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강 / 형통한 자-1 (39:1-5)

형통한 자-1

본문: 창세기 39:1-5

캐나다의 인류학자 리처드 리(Richard Lee)는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 근처에 사는 부시맨 부족과 3년을 함께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인류학자로서 그는 부시맨과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이들의 삶을 연구했습니다. 문명 사회의 사람들과 다른 점은 무엇이며, 공통점은 무엇인지, 문명 사회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또 그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있는지 등을 3년 동안 면밀히 연구했습니다.

3년이 흘러 충분히 배웠다고 판단한 그가 본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3년을 함께 살았으니 정이 들었을 것입니다. 헤어지면서 그동안 이방인인 자신을 잘 거두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소를 한 마리 잡았습니다. 소를 잡고 잔치를 벌이는데, 예상치 못한 반응에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들이 고마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한 사람 두 사람 돌아가면서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정도 가지고 우리 모두가 먹을 수 있겠느냐고, 너무 적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평소 이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어서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모자란다고 하니 소 한 마리를 더 잡으려고 수소문했지만, 갑자기 어디서 소를 구해 올 수 있겠습니까.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그냥 해보자 하고 지켜보았더니, 잔치가 끝날 때까지 전혀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넉넉하게 잘 먹고도 남았습니다.

괜히 화가 났습니다. 이렇게 잘 먹고 즐겁게 잔치를 할 거면서, 왜 그렇게 퉁명스럽게 불평을 해댔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족장이 "그건 우리의 풍습"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유를 들어 보니 이러합니다. 부시맨 부족은 원래 사냥과 수렵으로 생활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냥을 하다 보면 어떤 한 사람이 공을 세우게 됩니다. 작은 짐승부터 큰 짐승까지 잡아오는데, 어떤 사람이 잡은 짐승은 부족의 일주일 양식이 되고 어떤 것은 한 달 먹을 양식이 됩니다. 한 달 먹을 양식을 잡아온 사람은 부족의 영웅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저마다 칭찬합니다. 네가 수고한 덕분에 우리가 포식하게 되었다고, 고맙다고 치켜세웁니다. 그러면 그 칭찬이 다음에 어떤 결과를 낳겠습니까. 칭찬받은 사람은 넘치게 열심을 냅니다. 자기가 위험한지도 모르고, 목숨을 걸고, 위험한 자리로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지켜주기 큰 공을 세운 사람일수록 오히려 퉁명스럽게 대하고, 비난하면서 공을 세운 사람의 교만을 꺾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교만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이 리처드 리에게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내려감 속에 감추어진 동행

우리 주변을 보면 실패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능력이 모자라서 실패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능력이 모자라면 실패도 크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큰 실패를 하는 사람들은 대개 교만 때문에 무너집니다. 작은 성공에 도취되어, 그 성공에 주변 사람들이 잘한다고 해주는 말에 동기부여를 받아, 죽을 줄 모르고 위험을 안고 불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결국 실패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사람일수록 교만을 꺾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교만을 다루시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사람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다루시는데,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주시면 교만이 다루어집니다. 고통을 겪고 어려움을 건너가면서 내적으로 단단해집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모든 일들을 함부로 과신하지 않게 됩니다. 고통을 겪다 보면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였구나, 나는 참 부족하고 모자란 존재였구나 하면서 스스로 조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하나님이 요셉을 다루어 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아버지 야곱에게 사랑받던 아들이었습니다. 야곱은 그에게 채색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그에게 장자권을 부여했습니다.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다루시는 방식은 구덩이에 집어넣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애굽 노예로 팔리게 하셨습니다. 죄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요셉이라는 한 사람을 다루어 가시고, 그를 내면으로 단단하게 만들어 가셨습니다.

창세기 37장은 야곱이 요셉을 사랑했던 이야기, 그에게 채색옷을 지어 입히고 장자권을 준 말씀입니다. 요셉은 두 번의 꿈을 꾸었는데, 꿈을 가감 없이 형제들에게 이야기합니다. 형제들이 미워합니다. 결국 애굽 노예로 팔려갑니다. 창세기 38장은 유다의 가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밥먹듯이 어기는 유다의 모습과,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던 다말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39장에 이르러 본격적인 요셉의 고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창 39:1)

애굽 노예로 팔려간 요셉, 그의 주인이 된 사람은 보디발이라는 인물입니다. 성경은 그를 애굽 왕 바로의 친위대장이라고 소개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경호실장이었습니다. 대단한 권세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보디발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애굽에 내려갔다"는 표현입니다. '내려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라드'(יָרַד)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요나서에서도 핵심 주제어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욘 1:3)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욘 1:5)

'내려가다'라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해서 쓰입니다. 요나서에서 이 '내려감'은 영적인 타락과 침체를 의미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요나는 거부하고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가기 위해 내려간 이 '야라드'는 영적인 타락을 의미합니다. 내리막길로 계속 내려가는 영적 타락,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배 밑바닥까지 내려가 버렸습니다. 배 밑바닥에서 그는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갑니다. 풍랑이 일어나 배가 깨어질 듯한 위기 속에서도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영적인 침체에 빠지니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단어 '야라드'가 요셉에게도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애굽에 내려간 것, 이것도 영적인 타락이고 영적인 침체일까요. 아닙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이제 망해서 내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이것은 요나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야라드', 전혀 다른 '내려감'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 39:2)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요셉의 '내려감'은 망해서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타락도 아니요, 영적인 침체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심으로 이것은 하나님과의 거룩하고 확실한 동행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볼 때 지금 요셉은 어떤 상태입니까. 망한 것입니다. 최고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사랑해서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채색옷은 더 이상 노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는 열두 형제 중에 장자권을 일찍감치 넘겨받았습니다. 형제들 위에 군림하며, 형제들이 노동하고 목축할 때 그것을 감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구덩이에 빠졌다가 채색옷이 벗겨지고, 노예가 되어서 애굽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는 망한 것입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고 희망이 없습니다. 노예로 팔렸는데 어떻게 올라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과 함께했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이 시편 23편 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다윗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의 인생은 본래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새의 집에서 막내아들로 살았는데, 어느 날 골리앗을 이깁니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집니다. 오르막 인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군대 장관이 됩니다. 전쟁할 때마다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높아지고 또 높아지는 인생이었습니다.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을 만큼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인생에 시련이 찾아옵니다. 사울 왕이 그를 미워하기 시작하고, 그를 쫓아옵니다. 관직을 박탈당했습니다. 길거리로 내몰렸습니다. 이전까지 군대를 이끌고 다녔는데, 그때부터 아둘람 굴에서 만난 원통한 자, 빚진 자 사백 명을 거느리고 다닙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는 망한 인생입니다. 입지전적인 성공적 인물이었다가 완전히 무너져 버린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나는 망한 인생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내려가는 인생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염려할 것이 없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는 이 고백을 다윗이 했습니다.

요셉처럼, 다윗처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실패한 인생이라고, 망한 인생이라고, 자꾸만 내려가는 내리막길의 인생이라고 말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주와 함께 걸어가는 길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망한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공하는 인생이고 복된 인생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 평강의 근원

여기서 우리는 평안의 의미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언제 평안합니까. 언제 내 마음에 평강이 강같이 흘러넘친다고 생각합니까. 어떤 사람은 물질이 풍성해지면 평화가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착각입니다. 억만장자에게 걱정이 없을까요. 억만장자에게는 억만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건강에만 문제가 없으면 내 인생에 문제가 없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몸이 건강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여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문제투성이입니다.

참된 평강이 무엇인지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빠집니다. 흩어졌던 제자들이 '우리도 잡히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을까' 하는 공포 속에 모여서 문을 닫았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그 한가운데로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환경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길거리에 나가면 그들을 잡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눈이 번뜩이고 있었습니다. 환경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그들은 여전히 두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이어지는 말씀에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참 평강이란 무엇입니까. 내 인생의 결핍이 채워지고 문제가 해결되어서 평강한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 한가운데, 문제투성이인 내 인생 가운데 예수께서 찾아오시면, 그것이 평강입니다. 내가 비록 노예가 되어서 애굽에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그것이 평강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실패해서 내려가는 인생이라 말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우리는 그 안에서 평강의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 평강의 삶이 곧 형통한 자의 삶입니다. 부디 우리 인생에 예수께서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인생이라면, 우리는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상관없습니다. 모두가 형통한 자가 되고, 모두가 평강 가운데 거하는 자가 될 줄 믿습니다.

돌파하여 건너가는 삶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 39:3)

보디발이 보니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신 것이 보였습니다. 보디발이 보니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요셉이 형통하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형통'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형통을 '통할 통(通)' 자, 막힘이 없이 뻥 뚫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 '찰라흐'(צָלַח)라는 단어는 **'돌파하여 건너가다'**라는 뜻입니다. 막혀 있는데 그것을 돌파해서 건너가는 것, 그것이 형통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요셉의 힘으로는 막혀 있는 것을 돌파해서 건너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도움이 필요한데, 그 하나님이 도우셔서 건너가게 하시고 막혀 있는 것을 뚫게 하시는 능력, 이것이 형통입니다.

노예는 어떤 인생을 삽니까. 보디발 집에 있었던 노예 모두가 자기가 원해서 그 집에 온 것이 아닙니다. 노예의 삶이란 수동적인 삶입니다. 내가 원해서 와 있는 것이 아니니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옛날 영화나 그림을 보면 노예를 다루는 사람의 손에는 항상 채찍이 있습니다. 채찍으로 때려가면서 노예를 다룹니다. 적극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니, 시키는 것도 제대로 하지 않으니, 노예는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형통을 뜻하는 '찰라흐'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입니다. '돌파하여 건너가는 것'은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보디발이 이것을 본 것입니다. 보디발이 얼마나 바쁜 사람입니까. 왕의 경호실장입니다. 집에 들어오는 날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들어와서 노예들이 하는 일을 가만히 보니, 다른 사람들은 수동적입니다. 시키는 것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대단히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었습니다. 자기 앞에 닥친 어려움이 있는데, 이것을 자기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니 그가 믿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그 일을 돌파하고 건너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믿는 사람들의 삶이 보입니다. 우리가 행동하는 것, 우리가 말하는 것,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것 같아도 다 보고 있습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보고 계시고, 믿지 않는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보디발도 요셉의 삶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형통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합니까. "하나님, 저는 형통하고 싶습니다. 제발 제 인생 형통하게 뚫어 주세요." 그러면서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형통은 수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형통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입니다. 내가 일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돕지 않으십니다. 내가 그 일을 위해서 돌파하고 건너가기 위해서 시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도움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내 능력이 부족하니 기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은혜를 구해서 돌파하고 넘어가는 것, 그것이 형통입니다. 형통을 수동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형통하기를 원한다면 적극적으로 시도하십시오. 안 해본 것도 하고, 노력하고, 돌파하려고 애쓰고, 주저앉아 있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막혀 있는 것이 뚫려 형통하게 될 줄 믿습니다.

현재를 섬기는 형통의 비결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창 39:4)

요셉이 적극적으로 일하니 보디발이 그에게 가정 총무의 일을 맡기고 모든 것을 위탁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묵상하고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단어를 만납니다. '섬기매'라는 단어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을 섬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요셉의 처지였다면 요셉처럼 섬길 수 있었을까요. 방해하는 요소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요셉의 과거입니다. 우리가 요셉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형들의 손에 팔려서 애굽에 올 때까지 수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애굽 노예로 와서 보디발의 집에서 살면서, 그에게는 원망할 거리가 산더미처럼 있었습니다. 자신을 무조건 사랑하면서도 결국 지켜주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 자기를 낳아 기르다가 오래 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원망,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이 동생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가 오래 사셨을 것이라는 동생에 대한 원망, 나를 미워해서 팔아버린 형제들에 대한 분노,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면서 막아 주지 않으시고 일을 이 지경까지 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 이것이 뒤엉키면 현재를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과거 자신의 인생에 대한 연민이 들기 시작하면 현재를 살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부모 잘못 만나서, 시집 잘못 가서, 남편 잘못 만나서, 첫 직장에서 상사 잘못 만나서, 그렇게 억울한 일이 우리 인생에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돌아보면 그 일을 막아 주지 않고 해결해 주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한 실망, 이것이 함께 뒤엉키면 현재를 살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서 후회가 꼬리를 물고, 자꾸만 과거에 매여서 현재를 불태워 버립니다.

둘째는 요셉의 미래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미래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은 인정받아서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10년 뒤는 어떻게 될까요. 20년 뒤는 어떻게 될까요. 지금은 건강하고 열심히 살아서 인정받았지만, 10년 뒤 20년 뒤에도 이 집에서 살아 있을까요. 힘빠지면 쫓겨나지 않을까요. 노예는 주인의 소유인데, 혹시 잘못해서 한칼에 죽지는 않을까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있으면 현재를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특히 우리 청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취직에 대한 두려움, 직장 생활에 대한 불안감, 10년 뒤 나는 이 일터에서 일할 수 있을까, 20년 뒤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내 노년은 어떻게 될까. 중년의 사람들도 내 노후는 과연 행복할까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으면 현재를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훌륭한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절망이 산같이 높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한가득인데, 그는 현재를 살아냈습니다. 섬겼습니다. 과거가 어떠하든, 미래가 어떠하든, 지금 요셉 앞에 당면한 현실이 무엇입니까. 자기 주인 보디발입니다. 나는 보디발의 종입니다. 그러면 내 눈앞에 있는 보디발, 자기 주인을 섬겨야 하는 것이 자기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피할 수 있습니까. 이 현실을 피하고 어떻게 삽니까. 이 현실을 직면해야 합니다. 그래서 섬겼습니다. 열심히 섬겼습니다.

가장 미련한 사람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발목 잡히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미래가 불안하다면, 과거가 억울하다면, 현재를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 내가 섬길 일을 찾아서 열심히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형통한 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빛나고 아름다운 형통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때 가서 고백할 것입니다. 나도 요셉처럼 현재를 섬기고 살아냈더니 빛나는 형통의 미래가 내 것이 되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이 형통한 자의 복이 오늘 우리 모두가 누리는 복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요셉의 인생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인생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요셉의 인생과 다윗의 인생은 더 이상 소망이 없는 망한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기에 그는 망한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공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주여,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디발이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형통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돌파하여 건너가는 것이라 하셨사오니, 주여 우리가 우리 앞에 있는 난관과 고난과 어려움의 장애물을 돌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과거에 매이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를 불태우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섬기기를 원하오니,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고 빛나는 미래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