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통한 자-3
본문: 창세기 39:10-12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84년의 생애 동안 약 천여 건의 특허를 남겼고, 수많은 발명품으로 인류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상식적으로 누리는 현대 문명의 상당 부분이 에디슨에게 빚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의 발명품들에는 하나같이 역사가 있고, 이야기가 있으며, 깊은 사연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사연을 간직한 것이 바로 전구입니다. 전구 이전의 세상은 가스등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가스등에는 두 가지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는데, 하나는 필라멘트의 수명이 짧아 오래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연소 과정에서 유해한 오염 물질이 배출되어 실내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로등으로만 쓸 수 있었던 가스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에디슨은 질 좋고, 오래가며, 오염 물질이 나오지 않는 필라멘트 재료를 찾아 나섰습니다. 이 한 가지 과제를 위해 그가 테스트한 재료가 약 6천여 가지에 달합니다. 하루에 한 가지씩만 시험하더라도 16년 6개월이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시간을 에디슨은 전구 개발에 쏟아부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천 시간 이상 빛을 유지하는 필라멘트 재료를 찾아냈습니다. 대나무에서 추출한 섬유가 가장 우수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나무의 품종과 산지에 따라 품질이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지역의 대나무가 가장 적합한지 다시 찾아야 했고, 이를 위해 전 세계의 대나무를 수집했습니다. 결국 그가 발견한 최상의 재료는 일본 교토(京都)에서 자란 대나무였습니다. 미국에 사는 사람이 태평양을 건너 일본 교토의 대나무를 찾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수고를 쏟았겠습니까. 그의 집념과 성실이 오늘 우리로 하여금 밤을 환하게 밝히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과학 분야에는 고금을 막론하고 천재들이 꽤 많습니다. 세대마다, 순간마다 천재는 태어납니다. 그런데 이 천재들이 열매를 맺기란 쉽지 않습니다. 집념과 성실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재능도 결실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자기 분야에서 성실하지 않으면 열매를 거두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과학 분야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 해당하는 원리입니다. 성실한 사람이 업적을 남기고, 성공하며, 열매를 맺습니다. 신앙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이 성실이시기에,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닮은 우리도 매사에 성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성숙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통한 사람이었는데, 그 형통의 비결은 바로 성실에 있었습니다.
날마다의 유혹, 날마다의 거절
요셉은 형들에 의해 애굽의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과거의 상처에 매이지 않았고,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았습니다. 주인 보디발을 심히 섬겼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셉의 성실을 보시고 그에게 복을 부어주셨습니다. 사탄은 이 축복의 자리를 그냥 두고 보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를 통해 요셉을 넘어뜨리려는 유혹을 시작합니다. 요셉은 보디발에 대한 의리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으로 이 유혹을 단호히 물리쳤습니다. 상황을 핑계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죄 앞에서 초연했고, 죄를 피해갔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창 39:10)
한 번의 유혹을 이겨냈다고 해서 다시는 유혹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날마다 동침을 청했습니다. 요셉이 느꼈을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노예로서 육체적 고됨은 견딜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끈질기게 파고드는 유혹의 고통은 견디기가 지극히 어렵습니다.
사탄의 본성이 바로 이러합니다. 단 한 번의 시도가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집요합니다. 먹이를 한번 정하면 자기 입에 넣을 때까지 끝까지 달려들고, 끊임없이 물고 늘어집니다. 이것이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우리는 종종 한 번 찾아온 유혹에 승리했다는 사실에 도취됩니다. 그러면 두 번째 유혹 앞에서 번번이 넘어집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이제 내가 섰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확고하게 서 있다고 여기며 긴장의 끈을 놓아버리면, 믿음의 시선이 흔들리고 넘어지게 됩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48개의 성읍 가운데 첫 번째로 맞닥뜨린 여리고성이 가장 강력했습니다. 인구도 많고, 성벽도 높았으며, 두려움이 컸습니다. 이 성 앞에서 여호수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수 6:1-3)
여리고 앞에 선 여호수아에게는 무기도, 전략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유일한 무기이자 전략이 있었습니다. 자기 입을 먼저 열지 않은 것입니다. 경거망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지도자이자 장군이며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끄는 자였지만, 그가 먼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2절의 주어가 '여호와께서'인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성을 돌고, 나팔을 불고, 소리를 지르자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한 사람도 다치거나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여리고를 정복한 후 선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다음 성읍 아이는 작고 보잘것없었습니다. 그 성을 대하는 여호수아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수 7:2)
이번에는 주어가 '여호수아'입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만만해 보이는 성 앞에서 스스로 작전 명령을 내려버렸습니다. 그 결과 아이 성 전투에서 36명이 전사하고 참패를 당했습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순간 넘어져 버린 것입니다.
사탄은 집요합니다. 한번 성공했다고 해서, 한번 이겨냈다고 해서 두 번, 세 번, 열 번의 승리가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전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또 다른 영적 싸움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그날까지 순간순간 영적 전투에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요셉에게도 한 번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날마다 유혹했습니다. 사탄의 성실함이 놀라울 지경입니다. 보디발의 아내에게는 자존심이 상할 만도 했습니다. 모든 권력을 가진 보디발의 안주인이 일개 히브리 노예에게 날마다 거절당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자존심까지 내려놓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약속의 보배, 요셉 한 사람을 무너뜨리면 사탄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소득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존심도 버리고 성실하게 날마다 유혹합니다.
이 사탄의 성실함을 대하는 믿음의 백성은 어떠해야 합니까? 사탄보다 더 성실해야 합니다. 그들보다 한 걸음 더 움직여야 하고, 사탄보다 한 뼘쯤은 더 성실해야 합니다. 악한 사탄보다 조금이라도 덜 성실하면, 불성실하면, 매번 넘어지고 매번 무너집니다. 그리고 후회합니다. 우리가 죄짓고 무너지고 후회하는 이유를 깊이 돌아보면, 말씀에 성실하지 못했고, 기도에 성실하지 못했고, 믿음 생활에 성실하지 못했으며,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데 성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성실한데 우리는 게으릅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 가운데 자기 일에 불성실한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무더위에도 땀 흘려 일하고, 먹고사는 일에는 성실합니다. 그런데 정작 성실해야 할 곳이 따로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십자가 앞에 선 성실
죄와 싸워 이기려면 우리는 매일 죽어야 합니다. 그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매일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6)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는 물론이거니와, 그 십자가에 우리의 욕심과 정욕과 육체의 욕망이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서 우리의 모든 욕심과 죄가 죽어 없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한 점의 죄도 없으신 분이 왜 십자가에 달려 가셨습니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의 욕심과 정욕과 육체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 안에는 욕심이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욕망이 있고, 죄성이 있으며, 죄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만일 십자가에 죄를 못 박아야 하는데 여전히 죄 가운데 살고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붙잡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는다는 것은 내 육체의 욕망을 죽이는 것이며, 그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일에 성실하게 임할 때, 날마다 유혹하는 사탄의 공격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돈 버는 일에는 성실하고, 입으로 죄짓는 일에는 성실한데, 정작 자신의 정욕과 욕심과 육체적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에는 불성실하다면, 우리는 사탄에게 번번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보시는 하나님, 피하는 지혜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창 39:11)
일하러 집에 들어갔더니 집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와 요셉, 딱 두 사람만 남은 것입니다. 이 상황을 누가 꾸몄겠습니까? 집안의 모든 사람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유일한 권력자, 보디발의 안주인입니다.
사탄이 계획한 마지막 한 수가 남아 있었습니다. 요셉에 대한 사탄의 유혹은 세 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보디발의 아내가 동침을 청하면서 죄를 사랑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상황을 핑계로 넘어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이를 잘 이겨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날마다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요셉이 이겨냈습니다. 이제 사탄이 준비한 세 번째 단계, 환경을 완벽하게 조성해 놓은 것입니다. 집안 사람을 모두 내보내고 딱 두 사람만 남겨두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게 됩니다. 첫째, '아무도 없구나.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둘째, '딱 한 번만.' 이 두 가지 생각이 마음을 지배하는 순간, 사람은 죄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보는 이가 아무도 없습니까? 사람은 없어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이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눈동자같이 살피고 계십니다. 우리의 행동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까지 읽어내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창 7:1)
세상에 하나님의 피조물이 수없이 많고,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죄짓는 사람도 보시고, 노아처럼 의인으로 사는 사람도 보십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의로움을 지켜보고 계시다가 방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을 방주에 들이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죄짓는 것도 보시고, 선을 행하는 것도 보시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사는 것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 앞에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사는 존재여야 합니다.
다윗을 생각해 봅시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광야를 전전할 때 그는 죄짓지 않았습니다. 오늘 저녁을 어디서 보내야 할지, 내일 아침은 누구에게 가서 얻어먹어야 할지 막막한 상황에서는 죄지을 여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왕이 되어 왕궁을 차지하고 편안히 누리게 되자, 밧세바를 불러들입니다.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완벽한 범죄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보는 이가 정녕 없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시어 낱낱이 지적하고 책망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보고 계신 하나님을 어떻게 속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 우리는 죄지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생각, '딱 한 번만'에 대해서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탄이 '딱 한 번만'이라고 유혹하지만, 한 번으로 끝나는 죄란 없습니다. 죄는 도미노와 같습니다. 첫 번째 도미노가 넘어가면 두 번째, 세 번째가 줄줄이 넘어지고, 전체가 폐허가 되어야 비로소 멈춥니다. 한번 죄의 유혹에 빠지면 사탄이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다윗의 범죄가 간음으로 끝났습니까? 살인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까? 한 번의 범죄가 그다음, 또 그다음으로 연쇄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사탄은 '한 번만'이라고 속삭이지만, 결단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수렁에 빠지기 시작하면 그 한 번이 열 번이 되고, 죄 가운데 빠져 헤어나올 수 없게 됩니다. 한 번이 중요합니다. 한번 믿음으로 승리하면 그 승리가 두 번이 되고 열 번이 됩니다. 반면 한 번 실패하면 연쇄적인 패배로 이어집니다.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창 39:12)
요셉은 지혜롭게 행동했습니다. 요셉은 청년이었습니다. 청년의 정욕이 마음속에 있을 때였습니다. 매번 유혹하고, 작정하고, 환경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놓고 그를 유혹하는데,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아 끌며 동침을 청했습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기에 요셉은 옷을 버려두고 피해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이 영적 아들이자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서신에 이런 당부를 남겼습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딤후 2:22)
따르라고 한 것은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이고, 피하라고 한 것은 청년의 정욕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목회했던 에베소 교회를 위임받아 평생 동안 사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목회자에게도 있을 수밖에 없는 청년의 정욕, 그 정욕을 사탄이 파고들려 할 때 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은 누구보다도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도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평생을 살면서 내가 어디에 약한지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물질에 약한 사람이 있고, 말에 약한 사람이 있으며, 보는 것에 약한 사람, 듣는 것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피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약점을 집요하게 공략하고 물고 늘어집니다. 말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말이 많은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물질의 문제가 있는 사람은 금전 거래를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정욕에 약한 사람은 유혹의 환경을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피해야 합니다.
피하지 않으면, 내 약점을 모르고 있으면, 악한 사탄은 그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집요하게 파고드는데, 내가 그것을 모른다면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믿음의 사람, 형통한 사람 요셉은 자신의 연약함과 약점을 알았기에 환경을 만들지 않고 피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고, 형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론
요셉의 형통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날마다 자신의 죄성과 싸우고, 날마다 유혹을 거절하며, 날마다 하나님 앞에 서려 했던 성실의 열매였습니다. 사탄이 날마다 유혹한다면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사탄보다 한 뼘이라도 더 성실해야 합니다.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보는 이가 없다는 것은 사탄의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딱 한 번만'이라는 유혹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한 번의 넘어짐이 돌이킬 수 없는 연쇄적 패배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약점을 알고, 유혹의 환경을 만들지 않으며, 과감히 피하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십자가에 우리의 정욕과 욕심을 못 박는 일에 성실하고, 유혹의 환경을 만들지 않고 피하는 지혜가 우리의 삶 가운데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믿음의 길을 가게 하시고, 죄짓지 않으며 승리하는 길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정욕과 욕심과 죄의 욕망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 원합니다. 날마다 나를 죽이는 일에 성실하게 하옵소서. 내 욕심을 죽이게 하시고, 내 자아를 죽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과 성령의 은혜만 살아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가 약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하기 원합니다. 주님, 유혹의 환경을 만들지 않게 하시고, 피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