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은 하나님께
본문: 창세기 40:7-8
우리가 외국어로 된 책을 읽거나 번역할 때에는 면밀하게 살펴서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 글과 어순이 다르고 단어의 뉘앙스가 다르기 때문에 조금만 부주의하면 오역하기 쉽습니다. 해석에는 섬세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통계 자료를 분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통계 자료를 결과만 받아보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열 명의 학생이 수학 시험을 보았는데 아홉 명이 100점을 받고 한 명이 0점을 받았다면, 평균은 90점입니다. 이 학생 집단을 평균 90점의 집단이라 평가하면 학력 수준이 높은 집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90점을 기준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면 0점을 받은 학생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평균이 가지고 있는 함정입니다. 원 데이터를 살펴봐야 정확한 학습 지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광고도 해석을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탈모 관련 식품 광고에 "이 식품을 꾸준히 먹으면 20퍼센트 정도의 효과가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고 합시다. 탈모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은 이 식품을 꾸준히 먹어서 효과를 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기준과 정의가 빠져 있습니다. 얼마나 꾸준히 먹어야 하는지, 3개월이면 되는지, 1년을 먹어야 하는지, 10년을 먹어야 하는지 기준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어떤 상태의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지도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탈모가 막 시작된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지, 머리숱이 거의 없는 사람에게도 효과가 있는지 기준이 전혀 없습니다. 속기 딱 좋은 구조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고 있는 것도 해석이 잘못되어 상식이 아닐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물 위에 떠 있는 백조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물 위에 떠 있는 우아한 백조를 자기 계발의 예화로 많이 들었습니다. 백조가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으려면 물 아래에서 발을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잘 살려면, 무언가를 유지하며 살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백조를 전혀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백조의 깃털 자체가 기름 막으로 덮여 있어 물에 잘 젖지 않습니다. 백조 같은 조류는 가슴과 배에 공기주머니, 즉 기낭(氣囊)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뼈 안에 공기가 들어 있는 함기골(含氣骨)이라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발을 움직이지 않아도 가만히 있어도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오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1960년대 우리나라에 소개된 일본 만화를 보고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살펴보지도 않고, 검증하지도 않고, 수십 년째 이것을 진실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겠습니까? 해석이 잘못되어서 일어나는 문제들, 그런데 그런 문제들이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백조 문제이고 건강식품 문제이고 평균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문제는 내 인생에 대한 해석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 평생을 살다 보면 수많은 일을 겪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에 대해서 해석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내 인생의 문제를 우리는 어떤 식으로 해석합니까? 사람들은 해석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좋은 일이 일어나면 운이 좋았다고 표현하고, 예기치 않은 나쁜 일이 일어나면 운이 나빴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절실하게 알고 싶으면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내 인생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인생이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의 입을 통해서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 인생, 남들이 볼 때 답이 없는 인생,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풀리지 않을 문제가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내 인생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고 해석해야 할지를 함께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이 빚어낸 성장
요셉의 인생은 고난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그가 헤브론에서 아버지 집에 열일곱 살 소년으로 있었을 때, 그는 상대방을 살필 여유가 없었습니다. 살필 생각도 없었습니다. 자기가 꾸었던 두 번의 꿈을 형제들 앞에서 가감 없이 쏟아놓습니다. 형제들의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 표정이 바뀌는지, 불쾌해하는지, 이런 것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어린 열일곱 살짜리 소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받습니다. 애굽 노예로 팔려 왔습니다.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제는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는 것을 읽어냅니다. 읽으려고 노력해서 읽어진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워진 것입니다. 고난을 겪다 보니, 다른 사람의 아픔을 살피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그가 깊어지고 성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요셉을 다루시고, 훈련시키시고,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이 두 사람의 얼굴에 근심의 빛을 본 요셉이 입을 열어 직접 질문합니다.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창 40:7)
이 장면을 보면 요셉의 지경이 넓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헤브론 시골 구석에 있었다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할 수 있었겠습니까?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은 애굽 고위 공직자들이며, 파라오(Pharaoh)의 최측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주셔서 애굽으로 옮겨놓으셨기에, 그는 파라오 친위대의 대장 보디발을 만났습니다. 보디발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을 경험합니다. 보디발의 아내와 같은 사람을 만나 인생의 큰 유혹도 겪어봅니다. 간수장을 만나고, 감옥에 들어와서 섬기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삶의 덧없음과 깊이를 배웁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과 함께 대화까지 나누고 있습니다.
인생의 성장이라는 것은 고난을 통해서 깊어지기도 하고 폭이 넓어지기도 합니다. 요셉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경험을 쌓아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를 다루시고 훈련시키셨습니다.
이제 이 두 사람에게 요셉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찌하여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습니까?" 이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창 40:8)
이 두 사람이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밤에 각각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그런데 이 꿈을 해석할 방법이 없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꿈 이야기를 했지만, 조금 더 폭넓게 보면 이 두 사람이 자기 인생을 해석할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바로 며칠 전만 하더라도 이 두 사람은 왕의 최측근 신하들이었습니다.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낭떠러지로 떨어집니다.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끌려나가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도 있고, 다시 그 옛날 그 자리로 복권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인생을 도무지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한 자기 이야기를 히브리 노예인 요셉에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어찌 이 두 사람뿐이겠습니까?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 우리가 아는 위인들, 그들도 자기 인생을 해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역사상 수많은 군주들 가운데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던 사람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인물이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Macedonia)의 필리포스 2세(Philip II)였습니다. 아버지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저 바다 건너 페르시아(Persia)와 한번 전쟁하여 저 땅을 차지해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케도니아 같은 작은 나라가 대제국 페르시아와 겨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스무 살에 왕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줍니다. 전쟁을 했습니다. 페르시아를 정복합니다. 정복 군주가 됩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남쪽으로 내려가서 애굽까지 차지합니다. 더 동쪽으로 가서 인도까지 차지해 버렸습니다. 대단한 정복자였습니다. 싸움만 잘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만 능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알렉산더의 스승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아닙니까? 어려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철학을 배웠습니다. 역사를 배웠습니다. 문학을 배웠습니다. 자연과 세상의 이치를 배웠습니다. 그는 문학에도 능했고 문화적인 것에 탁월한 천재였습니다. 그가 정복한 도시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알렉산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도서관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책을 읽게 했습니다. 정복당한 나라의 백성들이 알렉산더 대왕을 칭송합니다.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Orient) 문화를 결합해서 헬레니즘(Hellenism)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위대한 군주입니다.
그랬던 그가 아라비아(Arabia) 원정을 앞두고 말라리아(malaria)를 옮기는 모기에 물려서 12일 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때 나이가 서른둘이었습니다. 자기 인생을 해석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영원토록 자기가 온 세상을 차지할 줄 알았습니다. 전쟁에 나가기만 하면 이기고, 한 번도 진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한 치 앞을 몰랐던, 해석 불가한 인생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오늘 여기 이 두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신앙인들입니다. 주일이 되면 가방 들고 교회에 옵니다. 예배당에 와서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내 인생을 내가 해석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관점으로 내 인생을 관조하면 해석이 되는데, 세상의 관점으로 내 인생을 보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는 것과 똑같은 관점으로 내 인생을 보니까, 억울한 일이 많고, 화나는 일이 많고, 풀리지 않는 일이 많고, 저주스러운 일이 많은 것입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내 인생이 저절로 해석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자의 당당함
이렇게 불안해하면서 해석이 안 된다고 하는 이 두 사람에게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창 40:8)
우리는 여기서 요셉의 자신감을 느낍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에게 말씀하십시오. 내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요셉의 신분은 히브리 노예 출신의 죄수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애굽의 고위 공직자이며, 복권되면 애굽에서 다시 실세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사람 앞에서 요셉이 얼마나 당당하고 얼마나 자신감이 넘칩니까?
요셉의 자신감, 이것은 하나님을 경험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만난 다양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감이 있습니다. 당당합니다. 자신의 처지와 신분에 상관없이 그들은 당당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돈이 좀 있어야 되고, 권력이 있어야 되고, 인물이 좋아야 어깨 펴고 삽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시적입니다. 나보다 돈 많은 사람, 나보다 권력 있는 사람, 나보다 인물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앞에서 주눅이 들어 당당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어디에서나 당당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다메섹(Damascus)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사도 바울은 사람에게 비굴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재판받을 때 그는 비굴하게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총독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자신이 배고프고, 굶주리고, 매 맞고 다녀도 고개 숙인 적이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섬겼을 뿐, 그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절, 이스라엘의 적대국가 중 하나가 아람(Aram)이라는 나라였습니다. 아람에 뛰어난 장군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나아만(Naaman)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전쟁에 나가기만 하면 승리했습니다. 왕이 얼마나 아꼈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나아만 장군이 나병에 걸립니다. 불치의 병입니다. 고칠 수가 없습니다. 왕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그런데 나아만 장군 집에 여종으로 있던 한 이스라엘 소녀가 자기 여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제가 우리나라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라는 분이 계셨는데, 우리 주인이 그분에게 가면 반드시 병이 고쳐질 것입니다. 그분에게 가십시오." 자신 있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는 여종입니다. 만약 나아만이 이 여종의 말을 믿고 갔다가 낫지 않으면 목이 달아날 판입니다. 그런데도 당당했습니다.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고 자신이 있었겠습니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이스라엘에 살 때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데 여전히 세상을 향하여 자신감이 없고 주눅이 들어 있다면,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고 예수를 참되게 경험했다면, 우리는 어디에 가서도 당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눅 들거나 움츠릴 필요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세상 앞에서, 권력 앞에서, 물질 앞에서 우리가 왜 어깨를 움츠리고 살아야 합니까? 믿음의 백성들은 요셉처럼 내가 어떤 신분에 있든, 어떤 처지에 있든 그들을 살리는 자들입니다. 이 당당함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인생
요셉이 이렇게 자신 있게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내게 이르소서"라고 말할 수 있었던 까닭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남에게 답을 알려줍니까? 내가 내 인생을 풀어가지도 못하는데, 내 인생도 생각해 보면 답을 알 수 없는데 어떻게 남의 인생에 관여할 수 있겠습니까?
요셉을 객관적으로 보면 꼬인 인생이고 기구한 인생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형제들에게 팔려서 애굽 노예로 왔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잘 살았는데 모함을 받아서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손가락질할 인생이고, "너도 참 기구하구나" 할 만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신의 기구한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미 해석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곡식을 사러 온 형제들을 만납니다. 그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 45:5)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 45:7-8)
주어를 보십시오.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셨고, 하나님이 나를 애굽 온 땅에 통치자로 삼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빼고 객관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이 애굽으로 온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형제들이 팔아서 온 것 아닙니까? 은 스무 냥에 형제들이 요셉을 팔아버려서 애굽까지 온 것이 맞습니다. 바로의 꿈을 해석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요셉 아닙니까? 자기가 바로의 꿈을 해몽해서 총리가 된 것입니다. 그를 총리의 자리에 앉혀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파라오 아닙니까?
하나님을 배제하면 그렇게 됩니다. 형제들 때문에 내가 팔려 왔으나, 내가 바로의 꿈을 해몽해서 총리의 자리까지 올랐다고 해석하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을 개입시키면 전혀 달라집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습니다. 내가 잘나서 바로의 꿈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다릅니까?
사람의 관점으로 내 인생을 바라보면, 잘못되면 모두가 남 탓입니다. 부모 잘못 만나서, 내가 하필 그날 그 자리에 있어서, 마음에 억울한 것뿐입니다. 분노만 쌓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언젠가는 터트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해 보면 아직까지 인생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잘된 일도, 하나님을 빼고 해석하면 내가 다 잘나서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일이 없습니다. 내가 영광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해 보면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관점을 가져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다시 재정립해 보십시오.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인생의 해석을 잘못해서 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니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사울에게 주신 선물이 많았는데, 그중 가장 위대한 선물, 가장 귀한 선물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입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다윗이야말로 좋은 선물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울이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블레셋의 거인 장군 골리앗이 40일 동안 나타나면서 이스라엘 군대와 하나님을 모욕하지 않습니까? 누구 하나 골리앗을 처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나와서 해결했습니다. 돌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이후 다윗이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이 됩니다. 가는 곳마다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전리품을 많이 가져다가 나라의 국고를 채워줍니다. 저절로 굴러 들어온 호박이 아닙니까?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내가 발굴하고 내가 기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면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이라는 사람을 사울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삼상 18:7-8)
이렇게 해석하고 말았습니다. 경쟁자로, 나의 왕위를 빼앗아 갈 위협으로 해석하고 만 것입니다. 그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쫓아다니기 시작하고 그를 내쫓고 죽이려 합니다. 그때부터 사울 왕가가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해석해 보십시오. 나에게 가시 같은 이웃이 있다면 "하나님이 나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저 사람을 주셨구나" 하고, 나에게 유익이 되고 기쁨이 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위대한 선물이구나" 하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사람들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사람을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 종속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람을 본다면 달라집니다.
사울은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못했습니다. 인생 만년에 왕국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블레셋과 전면전이 붙었습니다. 블레셋 다섯 부족 연합체가 전면전을 선포하고 달려들어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할 때인데, 사울은 하나님을 배제합니다. 무릎 꿇지 않습니다. 매달리지 않습니다. 대신 무당을 찾아갑니다.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서는 사울이 이르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하니" (삼상 28:7-8)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다가왔으면, 설령 하나님이 자신을 향하여 말씀하지 않으셨더라도,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한 번만 살려달라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무당을 찾아가고 말았습니다. 나라는 망하기 직전까지 가고, 전쟁에서 참패하고, 그와 그의 아들들은 목숨을 잃고, 사울의 왕가가 막을 내립니다.
결론
오늘 우리가 내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친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읽고, 그 말씀에 나를 비추어 봐야 내 인생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을 붙들고 기도해 봐야 합니다. 결정하는 순간에 내 마음대로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여쭈어 봐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부디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어디를 가나 당당하고, 어디를 가나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도 이 자리에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운이 좋았다, 운이 나빴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에 내 인생을 비추어 보게 하시고, 기도로 우리 인생을 다시 보게 하옵시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를 다시 살피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실수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내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 그리고 사람들까지 모두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지혜와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을 향하여 당당하게, 자신감 있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