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강 / 라헬과 이삭 (35:16-29)

라헬과 이삭

본문: 창세기 35:16-29

2023년 11월 29일, 헨리 키신저 미국 전 국무장관이 백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23년에 태어난 그는 20세기 세계 정치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관여하지 않은 국제적 이슈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의 분쟁, 중남미 국가들의 정치 현안 등 굵직한 국제 문제마다 그의 손길이 닿아 있었습니다. 그에게 조언을 구했던 전·현직 미국 대통령만 열두 명에 이를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실로 지대했습니다.

키신저의 외교적 노선은 철저한 현실주의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1971년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켰고, 미·중 수교를 앞장서서 이끌었으며, 1973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쉬움의 목소리가 쏟아졌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분쟁, 북한의 핵 문제 등 강대강 대치 국면이 이어지는 지금, 그가 살아 있다면 어떤 정치적 조언을 했을까 하고 사람들은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부질없는 상상일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사의 권한을 인간이 넘어설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란 하나님 앞에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라헬과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라헬은 야곱이 사랑한 여인이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자 야곱의 아버지입니다. 이 두 사람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와 교훈을 함께 찾아가기를 바랍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세상에서 스스로 힘을 주고 자기 뜻대로 해보려 했을 때, 야곱의 인생을 살았을 때는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벧엘에 올라가서 엘샤다이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이제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인생을 살면, 나는 너와 함께 영원히 하고 넘치는 복을 다하여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감격스럽고 귀한 경험을 안고 야곱은 벧엘을 떠나 헤브론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런데 길을 가는 동안 예기치 않은 일,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됩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자리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창 35:16)

벧엘에서 에브랏, 곧 베들레헴까지는 약 20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입니다. 그 길을 가는 도중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라헬이 길에서 해산하게 된 것입니다. 고대 시대에 이런 일이 발생하면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습니다. 의료 시설이 없으니, 기댈 곳이라고는 산모의 건강과 태아의 건강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바라고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악의 결과가 발생하지 않도록, 가족들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고 기대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창 35:18)

라헬이 세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아이를 낳다가 산모가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라헬은 눈을 감으면서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곧 '슬픔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야곱은 이 아들의 이름을 '베냐민', 곧 '오른손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이 장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생명의 꽃이 사라지는 순간 또 다른 생명이 잉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교차하는 장면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핵심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고통만 있거나 기쁨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삶과 죽음, 고통과 기쁨, 슬픔과 행복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우리 인생이 무척 고통스럽다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 삶이 너무 버거워서 숨쉬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24시간의 하루를 한번 돌아보면, 하루 중 모든 순간이 고통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고, 아스팔트 틈에서 한 줌의 풀이 솟아나며, 하나의 꽃이 피어나는 일이 가끔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 고통 가운데도 간혹 웃을 일이 있습니다. 행복이 있고 즐거운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을 통틀어 보면 웃고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왜 없겠습니까?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저 집은 불행한 일이 없겠다, 저 집에는 웃음꽃만 피겠다' 싶은 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 속을 들여다보면 웃고 행복한 일만 있겠습니까? 그 집에도 죽음이 있고 고통이 있고, 걱정이 있고 염려가 있습니다. 기쁨과 불행이 항상 공존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항상 여러 가지가 얽히고설켜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창 5:4-8)

창세기 5장의 족보가 기록하고 있는 핵심 단어들이 있습니다. '낳고, 살고, 죽었더라.' 우리 인생을 이보다 더 압축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태어나고 살고 죽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태어나는 것은 일반적으로 환희입니다. 새 생명의 탄생을 모두 축하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라헬의 경우처럼 누군가가 태어나는데 누군가가 죽는 일도 있습니다. 생명의 탄생조차도 고통과 환희가 교차합니다. 살아가는 삶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죽음은 슬프기만 한 것입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죽어갑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천국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슬프고 헤어지면 아프지만, 이 땅에서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기에, 천국에서 다시 눈 뜰 것을 우리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조차도 한편으로는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낳고, 살고, 죽었더라'—이 가운데에는 기쁨과 절망, 행복과 눈물이 함께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이 이러한 것이라면, 중요한 것은 슬픔과 고통을 어떻게 수용하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자세입니다. 이 점에서 야곱의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아들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는 어머니 라헬은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습니다. 슬픔의 아들. 이것은 라헬의 입장에서 충분히 그럴 만합니다. 어미 없이 태어나는 아들을 한 번 젖 물려보지 못하고 떠나보내야 하는 어머니의 심정이 슬프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살면서 이 아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하는데, 울타리 없이 살아가야 할 이 아들의 인생을 생각하면 어머니로서 눈물 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어머니가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슬픔의 아들이라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야곱은 이 아들을 평생 베노니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슬픔의 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아들을 슬픔과 절망에 빠뜨린 채 살게 내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오른손의 아들', 베냐민이라 불렀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손이, 하나님의 크신 권능의 팔이 너를 이끌어낼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어머니 없이 살아가야 하는 너의 인생이 고통스러울지라도,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손이라면 어머니의 손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강력한 손이 너를 지키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은 아들의 이름을 베냐민이라 불렀습니다.

슬프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라헬을 사랑했고, 누구보다도 라헬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슬퍼한 이가 야곱 아닙니까?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이나 종처럼 일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슬픔과 절도와 비탄에 빠져서 평생을 보낼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부르며 살게 내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오른손에, 권능의 손에 네 인생을 맡긴다고, 아들의 이름을 베냐민이라 부른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베노니로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살다 보면 슬픈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슴 치며 눈물 흘릴 일이 너무 많습니다. 억울한 일도 있고, 눈물 나는 일도 있고, 아무리 힘써도 애써도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현실은 우리가 슬픔의 자녀들입니다. 현실은 우리가 베노니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인생을 베노니로 그냥 살도록 내버려 두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오른손이 우리를 건져 내시고 이끌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베냐민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베냐민 같은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삶을 베노니로 해석하지 마시고, 우리 삶을 베냐민으로 풀어가고 해석하며, 슬픔을 극복하고 직면하고 이겨낼 때,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손이 실제로 우리 인생을 건져 올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집착이 삼켜버린 인생

두 번째로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기억해야 할 것은 라헬이라는 여인의 인생입니다. 한 여인으로서 라헬의 인생은 행복했습니다. 한 남자의 사랑을 온전히 독차지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을 얻기 위해 14년 동안이나 종처럼 일했던 야곱을 남편으로 둔 라헬은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한 인간으로서, 전인적인 한 인간으로서 라헬의 인생은 과연 행복했습니까? 그녀의 인생은 열등감이 지배했고, 경쟁이 짐이었습니다. 언니 레아가 여섯 명의 아들을 낳고 하나의 딸을 낳을 동안 자신은 아들 하나뿐이었습니다. 항상 경쟁했습니다. 그 열등감 때문에 르우벤이 가져온 합환채를 빼앗기도 했고, 남편을 다그치기도 했고, 자기 몸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서 아이를 갖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고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끝까지 언니와 경쟁해 보려고 아이를 가졌습니다. 아이를 낳아서 세겜에서 잘 기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세겜을 떠나 벧엘로 올라오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벧엘을 떠나 에브랏 길에 와서 거기서 해산하다가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인생을 집어삼킨 것이 무엇입니까? 언니와의 경쟁심 아닙니까? 그녀의 인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열등감 아닙니까? 평생의 열등감이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분한데, 지금까지 받고 누리는 그 사랑이 충분한데, 그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열등감과 경쟁 의식으로 살다가 결국 끝까지 그것을 놓지 못하고 살다가, 집착이 자기 인생을 삼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생이 항상 부족하지 않습니까? 물질도 부족하고, 사랑도 부족하고, 실력도 부족하고, 능력도 부족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 부족함이 집착이 되고, 그 집착이 열등감이 되고, 그것이 경쟁 의식이 된다면, 결국 그것이 나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놓을 수 있을 때 놓고, 과감하게 버릴 수 있을 때 버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 그것 하나 붙잡고 살아가면 족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전 3:12-13)

사는 동안 기뻐하고 선을 행하는 것, 그리고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열등감과 집착과 경쟁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선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경쟁하는데 어떻게 손이 펴지겠습니까? 집착하고 있는데 어떻게 타인의 불행과 고통이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집착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고 만족하며 살면, 나보다 힘든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들에게 베풀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낙을 누리고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집착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을 것이고, 그 집착 때문에 우리가 고생하거나 고통당하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라헬의 죽음은 우리에게 이러한 귀한 교훈을 깨닫게 해 줍니다.

절제하지 못한 욕망의 대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에브랏 길에 장사 지내고, 살아남은 가족들과 갓난아이 베냐민을 데리고 야곱은 다시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길을 떠나는 도중에 이 가정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창 35:22)

일어나서는 안 될 일입니다. 장남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를 범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야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가족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이상해졌다고, 라헬을 잃고 나니 이제는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린 것 같다고, 저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르우벤을 누구도 제재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르우벤을 비난하는 동시에 아버지를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창 49:3-4)

야곱이 임종 직전에 열두 아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축복할 때, 르우벤에게는 축복 대신 징계를 선언했습니다. 이를 통해 장자권은 요셉이 아닌 유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아마 가족들은 모두 요셉이 장자권을 가질 거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달랐고 야곱의 선언도 달랐습니다. 장자권은 유다에게로 갔습니다. 르우벤이 가지고 있던 장남의 권위를 박탈하여 유다에게 준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끓는 물처럼 욕망을 주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불타오르는 그 욕망을 절제하지 못했기에, 타고난 탁월함을 스스로 가리고 만 것입니다.

아마 르우벤의 입장에서 변명을 한다면 "아버지, 그것은 실수였습니다. 단 한 번의 실수였습니다. 한 번의 실수로 이것은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그 가정에서 오랫동안 훈련받은 사람입니다. 더구나 장남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떨 때 성공했고, 어떨 때 실패했으며, 어떨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어떨 때 징계를 받았는지 그는 다 보고 느끼며 자랐습니다. 훈련받을 만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 한 번의 실수로 용납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이 그를 징계하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 믿음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법도 모르고 믿음의 기초도 모를 때, 그때는 실수가 통합니다. 모르니까 어찌하겠습니까? 그런데 신앙 생활 수십 년을 하고, 이제는 알 만큼 알고, 성경도 배울 만큼 배우고, 깨달을 만큼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고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신 동시에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참아 주시다가 하나님이 심판하시면, 그 심판을 우리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하다 보면 우리는 그 안에서 방종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이것을 분명하게 기록하시고 보여 주신 이유는, 정신 바짝 차리고 깨닫고 살라는 것입니다. 네가 가진 천부적인 장자권의 권한은 영원히 너의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할 만큼 했다면, 깨닫고 알 만큼 알았다면,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심과 욕망들—물이 끓는 것 같은 불타오르는 이 욕심들을—지금까지 배워 온 말씀으로 다스려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

이렇게 다시 길을 떠나 야곱 가족들이 도착한 곳은 헤브론이었습니다. 헤브론에는 그의 아버지 이삭이 살고 계셨습니다. 이삭은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떠날 때부터 이미 노인이었습니다. 그때도 눈이 어두워 에서와 야곱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지금까지 생존해 계셨습니다. 부인 리브가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도 세상을 떠난 후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을 찾아왔고, 이삭은 마치 아들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아들이 도착하자 그 품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이삭의 나이 백팔십 세라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창 35:28-29)

백팔십 세, 이삭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삭은 40세에 결혼했습니다. 늦은 결혼이었습니다. 20년 동안 자녀가 없다가 60세에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이삭이 180세에 돌아가셨다면, 에서와 야곱은 이미 120세의 할아버지들이었습니다. 두 아들이 부친의 장례를 정성껏 치렀습니다.

이삭은 어떤 인물입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들 아닙니까? 어려서는 배다른 형제 이스마엘 때문에 학대를 받기도 했고, 모리아산에서 '여호와 이레'의 경험을 몸으로 한 인물입니다.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무려 백 세에 낳은,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입니다. 그는 온유한 인물이었습니다. 땅을 팔 때마다 우물이 나왔고, 분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몸으로 경험하고 느꼈던 인물입니다. 그의 인생에 유일한 문제가 있었다면 자녀를 편애한 것입니다. 영안이 어두워진 채 믿음의 조상의 아들이었던 이삭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창세기 35장은 세 번의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 라헬의 죽음, 이삭의 죽음. 이 가운데 가장 특별하고 탁월한 인물은 이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죽음이나 드보라의 죽음이나,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로 기억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이 땅의 수고와 고통을 다 뒤로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라헬처럼 집착하고, 라헬처럼 경쟁하고, 라헬처럼 갈등하며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길을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가고, 선을 행하고 기뻐하며 나누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은혜가 모든 주의 성도들에게 항상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드보라의 죽음과 라헬의 죽음과 이삭의 죽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귀히 살아간 흠이 있으나, 하나님이 그분들을 부르신 것은 한 가지이옵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때, 부끄럽지 않도록 이 땅에서 믿음 생활을 성실하게 잘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찌하든지 믿음대로 살게 하시고,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게 하시고, 주의 말씀과 행함이 일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경쟁하거나 분쟁하거나 다투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갈등하며 살지 않도록 도와주시며, 주께서 주신 진리의 말씀을 절제하며 지키고 행하며 살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