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강 / 무엇이 유익할까 (37:25-36)

무엇이 유익할까?

본문: 창세기 37:25-36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운 도덕이라는 과목은 공동체성을 형성하고 사회성을 길러주는 데 유용한 과목이었습니다. 도덕 시험 문제는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다음 중 길을 건너는 올바른 방법이 아닌 것은?' 1번 육교를 건넌다, 2번 횡단보도를 건넌다, 3번 무단횡단을 한다. 인지력이 있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이고 걸어가고 있으면 도와줘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지나쳐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도덕교육을 받으면 삶의 기준이 생기고 방향이 생깁니다.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어느 방향을 가지고 달려가야 할지를 마땅히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도덕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사람들의 행태가 보도되기 때문입니다. 지하주차장에 주차할 때 주차 라인 하나만 사용해야 하는데, 어느 한 차가 주차 라인을 물고 두 공간을 전부 차지합니다. 입주자들이 항의하면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차가 외제차라서 넓은 공간이 필요하니 두 곳을 꼭 사용해야 한다"고. 죄책감도 없고 미안함도 없고 염치도 없으며, 남들에게 폐를 끼친다는 생각조차 없습니다. 지하철이나 버스, 공공시설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모르고, 남들에게 폐를 끼치는지도 모른 채 행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우리가 행동하는 모든 기준은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보편성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이냐 하는 질문에 칸트는 그 기준이 도덕이요, 법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도덕이 무너지고 법이 무너진 사회라면 어떻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자기 행동의 기준을 자기 좋은 것에 둡니다. 내가 기분 좋으면 그만이고, 내가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 버립니다. 그래서 기준도 도덕도 법도 무너진 사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도덕이나 법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아닙니까? 도덕이나 법보다 훨씬 강력하고, 믿음의 사람들이 절대 기준으로 붙잡고 살아가야 하는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의 말이 등장합니다. 유다가 묻습니다. "무엇이 유익할까?"

실리의 유혹, 말씀의 기준

형제인 요셉을 죽여서 없애버리는 것과 팔아서 돈을 얻는 것 중에 과연 무엇이 유익한가? 미디안 상인들의 입장에서는 인신매매 현장에서 이 사람을 사서 팔아넘기는 것과 이 범죄 현장을 고발하는 것 중에 무엇이 유익한가? 오늘 이들의 삶과 선택을 통해 우리가 어떤 유익을 쫓아 살고 있는지, 유익의 기준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그런데 르우벤은 이 아이를 살려서 아버지에게 돌려보내 주려 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구덩이에 아이를 넣어 둡니다. 그렇다면 르우벤이 그 곁을 지켜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떤 일인지 자리를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르우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멀리서 장사꾼들이 향품을 싣고,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일단의 무리가 다가옵니다. 유다가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창 37:25)

향품과 유향과 몰약, 모두 값비싼 물건들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애굽에 팔기 위해 내려가는 중입니다. 이 상인들이 거래하는 애굽 사람들은 적어도 나라의 고관들이요, 돈이 많은 사람들이요, 이 물건을 구매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유다가 이들을 보고 형제들에게 제안합니다.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창 37:26-27)

유다의 형제들이 유다의 제안을 청종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청종'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듣고 따르며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다의 형제들은 유다의 말을 옳다고 여기고, 마치 하나님의 말씀처럼 따랐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한 것입니다.

유다가 이렇게 말한 까닭이 있습니다. 요셉을 죽여서 피를 흘리는 것과 팔아서 돈을 취하는 것 중에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유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지금이야말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기회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첫째 아들 르우벤을 장남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여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자였고, 그 일로 장남의 자리를 잃게 됩니다. 아버지가 그를 신임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 시므온과 셋째 아들 레위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세겜 사람들을 살육했습니다. 할례 언약으로 조약을 맺고 삼 일째 되던 날 쳐들어가서 칼로 죽여 버렸습니다. 그 일 때문에 가정에 위기가 찾아왔고, 세겜에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그곳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장자권은 요셉에게 있었습니다. 요셉만 없어지면, 논리적으로 순서상 유다가 그 다음 장자권을 가져갈 자격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법에 의하면 장자에게는 아버지 재산의 절반이 돌아갑니다. 그래서 유다는 적극적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요셉만 없어지면 이 장자권이 자신에게 올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베냐민은 아직 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직접 손에 피를 묻히는 것에는 마음의 거리낌이 있었습니다. 손에 피를 묻히고 그를 없애버릴 수는 있지만,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차라리 팔아치우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것입니다.

형제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셉이 눈엣가시였습니다. 맨날 꿈을 꾸고, 채색 옷을 입고 자기들을 감시합니다. 쳐다보기도 싫고 없애버리고 싶은데, 죽이려니 마음에 가책이 됩니다. 그런데 돈까지 생긴다니 일석이조였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동의한 것입니다. 이들의 가치는 실리주의였습니다. 죽이는 것보다 팔아치우는 것이 실리적이라는 판단, 실용성의 관점으로 접근한 것입니다.

훗날 예수님의 제자 중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버린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가룟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영혼의 메시아로 믿고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정치적 해방자로 생각했습니다. 삼 년을 충성을 다해 열심히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정치적 해방자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정치적 해방자로 우리를 건져 주실 것이라는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 지고 죽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본전 생각이 납니다. 젊은 청춘 삼 년을 다 바쳤는데, 어차피 가만히 두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라면, 차라리 넘겨서 은 삼십이라도 얻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실리주의가 꿈틀거리고, 실용성이 움직이며, 계산이 돌아갑니다.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마 26:48-49)

이토록 비열한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넘기고, 은 삼십을 얻어 자신의 삼 년을 보상받습니다. 가룟유다나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나, 이 부분에서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이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실용성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실용적'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들립니까? 누군가에게 "당신은 참 실리적인 사람입니다, 당신은 참 실용적입니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칭찬입니다. "당신은 참 지혜롭습니다"라는 말과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신앙생활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교회가 이치에 밝고 손해 보려 하지 않으며, 한 푼도 손해 보지 않고 모든 것에서 이익을 취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 교회를 정상적인 교회라고 보겠습니까? 믿음 생활이 어떻게 실리만 따지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실용적인 가치가 하나님 나라의 제일 가치입니까? 그렇지 않을 때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하루는 어느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와서 영생에 대해 질문합니다. "주여,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네가 율법은 다 지키느냐?" "그렇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이 사람은 부자입니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의 관원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관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 사람은 젊은 청년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청춘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비실용적이지 않습니까? 실용성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이 청년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수지타산이 맞지 않습니다. 영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죽어 봐야 아는 것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생을 얻기 위해 눈에 보이는 가장 확실한 물질과 권력과 젊음을 바치는 것은 계산이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늘 아버지께서도 이와 같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나타내는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봅니다. 둘째 아들 탕자가 아버지 돌아가시면 받을 유산을 먼저 받아서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리고 다 써 버렸습니다. 탕진해 버렸습니다. 거지가 됩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습니다. 집이 너무 생각나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가 이 아들을 어떻게 맞이합니까?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잔치를 열었습니다. 좋은 옷을 입혔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수지타산으로 따져 보면, 아버지가 이치에 밝고 한 푼도 손해 보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이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네가 나에게서 얻어 간 재산이 얼마인데, 다 갚을 때까지 한 푼도 없이 밥만 먹여 줄 테니 여기서 일하라"고. 그런데 이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아들이 건강하게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실용적인 분이십니까? 이치에 밝은 분이십니까?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특히 큰아들의 눈으로 보면 아버지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큰아들이 화를 낸 것입니다.

믿음 생활이란 간혹 이럴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시간을 투자하고, 물질을 쏟아붓고, 열정을 쏟아붓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실용성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가치가 넘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그 기준이 하나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가 깨달아 알고,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내야,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됩니다. 다시 한번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무엇이 유익할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그 말씀을 제쳐두고 쫓는 실용적인 가치입니까? 부디 우리에게 유익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정과 일터와 삶에 넘치도록 임하실 것입니다.

생명 앞에 선 선택

미디안 상인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창 37:28)

미디안 상인들이 그 자리에 갔습니다. 유다가 불러서 갔더니, 형제들이 모여 있고, 구덩이에서 한 아이를 끌어올립니다. 요셉이 구덩이에서 나오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형들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 달라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려 달라고, 아버지 집에 가서 한마디도 하지 않을 테니 살려 달라고, 이렇게 하지 말라고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울고 부르짖으며 형들에게 빌었겠습니까?

미디안 상인들이 보기에 이것은 범죄 현장입니다. 인신매매 현장입니다. 형제들이 공모하여 한 아이를 팔아치우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미디안 상인들은 개입하지 않습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은 이십을 주고 이 아이를 사 갑니다. 그 당시 노예 한 사람의 매매가가 은 이십이었습니다. 은 이십은 건장한 남자의 삼 년 품삯에 해당합니다. 단순하게 계산해 보면, 일용직 근로자가 하루 걸러 하루 일한다고 치고 일 년에 벌어들일 수 있는 수입이 오천만 원이라면, 삼 년 치 연봉은 일억 오천만 원입니다. 그것을 열 명의 형제가 나누면 한 사람당 약 천오백만 원 정도가 돌아갑니다. 동생을 팔아치워서 일인당 천오백만 원 정도의 수입을 가져간 것입니다.

은 이십을 주고 이 아이를 사 가는 미디안 상인들은 애굽의 부자들에게 훨씬 비싼 값으로 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조건이 좋았습니다. 열일곱 세의 소년이고, 건강하며,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도망갈 수도 없고, 딸린 식구도 없었습니다. 훨씬 비싼 가격에 애굽 부자들에게 팔아넘길 수 있으니, 미디안 상인들은 형제들의 분쟁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미디안 상인들의 입장에서 유익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물질이었습니까, 생명이었습니까? 무엇이 유익한가를 그들에게 물어보면, 그들에게 유익한 것은 사람의 생명의 가치가 아니라 돈이었습니다. 은 이십을 주고 두 배, 세 배를 불려서 이 아이를 팔아치울 생각, 그들에게 유익한 것은 오로지 물질이었습니다.

1994년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가 개봉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이 영화는 독일계 체코인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의 실화를 다룬 이야기입니다. 오스카 쉰들러는 나치 당원이었습니다. 나치에 부역하며 히틀러(Adolf Hitler)를 찬양하고 다녔습니다. 그는 사업가였습니다. 히틀러가 유럽을 침공하고 전쟁이 한창 잘 나갈 때, 나치에 부역한 대가로 유태인이 운영하던 공장을 불하받습니다. 이 공장을 통해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습니다. 부자가 되려면 직공들부터 교체해야 했습니다. 기존 직공들을 내보내고 노동력이 저렴한 유태인들을 고용하기로 합니다. 유태인들을 대거 고용하고, 학대하며, 갖은 모욕을 가하면서 돈을 벌어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학살한다는 소문, 수용소에 가두고 생체실험을 한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기 공장의 직공들도 끌려가 실험 대상이 되고 죽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쉰들러는 고뇌에 빠집니다. 그리고 결심합니다. 큰돈을 들여 자기 고향에 공장을 짓고, 한 사람 한 사람씩 몰래 이주시킵니다. 독일 고위 관료에게 발각되자 뇌물을 주어 무마합니다. 한 사람을 이주시키는 데마다 비용이 듭니다. 아우슈비츠(Auschwitz)에서 죽음 직전까지 갔던 백오십 명의 직공들까지 구사일생으로 건져 오는 데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습니다. 전 재산을 거기에 다 써 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살린 사람이 약 천이백여 명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습니다. 나치 당원이었다는 이유로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공장도 빼앗겼습니다. 수배령이 떨어져 아르헨티나(Argentina)까지 도주합니다.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복권되고 다시 독일로 돌아왔지만, 암에 걸렸습니다. 돌봐 줄 가족도 없고 병원 갈 돈도 없었습니다. 그때 유태인 보호위원회에서 그의 노후를 돌보고 책임져 줍니다. 1974년 오스카 쉰들러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해는 이스라엘 예루살렘 시온산에 안치됩니다. 나치 당원으로는 유일하게 예루살렘 시온산에 묻힌 사람이 오스카 쉰들러였습니다.

쉰들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는 본문의 미디안 상인들과 같은 처지였습니다. 발을 빼면 그만이었습니다. 모른 척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자신은 그저 공장을 운영하는 주인이지, 이 사람들의 생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왜 마음을 쓸 일입니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자기 돈을 들이고 목숨을 거는 것입니까? 그냥 히틀러가 명령했으니 끌려가게 내버려 두면 자신도 편하고 돈도 벌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이 유익하냐"는 질문 앞에서, 물질이냐 생명이냐는 가치 앞에서 그는 물질을 택하지 않고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비록 거덜 나고 빈털터리가 되고 거지가 된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게 된다 하더라도, 그는 후회하지 않는 생명 사랑의 가치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오늘 이 시대의 믿음의 백성들은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며, 이 시대에 고통받는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관심이 없지는 않습니까? 기원전 8세기에 아모스 선지자가 그 시대의 악한 위정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암 6:4-6)

그 시대의 위정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상아 상에 누워 기지개를 켜고,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대접으로 마시며, 몸에 기름칠을 하고, 자기를 위해 악기를 만들어 연주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환난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환난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형제들에게 핍박받는 사람, 육체의 고난을 겪는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곧 우리 형제의 고통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자들을 아모스가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고발에서 자유롭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의 가치,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물질주의의 가치가 생명 존중의 가치를 압도하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의 백성에게 무엇이 유익하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적어도 성도라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 제가 가진 물질보다 죽어가는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라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이고, 그것이 성도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실리를 쫓고 실용성을 쫓아가는 사람이냐, 아니면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냐? 너는 물질을 따르는 사람이냐,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이냐? 이 질문 앞에서 우리의 절대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 고백 위에 우리는 믿음의 집을 든든하게 세워 나갈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기준을 세우기를 원합니다. 유다가 형제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할까?" 요셉을 죽여 없애는 것과 팔아치워서 돈을 얻는 것, 그들의 선택 가운데는 하나님 말씀의 기준이 없었습니다. 미디안 상인들은 형제들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았고, 인신매매에 가담하여 물질의 가치를 쫓아 산 미련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주여, 우리의 가치가 생명 존중의 가치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악하고 험한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가 따르고 실천하고 순종해야 할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 말씀이 우리 삶의 주관자가 되며, 그 말씀을 중심으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