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색옷
본문: 창세기 37:1-4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 국가입니다.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온 국민이 히틀러에게 열광했고, 나치의 깃발 아래에서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는 참혹한 패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처참한 전쟁을 일으켰던 나라가 지금은 유럽연합의 중심 국가가 되었고, 유럽을 넘어 전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이끌어가는 핵심 국가로 우뚝 서 있습니다. 전쟁으로 나라가 폐허 직전까지 갔다가 불과 수십 년 만에 이런 기적적인 회복이 이루어진 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그중 한 가지 결정적인 이유를 든다면 바로 신뢰 회복에 있습니다. 피해를 끼친 주변 국가들로부터 신뢰를 되찾았고, 전 세계 시민들로부터 다시 믿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독일이 이 신뢰를 되찾아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크게 세 단계의 치밀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첫 번째는 전범들을 재판정에 세운 일입니다. 전쟁을 일으킨 주범들을 끝까지 추적하고 쫓아가서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돌프 아이히만입니다. 이 사람은 전쟁이 끝난 후 아르헨티나로 숨어 들어가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추적한 끝에 1962년 결국 이 사람을 법정에 세우고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철저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었습니다. 보상 재원은 전범들의 재산이었는데, 처음에는 약 100억 마르크 정도를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열 배가 넘는 천억 마르크 이상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보상이 이루어졌습니다. 세 번째는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이었으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다음 세대를 지속적으로 교육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왜 우리나라가 이런 비극에 말려들었는지를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으며, 이 교육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과거사 청산을 철저하게 해낸 것입니다.
어떠한 국가든, 공동체든, 개인이든 살다 보면 상처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일정 부분 해소하지 않으면, 철저하게 털어내지 않으면, 시간이 지났을 때 그 문제가 다시 우리 안에서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언어로 말하자면 회개하고 털어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빛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돌이키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대충 넘어가 버리면 같은 문제가 시간이 흐른 뒤 형태만 바뀐 채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야곱의 가정이 바로 이런 문제 한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 뒤틀린 사랑
야곱의 가정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이 가정의 배경을 살펴보면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삭이 장례를 치르기까지 살았던 곳은 헤브론입니다.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본토로 돌아왔고, 외삼촌의 집에서 20년을 보내며 자녀를 열둘이나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라반에게 항상 시달려야 했습니다. 마침내 라반을 떠나 자기 고향으로 가겠다고 나섰지만 라반이 뒤쫓아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에 개입하셔서 라반에게 경고하셨고, 야곱을 지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얍복 강가에서 야곱을 친히 만나시고 그 문제도 풀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행복하게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세겜 땅에 정착하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디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격분한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사람들을 살해해 버렸습니다. 야곱은 두려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결단한 뒤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이제 모든 위기가 지나가고 라반도 에서도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 평안한 상황이 찾아왔습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내면은 공허합니다. 허전하고 쓸쓸합니다. 그가 평생토록 사랑했던 라헬이 곁에 없기 때문입니다. 라헬이 세상을 떠나 버렸습니다. 라헬 없는 세상이란 그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었는데, 이제 그것이 현실이 되어 무료한 생애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라헬에게 쏟아부었던 사랑을 그는 라헬이 남긴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에게 쏟아붓습니다. 문제는 그 사랑의 방향이 잘못되었고, 뒤틀린 사랑이었다는 점입니다.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창 37:2)
요셉이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우리로 치면 고등학생 나이로, 사리분별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때입니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 곧 배다른 형제들과 자신의 관계가 어떤지 이미 몸으로 경험하여 다 알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형제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낱낱이 고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장면만 보면 요셉의 행동이 정상적이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형제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그때그때 아버지에게 고해 바치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닙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창 37:3)
채색옷이 문제입니다. 채색옷은 말 그대로 색깔이 있는 화려한 옷입니다. 당시에는 화학 염료가 없던 시대였기에 옷감을 염색하려면 천연 염료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천연 염료를 얻으려면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렇게 염색된 채색옷을 얻으려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아들이 열둘이나 되는데 그중 유독 한 아들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다른 열한 명의 아들과 구별한 것입니다. 이 아들은 나머지와 다르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채색옷은 색깔만 화려한 것이 아니라 길이도 달랐습니다. 소매가 길게 늘어져 있고 옷단이 땅에 닿을 만큼 길었습니다. 그런 옷을 입고 일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형제들의 옷은 어떠했겠습니까? 들판에서 양을 치고 산과 들로 뛰어다녀야 하며 가정의 온갖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형제들의 옷은 당연히 무채색에 팔이 짧고 무릎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 실용적인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요셉의 옷만 노동에서 면제된 자의 옷이었습니다.
채색옷을 지어 입혔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너는 다른 열한 명의 형제와는 다른 존재라는 선언이었습니다. 둘째, 너는 노동에서 면제된 사람이라는 표시였습니다. 이 두 가지가 가리키는 바는 분명합니다. 앞으로 내가 죽으면 이 집의 장자권은 요셉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였습니다.
편애가 빚어낸 상처 위의 상처
그렇다면 채색옷을 입고 노동에서 면제된 요셉이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이 일하는 목축 현장에 나타난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버지를 대신하여 형제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며 감시하는 자리에 선 것입니다. 요셉으로서는 불편했겠지만 그 사명을 가지고 그 자리에 왔기에 형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아버지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상황을 몸으로 겪고 있는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은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그 마음을 한번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동생이 채색옷을 입고 노동에서 면제받고, 장차 아버지의 대를 이어 자기들의 감독자가 될 것임을 알면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은 아버지 야곱이었습니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에게는 치유되지 않은 오래된 상처가 이미 마음속 깊이 쌓여 있었습니다. 에서가 야곱의 가족을 찾아왔을 때, 400명의 장정을 이끌고 왔을 때 야곱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네 명의 아내와 열두 자녀를 세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제일 앞에 빌하와 실바, 그리고 그들이 낳은 자녀들을 세웠습니다. 두 번째에 레아와 그 여섯 아들을 세웠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라헬과 요셉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한 까닭은 혹시 에서가 400명의 장정과 함께 칼을 들어 치면, 앞에 선 자들이 시간을 벌어 라헬과 요셉이 도망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때 가장 앞에 세워졌던 이들이 느꼈을 공포,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 분노 — 이런 것들이 세월이 흘러도 마음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은 그 문제에 대해 단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그때 판단을 잘못했다고, 너희에게 상처를 준 것이 미안하다고 자녀들에게 입을 열어 사과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세월이 지나 이제 그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를 새롭게 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야곱이 한 일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야곱 자신도 편애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를 먹는 것을 좋아했고, 그래서 에서를 편애했습니다. 쌍둥이 형제로 태어났지만 두 사람의 성격은 극과 극이었습니다. 에서는 어려서부터 활과 칼을 들고 산과 들을 누비며 사냥하기를 좋아했고, 아버지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니 고기를 잡아 요리해 바쳤습니다. 이삭은 그것 때문에 에서만 사랑했습니다. 반면 야곱은 선천적으로 조용하고 집에 있기를 좋아하는 내성적인 성품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어머니 리브가가 가슴이 아파서 야곱의 편만 들어주었습니다. 그 결과 가정에 평화가 사라졌습니다. 식구가 넷밖에 되지 않는데 이삭과 에서, 리브가와 야곱 편으로 갈라져서 장자권 분쟁이 일어나고 형제 간에 칼부림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 때문에 야곱은 부모를 떠나 타국에서 20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편애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편애에 큰 피해를 입었던 야곱이 세월이 흘러 자기가 편애의 가해자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런 일이 우리 시대에 없습니까?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술만 드시면 집에 들어와 세간살이를 때려 부수는 가장이 적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폭행하고 온갖 가재도구를 부수는 분들이 각 마을마다 한두 분은 있었습니다. 항상 그 집에서는 싸우는 소리, 물건 부서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렇게 폭력의 피해자로 자란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합니다. 나는 절대로 이런 부모가 되지 않겠다고. 그런데 어른이 되어 자기도 모르게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그토록 폭력에 시달렸고 그 고통을 온몸으로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야곱은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깊이 들여다보면, 이 문제를 하나님의 은혜의 빛 앞에, 하나님 말씀의 빛 앞에 철저하게 가지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내 인생을 하나님 말씀 앞에 고스란히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잘못된 과거, 흐트러진 삶, 내가 입은 상처와 내가 준 상처 — 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은혜의 빛 가운데로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환하게 드러내어 잘못된 것을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야 끊어내고 단절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어물쩡 넘어가 버리면, 나는 이 습성이 싫으니 이렇게 살지 않겠지 하고 생각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반드시 같은 양상이 나타납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이 비극적인 순환이 우리 인생에도 일어나게 됩니다.
회개가 여는 새로운 역사
우리나라는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끼니 걱정을 매일같이 해야 하는 곤궁한 삶이었습니다. 그랬던 우리나라가 지금은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교회사의 관점에서 믿음의 눈으로 보면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대부흥 운동이라 부르지만, 본질은 회개 운동이었습니다.
평양 장대현교회가 사경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 교회의 길선주 장로가 새벽 기도회에서 전할 말씀을 준비하는데 마음에 찔림이 있어 도무지 말씀을 준비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에 걸린 것은 이런 사연이었습니다. 가까운 친구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기 전에 길선주 장로를 불러 돈을 맡기며 부탁했습니다. 이 돈으로 내가 남기고 떠나는 아내와 자식을 돌봐 달라고, 가장 믿을 만한 친구에게 재산을 위탁한 것입니다. 친구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길선주 장로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급한 사정에 그 돈을 모두 써 버렸습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 상태에서 말씀을 준비하려 하니 마음이 찢어지도록 괴로웠습니다.
결국 새벽 기도 강단에서 그 사실을 그대로 고백하며 회개했습니다. "저는 아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고백을 듣고 있던 성도들이 크게 찔림을 받았습니다. 나는 더 큰 죄인인데, 나에게는 더 큰 죄가 있는데, 아직 회개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에 깊이 각성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시작된 회개의 물결이 사경회가 마칠 때까지 이어졌고, 은혜받은 사람들이 평양 시내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들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끄집어내고, 말씀 앞에서 돌이키고 회개하자 삶이 변했습니다. 이 회개의 불길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 각 지역으로 뻗어나간 것입니다.
1907년 이전까지 이 땅에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일제 강점기 아래 젊은이들에게 희망이 없었습니다. 배워도 소용없고 열심히 일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래서 술과 아편에 절어 살았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어 봐야 다 수탈당하니 소망이 없었습니다. 술과 노름에 빠져 살아가던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왔고, 그 말씀이 삶을 비추니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회개하고 나서 달라졌습니다. 상황은 여전히 일제 강점기의 서슬 퍼런 시간이었지만, 더 이상 술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을 때리지 않았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남편이 달라지고, 아내가 달라지고, 자녀들이 그 가정에서 보호받기 시작했습니다.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 애쓰고, 이 민족이 복음화 운동에 한 마음이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세상이 달라지고 이 민족이 달라진 것입니다.
회개하면 이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의 문제를 꺼내놓고 돌아볼 때 그 문제가 해소되고 해결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달라지지 않습니다. 야곱의 가정에서 편애의 피해자가 가해자로 전락하는 안타까운 비극이 일어난 것은, 자기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디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깨어진 샬롬, 어른의 책임
이 가정에 비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창 37:4)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미워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사네'가 쓰였는데, 이는 단순한 싫어함이 아니라 증오에 이르는 감정입니다. 형제들끼리 서로 증오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만든 상황입니까? 아버지 야곱이 채색옷을 지어 입힘으로써 빚어낸 결과입니다. 형제들끼리 편안하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가정에 샬롬의 평화가 깨어진 것입니다.
가정이 행복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속마음을 부모와 형제에게 식탁에 둘러앉아 편하게 나눌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허물하지 않고, 누가 문제 삼지 않고, 그래서 치유가 일어나고 회복이 일어나는 공동체가 가정입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서 편안하게 말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샬롬이 깨어진 것입니다. 무너진 가정입니다.
모름지기 가정의 어른이라 함은 평화를 지켜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른이 계신다는 것은 그 어른 때문에 가정에 평화가 있다는 뜻입니다. 부부 간에 다툼이 생기려 할 때도 어머니께서 들으실까 봐 목소리를 낮추고 성미를 죽이고 조용히 합니다. 그렇게 한번 참고 나면 가정에 평화가 깃들지 않습니까? 어른이 계시면 조심스러워집니다. 그런데 오히려 가정의 어른이 나서서 가족 간의, 형제 간의 평화를 깨 버렸습니다. 이것을 어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결론
우리는 부모이고, 할아버지 할머니이며, 교회의 어른들입니다. 이만큼 살아왔으면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중견이자 어른입니다. 그렇다면 나로 인해서 샬롬의 평화가 찾아오고 있는지, 내가 속한 공동체와 교회, 이 사회, 내가 가는 모든 곳에 기쁨과 평화가 임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어른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 때문에 평화가 깨진다면, 나로 인해 서로 미워하고 등돌리게 된다면, 그것을 어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나이만 들었다고, 세월만 보냈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은 평화를 세우고 지켜 주는 자입니다. 서로 평화롭기만 하면, 서로 하나 되기만 하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부디 우리가 가정의 어른으로, 교회의 어른으로, 우리가 속한 모든 곳에서 평화를 세우고 지켜 주는 어른다운 어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버이 주일에 귀한 말씀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편애의 피해자였던 야곱이 편애의 가해자가 된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오늘 목격합니다. 자기 인생을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드러내지 않아서, 회개하지 않아서 생겨난 일이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이런 악행을 반복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끊어내고 결단하고 정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가는 모든 곳에 평화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가정의 부모로서, 할아버지 할머니로서, 교회의 어른으로서,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자들로서 나로 인하여 평화가 찾아오게 하옵소서. 나의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평화의 메시지가 되게 하시고, 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평화의 디딤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