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강 / 형통한 자-2 (39:5-9)

형통한 자-2

본문: 창세기 39:5-9

우리는 조선 시대를 '500년'이라는 말로 익숙하게 부릅니다. 그러나 한 나라가 500년 동안 존속하며 유지·발전했다는 사실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세계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루아침에 왕이 바뀌고 한 나라가 100년 이상 지속된 사례조차 드물 정도로 역사의 흐름은 급변합니다. 그럼에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500년을 지속했다는 것은 그 안에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뛰어난 왕이 연속적으로 등장한 것도 아니고, 탁월한 신하들이 끊임없이 배출된 것도 아닌데 이 사회가 5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의 구성원들이 저마다 자기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직업군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보장사라는 직업이 있었는데, '알릴 보(報)' 자에 '모양 장(狀)' 자를 써서 보장(報狀)이라 했습니다. 변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중앙의 관청이나 주요 인물에게 알리는 사람을 보장사라 불렀습니다. 조선의 법전에도 보장을 두도록 명시하고 있었으며, 관에서도 보장을 두어 변방의 소식을 보고받았고, 부유한 이들도 각 지방에 보장을 두어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유명한 보장사 가운데 한 사람은 합천에 살고 있었는데, 합천에서 한양까지 건강한 남성이 아홉 날을 걸어야 할 길을 하루에 300리, 곧 120km를 걸어 사흘이면 주파했다고 합니다. 보통의 보장사는 자신의 평생 절반을 길 위에서 보낼 정도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변방 외적의 침입을 중앙에서 신속하게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착호인(捉虎人)'이라는 직업도 있었는데, 호랑이를 잡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민간에서 호랑이를 잡는 착호인이 있었고, 동시에 착호갑사(捉虎甲士)라는 부대도 있었습니다. 태종은 착호갑사 부대를 임시 편성했고, 세종 시절에는 이를 정규군으로 편성하여 운영했습니다. 당시 호랑이가 민가에 출몰하여 백성들을 해칠 정도로 피해가 극심했기 때문입니다. 착호갑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약 180보 되는 거리에서 화살을 정확히 명중시킬 수 있어야 했고, 양손에 각각 30kg 정도의 무게를 들고 단숨에 100보를 달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힘과 기술을 겸비해야만 착호갑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호랑이를 잡아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호랑이 가죽을 하사했는데, 그 가죽 하나로 한양의 집 한 채를 장만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착호인이나 착호갑사, 보장사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민간에도 촘촘한 안전망이 구축되었고, 조선이라는 사회는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믿음의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과 성실함으로 자기 자리를 잘 감당하면, 자기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복을 누리고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주변에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형통한 자로, 믿음의 백성으로 바르게 살면 우리 가정과 일터, 우리와 관계하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형통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을 아버지 야곱의 집에서 분리하셨고, 그는 형제들에게 팔려 애굽에 노예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몰락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신 길이었기에 복된 길이었습니다. 요셉이 형통했던 것은 당면한 어려움을 믿음으로 돌파해 나갔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탁월했던 점은 과거의 불행에 매여 현재를 망치지 않았고, 미래에 대한 염려로 현재를 낭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눈앞에 당면한 현실을 성실하게, 믿음으로 살아낸 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이어지는 본문은 그 형통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이 불러온 복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창 39:5)

보디발의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그 밭과 집안 전체에 하나님이 주신 복이 가득 차고 충만하게 넘쳤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보디발 집에 복을 주신 것은 보디발이 복받을 일을 했거나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요셉 때문에, 요셉을 위해서, 요셉 한 사람을 보시고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바르게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면, 그는 철부지였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열일곱 살 소년으로 살 때 아버지가 채색옷을 지어 입혔고, 형들 중에서 가장 귀하게 자랐습니다. 꿈을 꾸면 그 꿈 이야기를 형제들의 심정은 헤아리지 못한 채 가감 없이 전달하는 철부지였습니다. 아버지가 채색옷을 지어 입히고 세겜에 가서 형제들이 양 치는 것을 살펴보라고 했을 때, 그 불편한 옷을 입고도 세겜까지 갔다가 도단까지 찾아가는 고지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요셉이 애굽의 노예로 팔려 왔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면서 그곳에서 큰 살림을 맡아 보디발의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살림을 놀랍도록 잘 운영했습니다. 그 집에 큰 복이 임하고 안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형통이라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누가 잘한 것입니까? 갑자기 없던 지혜가 생겼거나 경영 철학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에게 갑자기 재능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내가 꼭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50 정도 된다고 합시다. 그런데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산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50 이상은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면 50이 아니라 100, 그 이상도 이룰 수 있습니다. 내 능력 이상의 일을 요셉의 삶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니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복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간절히 원하는 소원이 있다면, 그 일 자체에 힘쓸 것이 아니라 먼저 해야 할 일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어야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순서가 뒤바뀌면 힘은 힘대로 쓰는데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둘째,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된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복되게 합니다. 요셉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서 은혜를 받으니 그가 살고 있는 보디발의 집 전체가 복을 누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복을 누리고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요셉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신 복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2-3)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된 사람, 아브라함이 가는 모든 길에서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바로 된 사람의 주변 사람들이 모두 복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 가족을 사랑한다면, 내 가족에게 하나님이 주신 복이 흘러넘치기를 바란다면,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됩니다. 내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복이 우리 가족에게 흘러들어갑니다. 일터에서도 한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바로 서면, 하나님이 그 사람 때문에 보디발의 집에 복을 주셨던 것처럼 그 일터에도 복을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인 동시에 요셉에게 주신 은혜였고, 동시에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나 한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나만 복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는 모든 사람을 형통하게 하시고 평안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압송되던 중이었습니다. 그가 아드라뭇데노라는 배를 탔는데, 그 배에는 276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배가 파선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배 안의 물건을 모두 바다로 던져도 배의 흔들림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가 바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23-25)

'너와 함께 항해하는 사람을 다 네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서 가이사 앞에 서야 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한 사람이 배에 타고 있었기에 풍랑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276명 전원의 생명을 살려 주셨습니다. 한 사람이 바로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 이토록 중대합니다. 내가 바로 살면 우리 가정이 세워지고, 내가 바로 세워지면 우리 일터와 이 나라가 바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요셉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은 보디발의 집에 놀라운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족을 사랑하는 방식, 일터를 사랑하고 공동체를 사랑하는 방식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다음 모든 일은 주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형통한 자가 누리는 은총입니다.

사랑의 탈을 쓴 유혹

이런 형통한 자에게도 사탄의 유혹과 시험이 찾아옵니다.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창 39:6-7)

보디발의 아내가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했습니다. 여기서 '눈짓하다'는 히브리어 '나사(נָשָׂא)'에서 온 표현으로, '눈을 들어 보다'라는 뜻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지속적으로 요셉을 주목하고 관찰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순간 요셉에게 동침하기를 청한 것입니다.

이 상황은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위험하고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이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부족한 것이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남편 보디발은 당시 절대 권력자인 애굽 바로 왕의 친위대장이었습니다. 부귀와 권세와 명예를 갖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여인이 히브리 노예에게 동침하기를 청했습니다. 이것을 요셉이 잘못 이해하면, '이 여인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륜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큰 낭패를 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출처가 어디로부터 시작됩니까?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의 사랑은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그 자리, 십자가에서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인해 손해 본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망한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모든 사람이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극진하신 사랑은 모두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닮은 사랑이라면 모든 사람에게 유익해야 합니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유익하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한다면, 그 사랑은 거짓된 사랑입니다. 보디발도 파멸하고, 보디발의 아내도 망하고, 요셉도 망하는 것이 어찌 사랑이겠습니까? 이것은 배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며, 불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탄은 이것을 사랑이라고 속입니다. 세상의 드라마와 영화, 이 세상이 흘러가는 구조를 보면 이 모든 것을 사랑이라고 포장하여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까? 모두가 불행해지는 것이 어찌 사랑이 되겠습니까? 참된 사랑은 모두를 행복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닮았다면, 나의 사랑으로 인해 누군가가 불행해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이 상황이 요셉에게 치명적인 이유는 그의 처지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노예였습니다. 노예가 안주인의 명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안주인이 동침하기를 청하는 것을 받아들이면 이 집에서 막강한 권력을 얻게 됩니다. '나는 종이었기에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종의 처지에서 어떻게 안주인의 요청을 거절하겠습니까?'라고 상황을 내세울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요셉은 피 끓는 청년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젊은 청년이었습니다'라고 상황을 핑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황을 뛰어넘는 말씀, 절대 진리인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절대 진리인 말씀은 어떤 상황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상황의 노예가 아닙니다. 믿음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상황이 우리를 유혹하고 여러 조건을 내밀더라도, 말씀을 붙들고 있으면 어떤 상황도 건너가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맑은 렌즈로 비추는 하나님

요셉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창 39:8-9)

요셉의 대처를 주목해야 합니다. 요셉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보디발은 눈앞에 있는 주인이며, 그가 아무것도 금하지 않았지만 당신만은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보디발이 두 가지를 보았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는 것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하게 하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디발은 애굽 사람입니다. 지금껏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온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요셉이 그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을 보고 그를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는 것은, 보디발이 하나님을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요셉이라는 맑고 투명한 렌즈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렌즈가 더럽혀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믿었던 요셉이 자기 아내의 청을 받아들여 불륜을 저지른다면, 요셉이라는 렌즈가 더럽혀지면, 보디발은 하나님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요셉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믿지 않고 하나님을 한 번도 몰랐던 주인 보디발이 나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있는데, 내가 죄를 지으면 그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가 되겠습니까? 내가 죄를 지으면 나만 죄짓는 것이 아니라, 그분까지 무너지게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믿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돈을 많이 벌어 호화롭게 살라는 뜻이 아니라, 죄짓지 않고 투명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진실되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맑고 투명한 렌즈가 되어야 나를 통해 하나님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죄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이 고백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이 죄의 유혹을 한번 견디고 이겨내면, 내가 말씀 앞에 바로 서면, 이것이 곧 전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입니다.

또한 요셉은 고백합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그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지금 요셉이 입고 있는 옷은 노예의 옷입니다. 그러나 그의 정체성은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노예라면 이 요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근본적 정체성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존재이기에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다양한 직업으로 불립니다. 내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어떤 직업을 가졌든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의 이름과 직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근본적 정체성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직업의 옷은 불과 몇십 년 입으면 벗게 됩니다. 영원히 가져갈 나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옷입니다. 이 자녀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죄짓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셉을 넓고 더 넓은 영화로운 세상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감옥에서 잠시 고난을 받지만,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누가 이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만약 그가 보디발의 아내의 요청을 받아들여 범죄했다면, 한 달, 길어야 두 달 안에 보디발에게 발각되어 그 자리에서 처형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 청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손을 잡는 순간, 그는 넓고 놀라운 세계로 나아갔습니다.

죄가 우리를 유혹할 때 우리가 죄를 붙잡아 버리면 사탄에게 발목 잡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주저앉게 됩니다. 그러나 죄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손을 잡으면, 하나님께서 그 손을 이끌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넓은 세계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뿐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백성은 순결해야 합니다. 죄짓지 않고 순결하게 살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에 충만하게 넘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믿음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통해서 주변 사람들을 복되게 하기를 원합니다. 죄가 우리를 유혹할 때 사랑의 바른 정의를 깨닫게 하여 주옵시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서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본다는 마음을 가지게 하여 주시고, 내가 제대로 살아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음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손을 붙잡으시고 넓은 곳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기억하며 기대하게 하시고, 더 넓은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그 날을 기대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