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본문: 창세기 40:1-6
얼마 전 끝난 파리(Paris)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단이 열세 개의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중 양궁 부문에서 다섯 개의 금메달을 가져왔습니다. 우리나라 양궁은 현재 세계 최강의 자리에 있습니다. 특히 여자 단체전 양궁은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 이번 파리 올림픽까지 10연속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올림픽이 4년에 한 번씩 열리니, 40년 동안 최고의 자리를 지켜 온 셈입니다. 다른 나라 선수들도 쉬지 않고 노력하며 최선을 다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이면에는 엄청난 노력과 수고가 뒤따릅니다.
양궁이 세계 최강의 자리에 있지만, 이 최강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첫 시작이 있었습니다. 그 첫 시작은 미약하기 그지없었습니다. 1959년, 당시 36세의 서울 수도여고 체육 교사였던 석봉근(石鳳根) 선생님이 청량리 고물상을 지나다가 양궁 활 하나를 발견합니다. 줄도 없고 망가진 활이었지만, 그것에 마음이 끌려 사서 집으로 가져옵니다. 어떻게 작동하는지 몰랐기에 국궁장에 가서 활 사용법을 배웠습니다. 나름대로 배우고 공부하며, 교사였기에 외국 서적까지 구해 독학으로 양궁을 연습했습니다.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자 자기 학교에 양궁부를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 국궁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그러다가 1962년 미 8군에 부임한 엘로드(Elrod) 중령을 만나게 됩니다. 양궁 애호가였던 그는 한국에 부임했으나 양궁하는 사람을 찾지 못해 수소문하던 중, 국궁을 아는 이의 소개로 석봉근 선생님과 연결됩니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우리나라 양궁의 씨앗을 뿌립니다. 엘로드 중령의 주선으로 1963년 우리나라 국궁 협회가 국제 양궁 협회의 회원국으로 가입합니다. 석봉근 선생님은 가는 학교마다 양궁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씨를 뿌린 결과, 마침내 열매를 얻게 됩니다. 1979년 세계 양궁 선수권 대회에서 당시 19세의 김진호 선수가 5관왕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5년 뒤인 1984년 LA 올림픽에서 서향순 선수가 금메달을, 김진호 선수가 동메달을 차지합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세계 최강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미 양궁이 세계 최강의 자리에 있는 시점, 모든 사람이 주목하는 자리에 있을 때는 누구나 열심히 노력할 수 있습니다. 주목받는 인기 종목이면 명예도 얻고 보상도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959년 당시,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그때 구석에서 활쏘기 연습을 한다고 누가 알아주었겠습니까? 아무도 그 사람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미친 사람 취급을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정이 바로 이와 같지 않습니까? 내가 사는 삶의 현장에서, 내 가정에서, 일터에서, 우리가 사는 자리에서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산다고 해서 누가 알아줍니까? 아무도 그 수고를 알아주지 않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 생활을 성실하게 한다고 해서 박수쳐 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바로 그런 자리에서 빛이 나는 법입니다. 요셉이 바로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일생을 보면, 우리는 그의 일생에서 최고의 정점이 애굽 총리가 되었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기 39장에서 그를 형통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노예의 옷을 입고 살 때, 죄수의 옷을 입고 살 때, 하나님 앞에서 사명자로 열심히 살아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형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이 감옥에서 겪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날의 검 위에 선 두 사람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창 40:1-2)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범했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으므로 알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왕의 음식 문제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 당시 제국을 이끌고 있는 황제 입장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 입장에서 전쟁은 그리 두렵지 않습니다. 제국의 황제가 전쟁에 직접 진두지휘하며 나갈 일이 몇 번이나 되겠습니까? 그 아래 장군들이 나서고, 설령 나라의 명운을 건 전쟁에서 직접 나가야 한다 해도 제일 뒤편에서 지휘만 할 것이지, 직접 칼을 쓰거나 활을 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황제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독살의 위험입니다. 하루 세 끼 밥을 먹어야 하는데, 누가 음식에 독을 탈지 모릅니다. 음료에 독을 탈 수도 있고, 조금씩 독을 타서 서서히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철저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둡니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도, 그것을 가져오는 사람도, 함께 식탁 자리에 앉는 사람도 100% 검증되지 않으면 곁에 두지 않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은 왕의 음료와 음식 전체를 총괄하는 두 사람을 뜻합니다. 이 두 사람은 양날의 검과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은 항상 왕 곁에서 음식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먼저 확인합니다. 왕의 식탁에 항상 함께하는 사람들이니, 왕의 기분이 좋으면 이 사람들이 어떤 청을 하든지 들어줄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 신하들도 이 사람들에게 청탁하고 부탁했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면 분위기 좋은 식사 자리를 통해 풀어가려 했을 것이고, 그래서 이들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위험도 있습니다. 만약 왕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배탈이 나거나 문제가 생기면, 그 죄를 고스란히 이 사람들이 뒤집어쓸 수밖에 없습니다. 꼭 독살이 아니더라도 음식에 조그만 문제가 생겨도 이 두 사람은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음식에 관련된 어떤 이유로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왕은 이 두 사람에 대해 즉각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창 40:3)
만약 이 사람들이 왕을 독살하려 한 것이 확실했다면 친위대장의 집 안에 가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목을 쳐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었다는 것은 판단을 유보하고 조사 중이라는 뜻입니다. 조사해서 문제가 있으면 형장의 이슬로 끝나는 것이고, 문제가 없으면 복권될 수도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을 맡아야 하는 보디발의 입장에서는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이 두 사람은 왕의 최측근 중에 최측근입니다. 두 사람이 나중에 문제가 생겨서 처형되면 그만이지만, 둘 중 하나라도 왕 곁으로 복권되는 날이 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잘 섬겨 줘야 합니다. 일종의 보험을 들어야 합니다. 비록 환경은 감옥이지만, 불편함 없이 자기 책임 아래 이 사람들을 잘 돌봐 줘야 합니다.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닙니다.
섬김 속에서 자라난 성숙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 (창 40:4)
친위대장이 간수장을 통하지 않고 직접 요셉을 불러다가 두 사람을 섬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왕의 VIP이기 때문에 친위대장 보디발이 그만큼 신경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요셉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요셉은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처음에 요셉이 감옥에 들어올 때는 보디발에게 고마웠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아니라고 하는데 보디발은 그를 믿어 주었고, 그의 생명을 보전해서 감옥에 보냈습니다. 살려 준 것이니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자기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간수장이 옥중 제반 사무를 맡겨서 일하고 있지만 감옥은 감옥입니다. 아마 요셉은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나를 믿어주고 신뢰한다면, 내 결백을 믿어 준다면, 이제 좀 풀어 주지. 돈 몇 푼이라도 줘서 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면 좋겠다. 이 감옥에 나를 내버려 두지 말고, 이런 무거운 일을 맡기지 말고 그냥 좀 보내 주지.' 그런 마음이 왜 들지 않았겠습니까? 마음속에 서운한 마음이 있으면 일하는 데도 그 마음이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요셉은 그 두 사람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섬겼을까요? 서운한 마음이 있었다면 제대로 섬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창 40:5-6)
두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 이 두 사람은 사형수와 다름없는 처지입니다. 자기 목숨이 어찌 될지 모릅니다. 하루아침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도 있고, 하루아침에 왕 곁으로 복권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꿈자리가 뒤숭숭합니다. 꿈은 꾸었는데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고 나니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 사람들을 보러 들어온 그 자리에서 그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음을 읽어냅니다. 이 부분이 핵심입니다. 만약 요셉이 성심껏 섬기지 않았더라면, 이 두 사람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는지 알아낼 수 있었을까요? 아마 몰랐을 것입니다. 그냥 식사를 가져다 드리고, 잠자리가 괜찮으셨는지 살펴드리고, 옷까지 챙겨 드리는 것으로 대신했다면, 이 사람들의 얼굴을 깊이 들여다볼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성심껏 마음을 다해 최선으로 섬겼기 때문에 이분들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는 것을 알아낸 것입니다.
타인의 얼굴빛을 읽는 믿음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는 것을 알아냈다는 것은 요셉이 성장했다는 증거입니다. 왜 이것이 요셉의 성장을 보여 주는가 하면, 과거 17세 때 자기 아버지 집에서 살던 시절을 떠올려 보면 분명해집니다.
그때 요셉은 안하무인이었습니다. 자기 아버지 야곱은 요셉에게 일찌감치 장자권을 부여해 버렸고, 채색옷을 지어 입혔으며, 노동도 면제해 주었습니다. 자기 위에는 아버지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형들이 열 명이나 있어도 형들을 형답게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꿈을 꿉니다. 자기 곡식단이 있고 형들의 곡식단이 있는데, 형들의 곡식단이 자기 곡식단을 향하여 절을 합니다. 형제들을 다 모아놓고 자기가 꾼 꿈을 이야기합니다. 형제들이 그 꿈 이야기를 들을 때 얼굴이 어땠겠습니까?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그 표정을 상상해 봅니다. 만약 그 자리에 내가 형제들의 자리에 있었다면 내 얼굴 표정이 어땠을까요? 기쁜 마음으로 "정말 좋은 꿈을 꾸었구나, 꿈대로 되거라" 할 형제가 누가 있겠습니까? 열 명의 형제들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불편한 기색을 하는데,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다시 두 번째 꿈을 꿉니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 별을 향하여 절합니다. 이 꿈을 꾸고 다시 형제들을 불러 모아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 정도로 안하무인이었습니다.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마음 상태인지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형제들은 야곱의 아들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입니다. 자기 어머니 레아와, 여종 빌하와 실바가 아버지에게 얼마나 많이 구박당하고 멸시당하고 차별당했습니까? 자기 어머니 라헬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고통받았습니까? 그것을 헤아리고 이해한다면 형제들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17세의 철없는 요셉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형제들의 얼굴빛을 살피지 않는 사람, 믿음이 어리고 신앙이 어린 영적 상태에 있으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내 자식 자랑을 마음껏 합니다. 내가 번 돈 이야기를 하고, 얼마나 넓은 집으로 이사 갔는지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자식이 얼마나 잘되었는지 그런 이야기도 합니다. 상대의 형편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저분의 자녀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이분의 가정 사정과 형편이 어떤지 뻔히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내가 자랑하고 싶으니까, 내 이야기를 듣는 저분의 얼굴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떨리는데도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17세짜리 요셉처럼 철없는 신앙입니다. 상대의 마음과 상대의 상황, 공동체의 상황을 전혀 살피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대하면 피하고 싶지 않습니까?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고, 다시는 함께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마음과 처지를 몰라주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자기 이야기만 끊임없이 내뱉는 사람은 17세짜리 요셉 같은 신앙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제 이 두 사람의 얼굴에 근심이 있는 것을 읽어냅니다. 이것이 성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과 공생애 3년을 함께 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십자가 지러 올라가실 때, 제자들은 자신이 섬기고 함께했던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다는 사실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예수님의 두 제자는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인사 청탁을 합니다.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 20:20-21)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지켜보니, 이분이 정치적 해방자가 될 것 같았습니다. 병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무리를 먹이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고, 병든 자를 일으키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니, 예수님의 기적이라면 로마를 뒤집어엎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겠다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왕이 되시면 우리가 그 좌우편에서 섬기는 재상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어머니를 동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바로 그 길에서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그들이 못 들은 것이 아닙니다.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공생애의 마지막에 이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마 16:21)
이미 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난 예고를 하셨습니다. 고난당하고, 십자가 지고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것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귀에는 그 말씀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제자들 눈에는 예수님이 정치적 해방자로만 보였을 뿐,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자기중심적인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데,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 지러 죽으러 가시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영광받으러 올라가시는 것, 예루살렘에 왕 되러 올라가시는 것만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3년 따라다녀도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그분의 얼굴에 있는 근심과 고난, 그분의 뒷그림자에 있는 세상을 향한 고민을 제자들은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도, 공동체의 지체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여전히 17세짜리 요셉의 신앙에 머물러 있습니다.
초대교회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문제가 많았는데, 그중에 성만찬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성만찬은 오늘날과 같이 형식과 절차가 갖추어진 성만찬이 아니었습니다. 공동 식사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드릴 때 식사를 했고, 모이기 전에 식사를 할 수도 있었고 예배 후에 식사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편하게 사는 사람들, 일하러 가지 않는 사람들, 마음 편하고 몸 편하고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은 일찍 모여서 미리 준비된 식사를 자기들끼리 다 해 버렸습니다. 성만찬의 포도주도 다 마셔 버려서 취할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루 종일 일터에서 일하고 늦게 공동체 예배에 오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처럼 수준 낮은 문제가 고린도 교회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고전 11:33-34)
서로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배가 고프면 집에서 먹고 오라고 합니다. 이런 문제를 2천 년 전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2천 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는 없을까요? 교회 식당에서 식사하실 때 줄 서 있는 분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식사가 나오면 먼저 자리 잡고 앉아 계신 분들도 계시고,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식탁 자리에 앉아서 마치 고급 레스토랑에서 코스 요리 먹는 것처럼 천천히 식사하시고, 우아하게 드시고, 커피까지 가져와서 그 자리에서 다 드십니다. 줄 서 있는 사람이 보여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르신들이 그 자리에서 서서 기다리시는데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얼른 식사하고 자리를 비켜 드리고, 어르신들이 편안히 식사하실 수 있도록 해야 그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 자리에서 레스토랑처럼 식사하고 있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17세짜리 요셉의 자기중심적인 신앙입니다.
신앙의 성장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가만히 있어도 세월이 40년, 50년 가면 직분은 받습니다. 장로도 되고 권사도 됩니다. 그러나 장로가 되었다고, 권사가 되었다고 신앙이 성장한 것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믿음의 성장은 상대의 얼굴빛을 읽어내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상대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이 공동체가 어떤 상태인지, 내가 서야 할지, 앉아야 할지, 일을 해야 할지, 머물러 있어야 할지, 비켜 줘야 할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할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성장은 상대의 얼굴빛에 근심의 빛이 있는지, 기쁨의 빛이 있는지 그것을 읽어낼 수 있는 데서 드러납니다. 그런 의식 없이 살아간다면 그것은 17세짜리 요셉의 신앙입니다.
고난이 빚어낸 성숙의 눈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토록 자기중심적이었고 남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던 요셉이, 타인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는 것까지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고난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에 살 때 고난이 있었습니까? 아버지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고생 한 번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갑니다. 히브리 말을 쓰던 17세 소년이 애굽 말을 쓰는 집에 노예가 됩니다.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먹는 것도 다르고, 풍습도 다르고, 언어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노예입니다. 맞지 않으려면, 한 끼 밥이라도 제대로 얻어먹으려면 눈치가 있어야 합니다. 남을 살펴야 합니다. 나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타인의 눈을 살피고 필요를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눈치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빛을 살피고, 필요를 살피고, 그 필요를 채워 줌으로써 생존하고, 살아남아 견디며, 가정 총무가 되고, 죄수가 되어서도 옥중 제반 사무를 다 주관하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그가 총리가 됩니다. 총리가 되어서도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만나는데, 흉년의 시기에 백성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들의 삶에 무엇이 중요한지 제대로 알았기에 백성들을 구제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빛에 근심이 있는데, 그 근심을 자기가 가진 권력으로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우리가 믿음의 성장을 이루는 것은 상대의 필요를 살피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면 고난이라도 주셔서 상대의 얼굴빛을 살피게 하실 것입니다. 17세 소년 요셉은 안하무인이었지만, 고난의 용광로를 거치면서 타인의 얼굴에 드리운 근심의 그림자까지 읽어내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성장입니다. 부디 우리가 믿음의 성장을 온전하게 이루어내어, 타인의 얼굴빛과 상대의 사정을 제대로 살피는 성숙한 믿음을 지닌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17세짜리 요셉의 신앙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어떤 표정을 짓건 말건 하고 싶은 말은 다 해 버리고, 원하는 대로 떠들고 다녔던 미련하고 어린 신앙인이었습니다. 상대에게 상처 주는 삶을 살아왔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랬던 요셉에게 하나님은 고난을 주시고 어려움을 주셔서, 저 깊고 깊은 구덩이에서 사람들을 살필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감옥에서도 두 사람의 얼굴에 근심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는 어떤 신앙입니까? 나만 힘들고, 나만 아프고, 나만 어려운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고, 상대의 얼굴빛을 살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타인의 눈을 보게 하시고, 그들의 얼굴에 있는 그늘을 보게 하시고, 그들을 위로하는 위로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상대의 얼굴에 있는 기쁨을 보게 하셔서, 그들을 축하하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성장하는 신앙인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