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강 / 이제 바로께서는 (41:33-40)

이제 바로께서는

본문: 창세기 41:33-40

대구시 중구에는 달성공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지금은 동물원과 산책로로 사용되고 있지만, 삼국시대 신라 시기까지 이곳은 달구벌의 터전이었습니다. 군사들이 그곳에 모여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고, 이들은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 그곳에 거주했습니다. 세종대왕이 즉위하신 후 전국의 전략적 요충지에 군사 기지를 재건하는 사업을 추진하셨는데, 달구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다시 성을 쌓고 군사 기지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는 달성 서씨 가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문중의 어른이 되는 서침(徐沈)이라는 분을 불러 세종대왕께서 부탁하셨습니다. 다른 곳으로 이주해 주시면 지금 살고 있는 땅보다 세 배 넓은 땅을 드리겠고, 이주 비용도 넉넉히 지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서침 어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라가 필요로 하는데 우리가 땅을 받고 돈을 받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니, 돈도 땅도 받지 않고 알아서 이주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지금 달구벌 성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이니, 가을에 환곡을 돌려받으실 때 환곡 이자의 절반을 면해 주십시오." 세종은 이 청을 흔쾌히 수용했습니다. 땅을 대가 없이 내어준 것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거니와, 세종의 애민정신과 서침 어른의 백성을 향한 마음이 깊이 통했기 때문입니다.

세종대왕은 성군 중의 성군이십니다. 그러니 세종 이후의 왕들도 이 약속을 지속적으로 지켜 나갔습니다. 사백 년이 넘도록 조선 후기까지 달구벌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이 혜택을 입었습니다. 서침 어른이 돌아가신 뒤, 달구벌 성의 사람들은 그 공덕을 기리고자 구암서원(龜巖書院)을 세웠습니다. 이 서원의 터는 후손들이 대를 이어 관리하고 감독해 왔는데, 훗날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시에서 땅값을 보상해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달성 서씨 문중에서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리 조상도 나라가 필요할 때 땅을 그냥 내어드렸는데, 공공의 사업을 위해 필요한 땅에 어떻게 돈을 받겠습니까." 육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달성 서씨 문중은 그들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달성 서씨 문중의 어른이었던 서침은 백성들의 가난에 대해 늘 깊은 고민을 품고 있었습니다. 나라도 해결하지 못하는 이 가난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걱정이 컸는데, 기회가 오자 자신이 가진 땅을 희생하여 내어줌으로써 그들의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했습니다. 대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 대안을 제시하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는 법입니다. 희생 없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풍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애굽의 흉년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대안은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의 왕 바로는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과연 이 시대에 대안이 되는 공동체로 살아가고 있는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시대에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인지 함께 고민하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해 줍니다. 칠 년 풍년 뒤에 칠 년 흉년이 온다고 해석합니다. 풍년도 칠 년이고 흉년도 칠 년입니다. 그런데 흉년의 기간이 극심하여 앞선 풍년의 기간을 모두 잊어버리게 할 것이라 했습니다. 흉년이 너무 심하여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요셉이 바로에게 꿈을 해석해 준 내용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해석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 나라가 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안까지 제시해 줍니다.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창 41:33)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세우라는 것이 첫 번째 대안이었습니다. 위기를 극복하고, 풍년을 관리하며, 흉년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 한 사람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두 번째 대안은 조직과 시스템을 갖추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소서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에 대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아니하리이다" (창 41:34-36)

풍년과 흉년을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라는 뜻입니다. 사람과 시스템, 이 두 가지는 고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만 있고 다른 하나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시스템은 잘 갖추어져 있고 조직은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운영할 명철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없다면 조직과 시스템은 무용지물입니다. 반대로 사람은 잘 준비되어 있는데 체계가 없고 질서가 없고 시스템이 없다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풍년을 관리하고 흉년에 대비할 수 있는 사람과 시스템을 갖추라고 제안한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이 내놓은 이 대안을 통해 두 가지 교훈을 배웁니다. 그 첫 번째는 풍년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는 교훈입니다. 아마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 해, 두 해, 세 해, 네 해가 지나도 풍년이 이어집니다. 내가 수고하고 애쓰고 농사 지은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거두어들입니다. 복받은 땅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감각은 무뎌졌습니다. 언젠가 다시 흉년이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풍요가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 그러합니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기쁜 날이 있으면 눈물 나는 날이 있습니다. 건강할 때가 있으면 병드는 때가 있고, 풍년의 시기가 있으면 흉년의 시기가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한 등락을 거듭하는 인생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풍년이 칠 년 있으면 흉년도 칠 년 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이것은 반드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흉년의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풍년의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이 교훈을 깨닫지 못하면, 언젠가 갑자기 찾아올 흉년의 때에 우리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 땅의 교회들이 그 교훈을 주지 않습니까? 이 땅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풍년의 시간들을 오랫동안 누렸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 가운데 그 시절에 신앙생활을 했던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 시절은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교회들에게 주신 풍년의 기간이었습니다. 십자가만 꽂으면, 깃발만 꽂으면 사람들이 모여들던 부흥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풍년의 시간이 지나고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교단의 교세가 약 삼백만 명 이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십 년이 지난 오늘, 교세 통계에 의하면 약 이백삼십만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정확하지 않으니 실제로는 더 적을 것입니다. 십 년 사이에 칠십만 명이 어디로 갔습니까? 이십 대와 삼십 대 젊은 세대의 교세 감소는 훨씬 심각한 수준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풍년의 시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교회들이 풍년의 시간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사회와 젊은 세대를 향해 신뢰를 쌓아 놓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신뢰를 갉아 먹었습니다. 삼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 땅의 교회들이 해 온 일을 보면, 대형교회들의 교회 사유화, 정치 선동, 극단적인 분열이 교회를 휘감았습니다. 교회의 재정이 어디에 사용되는지 알 길이 없었고, 합리적이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교회는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뢰가 추락하고 만 것입니다.

결국 풍년의 시간이 영원할 줄 알고 살았던 그 참혹한 결과를 지금 우리는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19)

하나님은 이 부자를 어리석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쉬자, 누리고 즐기자 했습니다. 이 땅의 교회들이 삼십 년 동안 먹고 마시며 자기들만의 잔치를 하는 사이에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지금의 상황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뼈아픈 교훈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가정이 행복하다면, 이때를 소중한 때라 여겨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풍년의 때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가족이 건강하고 문제가 없는 시기를 지내고 있다면, 이 세월이 영원하리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늙고 병드는 이가 있을 것이고,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인생의 실패를 경험할 때가 있을 것이며, 우리 가정에도 흉년의 때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교회의 풍년의 때, 우리 가정의 풍년의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7-8)

두 가지를 당부합니다.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라는 것과, 뜨겁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모든 문제 없이 행복하다면, 그때 더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서로가 더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쌓아 두고, 그 사랑이 신뢰가 되면, 가정이 어려워질 때 그 사랑이 가정을 지키는 힘이 됩니다. 근신하여 깨어서 기도하면, 우리 가정이 힘들 때 기도의 힘으로 버텨내고 이겨낼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인생의 풍년의 때를 지내고 있다면, 정신 차리고 깨어서 기도하고,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흉년의 때를 견디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 같은 자가 되지 말고,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고 뜨겁게 사랑하는 지혜로운 백성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대안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요셉이 이야기하는 대안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두 번째 교훈은, 대안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오분의 일을 떼어내는 것, 지금의 우리가 생각할 때는 풍년의 시간에 엄청나게 많은 곡식이 있는데 그 가운데 이십 퍼센트를 가져가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탐욕의 본성이 있습니다. 내 주머니에 들어온 것은 전부 내가 가지려 합니다. 그 가운데 단 한 푼도 내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이십 퍼센트를 떼어내어 흉년을 준비하라고 하면 누가 기꺼이 따르겠습니까?

그러나 흉년의 때를 준비하는 대안이 필요할 때는 모든 사람의 희생이 요구됩니다. 희생하지 않고 어떻게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내가 조금씩 손해를 감수하지 않고 어떻게 다음을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현재도 누리려 하고 미래도 가지려 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미래를 준비하려면 현재를 조금씩 양보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을 지으시고 하나님은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토록 기뻐하셨던 인간이 죄를 짓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지만 죄를 미워하시니, 아무리 사랑하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죄 지은 인간을 그 땅에 그대로 둘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때 결심하셨습니다. 지금 쫓아내는 이 인간들을 구원할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결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이 나오려면 짐승이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날 짐승을 희생시키셨지만, 궁극적으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대안으로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이보다 큰 희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에게 가장 소중한 아들, 가장 소중한 독생자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대안으로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대안이 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와 죽음, 이 두 가지 문제의 유일한 대안이자 마지막 대안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갈 1:4)

그리스도께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대안으로 가장 큰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이 악한 세상을 구원하고, 그들을 건지며, 복음의 도구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있습니까? 교회가 세상에 대한 대안이 되고 있습니까? 예수 믿는 내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안이 되고 있습니까? 내 주변의 믿지 않는 친구들이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을 겪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나입니까? 힘들고 무너져 내릴 때, "내 친구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그에게 가서 내 인생을 상담해 봐야겠다"고 떠올려 주는 존재가 되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되려면 희생해야 합니다. 시간도, 물질도, 삶을 온전히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위기 상황에 생각나는 사람이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2020년 3월 코로나 팬데믹(Pandemic)이 창궐했을 때, 대구·경북 지역에 코로나가 급속도로 퍼져나갔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삼 주간 헌금을 모아주셨습니다. 육천오백만 원이 모였습니다. 대구·경북 지역의 코로나 거점 병원에 헌금하고, 교회 문을 닫으면 존폐가 어려운 미자립 교회들을 선정하여 도왔습니다. 그리고 양산시에 삼천만 원의 선교 헌금을 드렸습니다. 삼 주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합심해 주셨기에 교회가 어려운 시기에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 사회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는데 교회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 교회가 지금까지 대안적인 삶을 살아내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대안이 되려면 평소에 희생해야 합니다. 내어주고, 나누고, 손해를 감수해야 교회가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조차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안에는 절절한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도 희생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현실을 인정한 바로의 결단

이제 공은 바로에게 넘어갔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었고, 해석에 그치지 않고 대안까지 제시해 주었습니다. 수용하든 하지 않든 이제는 바로의 몫이었습니다. 바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창 41:37)

동의했다는 말입니다. 좋게 여겼다는 것은 "그래, 네 말이 옳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는 동의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파격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창 41:39-40)

요셉이 제안한 것이 두 가지였습니다. 사람을 세우라는 것과 시스템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바로는 명철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바로 요셉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 나라의 경제를 책임질 특임 총리로 요셉을 임명하면서,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왕좌밖에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 바로의 결정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도 안 되는 결정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가 훌륭하고 위대한 것입니다. 두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첫째로, 바로는 자기 나라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얼마나 사람이 없었으면, 애굽이라는 거대한 제국에 나라의 경제 상황을 통제하고 관리할 만한 명철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없어서, 히브리 노예 출신이고 바로 엊그제까지 감옥에 있었던 요셉에게 이 자리를 맡기겠습니까? 바로가 꿈을 꾸었는데 이 꿈을 해석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탄스럽게도 이 나라에 인재다운 인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바로는 그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기가 쉽겠습니까? 대제국의 통치자가 자기 나라의 부끄러운 민낯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치부를 이야기하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들어보면 다 맞는 말인데도 인정하기 싫습니다. 그래서 다투고, 화내고, 싸웁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려면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현실, 밑바닥 같은 현실, 부끄럽고 추악한 민낯을, 인재가 없고 사람이 없는 이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약 바로가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꿈을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요셉에게 큰 상을 내리고 집과 노예와 돈을 주어 돌려보냈다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하겠습니까? 통제하고 해결할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현실을 인정했습니다.

둘째로, 바로는 전통과 관습을 타파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의 관료 조직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집안과 가문이 좋거나, 아니면 밑바닥에서부터 인정받아 차근차근 올라간 사람이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떻습니까? 히브리 노예에 죄수 출신입니다.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고,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간 사람도 아니며, 시험을 쳐서 들어간 관료도 아닙니다. 그런 사람을 위기 관리의 수장으로 세운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가 이 나라를 비상 위기 상황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결정이었습니다. 지금 나라가 비상인데, 위기 상황인데, 전통이고 관습이고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하들은 분명 말했을 것입니다. "왕이시여, 이것은 전통에 어긋납니다. 이런 법이 우리나라에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한 번 더 생각해 주십시오." 그러나 그 전통과 관습이 나라를 구합니까? 우리를 살게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 인식이 정확하게 되면 전통과 관습은 과감히 깨뜨려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저출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저출산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는 그나마 아이들이 있고, 교회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을 잘 길러서 일당백의 그리스도의 용사로 키워내야 합니다. 청년들을 잘 양육하여 세상이 악하게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위대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물질이든 마음이든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합니다. 거기에 내려오는 전통과 관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교회가 지금까지 이렇게 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예산을 배정한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이 지금의 비상 위기 상황을 막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이 나라의 십 년 뒤, 이십 년 뒤, 우리 교회의 십 년 뒤와 이십 년 뒤를 보장할 수 없는 위기 상황입니다. 믿지 않는 바로도 이 위기 상황에 마음을 열고 특단의 조치를 내렸는데,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그것을 못 하겠습니까?

결론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대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풍년의 시간이 영원하리라는 착각에서 깨어나, 베드로 사도의 권면처럼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며, 뜨겁게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대안이 되는 삶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가장 큰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그 은혜 아래 있는 우리가 희생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바로처럼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와 전통과 관습을 뛰어넘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특별한 헌신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지혜로운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가운데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로는 자신의 현실을 인정했습니다. 특단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전통과 관습을 타파했습니다. 또한 대안을 위해서 희생을 각오하고 희생을 결심했습니다. 이 땅에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죄로 인해서 죽어가는 자들을 위해서 우리 하나님께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대안이 되심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 아래 우리가 살아가도록 도우시고, 그 사랑 가운데 사랑의 빚진 자로 온전히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