부로 충만했던 교회가 에베소 교회입니다. 은혜가 넘쳤습니다. 마술사들, 점치는 자들이 보던 책을 가져와서 불에 태웠는데 그 책값이 은 오만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과 열정을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렸습니다. 우상숭배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에 주님이 책망하십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촛대에는 초가 꽂혀 있고, 초가 꽂히면 환하게 빛납니다. 그 빛나는 촛대를 옮기면 그 자리는 다시 암흑천지가 된다는 뜻입니다. 인생에 다시 어둠이 찾아올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께 받았던 첫사랑의 감격을 잊어버리고, 벧엘을 잊어버리고, 벧엘의 첫사랑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면 우리 인생에 다시 암흑이 찾아온다는 말씀입니다. 늦었지만 야곱과 그의 가족이 벧엘로 올라간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결론

우리도 첫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첫사랑을 간직하고 회복해야 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어도 기쁘고 감사하고 즐거웠습니다. 주의 일을 하는 것이 기쁘고 보람되고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유도 많고 불평도 많고 염려도 많고 머물러 있는 날도 많습니다. 그러다가 촛대가 옮겨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시 하나님과 만났던 벧엘의 첫사랑을 우리 마음에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합시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것들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순도 높은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그 은혜가 우리 인생에 가득 차고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이 우상과 물질에 매여 있었지만, 그것들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순도 높은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 일하셨음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물질이 아니라, 이제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여타의 다른 이방 신상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어나기 원합니다. 다른 이유에 매이지 않고 이제는 일어나서 주의 일에 힘쓰겠습니다. 주님 함께하여 주시고 우리와 일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첫사랑으로 돌아가기 원합니다. 첫사랑의 감격을 가지고 주를 열심히 섬기는 그 순전한 마음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