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통한 자-4
본문: 창세기 39:13-23
1905년 을사조약을 주도한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자 1907년 정미조약을 주도한 정미칠적 중 한 사람, 두 조약에 모두 관여된 유일한 인물이 이완용입니다. 우리는 이완용을 친일파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닙니다. 스물다섯 살에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고, 스물아홉 살에는 고종황제가 근대 교육을 위해 설립한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웠습니다. 당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의해 미국 사절단으로 건너가 조선 영사관을 세우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2년간 미국에 머물며 신문물을 익히고 미국의 정치인들과 교분을 쌓았습니다.
조선에 돌아온 그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미국통 외교관이자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았건, 그는 친미주의자가 되어 "우리도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멀리 있는 미국보다 가까이 있는 러시아를 활용하여 일본을 견제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를 눈치 챈 이완용은 곧바로 친러주의자로 변신합니다. 마침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지자, 고종황제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킨 아관파천을 주도했고, 이 일로 고종황제의 신임을 한 몸에 얻게 됩니다.
그런데 일본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의 유능한 정치인을 물색하다가 이완용에게 눈독을 들입니다. 포섭을 위해 그를 내각의 총리로 임명하고, 권세와 명예를 안겨주었으며, 광산 채굴권까지 넘겨 부까지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완용은 친일파가 되었고, 이후 그의 행적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습니다. 부귀영화와 재물을 한꺼번에 거머쥐었고, 자신이 다 쓰지도 못할 돈을 벌어 후손 만대가 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은 이렇게 옷을 갈아입듯 상황과 환경에 따라 충성할 주인을 바꾸며 살아갑니다. 그것을 우리는 형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완용을 욕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저 사람처럼 시대를 잘 타야 하는데, 적절하게 주인을 갈아치우고 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하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형통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결코 형통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39장은 형통에 관한 정의를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요셉은 그런 의미에서 세속적 형통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성실한 자가 누리는 형통의 본질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억울한 누명 앞에 선 의인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끈질긴 유혹을 견디고 이겨냈습니다. 날마다 유혹했고, 환경까지 조성하며 동침을 청했지만, 요셉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성실함으로 끝내 승리했습니다. 옷을 버려두고 도망쳐 나온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귀한 승리였습니다. 죄를 이기고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대단한 승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정도로 견디고 이기고 승리했다면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상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억울한 누명이라는 고난이었습니다.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창 39:14-15)
보디발의 아내는 집안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요셉이 남겨둔 옷을 증거물 삼아 그가 자신을 희롱하려 했다고 거짓 고발합니다. 요셉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것입니다. 당황스럽고 억울한 상황에서 요셉은 아무런 해명도 할 수 없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같은 말을 전합니다.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창 39:17-18)
이 말을 들은 보디발의 심정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내의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할지,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자신이 알아온 요셉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요셉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목도해 온 자신의 경험은 무엇이었는지,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창 39:19-20)
"심히 노하였다"고 했습니다. 문맥상 요셉에게 노한 것처럼 보입니다. 요셉에게 노했기에 옥에 가둔 것입니다. 만약 아내에게 노했다면 아내를 집에서 내쫓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표면적인 것 너머의 속사정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벌인가, 보호인가
보디발과 요셉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였습니다. 당시 노예에 대한 생사여탈권은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돈을 주고 산 자기 재산이었습니다. 더구나 보디발은 바로의 친위대장으로서 막강한 권세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노예가 안주인을 겁탈하려 한 죄라면, 그 자리에서 목을 쳐도, 사지를 찢어 죽여도 비난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은 요셉에게 손 한 번 대지 않았습니다. 매질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말 일절 묻지 않고 그냥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옥이 어떤 곳이었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습니다. 이른바 귀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감옥이었습니다. 이 옥의 위치가 어디에 있었는지 창세기 40장 3절이 밝혀줍니다.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창 40:3)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들어왔는데, 그곳이 바로 요셉이 갇힌 곳이었습니다. 요셉이 갇힌 옥은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는 이런 방식으로 통치했습니다. 왕의 경호실장 집 안에 사설 감옥을 두고 측근들을 관리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재판 없이 그곳에 보내고, 진짜 죄가 드러나면 흉악범을 다루는 감옥으로 이송하며, 그렇지 않으면 적절히 다루고 훈련시킨 뒤 복권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권한이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 감옥에 보디발이 요셉을 넣었습니다. 이것이 벌이겠습니까, 보호이겠습니까? 보디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보디발은 체면과 위신이 중요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아내가 큰 소리를 질러 "당신이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 했다"고 외쳤으니, 모종의 조치는 취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보디발은 타고난 군인이었습니다. 왕의 경호실장으로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수십 번, 수백 번 겪어보아 속사정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자기 아내가 어떤 여인인지, 요셉이 또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를 매질하고 죽일 수 있겠습니까? 사건은 벌어졌고, 자신의 명예는 지켜야 했으며, 아내를 내쫓지 않는 이상 아내의 말에 대한 책임은 져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 안에 있는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에 요셉을 보낸 것입니다. 아내에게서 분리시키고, 동시에 요셉을 보호한 것입니다.
악의 이중성, 사랑의 항구성
우리는 여기서 악의 이중성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사탄의 본질은 교활하고 이중적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했던 행동을 보십시오.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듯이 행동했습니다. 동침하기를 청하고, 날마다 청하고, 환경까지 만들어두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거절당하자 순식간에 안면을 바꿉니다. 요셉을 죽여 버리려 했습니다. 마침 요셉이 두고 나간 옷이 있었기에 충분한 증거물이 되었고, 소리를 지르면 남편이 와서 당장 그의 목을 칠 것이라 계산한 것입니다.
사탄은 이런 존재입니다. 악의 실체도 모르고 본모습도 모른 채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넘어가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만약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받아들여 한 번이라도 잘못된 길을 걸었더라면 보디발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요셉은 아마 죽은 목숨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짓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악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사탄은 손바닥 뒤집듯, 자기 이익이 사라지면 사람을 모함하고 죽이려 달려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세족식 장면의 첫 구절입니다. 이 말씀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한 사람 한 사람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유다가 자신을 팔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유다의 발까지 씻어 주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진짜 사랑은 처음과 과정과 끝이 동일합니다. 처음 사랑한다고 했으면 그 사랑이 끝까지 갑니다. 내 생명을 다할 때까지, 처음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했으면 그 사랑은 중간에 변하지 않고 끝까지 갑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주는 달콤한 가짜 사랑은 자기중심적이어서 순간순간 변합니다. 유익하지 않으면 등을 돌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면을 바꿔 버립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짜 사랑을 붙잡아야 합니다. 세상이 유혹하는 가짜 사랑에 속으면 내 인생도 함께 무너집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붙잡고 살아가야 우리도 살고, 그 은혜 가운데 우리 주변 사람들도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옷을 입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창 39:21-22)
간수장이 옥중 제반 사무를 모두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간수장이 자기 임의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간수장은 보디발의 지휘를 받아야 했고, 이 옥이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 안에 있었으므로 모든 결정 권한은 보디발에게 있었습니다. 만약 보디발이 요셉에게 조금이라도 의혹을 품고 감옥에 넣었다면, 굶겨 죽이든 고문해서 죽이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간수장은 요셉을 신임하여 옥중 제반 사무를 다 맡겼습니다. 이것은 보디발의 허락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로 있다가 보직이 변경되어 감옥의 총무로 이동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누가 뭐라고 해도,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도 신실하게 살아온 사람은 결국 인정을 받습니다. 당시에 CCTV가 있었습니까? 아무런 증거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 신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사람조차 이 사람을 믿어주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신실하게 제대로 살아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이 정도의 신뢰는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지 않은 일까지 했다고 고발당하고 거짓 증거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벼랑 끝에 몰려도 누군가 나를 믿어주고 신뢰해 주는 사람, 요셉 같은 사람이 형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 상황에서 요셉의 태도입니다. 간수장이 맡기는 옥중 제반 사무를 요셉이 다 처리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디발의 신뢰를 받았건 받지 않았건, 지금 요셉이 처한 상황은 감옥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그는 죄수입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요셉의 훌륭한 점입니다.
그가 노예로 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형제들에게 억울하게 팔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가 되었지만, 지나온 과거와 아픔에 사로잡혀 현재를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언제까지 내가 노예로 살아야 하는가' 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오늘의 현재를 허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보디발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눈앞에 있는 주인을 섬기는 것이니, 그 일에 성실했기에 점점 더 많은 것을 맡기게 된 것입니다. 감옥에서 총무가 되어 일하라고 하니, 그 일을 불평 없이 감당했습니다. "나는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제발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하소연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매여 현재를 망치지 않았고, '언제까지 이 감옥에 있어야 하나' 하며 환경과 상황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옥중 제반 사무에 충실했습니다.
이것이 형통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노예가 되어 있든, 죄수가 되어 있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입니다. 형통한 사람이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는 집사요 권사요 장로로서 주의 일을 해야 하는데, 주변 상황과 환경이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것을 핑계 대며 살았던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수험생은 시험 때문에 예배보다 입시가 우선이 되고, 대학에 가면 연애와 취업이 기다리고, 취업하면 결혼해야 하고, 자녀가 생기면 돌봐야 하고, 먹고 사느라 바빠서 주의 일을 못 하고, 나이 들어 은퇴하면 손자 손녀를 돌봐 줘야 합니다. 언제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언제 주의 일을 제대로 한번 해 보겠습니까?
매 순간 일어나는 주변 환경과 처지와 상황들 속에서, 어떨 때는 노예의 옷을 입고, 어떨 때는 죄수의 옷을 입고, 어떨 때는 이 옷 저 옷을 갈아입으며 살지만, 하나님 앞에 받은 사명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달란트를 주시고 일하라 하셨는데, 그 일을 언제 한번 성실하게 감당해 보겠습니까? 우리는 이완용을 욕하면서도 이완용 식의 형통을 꿈꾸고 있는지 모릅니다. 미국이 득세하면 친미주의자가 되고, 고종이 러시아를 좋아하면 친러주의자가 되고, 일본이 힘을 가지면 친일파가 됩니다. 그에게 국가란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존재이십니까? 상황을 핑계하며 살았다면 우리가 이완용과 다를 바 무엇이겠습니까? 상황과 환경을 핑계하지 말고, 요셉처럼 어떤 상황에 있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기뻐하십니다.
결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 39:23)
창세기 39장의 주제는 형통입니다. 형통과 함께 반복되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셨으니"입니다. 창세기 39장은 형통을 쏟아 붓듯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관점에서 이것이 어떻게 형통입니까? 노예였고, 죄수였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요셉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일 것입니다. 왕이 주는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고, 멋진 수레를 타고 다니며, 제국을 통치하고, 자기 한마디에 수천 수만 명이 움직이는 총리의 자리야말로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요셉이 총리로서의 삶을 살 때 그가 형통했다고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형통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상황과 처지에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사는 것, 그것이 형통입니다. 그 이후에 주어지는 것들은 형통의 부산물에 불과합니다. 총리가 되건, 돈을 많이 벌건, 부귀영화와 명예와 권세를 얻건, 그것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부산물입니다. 그것이 진짜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이 애굽 총리가 되었을 때 형통하게 되어서 총리가 되었다는 말씀을 아예 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뒤바뀌면 우리 인생이 뒤죽박죽 되는 것입니다. 상황을 핑계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면 형통한 자가 됩니다. 그 이후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많이 주시면 그 받은 은혜로 주변에 베풀고 나누며 살면 되고, 적으면 적은 대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은혜 가운데 사는 형통한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요셉의 형통을 배우기 원합니다. 노예의 옷을 입고 있어도, 죄수의 옷을 입고 있어도, 심지어 총리의 옷을 입고 있어도,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일에 성실했고, 최선을 다했으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셉을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주여, 우리는 이완용처럼 이 상황 저 상황, 이 주인 저 주인을 섬기며 살려고 부질없이 애쓰지는 않습니까?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오직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삼고, 상황을 핑계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형통한 자가 누리는 은혜와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총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