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강 / 에서의 선택 (36:1-8)

에서의 선택

본문: 창세기 36:1-8

통일신라는 수백 년간 지속되다가 9세기에 이르러 쇠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중앙의 통제가 힘을 잃고 지방의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급기야 900년에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에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면서 후삼국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후삼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나라를 통일한 인물은 견훤도 궁예도 아닌 왕건이었습니다. 왕건은 본래 궁예 휘하의 지방 무사 출신이었습니다. 무예가 뛰어나고 식견이 넓으며 인품이 좋아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신망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혼란을 수습하고 나라를 통일할 수 있었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두 번에 걸친 특별하고 탁월한 선택이 그의 인생을 획기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첫 번째 선택은 궁예의 관심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며 온 나라를 공포에 떨게 만들던 그때, 하루는 궁예가 왕건을 불러들여 다짜고짜 이렇게 말합니다. "네 마음속에 역심을 품고 있는 것을 내가 다 알고 있으니, 자백하면 용서해 주고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는다." 인정해야 하는가, 부인해야 하는가. 그때 궁예의 측근이 붓을 떨어뜨리는 척하면서 귓속말로 "아닌 것으로 하라"고 알려줍니다. 왕건은 그 순간 결단을 내렸습니다. 거짓이라 호소한 것입니다. 한 번만 살려달라는 왕건을 궁예는 호쾌하게 웃으며 시험해 본 것이라 하고 살려주었습니다. 반대의 선택을 했더라면 그 자리에서 끌려나가 죄 없이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선택은 918년 6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측근들이 더는 폭정을 견딜 수 없다며 왕건에게 나라를 세울 것을 간청했고, 그의 부인이 갑옷을 가져와 직접 남편에게 입혀주었습니다. 왕건은 918년 고려를 세웠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했으며, 이 나라는 474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공하고 누군가가 실패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성공은 갑자기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루하루의 올바른 선택이 쌓이고 또 쌓여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실패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선택, 잘못된 선택, 최악의 선택들이 모이고 모여서 가슴 아픈 결말을 만들어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에서의 두 번에 걸친 잘못된 선택이 나옵니다. 이 선택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죄의 자리로 돌아간 선택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창 36:2)

에서가 이방 여인과 결혼했다는 기록입니다. 당황스러운 사실은 여기 나오는 부인들의 이름과 창세기 앞부분에 기록된 부인들의 이름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창 26:34-35)

학자들은 이름이 다른 이유를 여러 방면으로 설명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에서가 이방 결혼을 했다는 사실과 여자 관계가 복잡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바꿀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에서의 복잡한 여자 관계는 부모를 근심하게 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아들 에서를 보면서 항상 걱정하고 염려했습니다.

사실 이 점에서는 야곱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이방 결혼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만약 야곱이 라반에게 가지 않고 집 근처에 머물렀다면 부모의 근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라헬과 레아, 빌하와 실바, 네 명의 아내를 두었고 그로 인해 가정에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끊이지 않았으니, 야곱 역시 에서 못지않았습니다.

그런데 야곱과 에서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에서는 선을 넘어도 한참 넘어버렸습니다.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 (창 36:3)

이스마엘의 딸을 자기 아내로 맞이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실 수 없는 무서운 범죄행위입니다. 이스마엘이 누구입니까? 자기 아버지 이삭의 배다른 형제가 아닙니까? 아버지 이삭은 약속의 아들인데, 이스마엘 때문에 어린 시절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배다른 형 이스마엘에게 학대를 받았고, 이 일이 도화선이 되어 아버지 아브라함과 어머니 사라 사이에 심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보내라고 하셨고,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죄의 싹을 잘라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훌륭한 믿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렇게 해서 죄의 싹을 잘라내고 죄의 근원을 끊어냈는데, 에서는 다시 그 죄의 자리로 돌아가는 악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한번 끊어낸 악의 근원을 다시 자기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민 14: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민 14:11-12)

이 사건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이후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지파별로 한 명씩 열두 명의 정탐꾼을 뽑아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은 살 곳이 못 된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노하여 모세와 아론을 돌로 쳐서 죽이려 했고,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증하게 보셨습니다. 애굽이 어떤 곳입니까?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곳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었고, 그곳 사람들은 우상을 섬겼으며, 죄악의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죄악의 도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크나큰 대가를 치르시고 구속하여 건져내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죄의 자리로 돌아가려 하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나를 멸시한다.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 그들을 다 광야에서 멸해 버리겠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에서는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다시 그 죄악의 불구덩이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죄의 자리로 돌아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우리를 이 은혜의 자리에 앉혀 놓기 위해 치르신 대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내어주시고 우리 각 사람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자리에 앉게 하신 대가는 가벼운 값이 아닙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 손과 발에 못을 박으시고, 옆구리에 창을 찌르시고, 온몸의 물과 피를 다 쏟아내게 하신 이후에, 그 피값으로 우리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치르신 대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시 죄의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을 완전히 무력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말했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히 12:4)

우리는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대항해야 합니다. 왜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투성이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는데, 우리가 죄와 대충 싸우고, 다시 죄를 지어도 상관없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괜찮다고 여긴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실 수 없습니다. 에서가 바로 이것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그 집안에 죄를 끌어들이는 것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것이 에서의 첫 번째 잘못된 선택입니다. 우리는 에서처럼 이런 선택을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은혜의 장막을 떠난 선택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창 36:6)

에서가 약속의 땅을 떠나버렸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모두 마친 이후에, 그 약속의 땅을 떠나 은혜의 자리를 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에서의 이 결정에 대해 옳고 그름을 직접적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깁니다.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창 36:7)

이 말씀은 우리가 비슷한 논리로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창 13:6)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삼촌 아브라함을 떠날 때 내세웠던 논리입니다. 소유가 많아서 함께 거할 수 없다는 이 논리로 롯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버렸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떠날 때의 논리와 놀랍도록 유사하지 않습니까? 소유가 많아서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고 길을 떠납니다.

우리는 롯의 결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롯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그리고 에서의 결말 역시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에서의 이 선택이 왜 잘못된 것입니까? 에서가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장자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가볍게 여겼던 그가, 결국 장자권을 빼앗긴 이후에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 없어 떠나버린 것입니다.

에서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인데 동생에게 장자권을 빼앗기고, 어떻게 자존심 상해서 이곳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부모에 대한 원망,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그를 이곳에 머무르지 못하게 만들고 떠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서에게 장자권을 빼앗아 야곱에게 주신 것이지, 약속의 자리, 은혜의 자리를 떠나라고 내쫓으신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에게 "너는 이제 내 품을 떠나라,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가볍게 여겼으니 너는 버린 백성이다, 내 품을 떠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적이 없습니다. 장자권은 가볍게 여겨서 빼앗길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적어도 에서에게 은혜의 자리, 믿음의 자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를 떠나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믿음의 자리와 은혜의 자리, 야곱의 장막을 박차고 나간 것은 에서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내보낸 적이 없습니다.

가정을 한번 해봅니다. 에서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장자권은 이제 동생에게 갔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은 상하지만 야곱의 장막에 머무르면서, 이제는 회개하며 평생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다짐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충성하고 봉사하며 일생을 살았더라면,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약속의 한 축으로 귀하게 사용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에서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자존심이 상하니 야곱의 장막을 박차고 나와서 은혜와 믿음의 자리를 떠나버렸습니다. 믿음보다, 은혜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살다 보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믿음을 박차고 나가고, 은혜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처럼 미련한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에서의 모습은 가인과 흡사합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자존심이 상합니다. 화가 납니다. 동생을 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만나주셨지만,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버립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 4:16-17)

하나님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으로 갔고, 그것도 부족해서 성을 쌓아 그 안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린 것입니다. 예배 한두 번 잘못 드릴 수 있지 않습니까? 예배드릴 때 딴 마음을 품어서 하나님께서 내 예배를 받지 않으시고 동생의 예배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회개하면 됩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제부터 이 일을 교훈 삼아 제대로 예배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가인은 예배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의 판단에 반발하여, 은혜의 자리를 떠나버렸습니다. 동생의 예배를 받으시고 자신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 거기에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은혜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 은혜의 족보에서 사라집니다.

에서와 가인 사이에는 이러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화나는 일, 자존심 상하는 일은 매순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것도 믿음보다, 은혜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잘 지키고 믿음의 자리를 굳게 지키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우리를 들어 회복시켜 주시고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두 번에 걸친 잘못된 선택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렸습니다.

결론

에서의 잘못된 선택은 자신의 인생을 망친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에서의 자손을 우리는 에돔 족속이라고 부릅니다. '에돔'이라는 이름은 '붉다'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팥죽의 붉은 색깔 때문에 에돔이라 불린 것입니다. 에서가 세일 산에 가서 자손을 낳고, 세월이 흘러 에돔 족속 중에서 헤롯이라는 사람이 태어납니다. 헤롯 안티파테르 2세는 기원전 47년에 율리우스 시저에 의해 유대의 행정 지방관으로 임명받았고, 그의 아들 헤롯 대왕이 유대 온 지역을 통치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헤롯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하늘의 별을 관찰하다가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을 발견하고 길을 떠나 헤롯의 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헤롯은 분노했습니다. 천사들이 동방박사들에게 나타나 다른 길로 돌아가라고 지시했고, 박사들이 돌아가버리자 헤롯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마 2:16)

영아 학살 명령을 내리고 실행한 사람이 에서의 자손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헤롯이 죽고 나서 세 명의 아들이 유대 온 지역을 나누어 통치했는데, 이들을 분봉왕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유대와 예루살렘 지역을 통치했던 분봉왕이 아켈라오이고, 갈릴리 지방을 통치했던 분봉왕이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안티파스는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 패륜을 세례 요한이 지적했습니다. 어른이요 지도자로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직언했습니다.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을 행한 것이 에서의 자손, 에돔 족속에서 나온 헤롯 가문이었습니다.

에서의 두 번에 걸친 잘못된 선택이 자신의 인생을 망친 것에 그치지 않고, 그의 후손 에돔 족속을 낳았으며, 에돔 족속에서 헤롯의 가문이 나와 예수님과 세례 요한, 그리고 그 당시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는 선택이 두렵지 않습니까? 매순간 별생각 없이 내리는 선택, 나의 이익을 위해 순간순간 내리는 선택들이 시간이 한참 지난 이후에 이런 결말을 맞이한다면,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는 선택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선택인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이 길로 가도 되는 것인지, 이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것인지, 이런 마음을 품어도 되는 것인지 —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른 선택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인생도 지키고, 우리 후손들의 인생도 지켜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선택을 내리는 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에서의 두 번에 걸친 잘못된 선택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들까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이끌었음을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고 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더욱 미워하시는데, 에서는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다시 그 가문에 죄를 끌어들였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대항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대가를 마음 깊이 새기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도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고 대항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은혜의 장막을 사모합니다. 자존심이 상해도, 화가 나도, 불편해도 은혜의 장막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에서처럼 은혜의 장막을 떠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고, 은혜의 장막 그 자리,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아래 머무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지키고, 우리 후손을 지키고, 우리 믿음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 나가며 올바른 선택을 내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서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