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보다 옳도다
본문: 창세기 38:12-30
모든 공산품에는 마진(Margin)이 붙습니다. 소비자 판매 가격에서 생산 원가를 뺀 금액을 마진이라 부르는데, 이 마진율이 높을수록 수익이 많은 것은 당연한 상식입니다. 자동차 브랜드 중에 마진율이 가장 높은 것은 전기차 테슬라(Tesla)입니다. 대략 20% 정도 됩니다. 소비자가 3천만 원짜리 테슬라 전기차를 구입하면 600만 원이 마진이라는 뜻입니다. 마진이 상당히 높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명품 브랜드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계 3대 명품이라고 불리는 에르메스(Hermès), 루이비통(Louis Vuitton), 샤넬(Chanel)의 마진율은 60에서 70%에 이릅니다. 소비자들이 이처럼 마진율이 높은 명품을 구입하는 이유는 가방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에르메스를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가 높고 신뢰도가 대단합니다.
그런데 최근 이 신뢰도를 깨뜨리는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탈리아 밀라노(Milano) 법원 판결에 의하면, 385만 원 하는 프랑스 명품 브랜드인 디올(Dior) 가방의 원가가 8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디올 가방 제조사가 중국인 노동자들을 불법 시설에 몰아놓고 24시간 공장을 가동한 것입니다. 불법 시설에서 불법 노동으로 생산된 이 가방이 제조사에서 넘겨받을 때의 가격은 53유로, 우리 돈 8만 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매장에서 판매될 때는 2,600유로, 우리 돈 385만 원 정도에 거래되었습니다. 마진율이 무려 98%에 이릅니다. 이렇게 되면 명품에 대한 신뢰가 배신당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람들은 장인이 한 땀 한 땀 바느질해서 만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물건에는 이렇게 거품이 끼어 있습니다. 물건에만 거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도 부풀려진 거품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허풍과 허세와 위선으로 살기 때문에, 그 삶을 뒤집어 보면 거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거품을 제거하고 말씀의 공의와 능력을 드러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를 보면 허풍과 허세로 가득한, 말씀 없이 이리저리 방황하는 사람의 거품을 봅니다. 그러나 다말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살아간 자에게 하나님의 공의와 말씀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피고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품 낀 인생, 유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의 집을 떠났습니다. 충동적이고, 정욕적이고, 즉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서 지금 가장 행복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사명의 자리를 떠나온 것이었습니다. 사명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아들의 혼인을 시켰습니다. 다말이라는 여인에게 장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이 악하여 하나님의 징계로 죽습니다. 둘째 아들이 수혼의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도 이를 거부한 나머지 하나님 앞에서 징계를 받아 죽습니다. 이렇게 둘째까지 죽자 셋째 셀라를 다말에게 줘야 하는데, 유다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며느리를 떠나보냅니다. 말씀을 함부로 여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말은 친정에 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창 38:12)
아내가 죽었습니다. 어찌되었건 이 아내와 함께 아들 셋을 낳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세상을 떠납니다. 자기는 잘 살고 있다고 믿었고, 괜찮은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살다 보니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두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마치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에서 잘살아 보려다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은 나오미처럼, 유다 역시 서운하고 허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양털 깎는 날이 되었습니다. 잔칫날입니다. 딤나에 올라가서 양털을 깎습니다. 친정에 가 있던 며느리 다말이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시아버지 유다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다말, 그녀도 시아버지에게 갑니다. 그런데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몸을 감싸고, 다말인 것을 알리지 않는 모습으로 시아버지 앞에 나타납니다.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창 38:15-16)
다말의 결단, 말씀을 지키려는 의지
오늘 우리의 시각과 도덕적 관념으로 수천 년 전에 일어난 이 일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에서 규명해야 할 것들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다말이 왜 이렇게 행동해야만 했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는 다말이 왜 굳이 유다의 집안에 있으려고 집착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유다가 다말을 보고 창녀로 여겼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다말이 창녀의 복장을 하고 나타난 것입니까? 본문을 자세히 보면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너울로 얼굴을 덮고 천으로 온몸을 쌌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곧 창녀의 복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삭이 결혼할 때 그의 아내가 된 리브가가 이삭을 처음 만나러 오는 날 너울로 얼굴을 가렸다고 했습니다. 남편 될 사람을 만나는 첫 만남의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얼굴을 가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천으로 쌌다는 것이 창녀의 복장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유다가 넘겨짚어서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딤나는 이방인의 도시입니다. 양털 깎는 날, 잔칫날입니다. 이방인의 도시 딤나의 신전 창녀들이 길가에 와서 남자를 유혹하고 있을 것이라고 유다가 착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하던 대로,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사람답게 길가에 앉아 있는 여인을 보고 흥정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말은 왜 굳이 이 자리에 앉아 있어야만 했습니까?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창 38:14)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내보낼 때 한 말이 있었습니다. 셀라가 아직 어리니, 이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어 장성할 때까지 친정에 가서 있으라, 셀라가 장성하면 남편으로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물론 유다가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며느리를 내보내는 이유와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셀라가 장성했습니다. 시아버지 유다는 셀라를 며느리에게 남편감으로 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다말이 직접 이 자리에 찾아온 것입니다.
두 번째 의문이 남습니다. 다말은 왜 굳이 유다의 집안에 남으려고 집착하는 것입니까? 그냥 자기 갈 길을 가서 자기 행복을 찾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다말은 이방 여인, 가나안 여인입니다. 처음부터 신앙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죽었습니다. 아이도 없습니다. 친정에 갔습니다. 시아버지가 셋째를 줄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새 출발을 하는 것이 가장 깔끔하고 깨끗합니다. 좋은 남편감을 만나 다시 결혼해서 새 출발하면 자기에게도 좋고 친정 식구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굳이 이 여인이 시아버지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신 25:5-6)
신명기 율법은 후대에 기록된 율법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이 문서로 남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 자녀들에게 흘러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원히 지켜야 할 언약이었고, 기업 무를 자의 책임으로 그들에게는 이미 하나님 말씀의 상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씀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습니까? 여인이 시집와서 결혼했는데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형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다른 데 나가서 시집가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이 이 여인을 책임져서 아들을 낳아주면, 그 낳은 첫째 아들이 죽은 자의 이름을 잇는 아들이 됩니다. 그리고 형제들이 재산을 나누어 줘야 합니다. 그래서 죽은 자의 이름이 헛되지 않도록, 그 이름으로 대를 잇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업 무를 자'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불렀습니다.
룻의 고엘은 보아스였습니다. 보아스는 아무 조건 없이 고엘이 되는 헌신자, 기업 무를 자가 되었습니다. 고엘의 원뜻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내던져서 한 가정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고엘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말씀이요 법이었습니다.
다말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믿음의 집안에 시집 왔습니다. 유다가 아무리 엉망진창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그 할아버지가 이삭이요 증조부가 아브라함입니다. 믿음의 가문에서 흘러내려온 하나님의 말씀을 다말은 알고 있었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둘째까지 죽었는데 셋째 아들 셀라가 있고, 시아버지는 줄 생각이 없습니다. 다말이 생각할 때, 자기는 다른 데 시집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인생에 가장 편한 일이지만, 이 집안에서 어떻게든 아이를 낳아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엘을 세워주지를 않습니다.
다말이 결단합니다. 내가 고엘이 되기로, 내가 구원자가 되기로. 그래서 직접 이 집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도덕적 잣대로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다말은 바로 그 결단으로 이 행동을 한 것입니다.
공의를 세운 여인, 다말
유다는 여전히 똑같은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을 창녀로 여겨 흥정을 시도합니다.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창 38:17-18)
유다는 이 여인과 흥정을 시도하는데 손에 가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하룻밤을 보낸 뒤에 염소 새끼를 보내겠노라고 했습니다. 여인이 담보물을 요구합니다. 염소 새끼를 보내기 전에 담보물을 직접 정해서 요청합니다.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놓으라고 하자 달라는 대로 그냥 내주어 버렸습니다.
유다는 대단히 충동적이고 사려 깊지 못한 인물입니다. 인감도장을 함부로 넘겨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도장에는 자기 이름이 새겨져 있는 신분 증명 도구입니다. 끈이 없으면 옷을 풀어헤치고 다니는 민망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팡이는 머리 부분에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고, 사막을 횡단하는 사람들에게는 호신용 도구입니다. 뱀이 출몰하고 전갈이 나타나는 곳에서 지팡이가 없으면 자신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달라고 하니 그냥 넘겨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냈고, 아이가 생겼습니다. 나중에 유다는 자신이 준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찾기 위해 사람을 보냈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말이 작정하고 숨어 버렸으니 찾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 일이 알려지면 민망해질까 봐 더 이상 찾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석 달 후에 놀라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창 38:24)
유다에게 이 며느리는 불길한 여인이었습니다. 며느리를 집안에 들였는데 연이어 두 아들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보내기는 했는데, 하나님 말씀대로 하려면 셋째를 줘야 합니다. 그러나 주기가 싫었습니다. 불안하고 불길해서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정쩡한 채로 세월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법적으로는 아직까지 자기 며느리이니, 이참에 없애 버리자고 생각한 것입니다. 율법대로 행음했으니 불태워서 죽여 버리겠다고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다말이 내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창 38:25)
이 물건의 임자로 인해 임신했습니다. 도장과 끈과 지팡이, 그 주인이 누구입니까?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유다의 것입니다. 물러날 곳도 없고, 변명할 거리도 없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유다가 이렇게 돌이킵니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하지 아니하였더라" (창 38:26)
"그는 나보다 옳도다." 이 고백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옳다', '옳음'이라는 말에 히브리어 '츠다카'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말할 때 우리는 '체다카'를 씁니다. 유다가 자기 며느리 다말을 가리켜 말할 때 "그는 나보다 공의롭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말씀을 기반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이것을 공의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있는데 그 말씀이 성취되지 않고 적용되지 않으면 그것을 공의롭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법전이 있고, 그 법이 법대로 집행될 때 그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지켜질 때 우리는 그것을 공의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가리켜 "그는 체다카, 공의롭다"라고 말한 이유는 다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있으면 남편이 죽어도 다른 데 시집가지 말고 그 안에서 해결하라는 말씀, 비록 이방 여인이지만 그 말씀을 생명처럼 지킨 여인이 다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고백할 때, 다말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지킨 공의로운 여인이라고 인정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유다는 어떠했습니까? 유다는 공의와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지만 그는 말씀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말씀과 반대로 행하고, 거꾸로 행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즉흥적으로 건너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말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유다의 한 가지 훌륭한 점이 드러납니다. 그는 이것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다말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다말과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정욕적이고 충동적인 생활을 끊어냈다는 뜻입니다. 이후 유다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훗날 이집트에 곡식을 사러 갔을 때, 자기 동생 요셉이 총리가 되어 있는 줄 모르고 갔다가 베냐민이 잡힐 위기에 처했을 때, 유다는 생명을 걸고 베냐민을 지켜냅니다. 하나님 말씀의 공의대로 살아낸 것입니다. 여기서 깨닫고 돌이켜 철저하게 회개한 후, 그는 더 이상 이전의 삶을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결론
만약 다말이 오늘 우리가 보는 도덕적 잣대로 부도덕한 여인이었다면, 예수님의 족보에 그녀의 이름이 기록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성경의 기자들이 기록하기에, 이 여인 다말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한 공의의 여인이었기에 그녀의 이름이 예수님 족보에 당당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마 1:1-3)
야곱이 낳은 첫째 아들은 르우벤이요, 둘째는 시므온이요, 셋째는 레위요, 넷째가 유다입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은 요셉입니다. 그런데 정통성과 족보 이름의 계승자는 유다가 됩니다. 유다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다말 때문입니다. 다말이 스스로 고엘을 자처했기 때문에, 다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낸 그 자체가 공의가 되었기 때문에, 다말로 인해 그 가정에 쌍둥이가 태어나고, 베레스의 후손에서 다윗이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는 놀라운 은혜가 펼쳐집니다.
유다의 인생은 말씀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말씀 없는 인생은 거품이 낍니다. 말씀 없는 인생은 요동칩니다. 다말의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뿌리내린 인생이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가장 확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사 40:7-8)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습니다.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한철 피었다가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가면 풀도 시들고 꽃도 집니다. 말씀 없이 사는 인생, 공의롭지 않은 인생은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위에 집을 짓고 공의롭게 살아갔던 다말, 그녀의 이름은 영원히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기록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돌아봅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다말 같은 인생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주시고 하나님 말씀의 기준에서 다말의 행동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녀는 이방 여인이었지만 말씀 위에 집을 짓고 그 말씀을 굳게 지키려 했습니다. 자기 인생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스스로 고엘, 구원자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의로운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기억해 주시고 예수님의 족보까지 그 이름을 올려 주셨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가 거품 있는 인생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유다처럼 거품 낀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 붙들고 살아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