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드려 절하매
본문: 창세기 42:5-17
이탈리아 북동부 지방에 베네치아(Venezia)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이곳은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였습니다.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은 인구가 약 150만 명에 이르렀고, 보유한 선박이 3,300여 척, 그 배에 종사하는 선원들이 36,000여 명에 달했습니다. 규모만 놓고 보면 대단치 않아 보입니다. 선박의 수나 선원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던 프랑스보다 이들의 수입이 훨씬 많았습니다. 베네치아는 어마어마한 해상 무역 수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후추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럽 사람들은 빵과 고기를 주식으로 삼았는데, 빵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고기는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후추 같은 강한 향신료가 있어야 비로소 고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후추가 유럽에서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후추를 생산하면, 아라비아 상인들이 그것을 가져다가 이집트를 거쳐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독점으로 넘겨주었습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이를 유럽 전역에 공급했습니다. 인도에서 들여올 때의 가격에 비해 유럽 본토에 도착하면 50배나 뛰어올랐으니, 그 막대한 수익을 베네치아 상인들이 가져간 것입니다. 유럽 본토 사람들은 앞다투어 후추를 사들이고 모아두기 시작했습니다. 후추가 곧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유럽 본토에서 더 서쪽으로 가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도 후추가 필요했으나 거기까지 운반되면 가격이 150배로 치솟았습니다. 막대한 수익이 베네치아 상인들의 손안에서 놀아나고 있었으니,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이는 숙원이자 난제였습니다. 직접 항로를 개척하여 인도에서 후추를 가져오지 않는 한 해결 방법이 없었습니다. 전쟁을 벌인다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때 한 괴짜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콜럼버스(Columbus)입니다. 그는 스페인 왕실을 찾아가 자신에게 투자하라고 말합니다. 배를 띄워 인도까지 가서 후추를 싼값에 가져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제안이었지만 스페인 왕실은 과감히 투자했습니다. 콜럼버스가 배를 띄우고 항해하여 어느 대륙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그곳이 인도인 줄 알았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곳이 인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인도가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이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의 투자는 실패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완전한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스페인 사람들이 남미에서 은광을 발견합니다. 막대한 양의 은을 채굴하여 중국과 무역함으로써 스페인은 부강한 나라가 됩니다.
이웃 나라 스페인이 배를 띄우는 것을 보고 포르투갈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에게 항로 개척의 사명을 맡깁니다. 바스코 다 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마침내 인도에 도착합니다. 인도에서 후추를 가져옴으로써 유럽의 후추 가격은 비로소 하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역사적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한 가지입니다. 역사는 움직이는 사람에 의해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150배나 되는 가격을 지불하며 후추를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시도하니 은도 발견하고, 후추도 직접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실한 자가 지배하는 우연
하나님 나라의 법칙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독특하게도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고, 사람을 세워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비전을 주시고 그 비전을 꿈꾸게 하시며, 우리는 그 비전을 이어갑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동역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애굽에는 흉년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변 나라들에도 흉년이 찾아왔고, 아무도 풍년 때 준비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요셉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 야곱이 사는 곳에도 흉년이 닥쳤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아들들에게 화가 난 아버지 야곱이 다급하게 명합니다. 얼른 애굽에 가서 곡식을 구해 오라고 말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던 아들들이 아버지의 재촉에 못 이겨 일어나 곡식을 구하러 갑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놀라운 장면이 벌어집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창 42:5-6)
이 장면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광경이 있습니다. 17살짜리 소년 요셉이 과거에 꾸었던 꿈입니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창 37:7)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창 37:9)
형제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에 절하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두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이 꿈은 요셉이 17살이었을 때 꾸었던 것인데, 21년이 훨씬 지난 이 시점에서 그 꿈이 현실이 되어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꿈이 마침내 성취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기에 앞서 한 가지 해명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요셉의 직책입니다. 요셉은 총리가 아닙니까? 그런데 총리에게 걸맞지 않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곡식을 직접 팔고 있는 것입니다. 왜 총리가 곡식 파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겠습니까?
요셉은 현장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풍년을 관리할 때에도 애굽 온 지역을 순찰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풍년의 7년 동안 그는 애굽 전역을 다니면서 창고를 짓고, 각 지방의 수령들을 만나 파라오의 명을 전달하고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애굽처럼 넓은 땅을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풍년의 시간 내내 성실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일했던 인물입니다.
이제 흉년의 시간이 되어 곡식을 방출하는 때가 왔습니다. 넓은 땅이요 오늘날과 같은 통신 시설이 없는 시절입니다. 만약 총리가 이 일을 직접 관할하지 않고 사람들에게만 맡겨 놓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시골 마을의 관리가 곡식을 팔면서 제 마음대로 가격을 매기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은 수탈당합니다. 먹고 살아야 하니 곡식은 사야 하는데, 수령이 높은 가격을 부르면 그 가격을 지불할 수밖에 없습니다. 덩달아 물가가 치솟고, 그 모든 원성은 파라오에게 돌아갑니다.
그래서 현장 중심의 일꾼 요셉은 오늘은 이곳에서 곡식을 팔고, 내일은 저 지역을 순찰하며 돌아다녔습니다. 관리들은 총리가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으니, 정해진 가격대로 곡식을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연은 성실한 자가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애굽 전역에서 열 명의 형제들이 도대체 어느 곳에 와서 곡식을 살지 누가 알겠습니까? 멀리서 온 형제들이 애굽의 어느 구석에서 곡식을 사게 될지 요셉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이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을 다니며 곡식을 팔다가, 하필 그 장소 그 시간에 나타나 형제들과 조우하고, 그 앞에서 형제들이 엎드려 절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줄 누가 예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21년 전의 그 꿈이 현실이 될 것을 누가 내다볼 수 있었겠습니까? 각본을 쓴다 해도 이토록 극적인 장면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확률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기막힌 우연입니다. 그런데 우연은 가만히 앉아 있는 자에게 찾아오는 행운이 아닙니다. 요셉처럼 현장을 뛰어다니고, 성실하게 매 순간 땀 흘리며 일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게으른 자는 우연으로 오는 행운조차 거머쥐지 못합니다. 열심히 일하기에 이런 행운이 찾아오는 것이요, 성실하게 움직이기에 마치 우연으로 포장된 하나님의 선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게으르게 앉아 있는 사람에게 누가 우연의 선물을 가져다주겠습니까? 그런 일은 결단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룻 2:3-4)
여기에는 '우연히'와 '마침'이라는 단어가 나란히 등장합니다. 룻이 만약 곡식을 줍는 일이 귀찮다며 일하러 가지 않았다면, 그 밭에서 보아스를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보아스의 밭에서 보아스를 만나게 된 것도 룻이 성실했기 때문이요, 부지런했기 때문이요, 시어머니를 향한 긍휼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성실함이 보아스라는 복을 만나게 해주었고, 보아스를 만난 이후 그가 룻의 기업 무를 자가 되고 남편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성실함이 빚어낸 놀라운 우연이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게으른 자에게 이런 은혜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 인생에서 '왜 나에게는 행운이 주어지지 않는가, 왜 나에게는 이런 놀라운 은총이 없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 답은 한 가지입니다. 게을러서 그렇습니다. 성실하지 않아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연으로 가장된 필연도 선물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건은 우리에게 놀라운 역사를 보여줍니다. 21년 전에 꾸었던 꿈이 현실이 되는 역사의 현장을 목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요셉의 성실 때문입니다.
꿈을 주시는 하나님, 이루어가는 사람
이 사건을 통해 볼 수 있는 위대한 역사는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동역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17살짜리 소년에게 주신 꿈입니다. 요셉이 그런 꿈을 꾸고 싶다고 해서 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을 주시고 꿈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머물러 있으면 그 꿈이 현실이 됩니까? 형들이 와서 엎드려 절하는 현실이 저절로 펼쳐집니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꿈은 하나님이 주시지만, 그 꿈을 이루어 가고 만들어 가기 위해 수고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분투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요셉의 인생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형제들에 의해 팔려 갔습니다. 좌절스럽고 원망스럽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목숨을 끊어 버리고 싶은 유혹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견디고 버텼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고 끝이 보이지 않는 노예 생활도 그는 견뎌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 분을 붙잡고 죄짓지 않으려 분투했는데, 그 결과는 감옥이었습니다. 그래도 견디고 버텼습니다. 바로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그가 출세하여 애굽의 총리가 된 후에도 현장을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주셨고, 그 꿈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이 주신 꿈을 믿고 이루어가는 사람은 요셉 자신이었습니다.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 하나님이 주신 꿈과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구덩이에 던져지고, 노예가 되고,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견디고 또 견디었습니다. 꿈은 하나님이 주시고, 일은 요셉이 하고, 그 일하는 요셉을 하나님은 보호하시고 돌보셔서 동역하시며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내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택하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 바울은 이방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선언만으로 사도 바울이 저절로 그릇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향하여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그릇을 깨끗하게 닦아야 합니다. 깨끗하게 갈고 닦아야 하나님이 그 그릇을 쓰시지 않겠습니까? 그릇이 좁으면 넓히고 또 넓혀야 합니다. 그래야 그 그릇에 이방인을 담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전진하고 또 전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방을 향한 그릇으로 쓰시겠다는 뜻을 알고, 그는 나아가고 또 나아갔습니다.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관을 담은 한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3-14)
'달려가노라'고 고백하는 바울은 이 편지를 로마 감옥에 연금된 상태에서 썼습니다. 이미 나이가 많았고, 사역을 정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이방을 향하여 택한 그릇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믿고 멈추지 않았습니다. 로마까지 왔으면서도 그는 또 다른 꿈을 꿉니다. 스페인(Hispania)으로 가겠다는 꿈이었습니다. 이 그릇에 더 많은 이방인들을 담으려고 달려가겠다 고백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혹은 로마인들에게 40에서 하나 감한 39대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동족의 위협을 받고, 돌에 맞았습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꿈을 주셨기 때문에, 그 꿈을 이루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의 꿈을 이룰 수 없으니, 그는 방향을 정하고 목표를 세워 열심히 나아갔습니다.
부르신 자리에서의 성실한 동역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저는 요셉에게 주셨던 그런 꿈을 꾼 적이 없습니다. 바울에게 말씀하셨던 그 위대한 비전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면 열심히 할 텐데요."
그러나 이는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도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에게 직분도 주셨고, 직책도 맡기셨습니다. 섬김의 자리도 허락하셨습니다. 가정의 부모로 불러 세워주시고, 일터에서는 직장인으로, 일꾼으로 세워주시고, 이 나라를 위해서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 우리가 가는 곳마다 맡겨주신 사명을 우리는 얼마나 성실하게 감당해 왔습니까? 그 일을 위해 우리는 끝까지 분투하고 달려가 보았습니까? 하나님이 저를 목사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목사로 부르신 데에는 하나님의 비전과 꿈이 있습니다. 매 순간 기도하고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고 전도하라고 불러주셨으니, 한 시간도 허투루 쓸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직분자로 불러주셨습니다. 직책을 주시고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 그 일을 우리는 얼마나 성실하게 감당해 왔습니까? 원망과 불평, 낙심에는 익숙한데, 부르신 자리에서 나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역하는 일에는 얼마나 열심을 내었습니까? 그 열심이 열매를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은 부르시고, 우리는 열심히 달려가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손을 잡아 인도하시고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동역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아름다운 열매가 우리 인생에 맺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형제들을 만난 요셉은 그들에게 뜻밖의 누명을 씌웁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창 42:9)
간첩 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관리들도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평소 인자하고 온화하며 합리적이던 총리가 갑자기 외국인들에게 간첩 혐의를 씌우다니 말입니다. 증거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당황한 사람들은 열 명의 형제들이었습니다. 양식을 구하러 왔을 뿐인데 갑자기 간첩이라니, 자기 변호를 위해 가정사를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창 42:13)
동생 하나를 어디에 팔아넘겼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으니 '없어졌다'고 둘러댑니다. 요셉은 또 말꼬리를 잡습니다. 집에 있다는 그 막내를 데려오면 너희의 결백을 인정하겠다고 하면서 그들을 3일 동안 옥에 가둡니다.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창 42:16-17)
3일의 말미를 주고, 열 명 중 한 명의 대표를 뽑아 집에 가서 베냐민을 데려오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열 명 사이에 신뢰와 믿음이 충만하면 한 명을 뽑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로간에 믿음이 없고 신뢰가 없으면, 그 한 명을 뽑을 수가 없습니다.
요셉은 이것을 알아보려고 3일 동안 가두어 놓고 한 명을 뽑으라 한 것입니다. 21년 동안 형제들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형제들 사이에 믿음과 신뢰가 쌓였는지, 서로를 믿을 수 있는지, 아니면 21년 전 그때처럼 여전히 반목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 이것이 어렵겠습니까? 한 명이 나가는 순간 그 사람은 석방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의 사명은 아버지를 설득하여 베냐민을 데려오는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하거나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못하면, 굳이 이곳으로 돌아오겠습니까? 그 형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나머지 아홉 명은 꼼짝없이 애굽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 명이 저마다 서로 싸웠을 것입니다. 내가 가겠다고, 서로 가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나머지가 보기에 가겠다고 하는 사람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서로 내가 가겠다고 싸우다 3일이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서로간의 믿음이 사라진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결론
세상은 불신 사회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 세상은 돈으로 엮여 있고, 권력으로 엮여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익하지 않으면 차갑게 돌아서 버립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믿어주셨습니다. 용서받았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신뢰해 주셨습니다. 그런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자매보다 서로를 더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한 사람들은 서로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사람으로 인정하기에, 교회 공동체는 서로 믿어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형제들은 21년이 지나도록 자기 동생을 팔아치운 죄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지 않았기에 여전히 서로를 믿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회개했더라면, 서로간에 이 정도의 믿음은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몸은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데, 서로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습니까? 우리 가정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는 가정인데 서로를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공동체가 믿음이 넘치고 서로 신뢰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가 우리를 함께 일으켜 세우셔서, 하나님과 동역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에 함께 동참하고, 그 길을 함께 만들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꿈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비전과 우리의 수고가 연합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우연을 붙잡는 것은 우리의 성실이라고 배웠습니다. 주여,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꿈이 우리의 수고를 통해 아름답게 성취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 공동체가 서로 믿고 신뢰하는 공동체 되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가정이, 믿음의 교회가 그렇게 세워지게 하옵시고, 함께 서로 믿고 신뢰하며 하나님 나라를 함께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삼아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