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가정
본문: 창세기 38:1-11
작년 연말 영국에서는 한 특별한 장관직이 신설되었습니다. 이른바 '상식부 장관(Common Sense Minister)'이 새롭게 만들어졌고, 그 자리에 에스더 맥베이(Esther McVey)라는 여성 장관이 발탁되었습니다. 이 직책을 신설하며 수낵(Rishi Sunak) 영국 총리가 한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앞으로 정부 부처 간 어떤 일을 할 때, 영국의 상식이 무엇인지 궁금하면 맥베이에게 물어보라." 상식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영국에서 상식을 논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이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오늘 우리 시대가 원리와 보편성, 그리고 상식이 사라진 시대라는 반증이 아니겠습니까.
맥베이 상식부 특임 장관이 부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영국 모든 공무원의 공무원증 목줄을 통일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지개색 목줄을 달고 있고, 어떤 사람은 팔레스타인 국기 색상의 목줄을 달고 있는데, 이것이 특정 가치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므로 정부에서 지급하는 목줄로 통일하여 착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물론 반발도 적지 않았습니다. "맥베이가 말하면 그것이 곧 영국의 상식이냐"는 비판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영국과 유럽의 현실이 안타까운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 사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도대체 상식이라 말하지만, 무엇이 상식인지, 어떤 것이 기준이 되는지가 무너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말하는 상식의 기준을 뛰어넘어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상식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절대적 기준이 있다는 뜻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의 가정에는 기준이 없어 보입니다. 상식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절대적 기준도 없습니다. 그래서 엉망입니다. 오늘 이 가정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인 말씀 위에 서서 스스로를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없는 충동, 무너진 기준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창 38:1)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갔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자기 갈 길을 한번 가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종의 일탈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라헬이었고, 라헬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라헬이 낳은 아들 요셉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나머지 형제들에게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유다가 무엇을 하건, 어디로 가건 아버지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유다는 일탈을 시도합니다. 한번 멀리 떠나보기로 한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 야곱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잠깐 떠났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문제를 일으킵니다.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창 38:2-3)
유다가 가나안 여성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습니다. 한둘이 아니라 셋이나 낳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조금 더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발견됩니다. 유다가 낳은 세 아들의 이름은 엘과 오난, 셀라로 모두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사자인 유다의 이름도, 유다의 장인 이름인 가나안 사람 수아도 분명하게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세 명이나 낳은 유다의 부인 이름은 없습니다. 성경이 의도적으로 빼놓은 것입니다. 아들들의 이름도, 남편의 이름도, 장인의 이름도 있는데 부인의 이름만 없습니다.
2절 말씀을 다시 살펴보면,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라고 했습니다. 보고, 데리고, 동침하고 — 한 호흡에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을 보았고, 데리고 들어갔으며, 동침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상당히 충동적이고, 상당히 정욕적입니다. 유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여성이 누구이든 그것은 그의 인생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자신의 정욕을 해소하는 도구로 삼았을 뿐, 보고 데리고 동침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아이를 가졌고, 아이를 낳았으며, 그냥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결혼 생활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다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결혼 문제를 충동적으로 해결해 버렸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중요한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가운데 결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인생에서 결혼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할 정도로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이렇게 충동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보고 데리고 동침하고, 아이를 가졌으니 그냥 살아 버리는 — 이런 모습에서 성경은 유다가 얼마나 충동적인 인물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혼의 정석은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입니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창 24:63)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창 24:67)
이삭의 결혼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삭이 결혼할 때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중요한 문제를 앞두고 아버지가 기도했고, 결혼 후보를 찾기 위해 하란 땅으로 보낸 종 엘리에셀도 기도하며 갔습니다. 가서도 합당한 여인을 찾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당사자인 이삭은 들에 나가 묵상했다고 했는데, 이는 곧 기도했다는 뜻이며, 리브가 역시 기도하고 결단하여 먼 곳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결혼이 성사되었습니다. 이것이 결혼의 아름다운 정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온 집안이 함께 기도하는 것, 당사자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까지 함께 기도해 주는 것 — 인생의 중요한 문제는 기도가 앞서지 않고서는 결코 진행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자기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기도 없이 충동적으로, 욕망에 이끌려 해소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결혼 이외에도 우리 인생에는 중요한 문제들이 많습니다. 크고 작은 일들을 하기 전에 기도가 앞서지 않으면, 인생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것입니다. 어떤 중요한 문제를 앞두고도 하나님 앞에 무조건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붙잡아야 할 상식은 모든 일 앞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시작해야, 기도하고 엎드리고 시작해야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있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을 떠나면, 그 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유다는 기도하지 않고 자기 욕구대로 해결해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눈에 이끌려 넘어진 자
2절의 "보고"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유다는 지나치게 감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시각적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곧바로 충동적으로 행동해 버린 것입니다. 시각은 극히 강력합니다. 눈과 머리가 한순간에 사로잡히면 마음이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이면 몸이 움직이게 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보고, 데리고, 동침하는 것은 당연히 순서대로 일어나는 과정에 속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전통적으로 보는 것을 경계하라고 가르칩니다. 인류 최초의 죄가 보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5-6)
하와가 선악과 나무의 열매를 보니,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보는 것이 이토록 무서운 것입니다. 눈이 주는 시각적 자극을 이기지 못해 결국 선악과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 열매를 보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이 선악과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 하나님의 말씀이 선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인생의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바라볼 때 비로소 보는 것에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생을 둘러싸지 않으면, 그 울타리를 쳐두지 않으면, 항상 보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보는 것도 제대로 보아야 하고 잘 보아야 하는데, 우리의 눈이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 인생의 연약한 고리인 시각을 지속적으로 공격합니다. 예수님에게도 그렇게 했습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4:8-9)
예수님에게 가한 세 번째 시험이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우선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영광을 다 보여주고, 여기서 단 한 번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우선 보았기 때문에 마음의 욕심이 자리 잡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에게도 이런 방식으로 시험하셨는데, 하물며 연약한 우리 인간에게는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사탄은 지속적으로 우리의 약한 시각을 공략합니다. 이것이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견디고 이기기 위해서는 말씀이 앞서 있어야 합니다. 유다가 보고 데리고 동침해 버린 것, 거기에 넘어져 버린 것은 그의 인생에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말씀이 자신의 인생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어 있으면, 사탄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눈을 유혹한다 하더라도 막아내고 견디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상식, 믿음의 백성들이 붙잡아야 할 상식을 넘어선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유다처럼 기도가 없어서 충동적으로 살지 않고, 유다처럼 말씀이 없어서 보는 것에 현혹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명의 자리를 떠난 자의 기만
유다가 집을 떠나온 것은 잠깐의 일탈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깊어집니다. 이방 여인을 만나 결혼하고, 자녀를 셋째까지 낳게 되었습니다.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창 38:5)
셋째 아들까지 낳았는데, 여기서 주목할 대목이 있습니다. 셋째를 낳았을 때 유다가 '거십'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거십은 히브리어 발음으로 '캐지브'인데, 물론 지명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지만, 이 '캐지브'라는 말의 원형은 형용사 '카자브(כָּזָב)'에서 왔습니다. 곧 **'속이는', '기만하는'**이라는 뜻의 형용사에서 파생된 지명입니다. 성경이 이 지명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다의 입장에서만 보면, 지금 이 생활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니겠습니까. 유다의 인생을 한번 돌이켜 봅니다. 그가 지금까지 행복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그의 어머니는 레아였습니다. 야곱이 그토록 사랑하지 않는 여인이었습니다. 레아의 넷째 아들인 유다는 자라면서 어머니에게서 웃음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즐겁지 않고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정에는 네 명의 여성이 항상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뒤엉켜 싸웠습니다. 요셉이 태어난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요셉에게로 기울어졌습니다. 편파적인 아버지를 보며 자랐습니다. 사랑받지 못했고,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위로 형들은 사고만 쳤습니다. 큰형 르우벤은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고, 둘째 시므온과 셋째 레위는 세겜 사람들을 몰살시켜 칼에 피를 묻힌 이들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집을 떠나 한 아리따운 여인을 만났습니다. 이 여인이 누구이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과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셋이나 낳으며 살고 있습니다. 행복합니다. 즐겁습니다. 돌아보면 자기 인생에서 지금처럼 복되고 행복했던 시절은 없었습니다. 유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너를 속이고 너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만하다'라는 뜻의 지브를 여기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은 사명의 자리에 있어야 행복합니다. 그 자리가 비록 고단하고 어렵다 할지라도, 믿음의 백성에게는 사명이 있고, 그 사명자의 자리를 떠나면 한순간 홀가분할 수 있습니다. 일하지 않아서 홀가분하고, 사명을 감당하지 않아서 골치 아프지 않고, 싸우는 것을 보지 않아서 즐겁다 할지라도, 그 사명의 자리를 떠난 것은 자기를 속이고 기만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사명의 자리를 떠난 사람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약속의 가문에 있는 족장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비록 얽히고설키며 갈등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 유다가 감당해야 할 분명한 몫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야곱을 통해 나타났고, 그 가정이 비록 엉망이라 해도 거기에 하나님의 사명과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거기를 떠나서 이방인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고, 그냥 자연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를 속이고 기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 33:11)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 모세를 수종드는 사람이었습니다.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성막에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이 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다 가버리면, 그 뒤치다꺼리를 여호수아가 했습니다. 모세의 뒷바라지를 항상 감당하며 지냈습니다. 젊은 사람으로서 이 일을 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의 자리였기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않고 그 일을 묵묵하게, 성실하게 감당해 냈습니다.
사명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성실하게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데, 열두 명의 정탐꾼이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했을 때, 열 명의 정탐꾼이 이 땅은 점령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분별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사명을 성실히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다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회막을 떠나지 않고 사명을 감당하면,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지금 이 시점에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고, 사명을 감당한 사람이었으며, 그 자리를 떠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귀찮고 어렵다고 해서 사명을 내려놓고 훌쩍 떠났다가 돌아오면, 다시 그 감각을 익히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내가 여기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자리 잡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주의 일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크건 작건 꼭 붙들고 있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유다는 스스로 편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를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더 흘러 유다가 며느리를 맞이합니다.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창 38:6-7)
엘이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을 했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세 아들 가운데 첫째가 결혼한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후사 없이 죽었습니다. 그 당시 율법과 관습에 의하면 둘째가 형수를 취하여 자녀를 낳아 형의 대를 이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유다가 둘째 아들 오난에게 그 일을 명합니다. 그런데 오난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창 38:9-10)
이렇게 둘째 아들까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율법대로라면 이제 막내 셀라를 다말에게 주어 후사를 잇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이런 선택을 합니다.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창 38:11)
유다가 보기에 이 여인 다말이 불길한 존재처럼 보였습니다. 말은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고 했지만, 사실상 며느리를 돌려보낸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 집안과 상관없다고 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있고, 역혼제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유다에게는 그 말씀도, 그 제도도 관심 밖이었습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결론
유다의 인생을 돌아봅니다. 그는 충동적이고 정욕적이었으며,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앞두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각적인 사람이었고 말씀의 울타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사명의 자리를 지키지 않고 떠나버린 인물이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이 일이 도화선이 되어 유다는 이 문제를 자기가 직접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이 시대, 험악하고 복잡다단한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믿음의 백성은 기도와 말씀이라는 절대적 기준의 가치 위에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유다처럼 기도 없이 충동적으로 살지 않기 위해, 유다처럼 말씀 없이 보는 것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유다처럼 사명의 자리를 떠나 자기를 속이며 살지 않기 위해, 다시 한번 이 기준을 세우고, 믿음의 길을 결단하여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에 기준이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유다처럼 내 눈에 좋은 것을 즐겨 행하고, 충동적이며 정욕적인 때도 있었습니다. 사명의 자리를 훌쩍 떠나 내가 좋은 길로 갈 때도 있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제 마음대로 어기며 살 때도 많았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유다처럼 살지 않도록 도우시고,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살며, 무슨 일이 있어도 기도하고 행동하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기준을 주셨으니 그 기준을 붙들고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