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강 / 요셉이 꿈을 꾸다 (37:5-11)

요셉이 꿈을 꾸다

본문: 창세기 37:5-11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산과 들에 꽃이 활짝 피어납니다. 4월이 되면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벚꽃이 만개하고, 많은 사람이 꽃놀이를 즐깁니다. 5월이 되면 벚꽃은 지고 아름다운 장미가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합니다. 곳곳에서 장미축제가 열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장미축제가 에버랜드에서 열립니다.

장미는 보기에만 아름다운 꽃이 아닙니다. 향기도 강렬합니다. 향수를 만드는 이들에 따르면 장미는 약 이천 가지 이상의 냄새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조향의 세계는 결국 장미에서 시작해서 장미로 마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보았을 '샤넬 넘버 5'도 장미향을 베이스로 만든 향수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향기롭고 아름다운 장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야생 들장미를 제외한 대부분의 개량종 장미는 열매가 퇴화되어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꽃이 있으면 당연히 열매가 있어야 하는데, 그 장미에게서 열매를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더 아름다운 꽃을, 더 강렬한 향기를 원하여 개량하고 또 개량하는 사이에, 장미는 더 이상 열매를 맺을 이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장미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고통스럽고 슬픈 일입니다.

만약 그런 장미가 우리의 인생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겉보기에는 화려하고 남들이 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정작 인생에 열매가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신앙생활을 40년, 50년, 평생을 했는데 하나님 앞에 내어드릴 열매가 없다면, 그보다 허무하고 안타까운 일이 있겠습니까. 인생의 열매, 믿음의 열매, 신앙생활의 열매는 이토록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 등장하는 야곱의 가정을 보면, 이 가정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엉망입니다. 열매는커녕 가정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깨져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가정이 약속의 가정이라는 점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내려오는 약속의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가정을 불쌍히 여기시고, 소망 없고 희망 없는 가정에 꿈을 주셨습니다. 바로 요셉을 통해서 꿈을 주셨습니다. 요셉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게 되었는지, 그 꿈을 어떻게 이루어 가는지, 본문이 그 첫 시작을 알려줍니다.

소망 없는 가정에 임한 꿈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이 세상을 떠난 이후, 라헬에게 주었던 사랑을 요셉에게 고스란히 쏟아부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편집증에 가까운 사랑이었고, 집착이며 편애였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사랑했던 그 편애가 눈에 보이게 드러난 것이 바로 채색옷이었습니다. 채색옷은 값비싼 옷이었을 뿐 아니라, 노동을 면제받는 자의 옷이었습니다. 일종의 장자권을 요셉에게 물려주겠다는 아버지의 뜻이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가정은 엉망이 됩니다. 형제들끼리 미워하고, 증오하고, 갈등합니다. 서로 편안하게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샬롬의 평화가 깨어져 버렸습니다. 아버지가 편애로 일으킨 문제였습니다. 이 가정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대로 가면 그냥 끝장나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가정을 그대로 두실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너를 복이 되게 하겠다. 너의 자손을 저 하늘의 별과 같이, 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아지게 해주겠다."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쌓아온 추억, 믿음의 여정이 얼마나 깊었습니까.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 소망 없는 가정에 한 번 더 소망을 주기로 결정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창 37:5)

요셉은 이미 채색옷 때문에 형제들의 미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하여 꿈까지 꾸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꿈이었기에 형들이 그를 그토록 미워한 것입니까.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창 37:6-7)

형제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을 향하여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이런 꿈을 꾼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이 꿈을 자기 입 밖으로 형들에게 말해 버린 요셉도 참으로 답답합니다. 이 꿈이 의미하는 바를 형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형들은 무척 기분이 나빴고,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꿈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또다시 비슷한 내용의 꿈을 다른 형태로 꾸었습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창 37:9)

해와 달과 열한 별, 곧 부모와 형제들 모두가 요셉에게 무릎 꿇고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 이야기를 또 해버렸습니다. 형들의 분노는 폭발합니다. 아버지도 이 분위기를 다 읽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너무 험악하여 오히려 요셉을 꾸짖을 정도였습니다.

이 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각기 달랐습니다. 형제들은 분노했고, 요셉은 아무 생각 없이 형들에게 다 말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이 일을 두려워하며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꿈을 마음에 간직해 두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일

이 꿈은 요셉이 꾸고 싶어서 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 꿈을 꾸게 하셨습니까.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창 41:32)

훗날 애굽의 바로가 풍년과 흉년에 관한 꿈을 꾸었을 때, 애굽의 모든 점술가와 현인들도 이 꿈을 해석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감옥에서 나온 요셉이 이 꿈을 해석하며 한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같은 내용의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이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요셉이 두 번이나 비슷한 꿈을 꾸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요셉이 하는 일이 아니라, 형들이 막는다고 막아지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가 꾸짖는다고 멈출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가정을 해보아야 합니다. 만약 이 가정에 이 꿈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우리는 이 꿈의 결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꿈을 주셨고, 요셉은 이 꿈 이야기를 했고, 형들은 기분이 나빴고, 그것 때문에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애굽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이 가정에 이 꿈을 주지 않았다면, 요셉에게 이 꿈을 주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야곱은 날이 갈수록 늙어갑니다. 그가 그냥 늙고 병들어 죽어 버렸다면, 아들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혀놓고 세상을 떠났다면, 요셉과 베냐민을 돌봐줄 울타리가 아무도 없습니다. 라헬도 죽었고, 야곱마저 죽고 나면, 형들이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여 요셉에게 장자권을 인정하겠습니까. 절대로 그러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요셉과 베냐민을 아무도 모르게 없애 버렸을 것입니다. 형제들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꿈을 주셨기 때문에, 이 가정에 문제가 터졌고, 그 문제를 통해 오히려 이 가정 전체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야곱의 가정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꿈을 품을 수 없는 가정, 서로 말도 하지 않는 가정, 망가져서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이 완전히 무너진 가정이었습니다. 이런 가정에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꿈을 주시고, 그 가정이 앞으로 살아갈 방법과 방향을 제시하셨습니다.

마치 이 땅 우리 민족에게 꿈과 비전을 주신 것과 같습니다. 1885년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이 땅에 첫발을 내딛으며 복음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 땅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경제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고, 정치적으로는 일제의 수탈을 견디지 못하는 나라였으며, 외세의 침략을 당해낼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한마디로 힘이 없었습니다. 문맹률은 거의 100%에 이르렀고,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한 동네에 전염병이 돌면 몇 동네가 몰살할 정도로 취약한 나라였습니다.

이런 희망 없는 나라에 선교사들이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글을 깨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이 마음속에 들어왔습니다. 상황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이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복음이 들어오자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 싶다는 뜨거운 열정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이 달라진 것입니다.

꿈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요, 그 말씀이 곧 비전이 됩니다. 소망 없는 나라에, 소망 없는 가정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꿈을 주시고, 이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바로 우리가 걸어야 할 여정입니다.

1세대 선교사들은 이 땅에 병원을 세웠습니다. 그 당시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은 병에 걸리면 치료받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병원이 생기면서 사람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파도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1세대, 2세대 선교사들이 세상을 떠나고 본국으로 돌아간 후, 그들에게 훈련받은 목사들이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1950년대, 60년대를 거쳐 한국대학생선교회(CCC)의 김준곤 목사가 외친 기치가 있었습니다. '성서한국'이었습니다. 모든 대학생이 성경을 읽고, 이 땅의 모든 청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 되는 나라를 함께 세워가자는 원대한 포부였습니다. 술과 향락에 빠지지 않고, 이 땅의 청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워지자는 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전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꿈인데, 가장 가난했던 나라에서 성서한국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 당시 동포가 3천만 명 정도였고, 그중 약 6%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경직 목사는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구호 아래, 전 국민을 복음화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었습니다.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6%밖에 되지 않는 기독교 인구가 어떻게 전 국민을 전도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꿈을 가지고 포부를 가지니 그 꿈이 현실이 되어갔습니다. 1975년 여의도에서 빌리 그래함 집회가 열리면서 이 땅에 폭발적인 복음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꿈을 꾸고 하나님의 말씀이 비전이 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가정 같은 아무 소망 없는 가정에 요셉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 비전을 주시고 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소망 없는 이 땅에 선교사들을 통해 말씀을 주시고 교회를 세워 이 땅에 꿈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욜 2:28-29)

요엘 선지자는 기원전 8세기 유다에서 예언했습니다. 솔로몬 시절을 지나고 성전 신앙이 타락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갈라진 후 남유다의 신앙이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성전을 지키던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타락했습니다. 타락한 종교 권력은 타락한 세속 권력과 결합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줄 것이다, 이 타락한 민족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자녀들과 늙은이들과 젊은이들과 남종이나 여종이나 똑같이 하나님의 영으로 비전을 보고 예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자녀들과 젊은이들은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늙은이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종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나도 종이고, 내 자녀도 종이고, 내 손자도 종으로 살다가 죽어야 할 이들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고 꿈을 주시면, 그들이 예언하고 비전을 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 사도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에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앞에 서서 설교했습니다. 꿈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늙은이들이 꿈을 꾸고, 종들이 비전을 보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자에게 주시는 비전

그렇다면 이 희망 없는 야곱의 가정에 왜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꿈을 주셨습니까. 아들이 열둘이나 있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의 선택은 요셉이었습니까. 하나님도 야곱처럼 요셉을 편애하신 것입니까. 이 질문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 나가다 보면, 한참 시간이 지나서 불신자 바로의 입을 통해 그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창 41:38)

애굽의 왕 바로가 꿈 때문에 번민하고 있을 때, 감옥에서 갓 나온 한 청년이 이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단순히 꿈을 해석했다고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었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막 감옥에서 나왔는데, 이 청년에게서 말할 수 없는 권위가 느껴졌습니다. 한 나라의 대왕인 자신이 이 청년 앞에서 기가 꺾이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불신자 바로의 눈으로 봐도 이 사람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고백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요셉은 하나님의 영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꿈을, 비전을 주십니다.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소망 없는 가정에 꿈과 비전을 주시고 싶은데, 누구를 통해 줄 것인가를 살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니 요셉이 그중에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통해 꿈을 주시고 비전을 주신 것입니다.

왜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 꿈을 주시고 비전을 주십니까. 자기 욕심으로 충만한 사람, 죄악으로 충만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꿈을 줘봐야, 그것이 꿈인지 비전인지 분간하지 못합니다. 또한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꿈과 비전이 들어가면, 그것은 자기 야망으로 탈바꿈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자기 야망으로 바꿔 가는 사람은 위험한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요셉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일을 세워 가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 충만하려면 죄를 떠나야 합니다. 죄가 마음속에 있으면 성령 충만할 수 없습니다. 죄를 잘 다스리고 죄에서 떠나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요셉은 모자란 아이였습니다. 미숙한 소년이었습니다. 꿈을 해야 할 말인지 하지 말아야 할 말인지 분간도 하지 못하고 형제들에게 다 털어놓는 미숙한 아이였습니다. 아버지가 채색옷을 입힌다고 주는 대로 입고, 형들에게 가서 아버지 시키는 대로 형들이 잘못한 것을 다 고해 바치는 앞뒤가 꽉 막힌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미숙하고 모자라 보여도, 그의 영혼이 맑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아이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그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지위, 경제력, 나이,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꿈과 비전을 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꿈과 비전, 그리고 야망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단순하게 말하면 야망은 내가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자기가 붙잡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전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 꿈을 자기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두 번이나 겹쳐서 꾸게 하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야망인지 비전인지 자신도 헷갈리고 주변 사람들도 모릅니다.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루어가는 과정과 이루고 난 결말을 보면 명확하게 구분됩니다.

야망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사람을 힘겹게 하고, 주변 사람들을 상처 줍니다. 야망을 이룬 사람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괴롭히고 힘겹게 합니다. 헤롯을 보십시오. 왕이 나셨다는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어린아이들을 다 살해해 버리지 않았습니까. 역사 속의 제국의 왕들은 왕좌에 오르기까지 부모 형제 가족을 막론하고 죽여 버렸습니다. 그것을 권력의 속성이라 부르지만, 어떤 것으로도 포장할 수 없는 야망의 민낯입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주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힘겨워한다면 그것은 야망입니다. 우리 가족이 행복하지 않고, 나로 인해 모든 사람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야망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비전은 다릅니다. 비전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모두가 행복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보디발의 집 사람들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복받고, 요셉이 손대는 것마다 잘됩니다. 감옥에 들어가도 죄수들이 복을 받습니다. 비전을 이루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비전을 이룬 후에는, 하나님의 꿈이 그를 통해 성취된 이후에는, 애굽의 기근이 해결됩니다. 가난한 자들이 요셉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납니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 그 자손들이 모두 애굽으로 이주해 와서 비전을 이룬 사람의 그늘 아래 살게 됩니다. 이것이 비전과 야망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결론

우리는 모두 비전을 품을 수 있고 비전을 꿈꿀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면, 죄를 떠나고 내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맑고 밝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꿈을 주실 것입니다. 야곱의 가정처럼 소망 없어 보이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땅처럼 희망 없어 보이던 곳에서도 하나님은 비전을 심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꿈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성취하고,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가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희망 없고 소망 없는 야곱의 가정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요셉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가셨음을 봅니다. 주님, 우리에게도 소망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우리 가정을 봐도, 내 일터를 봐도, 내 인생을 봐도 소망 없는 삶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주님, 그러하오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떠나고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기를 원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꿈을 주옵소서. 하나님의 비전을 주시옵소서. 그 꿈과 비전을 가지고 이루어가며, 우리 가정과 주변 사람들을 복되게 하기 원하오니, 하나님 우리를 비전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