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이 년 후에
본문: 창세기 41:1-16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 이 명제는 경제학에서 핵심적인 원리로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삶의 전반을 관통하는 보편적 진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며, 누군가가 조건 없이 호의를 베풀 때에는 그 이면을 살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어떻게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을까요?
한두 가지 유래가 전해집니다. 미국 서부 개척 시절, 어느 선술집에 이런 광고가 붙었다고 합니다. "이 집에 들어오셔서 술 한 잔 값을 지불하시면 점심 식사는 공짜로 드립니다." 인근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 식당으로 몰려갔습니다. 어차피 점심은 먹어야 하는데, 술 한 잔 값만 내면 밥을 공짜로 준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올 때의 모습은 어떠했겠습니까? 술 한 잔만 마시고 나온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 고주망태가 되어 나왔고, 그 입에서 나온 말이 바로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구나"였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938년 미국 텍사스주의 한 신문사에 경제 칼럼이 실렸는데, 고대 바벨론(Babylon)의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신빙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내용은 이렇습니다. 바벨론의 한 왕이 백성들의 가난을 구제하고자 약 이천 명의 학자를 모아 해결책을 연구하게 했습니다. 일 년 동안 연구한 학자들이 약 육백 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가져왔으나, 왕은 분노하여 절반인 천 명을 처형하고 다시 연구하라 명했습니다. 남은 학자들이 삼백 페이지로 줄여 보고했으나, 왕은 또다시 그중 절반을 죽였습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어 마지막 한 명이 남았고, 그가 한 줄로 요약한 결론이 바로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습니다"였습니다.
이 말은 경제학의 핵심 개념이기도 합니다. 국가가 인프라를 조성하고 복지를 위해 돈을 쓰지만, 그 재원은 국민의 세금에서 나옵니다. 돈을 쓰는 정부도, 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도 이 사실을 피부로 느끼지 못할 뿐, 공짜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국민이 정치인을 신중히 선출해야 하고, 선출된 정치인은 세금을 세밀하게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이 명제를 우리 신앙의 원리에도 그대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고난받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고 고난만 받으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고난 끝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고난의 과정 속에서 숨겨진 보화를 캐내기도 하고, 고난 뒤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공짜 고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고난을 받습니다. 길고 긴 멈추어진 시간을 견뎌냅니다. 감옥에서 이 년의 세월을 버텨내는데, 그 끝에 열매가 있습니다. 요셉이 어떻게 이 시간을 견뎌냈는지, 우리 인생에 멈추어버린 시간을 어떻게 견디며 열매를 사모할 수 있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깨닫기를 바랍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
요셉은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 두 사람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 해석이 좋은 내용이었기에, 요셉은 그에게 간청했습니다. "당신이 여기를 나가시면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나는 이 옥에 갇힐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왕에게 부탁하여 나를 꺼내 주십시오." 술 맡은 관원장은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하고 나갔습니다. 그때부터 요셉의 기다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아무런 기별도 없는 채 흘러간 세월이 자그마치 이 년이었습니다.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창 41:1)
이 년 동안 요셉은 그저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그의 삶을 한번 그려봅니다. 그는 아마 일상을 묵묵히 살아갔을 것입니다. 간수장이 옥중의 제반 사무를 그에게 맡기지 않았습니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면서도 마음은 늘 저 옥 밖에 나가 있었을 것입니다. 나가면 나를 기억하고 꺼내주겠다던 그 사람이 늘 떠올랐을 것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그러나 소식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도 자리했을 것입니다. 죄가 없는데 왜 이 자리에 계속 머물러야 하는지. 자기 주인 보디발에 대한 원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이곳에 묶어두는지. 온갖 생각이 그의 마음을 헤집어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과 사건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진리입니다.
인간은 시계를 만들었지만, 시간을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시간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다스리신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 안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때로 "오늘이 내 때입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는 오늘이 가장 좋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손 안에 붙들고 계신 하나님께서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라 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 손 안에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이기겠습니까? 시간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지금도 시간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그 시간 안에서 우리를 훈련시키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순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은 시간 안에서 자기가 할 일을 찾지 못합니다. 원망만 합니다. 인생이 멈추어진 시간이라고 여기는 그 굴레 안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며 살아갑니다.
시간의 감옥 안에서 할 일을 찾은 바울
이 시간의 한계 안에서 탁월하게 살아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을 돌며 구제헌금을 모았습니다. 그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러 갔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체포했으면 재판을 하고, 죄가 없으면 풀어주고, 죄가 있으면 형을 살게 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죄가 없는데도 묶어놓고 재판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이사랴로 옮겨갈 때도 재판을 받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나는 로마 시민권자입니다. 여기서 재판받지 않겠습니다. 로마에 가서 가이사에게 재판받겠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왔습니다. 로마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셋집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며 재판을 받지 못했습니다. 언제 끌려나가 목이 잘릴지, 언제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죽임을 당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시간 안에서 바울이 한 일을 봅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행 28:30-31)
'온 이태', 만 이 년이라는 뜻입니다. 지루한 이 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바울은 셋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찾아오는 사람은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담대하게 거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갇힌 상태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입니다. 그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역 가운데 바울은 오네시모(Onesimos)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로마에서 만나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네시모가 회심하고 회개했습니다. 바울은 그를 다시 주인에게 돌려보냈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곳에서 옥중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이 주옥같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그가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담대하게 거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며, 복음 안에서 온전히 살아간 바울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살아가다 보면 우리도 시간의 굴레 아래 갇힌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나갈 수 없고, 뒤로 빠지고 싶은데 빠져나갈 수도 없고, 시간의 감옥 안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월이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 시간을 살아가는 분들이 이 자리에 없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많은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나를 왜 이 시간의 감옥에서 건져주지 않으시는지, 왜 이런 쳇바퀴 속에서만 살게 하시는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사람들을 원망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복음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거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 그것이 살길이었습니다. 우리도 시간의 감옥 안에 갇혀 있다고 느끼신다면, 그 안에서 내가 할 일을 찾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시간 안에서 우리를 훈련시켜 나가실 때 내가 할 일을 찾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서 믿음 생활을 성실하게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불현듯 찾아온 판결의 자리
그렇다면 요셉은 이 년여간의 멈추어버린 시간 안에서 어떻게 살았을까요? 자신의 영성을 잘 관리하며 영적 예민함을 유지하고 살았을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처럼 믿음이 무너져 내려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았을까요? 자신의 믿음을 제대로 지켰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판단하는 판결의 자리가 부지불식간에 찾아왔습니다. 애굽의 왕 바로가 꿈을 꾼 것입니다.
바로는 두 번의 꿈을 겹쳐 꾸었습니다. 첫 번째 꿈에서 자신이 나일 강가에 서 있었습니다. 아름답고 살찐 일곱 마리의 암소가 강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풍요롭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 강가에서 올라왔습니다. 보기만 해도 두려운 모습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흉하고 파리한 소가 아름답고 살찐 일곱 소를 먹어버렸습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바로가 다시 잠이 들어 두 번째 꿈을 꾸었습니다.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왔습니다. 보기만 해도 풍성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이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켜 버렸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해석할 수도 없는 꿈이었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바로가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창 41:8)
하나님이 주신 꿈을 어떻게 점술가와 애굽의 현인들이 해석하겠습니까? 물론 그들이 대충 짐작하여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에 누구 하나 정확하게 해석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상황을 곁에서 지켜보던 술 맡은 관원장에게 이 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창 41:9)
이 년 전 감옥에서 떡 굽는 관원장과 함께 갇혀 있을 때 만났던 요셉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는 바로에게 요셉이 자신의 꿈을 얼마나 정확하게 해석해 주었는지, 그래서 자기가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를 고합니다. 바로가 명했습니다. 당장 불러 올리라.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창 41:14-15)
이런 시간이 올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요셉이 기대했던 것은 술 맡은 관원장이었습니다. 나가면 나를 건져달라고 부탁했건만, 그 사람은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꿈을 꾸고 자기를 왕 앞에 세울 줄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불현듯 이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감옥에서 이 년을 견딘 시간, 그 고생과 수고를 한꺼번에 청산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자신의 영적 실력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입니다.
초지일관, 하나님 신앙의 고백
바로의 질문은 핵심을 찌릅니다. "내가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너는'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요셉이 어떻게 대답하느냐가, 그가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감옥에서 믿음과 영성을 유지했는지가 판가름 나는 결정적 지점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창 41:16)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 꿈 해석의 주인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물었습니다.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이 말을 받아서 "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꿈을 해석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당신의 꿈을 해석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요셉의 대답은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였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펼쳐놓고 생각해 봅니다. 그가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들어가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때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유혹했습니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 앞에서 요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주인이 이 집의 모든 것을 다 허락하셨으나 한 가지 허락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당신입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짓겠습니까?" 보디발의 집에서도 그가 고백한 것은 하나님 신앙이었습니다. 비록 노예의 몸으로 살면서 육신으로는 사람들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으나, 자기 삶의 참 주인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 되시는데 어떻게 죄를 짓겠습니까? 노예로 살면서도 참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신앙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을 섬기던 어느 날, 그들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두 사람이 꿈 때문이라고 했을 때,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말씀해 보십시오.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내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감옥에서도 그는 인생의 주인을 하나님이라 고백했습니다.
노예로 살 때도 자기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셨고, 죄수가 되었을 때도 자기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셨고, 이제 출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났음에도 바로 앞에서 여전히 "해석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초지일관 변함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 신앙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 50:19-20)
이 고백은 언제 한 것입니까? 애굽의 총리가 된 이후,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난 뒤의 일입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요셉이 형제들을 잘 돌봐주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앙갚음하지 않을까 두려워 벌벌 떨고 있는 형제들에게 한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그저 요셉일 뿐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이곳에 팔았으나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펼쳐놓고 봅니다. 변한 것이 있습니까? 노예로 살 때나, 감옥의 죄수가 되었을 때나, 절호의 기회를 만났을 때나, 애굽의 총리가 된 이후에나, 그는 한결같이 하나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바로 앞에서도, 형제들 앞에서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감옥에서도 영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 24:42)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 24:44)
깨어 있으라는 말은 곧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언제 예수님이 오실지, 언제 재림의 날이 임할지 우리가 알 수 없기에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간 뒤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여전히 깨어 있었습니다. 여전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영성을 예민하게 갈고 닦으면서 때를 기다리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때에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꿈을 주시고, 바로가 요셉을 불러 자기 앞에 서게 했습니다. 그때를 누가 알았겠습니까? 요셉이 바로 앞에 서게 되는 그 날,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시와 때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초지일관 하나님 신앙을 가지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결론
초지일관 하나님 신앙을 가지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을 겪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만 신앙이 한풀 꺾여버립니다. 멈추어버린 시간 안에 자신을 가두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일관하고, 자기가 이렇게 된 이유를 사람에게서 찾아 그 사람을 저주하다가 인생을 허비합니다. 그러는 사이 영혼은 병들어갑니다.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요셉처럼 출세하고 나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가 출세한 것이 스스로 잘나서 된 줄 알고, 주머니에 돈이 좀 생기고 양손에 권세를 좀 쥐어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초지일관 하나님 신앙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옥에 있을 때나, 노예로 살 때나, 출세한 이후에나 한결같이 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가졌던 요셉은 깨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몸이 늘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깨어 있고, 우리의 상황과 환경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 앞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 안에서 굳건하게, 변함없이,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고난을 잘 견디고 나면 반드시 공짜 없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아름다운 열매로 갚아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요셉의 삶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을 봅니다. 요셉은 노예로 살 때나 감옥에 죄수가 되어 있을 때나, 출세의 기회를 얻었을 때나, 성공한 이후에나 한결같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셨고,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주어(主語)였습니다. 주여, 우리는 환경과 상황에 따라 많이 흔들립니다. 우리를 붙잡아 주옵소서. 시간의 감옥 안에 갇힌 것 같을 때, 멈추어버린 시간 안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을 때,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 같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했고 사람을 저주했습니다. 할 일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바울처럼, 요셉처럼 여전히 내가 할 일을 찾겠습니다. 믿음 생활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주 안에서 깨어 있겠습니다. 언제 주님께서 나를 부르실지 그때와 시는 알지 못하지만, 매순간 영이 깨어 하나님 앞에서 살기 원하오니 주여, 우리의 영혼을 붙잡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