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하신 하나님
본문: 창세기 35:8-15
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뢴트겐은 X선을 최초로 발견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845년에 태어난 그는 쉰 살이 될 때까지 물리학자로서 48편의 논문을 발표했지만, 학계를 뒤흔들 만큼 탁월한 업적을 남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성실하고 진실하며,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나이 오십에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X선을 발견한 것입니다. 당시 의사들에게는 한 가지 오랜 숙원이 있었습니다. 환자의 몸을 고통 없이 들여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의술로는 그것이 불가능했습니다. X선의 발견은 그 불가능을 현실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돈방석에 올라앉았다"고. 영국은 당시 유럽 최고의 강국이었습니다. 일찍이 산업혁명에 성공하였고, 1623년부터 특허법이 시행되어 특별한 발명을 한 사람들이 영국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기술과 자본이 만나면 독점자본이 형성되는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뢴트겐에게 영국으로 가서 큰 돈을 벌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가지 않았습니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독일에 머물렀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내가 X선을 발명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원래부터 자연에 있던 것을 우연히 발견했을 뿐입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자산입니다." 만약 그가 영국으로 건너가 특허를 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오늘날 엑스레이 한 장을 찍으려 해도 막대한 비용을 감당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힘을 빼고, 자기 자신을 올바로 직시하며, 겸손하고 진실되게 살았기에 온 인류가 그 혜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백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그의 이름은 수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그의 이름은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먼저 힘을 빼야 합니다. 온몸에 들어간 힘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 전능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시느냐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겸손한 자와 함께 일하십니다. 몸에서 힘을 빼고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과 하나님은 함께 일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름 없는 자의 영광
야곱과 그의 가족은 세겜을 떠났습니다. 이방 신상과 귀고리들을 모두 땅에 묻고 길을 나섰습니다. 벧엘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은 첫사랑의 장소였습니다. 형 에서의 낯을 피해 두려움에 떨며 도망하던 그때, 만나주셨던 하나님을 벧엘에서 다시 만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지점에서 한 의미 있는 사람의 죽음을 기록합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창 35: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소 뜬금없는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의 어머니입니다. 그 어머니의 유모가 죽었다면, 야곱에게 이 여인은 거의 할머니뻘이 됩니다. 이 여인이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거니와, 리브가의 유모가 어떻게 야곱의 가족과 함께 동행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 더 놀랍습니다.
성경은 이 여인의 첫 등장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들을 보내며" (창 24:58-59)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이삭의 아내감을 구하기 위해 밧단아람으로 갔습니다. 리브가를 찾았고, 리브가가 함께 가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때 친정에서는 리브가를 혼자 보내지 않고, 그를 기르고 키웠던 유모를 함께 보냈습니다. 이 유모가 밧단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함께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유모는 언제 다시 야곱과 함께 밧단아람으로 가게 되었을까요?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창 27:44-45)
야곱의 가정에서 장자권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형 에서가 야곱을 죽이겠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자기 친정 밧단아람으로 떠나보냅니다. 떠나보내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네가 거기 가 있으면 내가 사람을 보내겠다." 아들의 안부를 전해 듣고 이곳 상황도 알려줄 사람을 보내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곳 형편이 여의치 않아 아들을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아들의 안부가 너무도 궁금했던 리브가에게 믿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평생 함께했던 유모 드보라를 그곳에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드보라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성경에 직접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보낸 이십 년 사이에 리브가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유모 드보라는 돌아가도 섬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야곱과 함께 그곳에 살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의 유모였던 드보라를 어머니처럼, 할머니처럼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모셨던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이제 벧엘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이 세상을 떠날 때, 성경에 그 이름을 기록해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이 여인의 이름이 밝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길을 떠날 때는 '리브가와 그의 유모'라고만 했습니다. 리브가가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을 때도 '드보라를 보내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이 여인의 이름이 기록되는 순간은 바로 세상을 떠날 때입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라고. 그리고 이 여인이 묻힌 곳은 벧엘, 곧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이 여인이 세상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성경에 기록해 두신 것입니다.
이 여인의 삶을 반추해 봅니다. 처음에는 어느 한 집안의 여종으로 들어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던 시절이었을 것입니다. 리브가의 유모로 살다가, 리브가가 시집갈 때 먼 가나안 땅까지 따라갔습니다. 믿음 좋은 집안에 며느리로 가는 리브가를 따라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이 낳은 아들을 위해 밧단아람까지 건너가 평생을 섬기며, 믿음이 자라고 성장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되고,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확신을 하나님이 각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벧엘에 묻어주셨습니다.
이 여인은 평생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았습니다. 한 사람, 한 집안의 그림자로 살았습니다. 그저 일만 하고, 의리 있게 이곳저곳 다니며 섬기며 살았습니다. 큰돈을 만져본 적도 없고, 자기 이름이 드러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여인의 이름을 기억해 주셨습니다.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에 이 여인의 이름을 기록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런 인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내 이름을 알아주지 않으면 화가 나고, 누군가 나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께 기억되는 사람입니다. 평생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가난하게 살고 어렵게 살아도, 그래도 믿음 생활을 잘하고 성실하게 산 사람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 놀라운 역사가 오늘 우리의 인생에도 함께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힘을 내려놓은 자에게 임하는 복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창 35:9)
하나님이 야곱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 복이었습니다. 벧엘로 올라오기만 하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이곳에 오기만 하면 복을 주시겠다고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복을 가득 안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복받으러 벧엘로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세겜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벧엘로 올라오지 않고 세겜에 머물렀던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아직까지 몸에 힘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밧단아람에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 이십 년 동안 일하며 벌어온 재산으로 충분한데, 스스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이것을 더 불리고, 더 부자가 되려고 세겜에서 서성거리며 살았습니다.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우상을 땅에 묻고 귀고리들을 땅에 묻은 뒤에야, 두려운 마음이 되어, 가난한 마음이 되어, 온몸에서 힘이 빠진 상태로 비로소 벧엘에 올라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복받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복받는 사람은 몸에서 힘을 뺀 사람입니다. 자기 잘난 맛에 하나님 앞에 오지 않고 세겜 땅을 서성거리면, 하나님이 복을 주고 싶어도 그 앞에 오지 않는데 어떻게 복을 주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왔다 해도 두 마음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복을 주시겠습니까? 힘을 빼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누가복음의 탕자 이야기가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심에도 유산을 달라고 하여 챙겨서 집을 나갔습니다.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렸습니다. 원래 그렇게 쓰려고 나간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부자가 되어 돌아오려고, 형과 아버지 앞에 보란 듯이 나타나려고 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쓰다 보니 돈을 다 써버리고, 사기도 당하고, 가난하게 되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에 이릅니다. 이제 몸에서 힘이 빠집니다. 잘난 맛에 살 때는 아버지 앞에 오지 않습니다. 돈이 있을 때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힘이 있을 때는 돌아올 생각조차 없습니다. 돈도 떨어지고 힘이 떨어지니 그제야 아버지 앞으로 돌아갑니다. 온몸에서 힘이 다 빠진 채로 돌아갑니다.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가 어떻게 맞이했습니까?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눅 15:22-24)
제일 좋은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셨습니다. 발에 신을 신겨 주셨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입니다. 아버지 품 안에서, 자기 몸의 힘을 빼고 아버지 앞에 서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손에 가락지를 끼고, 발에 신발을 신고, 날마다 잔치하며 사는 삶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몸에 힘이 가득 들어간 채 세겜 땅을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세상에 취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복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몸의 힘을 빼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그것이 복인데, 하나님을 갈수록 멀리 떠나 살면서 복을 원한다면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세겜에서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벧엘에서, 하나님과 약속한 바로 그 자리에서 복을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디 우리 몸에 있는 힘을 내려놓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하나님께서 이제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창 35:10)
하나님이 이 말씀을 처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하신 것입니다.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하신 후에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두 번째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왜 같은 말씀을 두 번 하셨겠습니까? 한 번 하셔서 야곱이 들었다면 두 번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한 번 말씀하셨는데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경쟁하다', '남의 발뒤꿈치를 잡다', '남의 뒤통수를 치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신 것은 이런 뜻이었습니다. 이제 경쟁하며 살지 마라. 그렇게 피곤하게 살지 마라. 남의 뒤통수 치는 인생, 남의 발뒤꿈치 잡는 인생을 살지 마라. 이제는 이스라엘이 되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다'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있겠습니까?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기도하는데 듣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무릎 꿇고 부르짖는데, 그것을 해결해 주지 않으실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부르짖고 기도하면 반드시 들어주시고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되라는 말씀은 세상을 기웃거리지 말라는 뜻이요, 사람들과 경쟁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과 담판을 지으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얍복 강가에서 말씀하셨는데, 야곱이 그대로 살았습니까? 세겜에서 다시 야곱으로 살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로 살라고 말씀하셨는데, 세겜에서는 이스라엘을 팽개쳐 버리고 야곱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에게 다시 이스라엘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와만 이야기하자. 네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려고 발버둥 치지 마라.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나에게 던져라. 내 앞에 와서 엎드리고, 나와 함께 해결하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훈련시켜 가실 때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 가도록 이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걷는 여정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구름떼같이 달려옵니다. 야곱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자기 능력으로 바다를 가를 수 있습니까? 애굽 군대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그때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서 엎드리고, 살려 달라고, 구해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주셨습니다.
사십 년 광야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가도 가도 모래뿐입니다. 야곱으로서는 광야를 건너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로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나님이 광야를 건너게 하십니다.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시고, 목마를 때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요단강 앞에 섰을 때도, 야곱의 능력으로는 그 강을 건널 방도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되어 "하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고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나와야 요단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강을 건너니 여리고 성이 나타납니다. 견고한 여리고 성을 야곱의 능력으로는 무너뜨릴 재간이 없습니다. 이스라엘만이, 하나님만 붙들고 늘어지는 자에게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여리고 성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행하시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능력으로 이룬 것이 과연 몇 가지나 됩니까? 하나님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내 힘으로 한 것이 얼마나 됩니까? 밥 먹는 것도, 숨 쉬는 것도, 내 모든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의 호흡도 하나님이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내 존재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야곱이 되어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야곱의 삶을 중단하라, 이스라엘이 되라, 그것이 너에게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창 35:11-12)
전능하신 하나님, 곧 '엘 샤다이' 하나님은 그 자체로 전능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이 나타나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이 나타나는 사람은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야곱에게는 하나님의 전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전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하나님께만 매달리는 자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다 말씀하시며 야곱에게 전능을 선언하신 이유는, 네가 이스라엘이 되면 전능한 하나님이 이러한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 나에게 일해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내 인생은 아직 이 모양인가 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네가 아직 야곱이기 때문이라고. 네가 야곱의 인생을 살고 있으니 하나님의 전능이 복으로 임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스라엘이 되라고. 너의 무능을 인정하고, 연약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오라고.
우리는 가끔 자신의 무능을 책망합니다.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없는 것도 많고 가진 것도 없다고. 그러나 내가 무능하고 연약할수록 하나님이 일하실 범위는 커져 갑니다. 이 무능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그대로 가지고 나오면 됩니다. 연약하기에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요, 부족하기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연약하고 부족하고 가진 것이 없어서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의 전능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함께 일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난 체하며 세겜을 서성거리고 있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겠습니까?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선언하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중요합니다. 구십구 세입니다. 남자로서의 기력이 다 사라진 나이입니다. 아내 사라도 여성의 경수가 끊어졌습니다. 이제 힘이 다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이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가정에 이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무능했기에, 구십구 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그때서야 하나님의 전능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때, 아직 혈기가 있고 팔팔할 때인 팔십육 세에 그는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때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의 인생에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힘이 남아돌아 다른 곳에 눈이 가고 다른 곳에 마음이 가 있으니,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의 몸에서 힘이 다 빠진 후에야 하나님이 전능을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비극이 될 수 있습니다. 아직 건강할 때, 우리의 힘을 믿음으로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겜을 서성거리지 말고 벧엘에 올라와서,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로 살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전능이 나를 통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하고 싶다면, 부디 이스라엘이 되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인생을 청산하고 이스라엘의 인생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이름 없이 빛 없이 살았던 드보라를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집에 인도하셨습니다. 세겜에서 서성거리던 야곱이 힘을 빼고 벧엘로 올라왔을 때, 하나님은 복을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구십구 세에 모든 힘이 다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전능자로 찾아오셔서 이삭이라는 기적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벧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복을 가득 안으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직 세겜에 있다는 것이요, 아직 야곱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을 내려놓고, 무능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만 붙드는 이스라엘의 삶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삶 가운데 놀랍게 펼쳐질 것입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처럼 신실하지도 못했고 성실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한 집안의 종으로 살면서도 하나님을 잘 섬긴 이 여인을 기억해 주시고 기록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성실하고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의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우리는 아직 힘이 남아돌아 세겜을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집을 나간 탕자처럼, 복의 근원이신 아버지와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복이심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그 앞에서 힘을 빼고 이스라엘의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야곱의 인생에 역사하지 않으신 하나님, 그러나 이스라엘의 인생에 전능의 하나님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구십구 세의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말씀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의 인생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