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본문: 창세기 37:12-22
지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 동안 우리나라의 보이스피싱 피해 건수는 약 22만 7천여 건에 달합니다. 피해 금액은 1조 7천억 원에 이릅니다. 경찰에서는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고 홍보에 힘쓰고 있으며, 언론과 방송에서도 보이스피싱을 차단하기 위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메신저를 이용한 새로운 수법이 기승을 부리면서 20대와 30대의 피해가 급증하는 추세입니다.
보이스피싱의 핵심 특징은 철저한 역할 분담입니다. 어떤 조직은 전화와 문자를 발송하고, 어떤 조직은 대출 상담을 가장하여 개인 정보를 빼냅니다. 또 어떤 조직은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는 역할을 맡고, 어떤 조직은 돈을 운반하며, 어떤 조직은 망을 봅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분업화된 구조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두 가지 효과를 노립니다. 하나는 경찰에 적발되더라도 단순 가담자로 빠져나가기 쉽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서 있기만 했습니다", "남들이 하라고 해서 돈만 전달한 것뿐입니다"라며 책임을 회피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범행에 가담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악을 설계한 몸통이 있을 것이고, 그 뿌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가담한 사람도 분명히 죄가 있고, 부역한 자들도 죄가 있으며, 알고도 모른 척 눈을 감아준 사람들도 죄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은 오십보 백보,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악의 분업 구조 속에 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를 다 계획한 것도 아니고 나는 크게 저지른 죄가 없다고 착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세겜으로 보내진 아버지의 마음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창 37:12)
야곱의 가족은 목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는 곳은 헤브론이었지만, 헤브론에서만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할 수 없었습니다. 건기와 우기를 따라, 목초지를 따라 양들을 이끌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형들이 세겜 땅에 가서 양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세겜이 어떤 곳입니까? 불과 얼마 전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사건으로 인해 그곳의 모든 남자를 살해해 버렸습니다. 그 일로 야곱의 가족은 두려움에 휩싸였고, 세겜과 조약을 맺은 주변 부족들이 보복할까 봐 떨어야만 했습니다. 그런 위험한 곳에 아들들이 다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먹고살기 위해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가장인 야곱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두렵고 불안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창 37:13)
아버지는 걱정이 깊었습니다. 아들들의 건강과 안전이 염려되었고, 동시에 이 아들들이 과거의 일로 인해 현지인들과 다시 충돌을 일으킬까 봐 두려웠습니다. 과거 사건으로 시비가 붙으면 이 아들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습니다. 불필요한 분쟁과 다툼이 일어날까 봐 무척이나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세겜에 파견한 것입니다. 요셉이 그곳에 간 자격은 감시자이자 감독관의 자격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입혀준 채색옷을 입고, 장차 장자권을 물려받을 자로서 형들을 살피고 양들의 안전을 확인하는 임무를 맡은 것입니다.
들판의 낯선 인도자
세겜은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약 80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부지런히 걸으면 3~4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아버지의 명을 받들고 세겜에 도착했을 때, 형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떤 사람이 그곳에서 요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창 37:15)
형들은 온데간데없고, 한 낯선 사람이 요셉에게 다가와 묻습니다. "네가 무엇을 찾느냐." 요셉이 형들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으니, 이 사람이 먼저 말을 건넨 것입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창 37:16-17)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겠습니까? 그 넓은 세겜 들판에서 형들이 서로 나눈 대화를 이 사람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도단은 세겜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입니다. 형들이 도단으로 이동하기로 대화한 내용을 이 사람은 소상히 알고 있었고, 마치 요셉이 올 것을 미리 알았던 것처럼 그를 만나 형들의 행선지를 정확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사람이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어떤 학자들은 성령님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분이 예수님인지 성령님인지는 핵심이 아닙니다. 여기서 진정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통해 요셉을 형들에게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주도하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이 사람이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요셉은 세겜까지 왔다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형들을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갔다면 형들에 의해 애굽에 팔리는 일도, 애굽에서 노예로, 죄수로 살아가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의 꿈을 해몽하는 일도, 기근에서 애굽과 온 근동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때문에 형들과 연결되었고, 형들의 손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갔고, 노예로 살았고, 죄수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요셉은 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였는가. 내가 이 사람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에게 형들의 거처를 묻지만 않았더라면, 지금 이 신세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감옥에 갇히지 않았을 것이고, 보디발의 아내를 만나지도 않았을 텐데." 그는 오랫동안 이 문제 때문에 번뇌하고, 자기 인생을 원망하고 저주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더 흘러서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바로의 꿈을 해몽하고 애굽의 총리가 되고, 7년 흉년을 수습하고, 애굽 사람들을 구해내고, 가족들을 다시 만난 후에야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 45:5)
형제들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보내셨습니다." 그는 그제서야 깨닫습니다. 그 들판의 낯선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곳에 보내셨다는 것을, 결국 화가 바뀌어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 건져내는 복이 되었다는 것을, 한참의 세월이 지나서야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스스로 죄의 길로 걸어가서 죄 짓지 않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 짓지 않고, 믿음 생활을 감당하며, 직장에서, 가정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만나는 바람에, 어떤 일에 휘말리는 바람에, 지금 이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길고 긴 여정입니다. 끝까지 가 보아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죄의 길로 걸어간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끄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여정을 떠올려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출 13:21)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이끄시는 최종 목적지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반드시 광야를 거쳐야 했습니다. 장장 40년의 여정을 건너가야 했습니다. 광야 40년을 거치면서 백성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했습니까? 마실 물이 없다고, 먹을 고기가 없다고, 낮에는 뜨겁다고, 밤에는 춥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셨습니다. 시간이 지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나서야, 하나님이 이곳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사막을 건너야만 했음을 비로소 깨닫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여정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칠 수도 있고, 인생의 희노애락 속에서 오르내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저 사람만 안 만났더라면, 내가 그때 그 일에 연루되지만 않았더라면."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의 도구로 쓰임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아무리 마음으로 그 일을 계획한다 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 16:9)
우리가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워도 하나님께서 그 걸음을 인도하시고, 선한 길로 이끄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마음에 억울한 일도, 분한 일도, 혹은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 한 걸음 한 걸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선한 인도하심을 따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악의 뿌리에서 떠나야 할 자리
이 사람의 안내를 받아 요셉은 도단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그리고 마침내 형들을 만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창 37:18-19)
멀리서 요셉이 다가오는데, 형들이 단번에 알아봅니다. 어떻게 알아보았겠습니까? 채색옷 때문입니다. 요셉도 참으로 무심한 것이, 소매도 길고 기장도 긴 그 옷을 입고 8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형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알록달록한 채색옷을 입고 멀리서 다가오는 동생의 모습을 형들이 바라봅니다. 그리고 비아냥거립니다.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형들은 그 자리에서 요셉을 죽이기로 모의합니다. 이것은 장난스러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한번 죽여 버릴까?" 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실행에 옮기려는 치밀한 계획이었습니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창 37:20)
형들이 분노한 이유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장자권을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에게 넘겨주려 하는 것에 대한 분노, 라헬로 인해 어머니가 차별받으며 자란 상처, 거기에 요셉이 두 차례나 꿈을 꾸며 형들의 분노를 자극한 일까지. 그러나 아무리 화가 나고 억울하다 한들, 사람을 이런 식으로 죽이려는 모의를 우리가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이런 음모를 꾸미는 악한 자들이었고, 무서운 자들이었습니다. 그 음모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실행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이 일을 막아서는 것처럼 보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창 37:21-22)
이 르우벤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보입니까? 아마 세 가지 정도의 감정을 느낄 것입니다. 첫째, 르우벤은 생명을 존중하는 선한 사람이구나. 둘째, 장남으로서 동생을 책임지려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구나. 셋째, 아버지의 입장을 깊이 헤아리는 사람이구나. 만약 그렇게 느꼈다면, 우리 모두 르우벤에게 속은 것입니다.
르우벤의 실체를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그가 정녕 선한 사람이고,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형제들이 살인 모의를 시작할 때부터 강하게 꾸짖어야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앞에서는 이미 장자로서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처지였지만, 형제들 사이에서는 장남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그 자리에서 그가 장남 아닙니까? 그런데 형제들이 요셉을 살해하려는 모의를 하는데 강하게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틀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동생이 미워도 죽이려는 모의 자체가 악한 것이다, 그런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말고, 그런 생각도 품지 말라." 진정 선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죽이지는 말고 구덩이에 넣어두자." 이렇게 타협해 버렸습니다.
두 번째, 우리는 그가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구덩이에 요셉을 넣어 뒀다면 끝까지 지키고 책임져야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는 그 자리를 이탈합니다. 르우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유다가 주도권을 쥐고, 형제들의 동의를 얻어 지나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요셉을 은 이십에 팔아버립니다. 돌아와 보니 요셉은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이런 사람을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동생을 책임지려 했다면 끝까지 그 자리에 있어야 했습니다. 요셉을 지키고, 아버지의 손에 인계할 때까지 곁에서 보호했어야 합니다. 그것이 책임입니다. 끝까지 돌보는 것. 그런데 그는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아버지의 입장을 잘 헤아리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동생이 팔려간 것을 알고 난 후, 형제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벗겨 둔 채색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 아버지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오다 보니 이 옷을 주웠습니다. 요셉은 사라졌습니다. 짐승에게 물려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형제들이 이런 거짓말을 할 때, 르우벤도 침묵했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그 일로 인해 십수 년을 고통 가운데 지냈습니다. 진정 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앞에서 진실을 말했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아버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진실을 밝히지 않고 형제들의 악 속에 숨어버렸습니다. 이런 사람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 입장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르우벤은 선을 행하는 생명 존중의 사람도, 책임감 있는 사람도, 아버지의 입장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결론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악이라는 것이 얼마나 교묘하게 우리를 속이는지를 봅니다. 악은 거대한 나무와 같습니다. 사탄은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가지를 뻗으며, 끊임없이 자라납니다. 르우벤은 그 나무에 달린 작고 가느다란 가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악이 아니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악의 뿌리에 기생하고, 악이라는 거대한 나무가 주는 양분을 먹으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살았습니다. "나는 단순 가담자입니다. 나는 처음에 반대했습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팔아치우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그의 죄가 사라지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백성은 아예 집을 따로 지어야 합니다. 악과 뿌리를 같이 할 수 없습니다. 선한 뿌리가 따로 있고 악한 뿌리가 따로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근본이 달라야 합니다. 처음부터 어중간하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며, "구덩이에 넣어두었다가 나중에 아버지께 돌려주면 되지"라는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어중간한 회색 지대를 벗어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새롭고 선한 한 그루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 길을 우리가 걸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은 그 어떤 사람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꼬였다고, 문제가 생겼다고 항상 우리 인생을 저주하고 원망했습니다. 그 일만 겪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원망과 저주 때문에 우리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긴 인생을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바라보면,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섭리를 눈으로 보고 경험하게 하시고 기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악과 절대 손잡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중간한 악의 자리에 서지 않도록 도우시고, 단순 가담자로 치부되지 않도록 도우시고, 선한 뜻을 가지고 새로운 집을 짓게 하여 주시옵소서. 악과 함께 뿌리 내리지 않도록 도우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자리에 온전히 서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