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과 그의 아들들
본문: 창세기 42:1-4
조선 중기의 문인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은 명문 사대부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진주 대첩을 승리로 이끈 명장 김시민(金時敏) 장군이었습니다. 이런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자 혜택이었습니다. 그러나 혜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도 따랐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의무가 과거 급제였습니다. 과거에 급제하기만 하면 집안 어른들이 끌어주고 밀어주어 출세의 길이 열렸지만,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본인의 몫이었습니다. 본인이 공부에 매진하여 시험에 합격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김득신은 어릴 때 천연두를 심하게 앓았습니다. 그로 인해 기억력이 남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집안 어른들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이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다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양자를 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김치(金緻)가 급히 달려와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가르쳐 보겠다며 기회를 구한 것입니다. 허락을 받은 아버지는 이후 십 년 동안 다른 일은 모두 젖혀두고 오직 아들의 교육에만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십 년이 지나도 공부에 진전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마침내 포기하는 심정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제 더 이상 공부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거꾸로 받아들였습니다. 더욱 열심히 정진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듣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 홀로서기를 시작했습니다. 집안에 재산이 있었기에 생계 걱정 없이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시험을 볼 때마다 번번이 낙방했지만, 서른아홉에 드디어 소과에 합격했습니다. 그러나 소과에 합격했다고 해서 벼슬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과에 합격해야 했습니다. 소과에 합격하는 데 마흔 언저리까지 걸렸으니 언제 공부해서 대과에 합격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더 열심히 공부하며 매일같이 정진하더니, 마침내 환갑 언저리가 되어서야 대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습니다.
벼슬길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학문에 정진하며 책을 쓰고, 시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의 시가 조선 팔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효종 임금이 그의 시를 무척 좋아하며 이런 평가를 내렸습니다. "김득신의 시를 읽다 보면 마치 내가 자연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렇게 시를 잘 쓰는가." 효종의 칭찬을 받은 시인이었기에 사람들은 앞다투어 그에게 글을 부탁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지자 김득신은 자기 묘비에 새길 글을 스스로 준비했습니다. 그 묘비의 핵심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재주가 남들만 못하다고 해서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마라. 열심히 정진하고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세상사의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 이 분의 말대로 노력하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열심히 정진하고 최선을 다하면 조금씩 발전하고 성장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성도들에게 바라시는 것도 믿음의 성장이 아니겠습니까. 발전하고 성장하며 조금씩 변화해 가는 우리 믿음의 성장을 하나님은 보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성장을 이루며 살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삶을 더욱 열심히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해결되지 않은 죄의 무게
오늘 본문에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성장하지 못한 채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삶을 돌이켜보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칠 년 풍년과 칠 년 흉년을 예고했습니다. 풍년의 시간에 오분의 일씩 곡식을 모았습니다. 온 애굽을 두루 순찰하면서 곡식을 거두어 창고를 지었습니다. 흉년에 대비한 것입니다. 드디어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극심한 흉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바로에게 달려가자, 바로는 요셉에게 가서 도움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재난 극복의 총책임자인 총리로서 이 위기를 하나하나 풀어갔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미 대비가 되어 있었기에 차분하게 흉년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애굽이 아니라 주변 근동 지방의 나라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도 예고 없이 흉년이 닥쳤습니다. 요셉 같은 인물이 없었기에 풍년과 흉년을 관리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요셉의 형제들과 그들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곳에도 흉년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크나큰 고통이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쳤고, 이제 곧 굶어 죽기 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이때 그 아들들에게 말합니다.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창 42:1)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창 42:2)
아버지 야곱은 이때 나이가 백삼십 세 언저리가 됩니다. 이 고령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들을 모아놓고 책망합니다. 서로 바라보고만 있지 말고 어서 가서 곡식을 사 오라고 다그칩니다. 야곱은 어떻게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텔레비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동네 사람들 중에 발 빠른 사람들이 이미 소문을 듣고 애굽에 가서 곡식을 구해왔습니다. 야곱은 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들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목축하는 사람들이니 풀이 마르고 짐승들이 굶어 죽기 직전이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이니 땅이 갈라지고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 자리에 앉아서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저마다 가정을 꾸리고 있는데, 다른 집 사람들은 다 가서 곡식을 구해오는데, 이 사람들은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야곱의 아들들에게서 심각한 무기력을 봅니다.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도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입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무기력을 정신병리학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무기력이 오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우리가 죄를 지을 때는 내가 선택해서 짓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죄를 짓고 또 짓다 보면 사탄이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죄는 인격처럼 성장하고 자라나며 내 영혼을 잠식해 들어옵니다. 지속적으로 죄를 지으면서 이 문제를 회개하지 않고, 털어놓지 않고, 해결하지 않으면 사탄에게 발목이 잡힌 채로 살게 됩니다. 사탄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악한 사탄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혼을 갉아먹다가 결국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육체까지 잠식해 들어갑니다. 죄 문제를 일찍 해결하지 못하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들이 가진 심각한 죄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 동생 요셉을 팔아넘긴 죄입니다. 시간 계산을 해 봅시다. 이 시점에서 요셉의 나이는 적어도 삼십팔 세 이상이 되었습니다. 따져 보면 요셉은 십칠 세에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삼십 세에 애굽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칠 년 풍년이 지났으니 삼십칠 세입니다. 풍년이 끝나고 흉년이 시작되었을 때, 흉년 일 년 차라면 요셉의 나이가 삼십팔 세이고, 이 년 차라면 삼십구 세입니다. 그렇다면 이 형제들은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께 토설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안고 있었던 시간이 최소한 이십일 년이라는 뜻입니다. 십칠 세에 동생을 팔아넘겼으니, 요셉이 삼십팔 세가 될 때까지 이십일 년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가슴속에 그대로 묻어둔 것입니다. 이 죄가 썩어서 악취를 풍기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털어놓고 해결하여 죄 사함을 받고 자유를 얻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 자기 영혼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썩어 비틀어지고 문드러져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무기력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혼만이 아니라 몸까지 못 쓰게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은 두 가지 방향으로 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고, 둘째는 내 죄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하나님께 회개했다면, 성경은 회개를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시니, 그 사실이 기록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아버지에게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사실 동생 요셉이 짐승에게 해를 당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가 요셉을 팔아버렸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아버지께 진심어린 사과를 구하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은 회개하지 않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시 7:12)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 2:5)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칼을 갈고 계십니다. 진노의 화살 시위를 이미 겨누고 계십니다. 그 손에서 놓아버리면 그 화살이 어디를 향하겠습니까.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자가 스스로 진노를 쌓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자기 파멸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큰 죄는 물론이고, 회개는 매일 지속적으로, 구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하루를 마감하며 잠들 때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고 회개하며 잠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큰 죄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죄가 내 마음에 들어오려고 할 때, 바로 그때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으면 이런 식으로 사람이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회개하면 반대의 역전 현상이 일어납니다. 성장하게 됩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이 눈물의 값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시고, 그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회개하면 가벼워집니다. 회개하면 새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새롭게 일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성령 충만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회개의 기쁨을 그의 설교에 담아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행 3:19)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 자신의 체험이었습니다. 회개하니 새롭게 되는 날이 하나님으로부터 그에게 임했고, 그래서 그가 새로워진 것입니다.
성장을 원하십니까. 믿음이 성장하고 자라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죄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의 크고 작은 죄 문제들,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나와 하나님만 아는 죄 문제들을 매 순간 씻어내야 합니다. 발 씻듯이 순간순간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장의 자리까지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변하지 않는 야곱의 편애
이제 야곱의 아들들의 상태를 살펴보았으니, 그 아버지 야곱의 상태가 어떠한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창 42:3-4)
야곱은 어떻습니까. 이십일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성장하고 변화했습니까. 그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편애하고 있었으며, 대상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과거에는 요셉을, 지금은 베냐민을 편애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손길이 절실한 상황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굶주리고 있는데, 한 사람이라도 더 보내어 곡식을 구해와야 할 판에, 베냐민만은 보내지 않았습니다. 아들들도 아버지의 이런 편애 때문에 감히 대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들들의 마음은 여전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변하지 않았구나.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우리 아버지는 이십일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여전히 편애하고 있구나." 이런 마음을 아들들이 갖지 않았겠습니까. 야곱은 이미 떠나버린 요셉에 대한 환영에 사로잡혀 자신의 시간을 허비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보는 야곱의 모습은 자기 혁신이 없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한 치의 변화도 용납하지 않는 완고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개신교도(改新敎徒)입니다. 개신교를 영어로 쓰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옮기면 '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프로테스트'(protest), 곧 '저항하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누가 우리를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렀을까요. 1517년 루터(Martin Luther)가 비텐베르크(Wittenberg) 성문 앞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임으로써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잘못된 전통을 비판하는 내용을 95개조로 작성하여 게시한 것입니다. 그렇게 써붙인 루터 자신도 그 파장이 이토록 크게 번질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1517년 이후 세상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십이 년이 지난 1529년, 루터를 따르는 루터파 사람들이 형성되었습니다. 비록 소수였지만, 1529년 제국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것은 명목상 회의였지만, 사실상 종교재판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소수파인 루터파를 재판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Karl V)가 로마 가톨릭의 지도자들과 소수파인 루터파 사람들을 모아놓고 회유와 협박을 했습니다. "십이 년간 너희가 저지른 모든 죄를 용서하겠으니 지금이라도 돌이키라. 이 자리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너희의 목숨을 담보할 수 없다. 지금부터는 전쟁이다." 이런 회유와 협박에도 루터파 소수파 그리스도인들은 굴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저항했습니다. 이 저항을 가리켜 사람들은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렀습니다.
무작정 저항한 것이 아닙니다. 기성 권력에 대해 감정적으로 떼를 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저항하면서 두 가지 기준을 분명히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믿음으로. 둘째는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 가톨릭 교회는 오직 믿음이 아니라 공로와 선행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읽어 보니,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선행과 공로를 주장하는 당신들과 합의할 수 없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전통과 교황의 교지를 앞세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최고의 권위입니다. 어떻게 당신들과 합의할 수 있겠습니까. 그 정신으로 그들은 저항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저항하는 사람들,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위대한 유산입니다.
우리는 이런 위대한 신앙 유산을 가진 개혁 교회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적 흐름 속에는 저항하는 정신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향하여 저항해야 합니까. 사람들은 외부를 향한 저항은 잘합니다. 남들을 향한 비판은 날카롭게 내뱉습니다. 상대방에게 심각한 상처를 줄 만한 말도 서슴지 않습니다. 개인을 향하여, 공동체를 향하여, 국가를 향하여, 조직을 향하여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냅니다.
그러나 저항의 칼날은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해야 합니다. 자기 혁신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나의 내면을 돌이켜보고, 나의 형편과 처지를 살펴보고, 자기 혁신을 하지 않은 채 쏟아내는 외적인 비판은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야곱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자녀들을 책망할 처지가 되지 않습니다. 야곱은 여전히 편애에 중독되어 살고 있었습니다. 이십 년 전 떠나버린 요셉을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에 자기 아들들이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분노가 터져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어서 가서 곡식을 구해 오라." 책망한 것입니다. 자기는 변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바뀌지 않으면서, 남들을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쏘아대는 사람, 그것이 야곱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스스로 나 자신을 살피고 혁신하고 고치지 않으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나 잘하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회가 시끄럽고 싸우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하나 되지 못하고, 존경받는 사람은 사라지고, 자기 혁신은 없이 상대방의 혁신만 부르짖는 시대가 지금의 불행한 시대를 만들었습니다.
묵은 과제를 해결하는 용기
다윗이 왕이 된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수도를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유다 지파의 왕으로 칠 년 동안 지냈습니다. 유다 지파는 가장 남쪽에 위치했고, 거기 헤브론에서 칠 년을 보냈습니다. 헤브론을 수도로 삼을 수 없었기에 좀 더 북쪽으로 수도를 옮겨야 했습니다. 고민 끝에 그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에는 이방인인 여부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예루살렘 곧 여부스에 이르니 여부스 땅의 주민들이 거기에 거주하였더라 여부스 원주민이 다윗에게 이르기를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나 다윗이 시온 산 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대상 11:4-5)
여부스 사람들은 그 옛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입성할 때, 그 땅에 살았던 원주민 일곱 족속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 일곱 족속을 모두 내쫓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내쫓지 못했습니다. 여부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을 차지하고 성문을 굳게 걸어잠갔습니다. 그 성은 높은 곳에 있어 견고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때 그 성을 차지했어야 하는데, 전쟁하기 싫어서, 더 이상 싸우기 싫어서 그냥 내버려 둔 것입니다.
그것이 기원전 천사백 년경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활동했던 시대가 기원전 천 년 언저리이니, 약 사백 년 동안 여부스 사람들이 그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이방 신들에게 제사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사백 년 동안 모른 척했습니다. 하나님이 내보내라고 하셨는데도 내보내지 않고 사백 년 동안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다윗이 해결한 것입니다. 도전하여 해결하고, 여부스 사람들을 내쫓고, 그 땅 예루살렘을 차지하여 다윗 성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다 아는 문제인데 해결하지 못한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믿음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귀찮아서, 혹은 하기 싫어서, 자기 혁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잘못된 습관들, 잘못된 죄 문제들, 내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문제들을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나의 치명적인 약점을 알고 있습니다. 지적합니다. 고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기 싫어서, 혹은 눈 감고 외면하고 싶어서, 그래서 성장이 없는 것입니다.
이십일 년 전 요셉과 그 형제들은 한 집에 살았습니다. 이십일 년이 지난 후 요셉은 성장하고 발전하여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모든 백성의 생명을 건지고 구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십일 년이 지난 후, 자기 혁신과 쇄신을 하지 않았던 형제들은 끌려다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곡식 좀 달라고 구걸하러 다니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결론
우리 인생은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 물질이 많아서 나누어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또 성장하면,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난 후에 사람들을 돌봐 주고, 그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며, 믿음으로 섬기고,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믿음을 전해 줄 수 있는 요셉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찾아온 기회에 자기 쇄신과 혁신을 하지 못하고 그냥 머물러 있으면, 평생 끌려다니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살펴보고 돌아보며, 성장하고 발전하는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베풀고 나누어 주는 자로 성장시켜 주옵소서. 요셉이 그 숱한 고난과 위기와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어 나누고 베푸는 자가 되었는데, 한 집에 살았던 형제들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구걸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자녀들의 잘못만 지적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여, 우리의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 죄인 된 모습을 깨뜨리시고 쇄신하여 다시 일어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